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화 (43/501)

***

상호는 경기장에서 내려오는 지윤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푹 숙여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걸음마다 절망이 묻어났다.

상대는 유술에 정통한 학생이었다.

주먹의 단점 중 하나는, 상대에게도 잡히기 쉽다는 것.

어느 정도 실력이 된다면 차라리 늦게 공격하는 것이 상대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어서 이득인데, 지윤은 못 참고 냅다 달려들어 버렸다.

결과는 바닥에 패대기.

‘어쩔 수 없지. 무술을 덜 배웠으니까…….’

지윤이 운동과 대련은 열심히 했지만, 무술 자체는 덜 배웠다. 그녀는 자신이 붙기만 하면 더 유리할 줄 알았겠지만 상대는 오히려 그걸 기다렸다.

상대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 주면 자연스럽게 패배로 이어지는 것이다.

‘뒤를 잡았으면 좀 달랐을 텐데. 아쉽네.’

옆에서 해련이 안타까워하며 혀를 찼다.

“상심이 큰가 본데요.”

“거짓말을 좀 했거든요. 10등 안에 못 들면 제가 짤린다고…….”

“아이고, 나쁜 담임이네.”

그는 패자 경기장으로 터덜터덜 걸어가는 지윤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다른 경기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64강전에서는 대부분의 주술사가 탈락했다. 그나마 운좋게 올라온 아이들도 주술사끼리 붙었거나 발이 느린 무예가를 만난 경우였다. 초보 주술사는 너무 약했다.

그래서 32강은 대부분이 무예가와 마법사였다. 17명이 무예가, 12명이 마법사, 2명이 주술사.

그리고 1명의 신앙인.

상호가 바라보는 경기장에 바로 그 신앙인이 올라서고 있었다.

‘용케 잘 올라왔네.’

그는 나빛의 64강전을 떠올리며 흐뭇해했다. 나빛은 의외의 순발력을 발휘해서 상대 무예가에게 일격을 먹였다. 동체시력 키우라고 때려온 게 헛일은 아닌 셈이었다.

허나 반대편 계단에서 은율이 올라오자 그의 얼굴은 곧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변했다.

‘죽었다 깨어나도 못 이길 텐데…….’

상호는 은율의 경기도 봐 두었다. 그녀의 64강전은 순식간에 끝났다. 달려들어서 베고 끝. 그 단순한 행동이야말로 상대와의 실력차를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였다.

그가 볼 때는 세희와 은율이 유력한 우승 후보였다.

해련도 그 경기장을 보고 있었는지, 검지로 나빛을 가리키며 그에게 물었다.

“저 아이도 강 선생 반이죠? 나빛이?”

“예.”

“나빛이한테도 그 거짓말 했어요?”

“예. 방금 그 아이랑 저 아이는 그런 줄로 아는 중이죠.”

“울겠는데.”

해련이 중얼거렸다. 그녀에게도 둘의 실력차가 보이는 모양이었다.

머잖아 결계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

나빛은 눈앞의 여학생을 보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16강까지는 가야 해.’

10등이 되기 위한 최소 조건.

다행히 오전 평가에서 10승을 해둔 덕분에 16강에만 가면 9, 10등을 노려볼만했다. 이번 경기만 이기면 승산이 있다.

상대가 얼마나 강한지는 모른다. 그래도 검이라면 세희를 상대하며 많이 익숙해졌다. 물론 그녀가 세희를 이긴 적은 없었지만, 눈앞의 여학생은 아마 세희보다 약할 터였다.

나빛은 그렇게 믿기로 했다.

‘한 번만 이기면 돼…….’

주변에 하얀 결계가 펼쳐졌다.

그녀는 여학생과 눈을 마주쳤다. 대진표에서 봤던 이름은 도은율.

은율은 아직 검의 손잡이에 손을 올리지도 않았다.

시합은 이미 시작되었는데도.

나빛은 마음을 다잡았다.

‘이건 비겁한 게 아니야…….’

그리고 은율을 향해 방어막을 날렸다.

삼각뿔 모양의 방어막은 은율의 명치를 향해 정면으로 날아갔다.

‘세희라면 당연히 피할 거야.’

나빛은 방어막의 방향을 바꿀 준비를 했다. 오른쪽, 왼쪽. 위와 아래도 예상에서 빼놓지 않았다.

은율은 드디어 한 걸음을 내딛으며 검을 뽑았다.

쨍그랑

“……어?”

나빛은 산산조각이 난 방어막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검을 뽑는 동작 그대로, 한 손으로 가볍게 휘둘러 방어막을 깨 버린 은율은 두 번째 걸음으로 나빛의 앞까지 다가왔다.

그리고 검 끝으로 나빛의 턱을 살짝 들어올렸다.

주변을 둘러싼 결계가 사라졌다. 나빛은 그때서야 자신의 패배를 깨달았다.

‘졌어……?’

회색 눈동자에 혼란이 담겼다.

‘이렇게 쉽게?’

방어막은 세희에게도 깨진 적이 없었다. 이토록 쉽게 부순 것은 오직 스승뿐이었다.

그런데 겨우 32강에서. 이리도 간단하게. 다른 아이들은 대체 얼마나 강한 건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그녀는 스스로의 실력이 얼마나 하잘것없는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한 가지 사실을 더 깨달았다.

“선생님…….”

울먹이는 나빛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은율은 나빛이 우는 것을 보고 당황하더니, 겨누던 검을 내리고 나빛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말없이 등을 토닥였다.

그래도 나빛은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나빛아, 내려와.”

모르는 선생의 모르는 목소리. 그녀는 한 발짝도 떼지 않고 선 채로 흐느꼈다. 질끈 감은 눈에서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그때 무언가가 나빛의 손을 잡았다.

나빛은 은율이 손을 잡은 줄 알고 눈을 떴지만, 은율이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손을 잡고 있었다.

그 힘은 어디론가로 끌어당기거나 하지 않고 가만히 기다렸다.

나빛은 고개를 들어 스탠드 쪽을 바라보았다. 자리에 앉은 상호가 그녀를 향해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선생님.’

둘만 있을 땐 손을 잡아 달라고 했다.

그래서 이렇게. 둘만 있고 싶을 때, 둘만 알도록 손을 잡았다.

“으흑, 흐윽…….”

상호의 얼굴을 본 나빛은 더 서럽게 펑펑 울었다. 은율이 쩔쩔매며 그녀를 다 독이고 계단 쪽으로 데려갔다.

그녀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패자 경기장으로 향했다.

***

“정말로 우는데요. 진짜 나쁜 담임이네.”

해련의 말에 상호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주말에 다같이 좋은 곳 놀러 가야겠다…….’

그는 다시 경기장에 집중했다.

시합은 빠르게 진행되어 금세 8강전까지 다다랐다. 상호의 예상대로 세희, 태화, 그리고 은율이 올라와 있었다.

태화의 다음 상대가 바로 은율이었다.

‘얘가 이러다 우리 애들 다 잡겠네.’

그래도 태화 정도면 비벼볼 만 하다. 상호는 입맛을 다시며 태화와 은율이 경기장에 오르는 것을 지켜보았다. 세희도 다른 경기장에 오르고 있었지만 그쪽은 딱히 걱정되지 않았다.

태화가 검지로 은율을 가리켰다. 결계가 펼쳐지기 전이었다.

“너! 나빛이 울렸지!”

은율은 아무 말 없이 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태화를 상대하려면 검을 미리 뽑아둬야겠다고 판단한 듯했다.

반대로 말하면 나빛은 그럴 가치도 없었다는 뜻이다.

상호는 은율이 나빛을 달래주었던 것을 떠올렸다.

‘착한 애 같은데. 자존심이 센 건가. 세희랑 성격도 비슷하네.’

화를 낼 것처럼 굴던 태화가 갑자기 허리를 푹 숙였다.

“감사합니다!”

“응?”

은율도, 상호도 당황했다.

상호는 태화가 나빛에게 방어막으로 두들겨 맞던 걸 떠올렸다.

‘설마 그것 때문에…….’

그러나 다음 순간, 경기장에 결계가 올라오자마자 태화의 뿔 사이로 보랏빛 에너지가 모여들었다. 상호는 그걸 보고 태화의 진의를 깨달았다.

“흐압!”

기합과 함께 광선이 쏘아졌다.

은율이 서 있던 자리에 폭발이 일어났다. 상호는 태화가 마각초살포를 정확한 방향으로 쏜 것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흙이 비산하며 결계 안이 뿌연 흙먼지로 뒤덮였다. 땅을 울리는 폭음에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집중되었지만,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중인지 볼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었다.

상호는 은율의 검이 태화를 향해 내리쳐지는 것을 보았다.

“히이이익!”

태화는 검을 맞기 전에 아슬아슬하게 순간이동을 했다.

“아이, 안 통하네……, 쓰읍.”

그녀의 양손에 검은 불꽃이 피어올랐다.

태화가 타오르는 양손으로 바닥을 내리치자 불꽃이 순식간에 퍼져나가며 온 바닥을 뒤덮었다. 안 그래도 뿌옇던 결계 속을 시커먼 연기가 가득 채웠다.

‘확실히 편리한 기술이야.’

상호는 그 불을 보며 생각했다. 평소에 태화가 사용하는 것처럼 빙빙 돌아 남을 가둘 수도 있고, 저렇게 갇힌 공간에서 바닥에 싹 질러 버리면 땅을 디딜수 없게 만들 수도 있다.

평범한 무예가라면 이미 시합이 끝났을 터였다. 경공이 없으면 벽에서 벽으로 뛰어다니는 것도 불가능하다. 불꽃에서 도망갈 방법은 없었다. 꽉 찬 연기 때문에 시야까지 막힌 상태.

안에서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꺄하하! 이겼다 또 이겼다~, ……꾸엑!”

검의 옆면이 태화의 얼굴을 후려쳤다.

태화는 맥없이 쓰러지며 황당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맵핵쓰네, 쒸바…….”

상호는 한숨을 쉬었다.

‘너한테도 안 보이면 어떡하냐, 임마…….’

다만 태화의 전법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상대가 평범한 학생이었다면 분명 태화가 이겼을 터였다.

대부분의 선생과 학생들은 볼 수 없었겠지만, 상호는 보았다. 태화가 바닥에 불을 지르자마자 은율이 검집을 땅에 세우고 그 끝을 밟아 뛰어오르는 것을.

그리고 놀랍도록 멀리, 빠르게 뛰어 결계를 한 번 박차고 방향을 꺾어 태화에게 달려든 것까지.

분명 경공이었다.

‘조기교육을 받았나 보네.’

상호는 많이 놀라진 않았다. 저 나이에 경공을 다루는 것 자체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중학교에서 가르치지 않을 뿐, 누군가에게 배우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니까.

다만 신기한 것은, 경공의 수준이 꽤 높아 보인다는 것이었다. 체내에 기가 상당히 쌓였다는 뜻이다. 아마 어릴 때 고급 심법을 익힌 듯했다.

그녀의 나이대에 고급 심법을 익혀서 저 수준이 되려면 학원 잠깐 다닌 것으로는 어림도 없고 부모가 오랜 시간 공을 들여야 가능했다. 그것도 개벽이 일어난 후 일찍 헌터가 된, 베테랑이라고 부를 만한 부모를 두었을 가능성이 컸다.

‘좀 어렵겠다.’

하지만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다. 특히 아이의 가능성은.

상호는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세희를 보았다.

세희도 다른 아이들보다 훨씬 내공이 많았지만, 고급 심법을 따라갈 정도는 아니었고 경공도 아직 배우지 못했다.

그래도 그게 싸움의 전부는 아니다.

‘충분히 할만해. 나하고 제일 많이 싸워본 게 세희 너니까…….’

상호는 묵묵히 결승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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