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머, 어머.”
민정이 손뼉을 치며 호들갑을 떨었다.
“너 진짜 선생님 됐구나!”
“설마 안 믿었어?”
상호는 헛웃음을 치며 태화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들은 학회 건물에 자리한 민정의 펜트하우스에 들어와 있었다.
“인사해. 쌤 아는 누나야.”
“안녕하세요.”
태화가 말똥말똥한 눈으로 민정을 바라보았다. 그는 민정에게도 태화를 소개시켰다.
“얘는 태화. 이태화. 내가 가르치는 학생.”
“안녕.”
민정이 해맑게 인사했다.
그런데 어째 태화가 조용했다. 촐랑대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차에서 이야기한 것 때문은 아닐 터였다.
상호는 의아해하며 그녀에게 물었다.
“왜 그래?”
“아뇨, 그냥…… 몇 살이세요?”
“누나가 올해 몇이지? 서른?”
“……서른하나.”
민정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한숨을 푹푹 쉬었다.
“상호야. 학교에 착한 남자 없니……? 난 외모 안 봐…….”
“좀 있으면 누나도 남자 생기겠지.”
그는 도현이 민정의 소식을 물었던 걸 떠올리며 어깨를 들썩였다.
민정이 그들을 소파에 앉게 했다. 그녀도 그 앞에 마주앉았다.
“그래서 웬일이야?”
“우리 애 마법공학 발명품 만드는 거 도와줘.”
“마법공학?”
“대회를 나가는데 만들고 싶은 게 있대.”
상호의 말에 민정은 태화를 바라보며 사람 좋게 웃었다.
“뭘 만들고 싶은데?”
“그게…….”
태화가 상호를 곁눈질했다.
민정은 그 눈빛을 알아보고는 염동력 마법으로 종이와 펜을 가져왔다.
“선생님 앞에서 말하기 싫구나.”
“네.”
“상호야, 방에 들어가 있어.”
상호는 머리를 긁적였다. 뭐기에 저렇게 숨기고 싶어하는 건지.
방에 들어가려고 집안을 살피는데 어째 방이 없었다. 식당도 주방도 거실도, 다 훤히 뚫린 한 공간이었다. 문이 보여서 열어보니 거기는 화장실과 옷방이었다.
보다 못한 민정이 구석을 가리켰다.
“저기 있어, 상호야. 저기 들어가면 티비도 있으니까 보면서 쉬어. 한숨 자든가.”
거기로 가서 문을 열어보니 침대가 있는 침실이었다. 화장대와 티비도 보였다.
상호는 살짝 당황하며 민정을 향해 외쳤다. 집이 워낙 넓어서 크게 말하지 않으면 소리가 닿지 않았다.
“누나, 여긴 누나 안방 아냐?”
“맞는데?”
너무도 당당하고 태연한 답변이 돌아왔다.
상호는 뭐라 말하려다가 입맛을 다시며 안으로 들어갔다. 침대 잠깐 앉는 것 정도는 별거 아니니까.
그는 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침대에 앉아 티비를 켰다. 채널을 돌렸지만 딱히 재미있는 프로그램이 없었다.
앉았더니 눕고 싶어진다.
그래서 누웠더니, 이번엔 자고 싶어졌다.
‘어으, 운전을 했더니 피곤하네……. 끝나면 깨우겠지.’
방에 퍼진 따스한 공기와 달콤한 향기 때문에 더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잠이 잘 오는 느낌이었다. 침대에 마법이라도 걸린 듯했다.
상호는 새우처럼 몸을 웅크리며 눈을 감았다.
***
눈을 뜨니 주변이 캄캄했다.
‘……헉!’
상호는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몸에 덮여있던 이불이 스르륵 흘러내렸다.
통유리창을 가린 커튼 사이로 달이 휘영청 떠오른 게 보였다. 완전히 한밤중이었다. 이 시간이 되도록 퍼질러 자다니.
아니, 이 시간이 되도록 안 깨우고 둘이서 뭘 하고 있는 건지. 그는 허둥대며 검을 찾다가 옆을 돌아보고 기겁했다.
“쿨…….”
옆에서 민정이 이불을 덮고 자고 있었다. 잠옷 차림으로.
“누, 누나.”
“우응……?”
상호가 부르자 민정이 눈을 떴다.
“왜? 좀 더 자지…….”
“왜 안 깨웠어?”
“깊이 잠든 것 같아서……. 어차피 우리끼린 상관 없잖아.”
같이 자는 건 상관 없긴 했다. 부대원들끼리는 이미 볼 것 다 봤다. 겨울에는 껴안고 자기도 했고. 하지만 상호는 민정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니었다.
민정은 부스스한 머리를 쓸어올리며 졸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밤도 늦었구 해서…… 태화도 자고 가게 했어.”
“그게 문제가 아니라 누나. 태화 기숙사 들어가야 하는데…….”
상호는 당황하며 핸드폰을 찾았다. 분명 기숙사 사감한테서 연락이 쏟아졌을 터였다. 애랑 같이 나가서는 안 들어오고 뭐하냐고, 미쳤냐고.
하지만 핸드폰 화면에는 부재중 전화는 커녕 문자 한 통도 없었다.
“어?”
“학회 통해서 학교에 연락했어. 견학하고 자고 간다고. 사진 몇 장 찍고 학회장님 이름 대니까 되더라.”
“그래……?”
상호는 덜컥 떨어졌던 심장을 추스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검은 침대 옆에 세워져 있었다. 그가 검을 잡고 침대에서 일어서자 민정이 물었다.
“안 자도 되겠어?”
“어우, 너무 놀라서…… 물 좀 마시고 올게. 깨워서 미안해. 누난 다시 자.”
“먹고 와. 옛날처럼 같이 누워서 이야기 좀 해.”
“으음…… 알았어.”
상호는 문을 나서며 생각했다.
‘누나가 많이 외롭나 보네.’
그런데 문 앞에서 검은 연기가 한 줄기 피어올랐다.
상호는 거실 쪽을 보았다. 그가 서 있는 곳에선 소파의 뒤쪽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곳에서도 검은 연기가 살짝 피어올랐다.
‘……안 자는구나.’
그는 검을 살살 짚으며 주방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물 한 컵을 들고 소파 쪽으로 향했다.
소파에는 역시나 태화가 누워 있었다. 하얀 민소매 원피스를 입고 이불을 덮은 채로. 민정에게서 잠옷을 빌려 입은 모양이었다.
하얀 어깨가 달빛으로 은은하게 빛났다.
상호는 무의식적으로 이불을 그녀의 어깨까지 올려 주었다가 문득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안 자고 있는데 괜히 유난 떠는 것 같네…….’
그는 손을 거두고 소파 앞에 있는 탁자를 돌아보았다. 탁자에는 커다란 종이 몇 장이 놓여 있었다.
다 백지인 줄 알았는데 잘 보니 아마 뒷장에 뭔가가 쓰여 있는 듯했다. 상호는 종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꼬리가 슬며시 기어와 종이를 눌렀다.
그가 고개를 돌리자 태화의 붉은 눈동자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쁜손.”
“미안.”
상호는 멋쩍게 웃으며 손을 내렸다.
“궁금해서 그랬어. 안 자고 있었네.”
그가 탁자에 앉자 태화는 이불을 코까지 끌어올리며 말없이 그와 눈을 마주쳤다.
민정을 만난 후부터 태화가 이상하게 말수가 적어졌다. 상호는 그게 마음에 걸렸다.
“태화야.”
“네.”
“무슨 일 있어?”
“아니요.”
“평소랑 달라 보여.”
태화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저 분이랑 어떤 사이에요?”
“누나?”
상호는 뭐라고 설명을 해줘야 할지 고민했다.
“음…… 소꿉친구 같은 거야. 어릴 때부터 알았어. 내가 너보다 어릴 때부터.”
“쌤 연상 취향이죠?”
“……그런 건 누가 알려 줬어?”
“저희들끼린 다 알아요.”
태화가 벌떡 일어나서 소파에 앉았다. 민소매 옆으로 고운 어깨와 쇄골, 가느다란 목이 드러났다.
그녀는 따지듯이 물었다.
“쌤이랑 저분이랑 왜 같이 자요?”
“그만큼 친해.”
“사귀는 사이예요?”
“그런 사이는 아냐.”
상호는 태화의 머리를 쓸어 주려다가 손을 멈췄다. 버젓이 드러난 어깨 때문에.
그 가까이에 손을 가져갈 수가 없었다.
“쌤 애인인 줄 알았어? 그래서 어색했던 거야?”
“엄청 여자다운 사람이랑, 스스럼없이 이야기하는 거 보고…….”
“옆에 끼면 안 될 것 같았어?”
“네.”
태화의 대답에 그는 피식 웃었다.
“그냥 아는 누나일 뿐이야.”
그는 물을 쭉 들이키고 탁자에서 일어났다.
“늦게까지 했겠네. 완성은 다 됐어?”
“네.”
“그럼 어서 자. 학교 가야 되잖아.”
“네.”
태화는 소파에 스르륵 누워 이불을 끌어올렸다.
“안녕히 주무세요.”
상호는 태화가 눈을 감는 것을 확인하고 민정의 침실로 돌아왔다.
그녀의 옆에 눕는 것이 처음은 아니었고, 단둘이서 작전에 나갔다가 함께 잔적도 있었지만, 안방 침대에 함께 눕는 것은 역시 어색했다. 상호는 침대 끄트머리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누웠다.
어둠 속에서 민정의 목소리가 들렸다.
“태화 깨어 있어?”
“응. 잠깐 이야기 좀 했어.”
“무슨 이야기?”
“나랑 누나랑 사귀는 사이인 줄 알았나 봐. 그래서 어색했대.”
민정이 웃었다.
“태화 착하더라. 좀 잘해 줘.”
“그…….”
상호는 그녀의 말에 별 생각 없이 대답하려다가 뭔가를 깨달았다. 그는 민정을 돌아보았다.
“누나. 태화가 만들고 싶다는 게 뭐야?”
“아아, 그게…… 킥킥.”
민정은 키득거리며 얼른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한참을 더 웃던 그녀가 상호의 곁에 바싹 다가와 귀에 속삭였다.
“네 상태를 잘 모르잖아. 그래서…… 귀엽더라. 기특하기도 하고.”
거기까지만 들어도 상호는 태화가 뭘 만들려고 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의 입가에도 엷은 웃음이 번졌다.
민정이 흐뭇해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마음이 예쁘지 않니? 치마는 그렇게 짧으면서. 빨래 맡기러 가는데 깜짝 놀랐어.”
“착해. 튀는 걸 좀 좋아할 뿐이지.”
“근데 너 애들 몇 명 가르쳐?”
“넷. 태화까지 넷.”
“학교에서 재밌었던 일은 없어? 누나 들려줘. 응?”
“누나 좀 기분 좋아 보이네.”
“히히, 오랜만에 동생이랑 이야기하니까 신나서 그래. 저번엔 쌩 가버렸잖아.”
“재밌는 일……보다는 힘든 일이 더 많았는데. 보자…….”
둘은 그렇게 이야기꽃을 피우며 밤을 꼴딱 새웠다.
천재와 범재
상호는 태화를 데리고 이른 아침에 학교로 돌아왔다. 남들 눈에 띄지 않도록.
태화와 민정이 만든 설계도는 목요일에 무사히 접수를 마쳤다.
결과는 다음 주 월요일에 나왔다.
“장려사아아앙~!”
상장을 받아든 태화가 꺅꺅거리며 교실을 뛰어다녔다.
상을 받았지만 상호의 얼굴빛은 그리 좋지 않았다. 태화의 발명품에 대한 점수 평가를 본 탓이었다.
설계 점수 10/10.
창의성 점수 5/10.
효용성 점수 1/10.
설계 점수가 아니었으면 장려상도 못 받았을 테다. 즉, 사실상 민정이 다 해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태화에게 말했다.
“잘했어. 혼자 한 건 아니지만…….”
“잘했죠? 잘했죠? 꺄하하!”
태화는 상장을 품에 꼭 안은 채 다른 아이들에게 혀를 쏙 내밀었다. 사정을 모르는 세희와 지윤은 완전 의외라는 눈빛을 그녀에게 보내고 있었다.
“상 받은 사람들한텐 설계도대로 제작해서 보내준대. 방과 후면 도착한다나 봐.”
“그거 땜에 한 거예요.”
“알고 있었어? 신기하네. 뭐…… 어쨌든 상 받았으니까. 소원권 하나 줄게.”
“저 소원권 지금 쓸래요.”
태화가 빙긋 웃었다.
상호는 그녀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기를 바랐지만, 약속은 약속이었다.
“뭔데?”
그가 묻자 태화는 세희, 나빛, 지윤을 빙 둘러 가리켰다. 그러고는 비릿한 조소를 지었다.
“얘들 소원권 싹 없애 주세요.”
“……뭐?”
“응?”
“어?”
지윤과 세희는 멍하니 굳어버렸다가, 이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태화에게 달려들었다.
“……야아아아! 니, 니 머라 씨부리쌌노?”
“너 따라나와.”
“몰라~ 몰라~ 배째~.”
태화가 교실 바닥에 벌렁 드러누워 데굴데굴 굴렀다. 소원권을 이미 사용한 나빛은 말없이 웃으며 그녀들의 소란을 지켜보았다.
세희가 서늘한 표정으로 칼을 뽑았다.
“째자. 그냥.”
지윤은 아예 태화 위에 올라타 마운팅을 하고 패기 시작했다. 잔뜩 흥분해서는 사투리가 줄줄 흘러나왔다.
“니 머꼬? 머꼬? 문디가 미칬나, 내 니 오늘 잡는다카이!”
“꺅! 아야!”
“쌤요, 소원권 당장 쓰겠슴니더. 이 가스나 그냥 쥑이뿔겠심더!”
“쌔, 쌤! 살려주세요! 저 다치면 쌤도 아프다면서요!”
상호는 두 소녀가 마음껏 태화를 패도록 내버려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