***
다음 날.
금요일이 되어 아이들의 성적표가 발부되었다. 상호는 교무실 책상 앞에 앉아 아이들의 성적표를 읽었다.
세희가 2등. 태화가 5등, 나빛이 39등에 지윤이 51등.
전원이 64강에 들었으니 나쁜 성적은 아니었다. 거기에 2등과 5등까지 있고.
옆에 앉은 설미가 그의 반 성적표를 들여다보고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어머! 상호 씨! 되게 잘 나왔다!”
상호는 그녀의 성적표를 읽었다.
최고가 61등. 64강 안쪽에 든 학생은 그 한 명 뿐이었다.
‘이건 놀리지도 못하고 위로하지도 못하고…….’
그가 뻘쭘해하고 있자 설미가 멋쩍어하며 웃었다.
“나 주술사 반이잖아.”
상호는 입맛을 다시며 조례 준비를 했다.
교실에 가서 아이들에게 성적표를 나누어주는데 다들 표정이 어두웠다. 스스로 만족할 만한 성적들은 아니었을 터였다. 딱 한 명, 태화만 빼고.
태화는 상호가 예상한 그대로의 반응을 보여주고 있었다.
“쌤! 10등 안쪽은 소원권! 콜? 콜?”
“너 그러다 쌤한테 반말하겠다.”
“기브 미 소원권!”
“그거 명령문 아니냐?”
상호는 핀잔을 날려주고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나빛의 표정이 유독 좋지 않았다.
“나빛이는 왜 그렇게 꽁해 있어? 잘했는데.”
“저…….”
나빛이 고개를 푹 숙이고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머니가 성적표 가져오라고 하셔서…….”
“……아.”
상호의 눈앞이 캄캄해졌다.
‘올 것이 왔구나.’
그래도 계속 외면할 수는 없는 문제였다. 5월 초에 잡혀있는 수학여행의 통지 서나 경비 수금은 어떻게 넘어간다 하더라도, 5월 중순에 공개수업이 있다.
어차피 마주하게 되어 있다.
“같이 가줄까?”
그의 말에 나빛이 고개를 퍼뜩 들었다.
“저희 집에요? 선생님께서요?”
“응.”
“정말요……?”
“학생도 넷밖에 없는데 가정방문 갈 수 있으면 가야지.”
나빛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환하게 웃었다. 아마 그 문제가 여태 가장 큰 고민이었던 모양이었다.
……다른 이유가 있는지도 모르지만.
그 다른 이유 때문일까, 세희가 코를 훌쩍이고 태화가 바닥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인생에 도움이 안 되네, 씨바…….”
누굴 대상으로 말하는지는 설명을 듣지 않아도 짐작이 갔다. 그는 진땀을 흘리며 그 둘에게 말했다.
“너희는 선생님이 옆에서 챙겨 주잖아.”
“그럼 전 가정방문 못하니까 가정 만들기 해주세요.”
상호는 태화의 말을 씹으며 나빛을 보았다.
“언제 가는 게 나을까? 주말엔 오히려 바쁘실 것 같은데.”
“가능하시면 오늘…….”
나빛이 확신을 못하고 우물거리자 상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이따가 선생님 핸드폰으로 아버님한테 연락 드릴 테니까, 같이 이야기하자.”
***
그래서 그는 나빛과 함께 점심시간에 교무실로 와서 나빛의 아버지, 하봉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이 들리자마자 비서가 전화를 받아 봉진을 바꿔주었다.
[어. 날세.]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버님. 바쁘십니까?”
[지금은 괜찮아.]
상호는 바로 본론을 꺼냈다.
“다름이 아니라 아버님. 나빛이 어머님께서 성적표를 가져오라고 하셨다는데요.”
[음.]
“성적표에 전투유형으로 적혀 있는데…… 이거 나빛이 통해서 보내드려도 괜찮은 겁니까?”
[그걸 자네가 물으면 어떡해?]
“혹시 아버님께 피해가 가지 않을까 해서…….”
[……어떻게 잘 고쳐서 인쇄할 수 없나? 파일을 수정해서 말이야.]
“그건 저한텐 범죄입니다.”
[그런가……. 난 몰라. 감당은 자네가 해야지.]
이게 말인가 방구인가. 상호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러면 제가 감당할 테니까 댁에 방문드려도 괜찮겠습니까?”
[집에 온다고? 오늘?]
“예. 그래도 담임이니까 성적표 상담드리는 김에 가정방문 겸해서……. 그리고 주말에는 바쁘실 것 아닙니까.”
봉진이 크게 당황했다.
[자네 우리 집사람한테 죽을지도 몰라.]
“죽이시면 죽지요, 뭐.”
[아니…… 하아. 요즘 집안 분위기 좋았는데…….]
상호는 옆에 앉은 나빛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통화 내용을 다 듣고는 난처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봉진의 자포자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해. 어쩔 수 없지. 집사람을 1년 내내 속일 순 없으니까…….]
“그럼 저녁에 방문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밥 먹을 건가?]
“아니요, 저는…….”
나빛이 그의 팔에 손을 얹었다.
“드시고 가세요.”
상호는 고민에 빠졌다. 남의 집에서 눈칫밥 먹는 걸 싫어하는 그였기에. 뭣보다 오늘 가정방문을 가면 나빛의 어머니와 대판 싸우거나 부탁을 하게 될 텐데, 이런 식으로 부담을 주면 역효과가 날 터였다.
하지만 나빛의 말은 어지간하면 들어 주고 싶었다.
“……주시면 감사히 먹겠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알려 놓겠네.]
“예, 아버님. 나빛이 바꿔 드릴까요?”
[그래.]
그가 핸드폰을 넘겨주자 나빛은 밝은 목소리로 봉진과 통화를 했다.
“네, 아빠. 네. 학교 끝나고 선생님이랑 같이 차 타고 갈게요. 엄마한테 맛있는 거 만들어 달라고 해주세요.”
상호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미운털이 박히는 건 아닌가 모르겠네……, 그냥 배달 시키면 안 되나?’
그의 타들어가는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빛은 핸드폰을 살짝 내리며 그를 향해 신난 목소리로 물었다.
“선생님, 음식 뭐 좋아하세요? 저희 어머니 요리 잘 해요.”
“컵라면.”
“아빠, 그냥 무조건 종류 많이 만들어 주세요. 여러 가지로 조금씩…….”
상호는 재잘거리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진짜로 죽을지도 모르겠군…….’
마음 단단히 먹고 가야 할 것 같았다.
따님 내놓으시라고
결국 와 버렸다.
상호는 차창 밖의 거대한 주택을 올려다보았다.
‘으리으리하네…….’
높이 쌓인 담과 일체화된 집이었고, 그래서 화려하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지만 어쨌든 컸다.
나빛의 수행원은 그와 나빛을 내려주고 차고로 차를 몰았다. 위로 열리는 차고 문 사이로 외제차들이 언뜻 보였다.
상호가 나빛과 함께 다가가자 대문이 저절로 열렀다.
‘자동문인가? ……아니군.’
문을 열어준 것은 칼을 차고 양복을 입은 사내였다. 나빛의 수행원과 같은 차림이었다.
마당 역시 넓기만 하고 그다지 호화롭진 않았다. 잔디밭에 징검다리처럼 놓인 평평한 검은 돌이 끝. 물론 서울 주택가 명당 한복판에 이런 마당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부의 증명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상호에게는 심심한 땅덩어리일 뿐이었다.
이리저리 둘러보던 그의 눈에 뭔가 특이한 것이 띄었다. 마당 한구석에 대충 놓인 커다란 용의 머리뼈였다.
‘어째 익숙한데.’
자신이 잡았던 놈 같았다.
상호가 잠시 걸음을 멈추자 나빛도 멈춰서서 그가 보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아, 저거는…… 옛날에 아버지가 사 오신 거예요. 취미 삼아보려고 사셨다는데 어머니가 싫어하셔서 저렇게 구석에 박아놨어요.”
“아버님이 많이 잡혀 사셔?”
“으음…….”
그녀가 멋쩍게 웃었다.
“조금요.”
“어머님이 무서우신 분인가 보네.”
“아버지한테만 그래요. 저도 어릴 땐 자주 혼났지만…… 다른 사람한텐 안그러시니까 걱정 안 하셔도 돼요.”
“부모님 몰래 신청했던 거잖아. 날 보면 화내시지 않을까?”
“그럴 수도 있지만…… 어머니도 선생님이랑 이야기해 보시면 아실 테니까요. 좋은 분이라는 걸.”
상호는 불안한 마음을 떨칠 수가 없었다.
둘은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다. 안에 들어서자마자 가장 먼저 느껴진 건 천장이 쓸데없이 높다는 것이었다. 창문이 많고 벽이 전체적으로 하얀 것이 낮에 왔으면 상쾌한 맛이 있을 것 같았다. 지금은 저녁이라 누런 듯 밝은 전등을 켜놓았는데 그 나름의 운치가 느껴졌다.
넓은 집에 진하게 음식 냄새가 풍겼다.
신발을 벗던 나빛은 가만히 서 있는 상호를 보고 의아해했다.
“들어오세요, 선생님.”
“응, 잠시만.”
누군가가 현관으로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상호는 그 발소리의 주인을 기다렸다.
묵직한 느낌을 보니 남자, 그것도 나이 든 남자일 듯했다.
‘아버님이겠지.’
다가온 이는 역시 봉진이었다.
편한 차림새였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격식없게 입지도 않았다. 그는 나빛의 곁에 선 상호를 보고 언짢은 듯 입을 우물거렸다.
“결국 왔구만. 그래도 이왕 온 거……. 잘 지내다 가라고.”
“예, 아버님.”
상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