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우웨에엑……. 멀미가…….”
지윤이 허리를 굽히고 구역질을 했다. 세희도 창백한 얼굴로 철푸덕 주저앉아서 지윤의 다리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세희가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는……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요…….”
“계속 해야지. 내일 수업할 때 또 해줄게.”
그때 지윤이 끙끙 앓던 것도 멈추고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내일 토요일인데요.”
상호는 말문이 턱 막혔다.
“……오늘 금요일이냐?”
시간이 벌써 그렇게 흘렀나. 분명 출석부를 봤는데 기억이 나질 않았다. 치매라도 걸린 기분이었다.
당황하는 그를 향해 지윤이 서운한 눈빛을 보냈다.
“저희가 말 안 했으면 오늘 소풍 준비도 잊었겠네요!”
“……미안.”
“그럼 내일 맛있는 거 사주세요!”
“뷔페. 뷔페 보내줄게. 그 주변에 유명한 곳 있더라.”
“진짜요?! 야, 태화야! 나빛아! 우리 내일 뷔페 간대!”
상호는 꺅꺅거리며 태화와 나빛에게 달려가는 지윤을 지켜보았다. 멀미는 이미 싹 사라진 듯했다.
***
벚꽃이 화사한 걸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그 아래 서면 아무리 못난 사람이라도 꽃을 따라 밝게 보인다. 그게 만약 한 창때의 소녀라면 더욱 그렇다. 어여쁘게 꾸민 네 명의 소녀들은 벚꽃이 핀 거리 어디를 가던 눈길을 끌었다.
물론 사람들이 그녀들을 보는 이유는 곱기만 해서가 아니었다.
뿔과 꼬리가 달린 소녀 때문도 아니었고, 회색 머리 소녀 때문도 아니었다.
그녀들이 달라붙는 한 청년 때문이었다.
“쌤! 똑바로 걸어요!”
“아니, 너희들 먼저 걸어가고 있으라니까…….”
“저희가 부끄러워요? 저흰 쌤 하나도 안 부끄러워요! 쌤보고 웃는 새끼 있으면 뿔로 박아 버릴게요!”
“네가 그러는 게 부끄러워…….”
상호는 한숨을 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벚꽃이 하늘하늘 떨어지는 공원. 길을 걷거나 풀밭에 앉은 사람들은 대부분이 연인이었다. 아이와 함께 온 부모들도 눈에 띄었다. 전체적으로 남자의 수가 적었다. 여자는 사진 찍는 걸 좋아해서 혼자서도 오고, 여럿이도 오는 모양이었다. 그냥 누워서 퍼질러 자는 아저씨도 있긴 했다. 그렇게 다양한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절름발이 애꾸에게 관심을 갖고 흘끔거리는 것은 남녀노소 모두가 같았다.
‘신경을 안 쓸 수가 없네.’
상호는 그냥 차에서 쉬려고 했지만, 아이들이 강제로 끌고 나와서 어쩔 수 없었다. 지금도 그녀들은 그를 가만히 내버려두질 않고 팔짱까지 끼며 옆에서 함께 걷도록 했다.
한 명만 있어도 눈에 띄는데, 눈에 띄는 소녀들 넷이 끌고 가니 이목이 끌리는 정도가 차원이 달랐다. 이미 그런 시선에 익숙한 상호도 버티기 힘들 정도였다.
“얘들아, 선생님 다리 아파서 못 걷겠다. 너희끼리 구경하고 차로 와, 응?”
“그럼 제가 업고 갈게요!”
“안 돼, 안 돼.”
결국 상호는 옆으로 떨어져 나와 잔디밭에 주저앉았다. 지윤이 미련이 남는지 아쉬워하며 그의 손을 당겼다.
“조금만 더 가면 이 공원 사진 명소 있어요. 거기서 같이 한 장만 찍어요, 네?”
“명소면 사람 많이 있는 거 아냐? 사진 찍기 힘들잖아. 그냥 그 명소에 너희끼리 찍고 와. 그 다음에 나랑 여기서 찍고.”
“힝……. 그럼 빨리 갔다 올게요.”
아이들은 하나같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길을 걸어갔다. 그 모습을 보자 상호는 심장이 따끔거렸지만. 사진명소에 있을 그 수많은 인파의 시선을 도저히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여기도 이렇게 많은데, 명소는 대체 얼마나 많을지…… 끔찍하네.’
잔디밭에 앉은 후부터는 사람들의 시선이 몰려들지 않았다. 그때서야 상호는 벚꽃의 색과 모양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예쁘긴 하네.’
주변을 둘러보던 그의 시야에 한 쌍의 남녀가 들어왔다.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돗자리를 폈다. 남자는 모자를 푹 눌러썼고, 여자는 평범하지만 순하고 부드러운 인상이었다.
함께 왔지만 살짝 어색한 분위기인 것이 아직 연인은 아니고 썸을 타는 듯했다.
사내가 손을 들자 그 위의 나무에서 벚꽃잎이 우수수 떨어져 낭만적인 광경을 만들었다. 허공섭물이었다.
상호는 그 사내를 가만히 지켜보다가 실소를 터트렸다.
‘그럼 그렇지. 바쁘긴 개뿔이…….’
그는 사내를 놀려줄 생각으로 그쪽을 향해 기를 뻗었다.
그물처럼 뻗어나간 기운은 남녀의 곁에 떨어지는 수백 개의 꽃잎을 그 자리에 정지시켰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남자가 당황해하자 상호는 입꼬리가 스멀스멀 올라갔다.
‘그러게 누가 구라치래.’
상호는 잡아놓은 꽃잎을 한데 모아 사내의 머리 위에 쏟아부었다. 사내는 머리 위로 손을 휘저어 꽃잎을 날리고는 화가 잔뜩 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내와 상호의 눈이 마주쳤다.
사내의 입에서 당황성이 튀어나왔다.
“엇?!”
“왜요? 아는 분이에요?”
“아, 아니…… 신경 안 쓰셔도 돼요. 하하…….”
훤하게 생긴 사내는 상호를 연신 흘끔거리며 여인을 향해 웃었다.
상호는 그 사내, 서도현을 보며 잔디에 누워 머리를 받쳤다.
도현은 그에게 연인 될 사람을 들킨 것이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가장 최근에 통화했을 때는 협회 일 힘들고 바쁘다고 그렇게 한탄을 했는데, 이렇게 놀고 먹는 것을 보였으니 그럴 법도 했다.
두 남자가 놀리고 놀림받는데, 여인이 도현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귀에 꽃잎 붙었어요.”
손이 지나간 자리는 벚꽃이 아니라 봉선화라도 묻었던 듯 발그레하게 물들어 있었다.
“제일 강한 헌터라면서 꽃잎 하나 못 막으시네요.”
“아, 아하하…….”
귀뿐만 아니라 얼굴 전체가 달아오른 도현은 머리 대신 애꿎은 모자만 긁으며 멋쩍어했다.
그때 상호를 향해 누군가들이 달려왔다.
“쌤! 딱 대요!”
당연히 아이들이었다.
“한 명이랑 한 번씩! 그리고 마지막에 단체샷!”
“꽃 따 왔어요! 이거 귀에 꽂으세요.”
“얘들아, 잠깐만…….”
멀리에서 도현이 실실 웃고 있는 것이 보였다. 상호는 필사적으로 그의 귓등에 벛꽃 가지를 꽂으려는 아이들을 밀어냈다.
“진짜, 진짜! 어허, 선생님 화낸다!”
“짠!”
한쪽도 아니고 양쪽에. 흐드러지게 핀 벚꽃 가지가 떡하니 꽂혔다.
거울을 안 봐도 어떤 꼴일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상호는 시뻘개진 얼굴을 양손으로 가렸다.
‘……죽고 싶다!’
자신의 과거를 아는 사람에게 이런 모습을 들키다니. 쪽팔려서 얼굴이 터질 것 같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이들은 핸드폰을 들어 그와 사진을 찍었다.
“손 떼주세요~. 아이, 한번만 찍어요~.”
“저희도 꽃 꽂을게요. 그럼 되잖아요~.”
“미안하다, 얘들아……. 제발…….”
“그럼 이대로 찍고 꽃 없이 한 번 더 찍는 거예요!”
“차라리 그럴게. 이거 좀 빼고 찍자…….”
결국은 꽃이 있는 버전과 없는 버전으로 한 명당 두 장씩, 맘에 드는 사진이 나올 때까지 찍었다.
마지막 순번인 나빛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 핸드폰을 가지지 못한 그녀의 손에는 상호의 핸드폰이 대신 들려 있었다.
“이 정도면 된 것 같아요.”
나빛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상호는 꽃을 던져버렸다.
이제 마지막으로 다섯이서 단체사진을 찍어야 했다. 지윤이 핸드폰을 들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누구한테 찍어 달라고 해야겠는데…….”
태화가 그게 뭐 별거냐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쌤이 조종해서 찍으면 되는거 아냐?”
“에이, 보면서 찍어야지. 아무리 쌤이라도 그거는 못하지…….”
그 때 도현이 다가와 지윤에게 손을 내밀었다.
“줘봐요. 내가 찍어 줄게.”
“네? 아, 네…… 감사합니다!”
지윤이 도현에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그 때 그녀의 손에서 반지가 반짝거렸다. 상호는 도현의 시선이 그곳에 고정되는 것을 보았다.
‘용케 기억했네.’
반지에 관한 이야기는 도현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도현이 아는 것은 예현여고에 성철의 딸이 있다는 사실과, 성철이 끼고 다니던 결혼반지의 모양뿐이었다.
밋밋해서 잘 보지 않으면 헷갈릴 만한데도, 전우의 것이라서 쉬이 알아본 듯했다.
도현은 핸드폰을 받아들고 잠시 지윤을 바라보다가 씩 웃으며 뒤로 물러났다.
“선생님 옆에 서렴. 예쁘게 찍어 줄게.”
“네.”
지윤이 잰걸음으로 뛰어와 상호의 왼쪽에 붙었다.
그걸 본 세희가 쏜샅같이 오른쪽에 붙자 태화가 화를 냈다.
“야! 여우년아! 제일 좋은 자리는 지가 다 먹…… 꼬, 꼬리 잡지 마! 남들 볼 땐 잡지 말라고 했지!”
“태화야, 그냥 빨리 찍자.”
“힝, 나만 맨날 그래, 쌤 미워…….”
“빨리 찍고 자리 바꿔서 찍자.”
“넹.”
그와 아이들은 일렬로 서서 포즈를 잡았다.
상호는 핸드폰을 든 채로 입꼬리를 실룩거리는 도현을 노려보았다.
“거 빨리 찍읍시다.”
“알았어, 알았어. 찍습니다. 하나, 둘, 셋…….”
그때 저 멀리에서 일단의 무리가 카메라를 들고 달려왔다. 기자들이었다.
처음에는 벚꽃을 찍으려나 싶었지만, 알고 보니 전부 도현을 향해 똑바로 달려오고 있었다. 도현은 당황하며 상호를 향해 지윤의 핸드폰을 던졌다.
“어이, 아저씨! 받아!”
상호는 혀를 차며 핸드폰을 잡았다.
‘또 시작이구만.’
도현은 모자를 푹 눌러쓴 채로 순식간에 쌩하니 달아났다. 기자들은 플래시부터 무작정 터트리며 그 뒤를 쫓았다.
“서도현 헌터님! 인터뷰 한 번만!”
“무공 이름이 뭡니까? 말해 주세요!”
“협회장님과의 불화설에 대해서 한 말씀만……!”
그중 몇 사람은 상호와 아이들을 향해 뛰어왔다. 도현과 함께 있던 것을 본 모양이었다.
“서도현 헌터님과 아는 사이십니까?”
“그 핸드폰 혹시 보여주실 수 있을까요?”
“헌터신가 본데 헌터증 한 번만 보여주시면 안 될까요?”
이런 식이다.
X급 헌터는 절대로 평범한 삶을 살 수 없다.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고, 지나가는 길마다 민폐를 남긴다. 도현도 그걸 알기에 이렇게 탁 트인 공공장소에서는 상호에게 아는 척을 못 하고 아저씨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누구 건 줄 알고 핸드폰을 달라고 하는 걸까. 남의 신상은 왜 캐내려는 걸까.
상호는 기자들의 무례함에 속으로 이를 갈았지만 겉으로는 사람 좋게 웃었다.
“모르는 분입니다. 핸드폰은 우리 애 거고요. 헌터증 정도는 보여 드리겠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크흠.”
기자들은 그가 지갑에서 꺼낸 B급 헌터증을 보고는 실망에 빠졌다.
“에이, 뭐야. 그냥 도현 헌터나 쫓아갈걸…….”
“설마…… 신원보호 받은 저승부대원 아닐까요?”
“바보냐? 누가 B급을 받아? S급 A급을 받지.”
상호는 꿍시렁대며 돌아서는 그들을 보고 쓰게 웃었다. 바보처럼 살아야 사람을 속일 수 있는 법이다.
그에게는 다른 부대원들보다 더 신분을 열심히 숨겨야 할 이유가 있었다. 다리 때문에. 만약 저승부대원이었다는 걸 들키기라도 한다면 그날로 인생 종치는 것이었다. 도망을 칠 수가 없으니까.
도현이 저렇게 고생하는 걸 보면, X급 안 받기를 정말로 잘했다는 생각이 들수밖에 없었다.
그는 도현이 도망치느라 내버려둔 여인에게 다가가 물었다.
“남자친구가 바쁘신가 보죠?”
여인은 씩 웃었다.
“남자친구 아니에요. 헤어졌거든요. 방금.”
“……으음.”
썸이 깨진 모양이었다.
상호는 여인이 돗자리를 챙겨 떠나는 것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제일 강한 헌터지만, 꽃잎이 오는 것도 가는 것도 막을 수 없는 처량한 신세.
‘또 밤에 술 마시자고 불러내겠구만.’
누구를 위한 삶인가
“왜 더 안 드세요?”
지윤이 묻자 상호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옆에는 이미 접시가 대여섯 개 쌓여 있었다. 지윤은 그 탑에 하나를 더 추가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시고 싶은 거 있으시면 말하세요. 가져다 드릴게요.”
“난 됐어. 배 채웠다.”
상호는 손사래를 치며 뷔페의 한쪽 구석을 곁눈질로 살폈다.
외딴 창가 자리에 예약석이라고 쓰인 팻말이 놓여 있었다. 의자는 두 개.
지윤이 밥을 한 시간씩 먹고 점심 시간이 다 지났는데도, 그 자리에는 주인이 오지 않았다. 그냥 늦게 오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상호에겐 그 예약석이 꼭 도현의 자리 같아서 마음이 편치 못했다.
그가 계산을 마치고 아이들과 가게를 나가는 순간까지도, 예약석 두 자리는 덩그렇게 빈 채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