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화 (42/501)

***

오전 평가가 끝나고 점심 시간.

아이들은 흙먼지가 묻은 체육복 그대로 급식소에 들어갔다. 덕분에 흙먼지가 풀풀 날렸다. 배식을 받은 상호는 간만에 흙맛나는 밥을 먹겠구나 생각하며 앉을 자리를 찾았다.

“쌤! 여기!”

태화가 손을 흔들었다.

그의 반 아이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밥을 먹고 있었다. 상호는 그리로 걸어가며 아이들의 안색을 살폈다.

다들 밝은 표정이었다.

“시합 잘 했어?”

“네!”

태화가 신이 나서 대답했다. 상호는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몇전 몇승인데?”

“10승이요!”

“세희도 10승이고. 지윤이는?”

“8승이요.”

“잘했네. 나빛이는?”

“10승……. 헤헤.”

그 말에 상호와 세희, 태화, 지윤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나빛을 돌아보았다. 갑자기 시선을 집중당한 나빛은 진땀을 흘리며 소심하게 웃었다.

“정령 공격은 방어막으로 다 막았고……, 저주는 아예 안 통하는가 봐요.”

“으아~ 개꿀빠네! 누구는 넘어져가지고 빤쓰에 흙 들어가고 난리도 아닌데…….”

태화가 꼬리를 촐싹거리며 한탄했다.

상호는 만족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10승을 한 세희와 태화와 나빛은 무조건 64강에 들어가고, 지윤도 아마 높은 확률로 포함될 것이다.

“다른 반 애들이랑 싸워보니까 어떻든?”

“조빱들이에요.”

“좀…… 느린 것 같아요.”

첫 대답은 당연히 태화였고, 다음 대답은 의외로 나빛이었다.

세희가 그런 말을 하면 인정하겠는데 나빛이라니. 상호는 웃음을 참으며 태연하게 물었다.

“어떤 점에서?”

“저는 주술사들이랑 싸워서, 그 애들이 행동이 느린지는 잘 모르겠지만……

뭔가…… 변수? 변수가 생겼을 때 대처하는 게 느린 것 같아요.”

“그래. 맞아. 그런 단점을 없애는 훈련을 너희가 지금까지 해온 거야.”

더 설명할 필요까지는 없었다. 빨리 밥 먹고 쉬어야 한다.

“열 번 싸우느라 고생했다. 그런데 오후에도 또 뛰어야 돼. 얼마 못 쉬겠지만 그래도 컨디션 관리 잘 하고.”

“네!”

“세희랑 태화는 밥먹고 나서 좀 보자.”

이름을 불린 둘은 어리둥절해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네.”

상호와 아이들은 식사를 시작했다.

평소보다 간이 삼삼했다. 기름기도 별로 없고, 소화가 잘 되는 음식으로만 이 뤄져 있었다. 다르게 말하면 맛이 없었다.

상호와 세희와 나빛은 반찬투정을 하지 않는 성격이었고, 지윤은 배고프다며 싹 먹어치웠지만, 태화는 맛대가리가 없다며 다 먹지 못하고 남겼다.

“아이고~ 피 같은 내 등록금 학교에 바쳤는데~ 학교는 나한테 해주는 게 없네~.”

“넌 안 내잖아, 임마. 빨리 정리하고 따라와.”

식사를 마친 상호는 급식소 뒤쪽으로 향했다. 세희와 태화가 그의 뒤를 졸졸 쫓았다.

태화는 아무도 없는 주변을 쓱 둘러보고는 상호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길래 이런 으슥한 곳까지 끌고 와요?”

“뭘 으슥해, 바로 뒤에 조리사 아주머니들 돌아다니는데…….”

아주 비밀스러운 이야기는 아니지만, 나빛과 지윤의 귀에는 들어가면 안 되었다.

그는 세희와 태화의 어깨에 손을 얹고 눈을 마주쳤다.

“내가 저번에 너희 전부 10등 안에 들어가야 한다고 했었지?”

둘은 불안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네.”

“그거 뻥이야.”

“네?”

세희가 눈을 깜빡였다.

상호는 겸연쩍어하며 살짝 웃었다.

“지윤이 집중시키려고 그랬어. 그러니까 너희는 다른 애들 신경쓰지 말고 너희 시합만 열심히……, 윽.”

그는 말하다 말고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태화가 뿔로 그의 가슴팍을 들이박은 것이었다.

호신강기로 막긴 했지만, 계속 밀어붙이는 탓에 결국은 벽에 기대게 되었다.

그녀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중얼거렸다.

“나, 나한텐 양치기 소년이니 뭐니 했으면서…….”

“응?”

“자기는 양아치야…….”

많이 신경쓰고 있었던 모양이다. 상호는 태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미안, 미안.”

“복수.”

“응?”

태화가 그의 와이셔츠에 입술을 마구 문질렀다. 그는 셔츠에 틴트가 잔뜩 번진 것을 보고는 뒷목을 잡았다.

“얌마, 지운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지우지 마요. 벌이에요. 쌤 그런 거 간직하는 거 좋아하시잖아요.”

그녀가 혀를 쏙 내밀고는 세희의 뒤로 도망쳤다.

세희는 말없이 방긋 웃고 있었다. 상호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안도했다. 딱히 화가 나진 않은 듯했다.

“저도 벌 드릴래요.”

“응?”

그녀는 그가 짚고 있는 검을 휙 낚아채고는, 태화의 손을 잡고 쌩 도망가 버렸다.

“…….”

너무 당황해서 허공섭물로 잡지도 못했다.

‘세희도 화났구나…….’

상호는 멍한 얼굴로 벽에 기대어 서 있다가, 바닥에 스르륵 주저앉았다.

급식소 뒷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 그래서 김씨가 글쎄…… 아이쿠! 선생님 왜 여기 계쇼?”

“아이고, 다리 아픈 총각 아녀? 지팡이는 어디 갔어?”

그는 아무런 대답도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

다행히 세희는 오후 평가가 시작되기 전에 그를 찾아왔고, 상호는 다시 걸어다닐 수 있게 되었다.

세희 앞에선 말조심해야 한다는 걸 깜빡했다. 그가 기억을 되새기며 스탠드에 앉아서 한숨을 쉬는데, 누군가가 옆에 다가와 섰다.

“오전 평가는 잘 됐어요?”

옆을 올려다보니 해련이 생긋 웃고 있었다. 상호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아, 네, 교장선생님.”

“앉아 있어요.”

해련이 상호의 어깨를 누르고 그의 옆에 앉았다.

스탠드가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고 석재 타일을 썼지만, 그래도 흙바닥인 것은 매한가지였다. 상호는 그녀의 하얀 양복바지를 보며 당황했다.

“교장선생님, 바지에 흙…….”

“좀 묻으면 뭐 어때요. 이미 앉은 거 무를 수도 없고. 아니면…….”

해련은 주변을 쓱 둘러보고는 작게 속삭였다.

“강 선생이 털어주려고?”

상호는 진지한 고민에 빠졌다. 왜 그의 주변 여자들은 그를 못 놀려먹어서 안달이 난 건가.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호호호…… 미안해요, 내 주책 받아주는 게 강 선생밖에 없어.”

“주책을 저한테만 부리시는 게 아니고요?”

“그것도 맞지. 그래서, 아이들 오전 평가는 어떻게 됐어요?”

“10승 세 명, 8승 한 명입니다.”

해련은 그의 말을 듣고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어머. 확실히 뭔가 다르긴 다른가 보네.”

“두 명은 원래 그럴 만한 아이들입니다.”

“그럼 나머지 두 명은 강 선생 능력?”

상호는 곰곰이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두 아이는…… 반쯤은 제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오호…….”

해련은 기대된다는 듯이 눈을 반짝였다.

“허풍인지 겸손인지는 봐야 알겠네요.”

둘은 운동장 한쪽을 쳐다보았다. 그곳에서는 오전 평가에서 선별된 64명의 아이들이 대진표를 보고 있었다.

오후 평가는 토너먼트 방식이다. 64강부터 시작해서 32강, 16강 순으로 진행해 1등을 뽑고, 그 아래로는 오전 평가에서의 성적과 순위 결정전을 통해 등 수를 정한다.

대진운이 적잖이 작용하지만, 285명의 아이들을 완벽히 공정하게 평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경기 수가 너무 많아지면 애들이 죽어나갈 테니.

상호는 이미 대진표를 보았다. 그의 반 아이들이 어디쯤까지 올라갈지, 반 아이들끼리 만나게 되진 않을지를 생각하며 대략적인 예상은 해 두었다.

다만 그의 반 아이들의 대진만 본 것은 아니었다.

‘도은율……. 누구 반이지?’

오전부터 자꾸 은율이란 아이가 신경쓰였다. 세희와 함께 단 둘뿐인 무예 10승.

그래서 은율의 대진도 확인해 둔 상태였다.

‘다행히 세희랑 태화랑 지윤이랑은 멀리 떨어져 있긴 한데…….’

문제는 나빛과 32강에서 만나게 되어 있다는 것.

나빛은 주술사와의 상성을 이용해서 쉽게 올라온 케이스였다. 즉, 다른 63명의 학생들보다 실력이 훨씬 떨어진다. 어찌어찌 운좋게 64강에서 이긴다 해도, 32강에서 은율을 만나면 무조건 지게 되어 있었다.

32강에서 지면 당연히 10등은 물 건너간다. 순위 결정전에서 아무리 날고 기어 봤자 17등이 최대.

‘……어떻게 위로할지나 생각해 둬야겠다.’

그게 현실적인 판단이다. 상호는 생각을 정리하고 경기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 아이들은 대진표를 다 확인하고 경기장으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여섯 개의 경기장 중 사용하는 것은 스탠드 쪽의 네 개. 패자가 생기면 비어 있는 두 경기장으로 가서 순위 결정전을 진행하게 된다.

옆에서 해련이 말했다.

“강 선생네 학생들 올라오면 말해 줘요.”

“지금 저기 있습니다.”

상호는 네 개의 경기장 중 왼쪽 위의 것을 가리켰다.

한쪽에선 지윤이, 다른 한쪽에선 작은 나무 막대기를 든 여학생이 올라왔다.

마법사들이 쓰는 마법 보조 도구, 완드였다.

“오후 평가, 시작하세요.”

운동장 중앙에서 한 선생이 소리치자 모든 경기장에 결계가 펼쳐졌다.

동시에 경기장 위에 선 아이들도 움직였다.

상호와 해련은 지윤이 상대를 향해 달려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보법은 가르쳤나요?”

“기초만 닦아 놨습니다.”

상대 여학생이 지윤을 향해 지팡이를 겨누자 그 끝에서 하얀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기체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상호도 몰랐다. 지윤도 당연히 모를 것이었다.

지윤은 바닥을 힘껏 박찼다. 기체이기 때문에 확실히 피하려면 평소보다 높이 뛰어올라야 했다.

해련이 체조 선수처럼 훌쩍 뛰어오른 지윤을 보며 감탄했다.

“경공도 안 가르친 거죠?”

“예. 내공으로 근육 강화하는 방법만 조금 아는 상태입니다.”

“힘이 좋네.”

지윤이 공중에서 한 바퀴 돌아 상대 여학생이 있던 자리에 착지했지만, 여학생은 이미 순간이동으로 피한 지 오래였다. 여학생이 다시 지팡이를 들어올렸다.

지윤은 마법을 피해 펄쩍펄쩍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발과 손을 이용해서 재주를 넘고, 때로는 결계까지 이용해서 횡방향으로도 뛰어올랐다. 해련은 이제 기인이라도 보는 것처럼 신기해하고 있었다.

“내공도 별로 없다면서 어떻게 저렇게 계속 뛰어요? 지치지도 않고…….”

“운동 중독입니다.”

수련에 미친 걸로 따지면 세희가 제일이지만, 지윤도 만만찮았다. 저녁에도 별관에서 땀 흘리고 주말에도 별관에서 땀 흘리고. 덕분에 힘과 체력, 맷집만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그 세 가지만은 지윤이 세희보다 앞섰다.

시간이 지날수록 상대 여학생이 마법을 쓰는 빈도가 점점 줄어들었다. 공격은 단순해지고, 순간이동을 하기까지 점점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악마 융합체가 아니다 보니 연속으로 마법을 쓰는 것이 슬슬 부담스러워지는 모양이었다. 지윤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순간이동이 끝난 직후에 상대를 향해 달려들었다.

“흐읍!”

“꺅!”

그녀는 상대 여학생을 덮쳐서 바닥에 자빠뜨리고, 그 위에 올라타 주먹을 치켜들었다.

여학생이 기겁하며 소리쳤다.

“하, 항복!”

이로써 32강 진출.

상호는 결계가 해제되자 지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지윤이 장갑을 벗더니, 반지에 입을 맞추고 상호를 향해 주먹을 들어올렸다.

해련이 고개를 기웃했다.

“금반지 같은데. 학생이 저런 걸 끼네요. 보통 반짝반짝한 걸로 끼지 않……, 강 선생, 그렇게 좋아요?”

“예?”

“푼수처럼 웃고 있는데.”

상호는 그녀의 말대로 입꼬리가 귀에 매달려 있다는 것을 깨닫고 헛기침을 했다.

“죄송합니다.”

“죄송할 건 아니죠. 학생이 이기면 좋을 수 있는데…… 강 선생이 그렇게 웃는 거 처음 봐서 그래요.”

해련이 무릎에 팔을 올려 턱을 괴고 그를 바라보았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3월까진 아직도 전쟁중인 군인 같았는데. 요즘은 강 선생 나이다워져서 보기 좋네요.”

“죄송합니다.”

“아니 죄송해할 게 아니라니까. 철없다고 혼내는 게 아니에요. 앞으로도 자주 좀 웃어요. 이등병처럼 지내지 말고.”

이등병이란 말이 상호의 가슴에 유난히 아프게 박혔다. 부대에서도 막내였는데 여기에서도 막내.

“……자주 웃어 보겠습니다.”

“보겠습니다가 아니라 볼게요!”

“볼……, 후우…… 볼게요.”

“푸훗……, 강 선생은 놀리는 맛이 있다니까.”

해련은 깔깔거리며 상호의 등을 두드렸다. 스탠드에 앉아 구경하던 아이들이 그들을 돌아보며 신기해했다.

상호는 붉어지는 얼굴을 양 손바닥으로 가렸다.

‘왜 내 주변 여자들은……, 나만 보면 놀려대냐…….’

      벽

약하다.

얇은 팔뚝만 봐도 알 수 있다.

주먹을 말아쥐는 방식은 아예 틀렸다.

그런데.

어째서 지는 것인지, 소녀는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오지윤.”

쓰러진 소녀의 귀에 감독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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