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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결승.
다른 모든 이들의 평가가 끝난 후 치러지는 마지막 시합.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학생들 모두가 스탠드에 앉거나 경기장 가까이에 서서 구경했다. 참관을 맡은 선생도 다른 경기보다 훨씬 많았다.
해련이 팔꿈치로 상호의 옆구리를 찔렀다.
“가까이서 응원하지 그래요?”
“안까지 안 들리지 않습니까.”
결계 안쪽은 바깥의 방해를 받지 않도록 완벽히 차단된다. 밖에서는 보고 들을 수 있지만, 안에서는 밖이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해련도 그건 알 터였다.
“그래도 안 하는 것보단 하는 게 마음이 편하잖아요.”
“그건…… 그렇죠. 그래도 응원은 여기서도 할 수 있으니까…….”
“좀 불편하겠지만 가까이 가 줘요. 이기면 바로 앞에서 기뻐해주고, 지면 올라가서 위로해줘야 하니까.”
그 말은 옳았다. 상호는 검을 짚고 일어났다.
세희와 은율은 경기장에 아직 오르지 않고 마주보는 방향의 계단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세희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가 그를 발견하고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상호도 고개를 끄덕이며 신뢰가 담긴 눈빛을 보냈다.
‘잘 하고 와.’
세희는 몸을 돌려 경기장으로 올라갔다.
상호는 은율 쪽을 보았다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은율이 경한과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가 담임인 모양이었다.
‘하필 저놈이…….’
은율이 강한 이유는 어릴 때부터 받아온 조기교육 때문이지 경한 때문은 아니었다. 그래서 상호는 열등감을 느끼진 않았으나 배알이 뒤틀렸다. 그냥 재수가 없는 놈이라서.
경한은 은율의 귀에 뭐라 속삭이고는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상호는 은율의 텅 빈 듯한 눈빛을 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문경한 저 놈 뭔가 수상한데…….’
은율도 곧 경기장에 올랐다.
진행을 맡은 선생이 손을 들어올렸다. 여태껏 한 번도 주어지지 않았던 시작신호.
“시작!”
선생의 팔이 내려감과 동시에 결계가 올라왔다.
그러나 세희와 은율 둘 다 검을 뽑지 않았다.
서로를 노려보며 옆으로 슬그머니 걸음을 옮길 뿐.
상호는 세희와 은율의 걸음을 살폈다. 얼마나 유연하게 걷는지. 갑자기 달려 들 수 있는지. 어디로든 피할 수 있는지.
“쌔애애앰!”
한참 집중하고 있는데 옆에 태화가 찰싹 달라붙었다. 상호는 그녀를 흘끗했다. 태화의 뒤로는 나빛과 지윤이 세상 무너진 표정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입술에 검지를 붙였다.
“쉿. 시합 좀 볼게.”
“쟤들 칼도 안 뽑고 뭐해요?”
“자존심 싸움이야.”
나는 이 자세, 이 거리에서도 반응할 수 있다.
너를 이 자세, 이 거리에서도 공격할 수 있다.
서로가 서로의 발치를 사선이라고 주장하며, 넘으면 죽는다고 소리 없이 외치지만, 동시에 검을 꺼내지 않음으로서 어디 한번 넘어와 보라고 도발하고 있었다.
둘 다 단번에 달려들어 서로를 공격하고 싶어할 터였다.
“그래도 결국은 뽑게 되어 있다.”
뽑아놓은 쪽이 유리한 건 어쩔 수 없으니까.
다만 누가 먼저 쫄았는지 드러나는 게 문제.
그야말로 실용과는 거리가 먼 자존심 싸움이었다. 실전에서 기세가 중요하긴 하다만.
두 아이는 계속 빙글빙글 돌기만 했다.
“안 뽑는데요?”
어이없어하는 태화의 말에 상호는 진땀을 흘렸다. 둘 다 자존심이 너무 강한 모양이었다.
‘그냥 뽑아, 바보들아. 뽑고 이기면 되는 거야…….’
결국 둘 다 검을 뽑지는 않았다.
하지만 세희가 검의 손잡이에 손을 올리고 조금씩 다가가기 시작했다. 옆으로 게걸음을 치지만, 둘의 거리는 아주 미세하게 줄어들고 있었다.
상호는 세희의 속마음이 들리는 것 같았다.
‘손도 안 올려?’
‘선 넘는다? 넘는다?’
세희가 발을 살짝 구르자 은율의 손이 짧게 튕겨 올라갔다.
태화가 그 모습을 보고 가슴을 퍽퍽 두드렸다. 풀죽어 있는 나빛과 지윤과는 달리 기운이 넘쳤다.
“야! 영화 찍냐! 어차피 싸울 거면 빨리 싸워!”
“안에 안 들리는 거 알지?”
상호는 핀잔을 주며 세희와 은율의 거리에 집중했다.
둘이 옆걸음으로 경기장을 한 바퀴 돌 때마다 손가락 두 마디 정도가 가까워졌다.
그만큼 굼벵이 같은 속도로, 세희는 은율을 향해 전진했다. 조금씩, 조금씩.
어느 정도 거리가 가까워지자 은율의 손이 검을 향해 쏜살같이 올라갔다.
‘여기가 선이구나.’
상호는 세희가 같은 생각을 했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세희의 다리가 땅을 박찼다.
그와 동시에 시퍼런 검광이 서로의 칼집 입구에서 번쩍였다.
상호의 눈도 반짝였다.
‘됐다!’
그대로 날아간다면 세희의 검이 은율의 목에 먼저 도달한다. 은율은 생각보다 빠른 세희의 검에 당황했는지 급히 검을 세워 자신의 목을 방어하려 했다.
옳은 판단이었다. 세희의 목까지 날아가는 것보다 그녀 자신의 목을 막는 게 더 짧은 시간이 걸렸으니까. 검을 뽑지 않은 상태라서 더욱 그랬다.
결국 검의 속도는 세희가 빨랐다.
하지만.
채애앵
세희는 부러진 칼날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
그리고 그녀의 목에 은율의 칼이 날아들었다.
퍼억
둔탁한 소리와 함께 세희가 무릎을 꿇었다.
결계가 내려가고.
1등이 정해졌다.
“1등. 도은율.”
반쯤은 정해진 결과였다. 상호는 담담한 표정으로 경한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경한은 그냥 씩 웃고 있었다. 하지만 상호의 눈에는 억지로 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반쯤은 기뻐하고, 반쯤은 화가 난 것 같기도 했다.
‘꼴에 A급이라고…… 은율이 느렸다는 걸 알아챈 건가.’
상호의 마음이 평온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검기의 강도를 제외한 모든 면에서 세희가 우위였다.
그건 이제부터 그가 가르치면 된다.
비록 1등은 못했지만, 중요한 건 연말 학년평가니까.
하지만 세희는 전혀 평온한 표정이 아니었다.
“윽……, 윽……!”
무릎을 꿇은 세희는 몸을 웅크리고 바닥을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목에는 핏대가 섰고, 얼굴은 시뻘겋게 끓어올랐다.
그녀의 손이 바닥을 계속 때렸다.
그 앞에는 부러진 검이 나동그라진 채였다.
“끄흑…… 흐윽……!”
태화가 말없이 상호의 등을 밀었다.
그래도 상호는 잠시 기다렸다. 은율이 내려갈 때까지.
은율은 세희가 우는 것을 말없이 지켜보다가, 조용히 뒤돌아서서 경한을 향해 걸어갔다.
상호는 그때서야 경기장으로 절뚝이며 올라갔다.
“세희야.”
그가 옆에 앉자마자 세희가 달려들었다.
그녀는 그를 으스러지도록 끌어안고 울음을 터트렸다.
“왜…… 왜 진 거예요?”
상호는 말없이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그러자 세희가 더 크게 흐느꼈다.
“내가, 내가 더 빨랐는데……!”
그는 긍정해주지 않았다.
네가 더 강하다는 말은 아직 할 수 없다. 엄연한 결과가 말해주고 있으니까.
하지만 분명히 더 강해질 수 있다.
그래서 그는 딱 두 마디만 했다.
“괜찮다. 잘했어.”
세희는 모두가 운동장에서 떠날 때까지, 그의 품에서 하염없이 울었다.
이겨야 하는 이유
중간평가가 모두 끝났다.
종례 시간이 되어 상호와 아이들은 반에 모였다. 세희는 눈이 퉁퉁 부었고, 나빛과 지윤은 망연자실한 표정이었다.
상호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머리도 함께 굴렸다.
진실을 어떻게 알려야 하나.
‘스리슬쩍 말해줘야겠구만.’
그는 헛기침을 하며 말문을 열었다.
“얘들아. 너무 실망하지 마라. 다음에 잘 하면 되니까.”
“다음이 어딨어요!”
지윤이 울먹거리며 소리쳤다.
“쌤 이제 가신다면서요……!”
상호는 태연하게 능청을 떨었다.
“누가 그래?”
“쌤이……!”
“뻥이야, 그거.”
그가 그 말을 하자마자 지윤이 책상을 발로 뻥 까버렸다.
콰당탕
어안이 벙벙해하는 아이들 사이에서 그녀가 달려나왔다. 바닥을 구르는 책상보다 빠르게.
그리고 양 주먹을 들고 달려와 상호의 가슴팍에 내리쳤다.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두 번, 세 번. 때릴 때마다 무슨 샌드백을 치는 것처럼 둔중한 타격음이 교실을 울렸다.
“뻥을! 와! 그따우로! 칩니꺼!”
“너 집중하라고…….”
“내는, 내는 쌤이 참말로 가는 줄 알고…….”
상호는 안겨드는 지윤의 등을 두드리다가 뭔가 싸한 기운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다른 세 명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다가오고 있었다. 태화가 지윤의 뒤에 서며 세희와 나빛을 돌아보았다.
“줄 서.”
“뭘 줄을 서, 인마. 가서 앉아.”
상호가 면박을 줬지만 태화도, 세희도, 나빛도 지윤의 뒤에 딱 붙어 서서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그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알았어. 다 와. 다 같이 안아 줄게…….”
“아싸! 비켜비켜비켜!”
“태, 태화야, 뿔 조심해…….”
품 앞에서 네 개의 머리가 박치기를 했다. 상호는 어찌할 줄 모르고 진땀만 줄줄 흘렸다.
‘얘들 이러다 나중엔 그냥 덥석덥석 안겠네……. 큰일나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