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음날 종례 시간.
상호는 교실에 아이들 넷을 세워 놓고 그 앞에 섰다.
“어제도 말했지만, 다른 반 애들도 고등학교 올라온 지 한 달밖에 안 됐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태연하게 칼집째로 검을 휘둘렀다. 공격이 향하는 곳은 나빛의 목이었다.
카아앙
나빛은 당황하긴 했지만 침착하게 방어막으로 공격을 막아냈다. 그녀가 가슴에 손을 얹고 진저리를 쳤다.
“서, 선생님. 깜짝 놀랐어요…….”
“그러라고 한 거야. 어쨌든 이런 상황에선 하루하루의 차이가 승패를 가른다.
단련도 쉬지 않고 해야겠지만, 시험 보기 전날까지도 머릿속으로 생각을 하고 깨달음을 얻어야 돼.”
그는 그녀들을 쓱 훑어보았다.
“지금 우리 반엔 주술사가 없다. 그렇지?”
“네.”
“주술사가 어떻게 싸우는지 알아?”
대답은 태화가 했다.
“치사하게요.”
“……좀 더 구체적으로.”
“정령한테 명령만 하면 정령들이 알아서 싸워주고, 이상한 저주 쓰고…….”
“맞아. 정령은 마법이나 무예랑은 달라. 정령 여럿을 소환해서 물량전으로 이끄는 게 주술사의 방식이다. 수도 많고, 종류도 많아서 다양한 방향에서 다양한 공격이 들어와. 거기에 도저히 예상할 수가 없는 저주까지 있지.
학생 때는 강한 저주는 가르치지 않으니까 너무 무서워할 필요는 없지만…… 발이 갑자기 미끄러지고, 머리카락이 갑자기 눈앞을 가린다거나 하는 정도는 쓸 수 있을 거야. 1학년 애들도.”
“그럼 어떡해요?”
“정령 공격은 몇 대 맞아도 상관없어. 발 잡히는 거랑 불만 좀 조심하고.”
초보 주술사들의 단점은 화력이 없다시피 하다는 것. 흙과 나무뿌리, 얼음과 바람으로 상대의 움직임을 방해할 순 있지만, 공격수단이 오직 불뿐이어서 그것만 조심하면 아무것도 못 한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존재했다.
“초보 주술사는 도망도 못 치고 확실한 방어 수단도 없으니까, 공격만 제대로 하면 돼.”
“네.”
아이들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상호는 그녀들 한 명 한 명과 눈을 마주쳤다.
세희는 보법의 기틀을 완벽히 다졌다. 특별한 보법은 아직 가르쳐주지 않았고, 내공이 적어 경공도 익히지 못했지만, 언제 어떤 자세로든 원하는 방향으로 다리를 뻗어 뛸 수 있게 되었다.
태화는 여전히 공격이 뻔했지만, 처음 싸우는 상대로는 드러나지 않는 단점이고, 마법도 제법 잘 맞추게 됐다.
나빛은 아직 성창을 만들지 못했다. 방어막으로 때리는 것은 가능하지만 전투를 끝내버릴 정도로 치명적인 일격은 없었다. 그래도 어차피 나빛에게는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1등을 하겠다고 호기롭게 말은 하지만, 그건 그녀의 생각일 뿐. 상호는 그저 나빛이 경험만 잘 쌓기를 바랐다.
그리고 지윤.
보법도 아직 익숙해지지 못했고, 짧은 공격거리는 해결이 되지 않았다.
상호는 그녀의 수준을 더 끌어올려주고 싶었다.
“지윤이는 끝나고 남아.”
“네.”
지윤은 별 반응 없이 가만히 대답했다. 무엇 때문인지 아는 것 같았다.
상호는 종례를 끝내고 다른 셋을 내보냈다.
“들어가. 세희랑 나빛이는 계속 연습하고. 태화는 연습은 못해도 계속 머릿속으로 생각해. 어떻게 싸울지.”
“네.”
“안녕히 계세요.”
세희, 태화, 나빛이 인사를 하고 나가자 그는 지윤을 바라보았다.
“지윤…… 응? 왜, 왜 그래?”
그녀가 울먹거리고 있었다.
아직 아무것도 안 했는데. 상호는 당황하며 지윤의 앞으로 다가갔다.
“왜 울어?”
“저, 저 어떡해요……?”
갈색 볼로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다른 애들을 이길 수가 없어요……. 아빠는 왜 주먹을 쓴 거예요? 그걸 모르겠어요……. 주먹만 들고 남을 어떻게 이겨요?”
어제의 대련에서 마음의 짐을 좀 내려놓은 줄 알았는데, 여태까지 그걸 계속 고민한 모양이었다.
상호는 검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뽑아봐.”
지윤은 시키는 대로 했다.
“가까이 서.”
상호는 가까이 다가온 그녀와 눈을 맞췄다. 둘의 거리는 칼 하나만큼도 되지 않았다.
“그걸로 공격해봐.”
지윤은 거침없이 그를 향해 칼을 내리쳤다. 어설펐지만 빠르기는 했다.
그는 검을 오른쪽 손등으로 받아내고, 속도가 느려진 검을 왼손으로 잡았다.
“모든 무기에는 장단점이 있어.”
그리고 오른손으로 지윤의 갈비뼈를 살짝 때렸다.
“윽!”
“맨손은 짧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야. 하지만 동시에 그 어떤 무기보다도 자유롭기도 해. 상대의 무기를 잡을 수도 있고, 땅이나 벽을 짚을 수도 있지.
그리고 다른 무기들은 자세를 바꿀 때, 특히 갑자기 방어를 해야 할 때 시간이 걸리지만, 맨손은 시간이 거의 걸리지 않는다. 모두 요긴한 장점이야. 하지만 그 장점을 살리려면 많은 조건이 필요해.”
상호는 지윤이 놓친 검을 집어 칼집에 넣었다.
“주먹은 강기와 보법이 모두 뒷받침되어야 쓸 수 있는 무기야. 하나라도 결여되면 정말 아무것도 못한다. 강기는 너나 애들이나 똑같으니까 걱정 안 해도 되지만…… 문제는 보법이야.”
“보법 연습을 더 해야 하나요?”
“그것도 맞는데, 기본적으로 경공이 없는 보법은 반쪽짜리야. 너흰 아직 경공을 쓸 내공이 없고.”
“그럼…… 어떻게 해야 해요?”
“회피는 보법으로만 하는 게 아냐. 다리로만 하는 게 아니란 뜻이야.”
상호는 그녀의 팔뚝을 잡았다. 굵지는 않았지만 단단한 근육으로 꽉 차 있었다.
“넌 몸이 가벼운데도 힘이 세니까 충분히 가능해.”
지윤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팔로…… 손으로 보법을 하라는 말씀이세요?”
“그건 아니지만 손으로도 얼마든지 뛰어오를 수 있지. 너처럼 단련된 사람이 내공까지 쓰면 한 손으로도 충분한 힘이 나오니까. 꼭 바닥만 사용하라는 법도 없고. 이걸 기억해. 맨손인 사람은 무기를 든 사람보다 자유롭다는 거.”
그 말에 그녀는 뭔가를 깨달은 듯했다.
“정직하게 다리로만 뛸 필요는 없다는 건가요?”
“그렇지.”
상호는 씩 웃었다.
“이제 알겠어? 맨손을 쓰는 사람이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
“네.”
지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그녀는 더 이상 낙심한 표정이 아니었다. 당장이라도 이 깨달음을 써먹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는 얼굴이었다.
상호의 손이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할 수 있겠어?”
“네!”
지윤은 손을 들어 주먹을 꽉 쥐며 대답했다. 오랜만에 힘찬 목소리였다.
상호는 그녀가 정말로 자신감을 되찾은 것을 보며 흡족한 웃음을 지었다.
***
날이 흘러 4월 26일. 1학년 중간평가 날.
운동장 곳곳에서 기합소리가 들려왔다.
“흐읍!”
“이얏!”
운동장은 여섯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정령이 흙으로 단을 쌓고, 마법으로 결계를 두른 경기장. 결계가 단에 딱 맞게 쳐져 있었기에 장외패는 없었다.
경기장 위에서는 이미 시험이 치러지는 중이었다. 무예가 학생들은 무예가 학생들끼리, 마법사 학생들은 마법사 학생들끼리.
1학년은 총 285명. 그중에 신앙인이 32명. 치료 유형의 신앙인들은 실내에서 따로 시험을 본다. 전투 유형으로 시험을 신청한 신앙인은 나빛 한 명 뿐이므로 전투 시험을 치는 인원은 총 254명.
거기서 무예가가 127명. 마법사가 78명이고 주술사가 48명. 경기장은 인원수에 맞춰 3개는 무예가, 2개는 마법사, 1개는 주술사에게 배정되었다.
오전에는 무예, 마법, 주술을 나눠서 각 유형별로 평가를 진행하고, 254명 중 64명을 선별해서 오후에 타 유형과 합쳐 시합을 시킨다.
무예가는 127명 중 32명. 마법사는 78명 중 20명. 주술사는 나빛을 포함해서 49명 중 12명.
아이들이 그 64명 안에 들어갈 수 있을까. 상호는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스탠드 맨 윗자리에 앉아 있었다.
혼자 외롭게.
‘이렇게 앉아 있어도 되나…….’
상호는 동료 교사들이 바쁘게 돌아다니는 것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중간평가를 처음 보는 신참인 덕분에 편하게 참관하는 중이었다. 다들 B급한텐 중요한 일은 맡기지 않으려 하기도 했고.
‘이거 원…… 온종일 꿀만 빨겠네.’
낙하산 소리 들을 만도 하다. 그는 팔짱을 끼고 바로 앞의 경기장을 내려다보았다.
검을 든 채로 돌아서는 세희. 그리고 그 뒤에 쓰러진 여학생.
여학생의 손에는 부러진 창이 들려 있었다.
교사들 중 한 명이 다가가 여학생을 일으키고 보호 아티팩트 목걸이를 벗겼다.
“천세희, 10전 10승.”
경기장 주변에 서 있던 교사가 종이에 무언가를 적으며 말했다.
오전에는 한 명당 10번만 뛰면 된다. 즉, 세희는 승률 100%로 오전 평가 종료.
상호는 세희의 앞선 시합들을 돌이켜 보았다. 전부 엄청난 속도로 달려들어 단 한 번의 쾌검으로 끝냈다. 다른 아이들은 피하지도 못하고 막지도 못했다.
빠르기도 빨랐지만 진짜 죽여 버리겠다고 달려드는 그 기백이 한몫했다.
덕분에 아이들은 혼비백산한 채로 검을 맞았다.
전부 기초를 다져놓지 않은 탓.
‘수준이 확실히 다르구나.’
흐뭇해하는 상호의 귀에 다른 경기장에서의 소리가 들려왔다.
“도은율, 10전 10승.”
상호는 그쪽을 흘끗했다.
경기장에서 검을 든 여학생이 내려가고 있었다. 똑단발에 키가 컸다. 눈빛이 세희처럼 진지한데 키가 크고 늘씬하다 보니 모델처럼 도도한 분위기가 났다.
아쉽게도 세희에게 집중하느라 은율이 싸우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
‘무예가는 저 둘만 전승인가 본데…….’
120여 명의 전적을 모두 기억하지는 못했지만, 아마 다들 한 번씩은 패했던 것 같았다. 10전 10승은 아직 저 둘 뿐.
그래도 아직 모든 학생의 시합이 끝난 건 아니다. 상호는 은율의 생김새를 기억해 두고 또다른 시험장으로 눈을 돌렸다.
그곳은 시합이 이제 막 시작되려는 참이었다.
진행을 맡은 교사가 호명했다.
“오지윤, 김시연.”
위를 향해
깡 깡
지윤은 손바닥에 주먹을 부딪히며 훌쩍 뛰어 경기장에 올라섰다. 손에 낀 강철 장갑에서 금속성이 울려퍼졌다.
반대편에서는 창을 든 여학생이 계단을 올랐다.
지윤은 창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드디어 써먹을 때가 왔구만.’
진행 교사가 그녀와 상대 학생에게 목걸이를 가져왔다. 둘이 그 목걸이를 걸자 교사는 목걸이들의 상태를 확인하고 경기장 아래로 내려갔다.
경기장 외곽에 하얀 결계가 올라왔다. 밖에서는 안이 보이지만 안에서는 밖이 안 보이는 결계. 바깥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어서 좋았다.
하지만 스승은 지켜보고 있을 터였다.
지윤은 주먹을 한 번 꽉 움켜쥐었다가 풀었다.
시합은 이미 시작된 상태.
상대 여학생이 지윤을 향해 창을 겨누고 슬금슬금 다가왔다. 지윤은 양손을 비스듬히 앞으로 내밀고 조심스럽게 뒷걸음질을 쳤다.
아마 도망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상대도, 구경꾼들도.
‘더 와. 더 가까이 와보라고.’
지윤은 상대에게 도발하는 눈빛을 보냈다.
‘네가 더 유리하잖아.’
그녀와 상대의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선들이 있었다.
서로의 간격.
상대가 반응하지 못할 거리는 어디인가. 자신이 반응하지 못할 거리는 어디인가.
각자의 눈에 두 개씩, 총 네 개의 선이 둘 사이에 존재했다.
여학생은 선을 향해 다가갔고, 지윤은 선에서 물러났다.
빙빙 돌지 않고 똑바로 뒤를 향해 걸었다. 그래서 좁지 않은 경기장인데도 금방 벽을 등지게 되었다. 등에 닿지는 않았다. 팔 뻗으면 닿을 거리.
여학생은 승리를 직감했는지 아무런 의심 없이 창을 찔러넣었다.
쉬익
창날이 시퍼런 빛을 내뿜으며 날아들었지만, 지윤은 세희와의 대련 덕분에 더 이상 날붙이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녀는 침착하게 허리를 한껏 젖혀 창을 피했다. 가슴을 노렸던 창이 얼굴 위로 세차게 지나갔다.
좋지 않은 자세였다. 다시 일어서기도 곤란하고, 상대의 다음 공격에 반응하기도 어렵다. 느리고, 힘들고, 자유롭지 못한 동작. 회피로서는 최악.
그러나.
“흡!”
지윤은 허리를 젖힌 자세 그대로 결계에 양손을 짚었다.
그리고는 팔을 쭉 뻗어 결계를 밀어내며 그 반동으로 상대를 향해 달려들었다. 태클을 하듯이 바닥에 딱 붙어서.
손에 무기가 있었다면 하지 못할 동작이었다.
“……헉!”
창을 든 여학생은 당황하며 지윤을 향해 창을 내리치려 했다. 창끝은 무리겠지만 창대로라도 때리려는 심산이었다.
하지만 지윤이 여학생의 다리 밑으로 들어가는 게 더 빨랐다. 창은 애꿎은 땅만 때릴 뿐. 상대의 다리 밑으로 파고든 지윤은 다시 땅을 밀어 몸을 일으켰다.
이 또한 무기가 있었다면 불가능한 동작.
그녀는 일어나는 힘을 그대로 이용해 상대의 턱에 팔꿈치를 꽂았다.
빠악
“커흑!”
여학생의 몸 전체가 들어올려질 정도로 강렬한 일격이었다.
쿠당탕 소리를 내며 넘어진 여학생은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주인 잃은 창이 바닥에 덜그렁 떨어졌다.
결계가 사라지고 주변 풍경이 드러났다.
“오지윤, 4전 4승.”
진행 교사가 승자를 호명했다.
순조롭게 이겨나가고 있다. 지윤은 고개를 돌려 스탠드를 쳐다보았다. 그곳에서는 상호가 그녀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고 있었다.
그녀는 웃으며 경기장에서 내려왔다.
입꼬리가 귀에 걸려 있었다.
“지윤아, 목걸이 주고 가야지.”
“앗, 네!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