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긴 하루였다.
종례를 마친 후엔 다섯 시가 넘었다. 여름을 향할수록 길어져 가는 해도 이제는 뉘엿뉘엿 저물고 있었다.
상호는 그 하늘의 주홍색 빛깔을 좋아했다. 교실 창문으로 바라보는 것이 특히 그랬다. 이 시간에 교실에 남았다는 것은, 곧 아이들과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는 뜻이었으므로.
그는 창가 자리에 앉아 창밖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옆에 앉은 세희도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세희야.”
“아, 네.”
그의 부름에 세희가 퍼뜩 고개를 돌렸다.
상호는 팔짱을 낀 채로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이제 좀 받아들였어?”
세희는 얼른 대답하지 않았다.
“……잘 모르겠어요.”
“아직 미련이 남아?”
“네.”
그녀가 검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더 빨랐으면 막기 전에 벨 수 있지 않았을까……하는,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런 걸 결승전에서 바라긴 힘들지. 상대도 너만큼 강하다고 생각해야지. 첫 공격에 반응을 못 할거라고는 생각하지 마. 그러다 다치는 거야.”
“그렇지만…….”
세희는 못내 아쉬운 듯 검을 살짝 뽑았다가 다시 넣었다.
“여전히…… 모르겠어요. 왜 그 애 검이 더 단단했던 거예요?”
“검기 때문이야.”
“검이 그렇게…… 한 방에 부러질 정도로 차이가 나요?”
“응.”
상호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세희가 그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제가 다음번에 이길 수 있어요?”
상호는 그 질문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해. 심법을 배우고 내공을 쌓으면.”
아직 기초 심법밖에 배우지 않은 세희는 은율보다 폭발적인 성장을 할 가능성이 남아 있었다.
세희의 눈이 반짝였다.
“좋은 심법은 어떻게 배워요?”
“뭐, 공개 심법을 배우거나, 학교에서 사놓은 고유 심법을 배우거나…….”
심법의 첫 번째 분류는 기초 심법과 고급 심법.
기초 심법은 말 그대로 기초다. 모든 심법의 기본이 되는 단 하나의 심법. 고급 심법은 기초 심법에서 변형되고 파생된 여타의 모든 심법들을 이르는 말이었다.
고급 심법은 다시 두 갈래로 나뉜다. 공개 심법과 고유 심법.
공개 심법 또한 말 그대로였다. 누구나 배울 수 있도록 공개된 심법. 물론 무공의 기초도 모르는 무지렁이가 혼자서 배울 수 있는 것들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공개는 되어 있으므로 지식만 있다면 얼마든지 익힐 수 있었다.
반대로 고유 심법은 접근 수단이 제한적이고 폐쇄적이다. 주로 라이센스를 구입한 이들에게만 공개하거나, 스승이 제자에게 직접 은밀히 전수해 주는 종류의 심법들이었다.
세희는 고민에 빠진 표정을 지었다.
“선생님.”
“응?”
“저는…….”
그녀의 눈빛에 결의가 비쳤다.
“선생님 심법 배우고 싶어요.”
그럴 줄 알았다. 상호는 쓴웃음을 지었다.
“넌 선생님 심법 뭔지도 모르잖아.”
“그래도 배우고 싶어요.”
“내 심법은 좀 문제가 많아.”
언뜻 보면 비밀스러운 고유 심법이 귀하고 좋아 보이지만, 실상은 공개 심법들의 효율이 훨씬 좋았다. 누구나 보고 고칠 수 있기 때문에 개선이 원활하고 끊임없이 진화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고유 심법들은 둘 중 하나였다. 특이한 장점이 있거나,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거나. 후자는 대부분 돌팔이들의 돈벌이용으로 사용되었다.
상호의 무공도 고유 심법이었다.
“내 심법은 전쟁중에 스승님이랑 같이 완성시킨 거야. 그때 나는 마나에 파묻혀 살아서 내공 걱정이 없었고…… 그래서 심법도 내공을 많이 얻는 데 집중하는 게 아니라 강한 강기를 만드는 데 집중했어. 한마디로…… 학생이 배울 만한 물건이 아니야.”
“그래도 배우고 싶어요.”
“네가 그걸 배우면 은율이를 못 이겨.”
그 말에 세희는 눈을 내리깔고 생각에 잠겼다.
자존심 강한 아이니까 아마 물러설 것이다. 상호는 그렇게 생각하며 말을 이었다.
“애초에 내 심법은 나한테만 최고의 심법인 거지, 다른 사람한테도 최고의 심법인 게 아니야. 사람마다 환경이 다르잖아. 너도 네 상태를 생각해서 가장 알맞는 심법을 찾아야…….”
“필요없어요.”
“……응?”
당황한 그를 세희가 바라보았다. 거의 노려보는 수준의 눈빛으로.
“져도 돼요. 전 선생님 심법 배울래요.”
“아니, 그러면 너 학비 면제는……. 설마 대출 받게? 너 그게 얼마인지 알아?”
“학교 못 다녀도 상관없어요.”
큰일 날 소리를 한다. 세희가 그런 말을 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한 상호였다.
그는 짐짓 턱에 힘을 주며 화난 표정을 지었다.
“너 그런다고 가르쳐 줄 것 같아? 네가 학교를 안 다니면 내가 널 어떻게 신경 써? 선생님은 당연히 학교 학생들이 먼저야.”
“선생님이 저 버리셔도 상관없어요. 저는…… 혼자서라도 선생님 심법 공부하면서 살아갈래요.”
“혼난다, 진짜!”
말은 그렇게 하지만 상호는 세희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고 있었다.
이 고집쟁이를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정확히 말해줄게. 내 심법은 내공을 얻는 속도가 기본 심법하고 별 차이가 없어. 그런데 강기에 들어가는 내공은 두 배가 넘고, 그런다고 강기가 두 배로 강해지는 게 아니라 아주 조금, 일반적인 강기들보다 한계치가 높을 뿐이야. 보통 사람들한텐 쓸모가 없다고.”
“헌터는 보통 사람이 아니잖아요.”
세희는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그를 향해 가까이 다가앉았다.
“저는 알아요. 가장 강한 몬스터들을 잡기 위해 만드신 거잖아요. 그게 왜 쓸모가 없어요?”
“너희한테는…….”
“저희도 언젠간 그런 몬스터들이랑 싸워야 해요. 그게 헌터잖아요.”
상호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의 논리도 맞지만, 그에겐 더욱 명확한 이유가 있었다.
세희는 1등을 못 하면 학교를 다니지 못한다. 만약 대출을 받아 다니게 된다 하더라도 자나깨나 돈 걱정에 시달릴 게 뻔했다. 명문사립고교 등록금은 절대 한두 푼이 아니니까.
학교를 행복하게 다닐 방법이 있는데 그걸 포기한다는 것은 상호에겐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의 머릿속에 도현의 말이 떠올랐다.
‘네가 어릴 때 학교에서 친구들과 놀지 못했다는 게 제일 안타깝다.’
“세희야.”
“네.”
“선생님은 정말로 안 가르쳐 줄 거야.”
그러자 세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 태화처럼 떼쓸 거예요.”
“그게 뭔…….”
“선생님 걷는 건 저보다 느리잖아요. 선생님 가는 데마다 바닥 굴러다니면서 떼쓸 거예요. 농담 아니예요.”
이 정도면 협박이다. 좆되기 싫으면 처신 잘하라는 소리와 동급이었다.
상호는 숨이 턱턱 막혀왔다.
‘진짜로 안 되는데…….’
사실 아주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의 심법을 가르치고, 그의 내공을 나눠주면 된다. 같은 심법을 익히면 내공을 나눠주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했다.
하지만 교육상 좋지 않은 일이었다.
쉽게 얻은 것은 쉽게 쓰게 된다. 상호가 아이들에게 금전적인 지원을 해주지 않는 이유와 정확히 일치했다.
그래도 세희는 지금까지 증명해 왔다. 얼마나 열심이고, 얼마나 진실한지.
“그러면…… 세희야.”
세희가 기대하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네가 그걸 배우는 순간부터…… 내가 널 버릴 수는 없어. 나한텐 중요한 무공이라서…… 그걸 배운 사람을 내치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하나만 약속해 줘.”
“네.”
“학년평가 되기 전에, 내가 다른 애들 내공의 평균만큼을 딱 너한테 줄게. 그러니까…… 꼭 1등 해.”
상호는 그렇게 말하며 세희와 눈을 마주쳤다.
조용한 얼굴의 반짝이는 눈빛 속에서, 열망과 환희가 뒤섞여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네.”
세희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상호는 세희와의 첫 면담 때를 떠올렸다. 그때도 이렇게 약속했었다.
하늘의 색도 같고, 장소도 같고, 사람도 같다.
그는 그때보다는 약간 더 강하게 새끼손가락을 엮었다.
“약속했어.”
“네.”
세희는 노을보다 환하게 웃었다.
***
상호와의 면담을 마친 세희는 교실을 나와 복도를 걸어갔다.
힘든 하루라서 오랜만에 배가 고팠다. 오늘은 밥이 뭐든 간에 깨끗이 해치울 것 같았다.
가벼운 걸음으로 계단을 향하던 그녀는 어떤 소리를 듣고 발을 멈췄다.
남자 목소리였다.
‘뭐지?’
종례가 끝난 후 한참이 지나서 평소라면 아무도 없을 시간이었다.
화내는 듯한 그 목소리는 문경한이라는 선생이 담임을 맡은 교실에서 나오고 있었다.
‘도은율이 저 반이었지……?’
세희는 발소리를 죽이고 조용히 그곳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가까운 교실의 문을 살그머니 열고 안으로 들어가 숨었다. 바로 옆 반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소녀였다.
“저, 저 1등 했잖아요…….”
처음 듣는 목소리. 하지만 은율이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도도한 얼굴과는 다르게 아주 여린 목소리였다.
“오늘은…… 잘했다고 칭찬해 주시면 안 돼요……?”
“은율아.”
경한이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부르자, 은율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네…….”
“검이 느리더라. 하마터면 질 뻔했어.”
“하, 하지만…….”
“변명부터 나오는구나.”
“죄송해요…….”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세희는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경한의 속삭임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벌 받아야지?”
“네…….”
“치마 걷어.”
‘뭐?’
세희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다음 순간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찰싹 소리가 났다.
회초리를 휘두르는 것 같았다.
속바지를 입었을 거라고 믿고 싶지만, 들려오는 소리에서 찰기가 느껴졌다.
분명 맨살을 때리는 중이었다.
매질은 목탁 치듯 일정한 간격으로 계속 이어졌다.
세희는 끓어오르는 의문을 참지 못하고 몰래 다가가 복도 쪽 창문을 들여다보았다.
“으흑……!”
은율은 칠판에 손을 얹고 몸을 뒤로 쭉 뺀 채였다.
치마를 걷어 드러난 허벅지의 맨 윗부분에는 시뻘건 선이 여럿 쳐져 있었다.
오래된 멍도 있는 것을 보아 오늘이 처음은 아닌 모양이었다.
지금도 실시간으로 추가되는 중이었다.
“아……!”
은율이 눈물을 뚝뚝 흘리며 신음을 내뱉었다.
주홍빛으로 물든 교실에서, 사제가 단둘이 남아 때리고 신음하는 모습.
세희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스승이 왜 1등을 한 제자를 때리고 있는 건지. 제자는 왜 가만히 맞고만 있는 건지.
사진이나 동영상을 찍어서 누군가에게 알리고 싶지만, 버튼 누를 때의 소리가 너무 컸다.
그녀는 천천히 뒷걸음쳐 다시 옆반으로 돌아왔다.
한참을 이어지던 매질이 드디어 멈추고, 경한이 다시 속삭였다.
“선생님이 널 사랑해서 이러는 거야.”
“네…….”
“맞고 난 다음에는?”
“감사합니다, 선생님…….”
은율이 헐떡이며 웃었다.
세희는 차가운 눈빛으로 허공을 노려보았다.
고아로 자라와 세상이 더러운 것은 알았지만, 코앞에서, 일상에서, 자신에게도 익숙한 관계를 일그러지고 뒤틀린 형상으로 마주하게 되니 분노가 치솟았다.
‘무슨 약점을 잡힌 거야? 아니면 네가 좋아해 버린 거야?’
신고하기엔 애매하다. 증거는 없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상호에게 알릴까 싶었지만, 좋아하는 선생님에게 남의 반 아이까지 걱정시키고 싶지도 않았다. 다른 어른들은 믿기는 할지 의문이었다.
세희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 문제는 자신이 해결해 줄 수 있다.
‘연말평가까지 갈 것도 없어.’
1학기 기말평가 결승전까지 올라와.
그때 밟아줄게.
그리고 네가 선생한테 맞는 모습을 어른들한테 보여줄 거야.
‘구해줄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그녀는 경한과 은율이 교실을 나와 3층에서 사라질 때까지, 검의 손잡이를 꽉움켜잡고 결의를 다졌다.
가정방문
다음 날 목요일은 정상수업이지만, 상호는 아이들을 약간 풀어주기로 했다.
물론 그것은 그의 기준일 뿐. 다른 반 아이들은 교실에서 놀거나 쉬었지만, 태화와 나빛과 지윤은 운동장을 뛰고 있었다.
태화가 스탠드에 앉은 상호의 앞을 지나치며 소리쳤다.
“쌤! 세희는 왜 안 뛰어요?”
“얜 잘했잖아.”
“저도 8등 안쪽 찍었잖아요!”
“너는 방심만 안 했으면 좀더 해볼 수 있었어.”
“나만 미워해! 세희만 예뻐해! 교육청에 신고해서 쌤 짜르고 백수가 된 밥벌레 쌤한테 돈 벌어다주고 간이고 쓸개고 다 빼주는 인생 파탄난 여자가 되어버릴 거야아아아!”
태화는 빼애액 소리를 지르며 운동장을 달려갔다.
‘요즘 애들 너무 무섭다…….’
상호는 속으로 한탄하고 옆에 앉은 세희를 돌아보았다. 세희는 또 새로 받은 검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세희야.”
그가 부르자 세희가 고개를 돌렸다.
“네.”
“운기 방법은 나중에 알려줄게. 지금은 설명만 들어.”
그녀는 그 말을 알아듣고 자세를 바로했다.
상호는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심법 이름은 천색창염강기공이야. 뜻은…… 천색이 하늘색이란 뜻이고, 창염은 파란 불꽃. 그러니까 하늘색 파란 불꽃…… 뭐 그런 뜻이지.”
“그분께서 지으신 거예요?”
“응.”
심법의 이름은 한자, 한글, 영어 등으로 다양했지만, 그래도 역시 한자가 제일 많았다. 다만 개발과 갱신이 자주 일어나는 공개 심법들은 버전을 표기해야 했기 때문에 알파벳과 숫자가 뒤에 붙었다. A111, B112 같은 식으로.
상호의 경우에는 고유 심법이었기에 그런 변종이 없었고, 뒤에 따로 붙는 글자도 없었다.
“어제 말한 대로 천색창염강기공은 강기에만 집중한 무공이야. 혹시 강기의 강도별 형태 알아?”
“네. 기형 액형 고형, 3단계요.”
“그래. 첫째가 기체. 검기에 가장 가까운 형태.”
상호의 검지에 안개처럼 희미한 기운이 감돌았다.
“검기와 강기를 나누는 기준이 뭐야?”
“강기는 길이를 늘릴 수 있어요.”
“그래. 결국 그 이야기긴 하지. 정확히는 강기라는 것은 쓸데없이 허공에 분산되지 않고 모양이 딱 잡혀야 한다는 거야. 그런데 이 기체 모양의 강기는 길이를 억지로 늘리거나 모양을 잡을 수는 있지만, 내공 소모가 너무 심하다.
이 수준에선 효용성이 없어. 좀 단단한 검기일 뿐이야.”
그의 손가락에 감도는 기운이 형태를 잡기 시작했다. 아주 잔잔하게 일렁이는, 그러나 뚜렷한 경계선이 있는 형태.
불보다는 액체처럼 흐르는 모양이었다.
“이게 액형. 사실상 여기부터가 강기의 초입이지.”
손가락의 기운이 다시 변했다. 흐르지 않고 굳은, 아주 깨끗한 보석이나 유리를 손가락에 덮어씌운 듯한 모습으로.
“그리고 고형. 이게 진짜 강기야. 이 정도가 되어야 강기로써 써먹을 수 있게 돼. 일반적으로 여기서 내공을 더 쏟는다고 모양이 변하진 않아. 보통 사람들은 사실상 여기가 끝이지. 그런데 이 다음이 있어.”
세희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고형 다음이 있어요?”
“이거야.”
상호의 검지에 검푸른 불꽃이 피어올랐다. 맹렬하게 격동하는 그 기운은 바람과는 상관없이 위쪽으로만 불타올랐다.
세희는 강기를 보며 눈을 깜작였다.
“……하늘색은 아닌 것 같아요.”
“까맣지? 나는 이렇더라. 스승님은 하늘색이었는데.”
예경의 강기는 맑은 하늘색이었다.
“뭐, 이름은 스승님 기준으로 지은 거니까. 네가 배우면 또 하늘색이 될 수도 있고, 나처럼 까말 수도 있고. 세상에 둘밖에 배운 사람이 없어서 확답은 못하겠다.”
상호는 강기를 거두고 말을 이었다.
“이 네 번째 단계의 강기는 쓸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어. 그래서 이름도 아직 안 정해졌다. 굳이 불러야 할 땐…… 간단하게 초강기라고 불렀어. 물론 내 주변 사람들만 쓰던 말이라 남들한테 말하면 못 알아들을 거야. 그냥 내가 그렇게 부른다는 것만 알아 둬.”
“초강기를 쓰는 건 몇 명 정도예요?”
“그건 모르지. 일단 우리 학교에선 교장선생님 정도.”
“천색창염강기공이 아니어도 초강기는 쓸 수 있는 건가요?”
“응. 대신 강도는 다르지. 같은 밀도라면 천색창염의 강기가 더 강해. 내공이 더 많이 소모되긴 하지만.”
세희가 그와 눈을 똑바로 마주쳤다.
무언가를 갈망하면서도, 약간의 걱정이 묻어 있는 눈빛이었다.
“그러면 그건 언제 가르쳐 주실 거예요?”
“운기는 조용할 때 해야 하니까. 그리고 시간도 많이 필요해서…… 주말에 날 잡고 가르쳐 줄게.”
상호가 그렇게 말해도 세희의 얼굴에선 근심이 가시지 않았다. 그는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물었다.
“무슨 일 있어?”
“선생님.”
그녀는 말을 잠시 끊고 침묵하다가, 곧 그에게 물었다.
“선생님은 저희 안 때리실 거죠?”
“응?”
이게 뭔 엉뚱한 질문인가. 상호는 당황하며 머리를 긁었다.
“때리긴…… 때렸지? 지금까지도 많이…….”
“저희를 가만히 세워놓고 때리지는 않으셨잖아요.”
“으음……. 나빛이는 몇 번 맞긴 했어. 그건 왜? 다른 반 선생님이 누구 때렸대?”
“네.”
세희는 쓸쓸한 눈빛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회초리로 때렸대요. 허벅지랑 엉덩이 사이를.”
그는 그 말을 듣고는 별 일 아니라고 생각하며 어깨를 들썩였다.
“굳이 때리라면 엉덩이밖에 없긴 해.”
“왜요?”
“다리는 자국이 보이잖아. 손은 무기를 잡아야 하고, 머리는 매로 때리기는 좀 그렇고. 나도 체벌은 싫지만 너희를 때려야만 한다면 엉덩이를 때리게 될 거야.”
“그렇지만 저희 맨살을 때리진 않으실 거잖아요.”
상호의 몸이 굳었다.
“……어떤 선생이 자기 학생 맨엉덩이를 때렸다고? 그런 일이 있었어?”
“아니요.”
세희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지만, 전혀 웃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냥, 갑자기 생각나서 물어 봤어요.”
“깜짝이야…….”
상호는 얕은 한숨을 쉬었다.
하긴 아무리 세상에 개막장 인간이 많아도 그런 인간이 예현여고 선생까지 하고 있을 리가 없다……고 믿고 싶지만.
상호는 알고 있었다. 어딜 가든 병신은 존재한다는 것을.
그런 쓰레기가 주변에 하나는 꼭 있다는 것을, 군대에서 굴러보아서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세희가 거짓말을 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누군가가 학생의 맨엉덩이를 때렸다는 게 사실이라고.
‘당장 생각나는 건 문경한 그놈인데.’
하지만 증거 없이 무작정 사람을 의심하는 것도 좋은 일은 아니다. 상호는 생각을 거두었다.
“뭐…… 어쨌든 선생님은 너희 때리기 싫어. 대련할 때 안좋은 버릇 나오면 그거 고치려고 치긴 하는데…… 내가 그걸 즐기진 않는다는 것만 알아 줘.”
세희는 그때서야 밝게 웃었다.
“알아요.”
한 치의 의심도 담기지 않은 대답이었다.
상호는 살짝 안심했지만, 그래도 세희의 얼굴에 남은 근심의 흔적을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 눈치라, 일단은 모른 척하기로 하고 다른 아이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