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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역시나 문자가 왔다.
“씨바, 경공 못 하는 거 알면서 어디까지 오라고…….”
상호는 주차할 자리를 찾으며 투덜거렸다.
도현이 그를 부른 곳은 한강 상류 변두리의 잔디밭이었다. 강남에 있는 협회본부 옥상에서 빡세게 뛰어오르면 한 방에 도달 가능한 곳.
그가 대충 주차를 마치고 약속한 곳으로 가자 한 사내가 돗자리도 없이 술상을 대충 차려 마시고 있었다.
검을 절그럭거리는 소리에 사내가 뒤를 돌아보았다.
“어, 왔냐?”
상호는 도현이 차려놓은 술상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잔디밭 위 알루미늄용기에 골뱅이 무침, 그리고 번데기 통조림, 편의점 삼각김밥.
“아니, 바쁜 동생 불러서 대접한다는 게 이따구야?”
“그러니까 니가 어린놈인 거야. 안주 말고 술에 집중해야지, 짜식아.”
술이라고 뭐 대단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소주.
주기만 하면 뭐든 먹는 상호였지만, 어이가 없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는 도현의 앞에 털썩 주저앉으며 종이 소주잔을 들었다.
“그래. 줘봐.”
도현은 킬킬거리며 병을 들어 술을 따랐다. 얼굴이 이미 벌겋게 달아오른 채였다.
“나 가고 나니까 화 많이 났드냐?”
“티는 안 냈지만…… 끝이라고 선을 딱 긋던데.”
“역시나…….”
도현이 술을 단번에 들이켰다.
“이래서 연예인들이 끼리끼리 사귀는 건가? 너 민정이랑 연락 하냐?”
“얼굴은 봤지.”
“너 아직도 전화 안 하고 그냥 쳐들어가?”
“쳐들어가면 되는데 전화를 왜 해?”
“미친놈, 다리도 아픈 놈이…….”
상호는 안주를 집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어차피 다 볼일이 있어서 겸사겸사 만나는 거니까. 민정이 누나도 그냥 학회에 볼일이 있어서 들렀다가 만난 거야. 어쩌다 보니 민정이 누나가 해결해 주긴 했지만…….”
“쯧, 매정한 새끼. 일 없어도 좀 만나고 그래.”
“누나가 그러는데 형도 연락 안 한다드만. 내가 형이랑 누나들 제일 자주 만나던데?”
“나는 바쁘다니까.”
“퍽이나…….”
도현은 술을 몇 잔 더 털어넣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상호는 혀를 차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취했구만…….’
“알아서 조절해. 난 못 데려다 주니까.”
“난 가끔…… 의문이 든다.”
뜬금없이 도현이 중얼거렸다.
웃음기가 싹 사라진 채로 강을 노려보고 있었다.
“내가 어디까지 희생해야 되는 거지?”
상호는 조용히 도현의 말을 들었다.
“우린 세상에 목숨도 바쳤잖아. 뭘 더 원하는 건지 모르겠다. 이미 나라를 위해서 일하고 있는데 일상까지 빼앗으려고 해. 낮에도, 밤에도……. 마음대로 갈 수 있는 곳이 없어. 술집도 못 가. 식당도 구내식당 아니면 가지를 못해……. 이게 삶이 맞나? 나는 모르겠다, 정말.”
“도망쳐, 그럼.”
“……도망칠까?”
진심인 듯했다.
“나 없어도 협회 잘 굴러갈 텐데. 그냥 통장만 들고 시골로 도망쳐 버려?”
“형 선택이지.”
상호의 말에 도현은 허탈하게 웃었다.
“넌 선택 잘했다. 정말로. 아니지, 또 모르지. 네가 X급이 됐으면 기자고 뭐고 다 두들겨 팼겠지.”
“형도 패버려, 그냥.”
“난 부모님 눈치가 보여서.”
상호의 경우와 달리 도현은 양친이 멀쩡히 살아 있었다.
“내가 기자들 몰래 어떻게 여행 간 적이 있었다? 그런데 시발 무슨 일이 있었는줄 아냐? 갑자기 아버지한테 연락이 온 거야. 기자들 왔다고. 그래서 가보니까 진짜로 진을 치고 있데. 그땐 빡쳐서 녹음기랑 카메라 다 부숴버렸지.
허공섭물로 싹 뺏어서. 그러고 나니까 그때 온 기자들은 당분간 안 보이더라.
겁났나 봐. 근데 요새 또 슬금슬금 보이더라고.”
“부모님들은 뭐라 하셨어?”
“아들 유명하다며 좋아하시지. 그런데…… 진심이겠냐.”
“형도 그냥 나효은 걔처럼 방송을 해. 형이 숨어 사니까 기자놈들 더 달려드는 거 아냐?”
“효은이처럼?”
도현은 고민에 빠진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방송은 영 안 되더라. 그리고 사람들은 내 무공에 관심이 있는 거잖아.
성력은 아무나 쓰는 게 아니니까 안 물어보는 거고…… 내가 방송에 나가도기자들은 계속 몰려올걸.”
“팬이 생기면 팬들이 나서겠지. 기자들 너무 과한 거 아니냐고.”
“팬? 염병, 그런 짓은 진짜 못하겠다. 어우…….”
상호도 진짜로 그러라고 말한 것은 아니었다. 도현의 성격을 알고 있었기에.
도현이 삼각김밥을 까서 먹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도망치고 싶어도…… 칠 수가 없다. 도망쳐봤자 부모님만 고생할게 뻔하고…… 계속 도망칠 수 있다는 보장도 없어. 그러다 들키기라도 하면 더 시끄러워지겠지.”
“심한 놈들은 고소해, 그냥.”
“내가 협회장님한테 배운 게 하나 있어. 너도 기억해 놔. 기자를 적으로 돌리는 것만큼 멍청한 짓이 없다.”
술에 취했어도 눈빛은 말똥말똥했다.
“기자는 정의롭든, 정의롭지 않든 무서운 족속이야. 물론 그 이유는 털어서 먼지 안 나오는 인간이 없기 때문이지만……. 내가 범죄는 저지른 적이 없어도, 밝히기 싫은 비밀 몇 가지는 있지. 누구나 그런 법이고. 너도 그럴 거 아니냐.”
“……그렇지.”
“그래서…… 방법이 없다. 내가 X급을 선택했던 순간부터 정해진 거야. 돈많이 벌어서 효도한 건 후회 안 하지만…….”
도현이 한숨을 푹푹 쉬며 상호를 바라보았다.
“내가 네 삶이 부럽다는 건 아니야. 잃은 건 네가 나보다 훨씬 많지. 비교하기 민망할 만큼…… 근데…… 부럽다. 미안하다. 뭔 말인지 알지?”
“알지.”
상호는 입맛을 다시며 도현의 잔에 술을 따랐다. 실연을 하면 사람이 좀 맛이 갈 수도 있는 법이다.
부모도 잃고 연인도 사별하고, 다리까지 저당잡힌 그의 삶을 도현이 부러워할 순 없었다. 도현이 부러워하는 것은 상호의 선택이었다.
상호도 그 사실을 알았기에 화를 내진 않았다.
“그 아가씨랑은 얼마나 됐어?”
“길진 않지. 한 달인가. 그래도 이번엔 느낌이 좋았는데…… 한계였나 보네. 그러고 보니 너는 애들이랑 잘 지내는 것 같더라?”
“그럭저럭.”
“애들 중에 맘에 드는 애 있드냐?”
“아니 씨발…….”
상호는 술병을 확 깨버릴 뻔했다.
“형은 직접 봤으면서 그런 소리가 나와? 꼬맹이들이라니까?”
“누가 지금 잡으랬냐? 졸업하고 만나면 되는 거지. 나랑 그 아가씨 나이차도 5살이야. 니는 임마 스물셋이면 시퍼렇게 젊은 놈이 겨우 그거 가지고 유난이냐. 니 나이에 여고생이랑 사귀는 놈이 분명히 꽤 있을 텐데…….”
“나이가 문제야? 제자인 게 문제지.”
그가 툴툴거리자 도현이 실실 웃었다.
“난 니가 애들한테 꼼짝없이 당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귀에 꽃을 꽂드만.”
“그럼 애들을 패겠어? 당연한 거를 가지고…….”
“아니, 애들이 널 안 무서워한다고. 평소에 잘 대해주나 봐?”
“그…….”
상호는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이마를 짚었다.
“그래. 딱히 애들 싫어하는 게 아니니까.”
“다행이네. 너 좀 잘 지내라고 거기 넣은 거였는데. 애들이랑 있을 땐 표정이 확 살더라.”
“……됐어. 다 마셨으면 가자.”
그가 쓰레기를 치우려 하자 도현이 나지막이 말했다.
“상호야.”
“응?”
“아이들이랑 많이 놀아라. 수련만 시키지 말고.”
“놀긴 뭘 놀아? 우리 애들은 진짜로 열심히 해야 하는 애들이야.”
중간평가가 얼마 남지 않았다. 다같이 노는 날은 오늘이 마지막이었다. 적어도 4월은.
상호는 그 실없는 내용을 듣고 도현이 장난으로 말하는 줄 알았지만, 도현의 눈은 진지했다.
“내가 너 처음 봤을 때 무슨 생각 했는지 아냐?”
“뭔데?”
“불쌍한 놈이었다.”
상호는 빈 술병과 쓰레기들을 잡은 채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창 놀 나이에 칼들고 스승 따라서 전쟁터 뛰어든 꼬마. 부모님도 여의고 동갑내기 친구는 주변에 있지도 않고. 뭐 효은이가 있긴 했지만 같이 놀 만한 상대는 아니니까.
그렇게 전쟁터 나가서 매일같이 몬스터랑 싸우다 죽을 뻔하고, 정 붙인 전우들은 태반이 죽고. 그리고…… 나는 감히 상상도 못할 고통들을 겪고. 지금도 너는 나한텐 세상에서 제일 대단하고 제일 불쌍한 놈이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닌 좀 놀아라.”
도현이 혀를 찼다.
“네 불행의 모든 배경을 걷어내고 봐도…… 네가 그 시기에 공백이 있다는거. 어릴 때 놀지 못했다는 거. 그거 자체가 나는 제일 안타깝다. 그래서 하는 말이야. 너 아직 어리니까, 애들이랑 같이 놀으라고. 그게 내가 너 선생시킨 진짜 이유야.”
“놀라고 보낸 거면 남고를 보내지 그랬어? 남녀공학이나…….”
“남고 가면 니가 버틸 것 같냐? 개기는 놈 무조건 하나는 있을 텐데? 니가 남고 가면 한 달 안에 애 하나 잡고 교사 때려칠걸? 그리고 교사한텐 남녀공학이 제일 지옥이야, 인마. 모르는 소리 하지 마.”
상호는 도현의 시선을 피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아예 안 다녀봐서 반박할 수가 없네, 시바…….’
납득이 가긴 했다. 남학생이 태화처럼 수업시간에 깐죽거렸으면 진작에 두들겨 팼을 것이다.
그래도 놀으라는 소리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상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야 할 일이 떡하니 남아 있는데 놀 수는 없지. 그게 잘 풀리고 잘 끝나면 내가 알아서 놀 거고. 난 간다.”
“들어가. 난 좀 누워 있다가 가야겠다.”
도현이 잔디밭에 벌렁 드러누웠다.
“오늘은 기자들이 좀 늦게 오네. 그래도 또 찾아내겠지. 그때까지만 쉬련다.”
상호는 그를 쳐다보다가 돌아서며 한 마디 했다.
“나한텐 형이 제일 불쌍한 양반이야.”
“낄낄낄…….”
도현이 몸을 들썩이며 술 취한 웃음소리를 냈다. 상호는 그를 뒤로하고 주차장으로 향했다.
차에 타서 안전벨트를 꽂는데 옆쪽으로 기자들이 우르르 떼지어 달려갔다.
‘마법이라면 형이 알아낼 수 있을 텐데…… 정령이 말해 주는 건가. 귀신같이도 찾아내는구나.’
상호는 혀를 내두르며 핸들을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