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학년이었어.”
건흠은 눈물자국이 남은 얼굴로 담벼락 너머 허공을 바라보았다.
“돈이 없었지. 가족이 없으니까. 중학교 성적이 좋아서 등록금은 면제받았지만 1학년까지였어. 그래서 누구보다도 열심히 했지. 내가 특별히 신경을 써주진 못했지만…… 다혜는 혼자서도 실력이 쑥쑥 늘었어.”
상호는 잠자코 들었다.
“그런데 열심히 하는 것만으로는 되지 않더라. 결국 연말 학년평가에서 14등을 했고…… 2학년 등록금을 면제받지 못한 거야. 나는 대출을 받으면 된다고 설명해 줬지만…….”
건흠이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된 걸 보니…… 아마 빚을 지는 게 무서웠나 봐.”
“그렇겠지요. 한두 푼은 아니고, 어릴 땐 특히 그러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내 돈으로라도 내 주는 건데.”
그는 못내 원망스러워하는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의문이 들어. 왜 제일 행복해져야 할 사람이 행복해지지 못하는 건지.”
상호는 검을 짚은 손에 힘을 주었다. 왼쪽 다리가 미친 듯이 욱신거렸다.
그가 알기로 세상에서 가장 고결한 사람도 끝끝내 행복해지지 못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상호와 건흠은 잠시 말없이 바람을 느꼈다.
건흠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자네가 학교에 온 것도 11월이었지?”
“예.”
“뭔가 관련이 있나?”
상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혜처럼 죽는 아이가 없었으면 해서…… 선생이 되려고 마음먹었습니다.”
“꼭 내가 못났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건흠은 말은 그렇게 하지만 부정적인 감정은 없어 보였다.
“강 선생은 자신 있나? 아이들을 강하게 키울 수 있나?”
“있습니다.”
“얼마나?”
상호는 말없이 운동장 너머의 산을 가리켰다.
그가 검지를 살짝 비틀자 산 정상에 있는 나무가 뚝 부러져 넘어갔다.
건흠은 그 모습을 보고 잠시 말을 잃었다.
“……B급이 아니었군. 역시 설명회 때 그건…… 특별한 능력이 아니라 그냥 내공으로 한 거였나.”
“그렇죠.”
상호의 검을 짚은 손 위에 건흠이 손을 얹었다.
“다들 낙하산이라고 그러던데. 자네 큰 오해를 받으면서 살고 있구만.”
“별로 신경 안 씁니다. 애초에 제가 자초한 일이라서. 그렇게 살고 싶으니까 이러는 거죠. 다른 사람들한텐 말하지 말아 주세요.”
“그래야지. 자네 없었으면 앞으로도 계속 기다리기만…… 잠깐.”
건흠은 말을 하다 말고 상호를 돌아보았다.
“궁금한 게 있는데…… 자네도 다혜가 죽은 걸 확인한 건 아니지?”
상호는 눈을 끔뻑였다.
“……예.”
“그럼 됐어.”
건흠은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도 계속 기다릴 거야. 아니, 내가 직접 찾아봐야겠군.”
“……그렇습니까.”
확실히 상호도 다혜가 죽은 것을 직접 본 것은 아니다. 그 사건은 시체가 마구 훼손되고 몬스터들에게 잡아먹혔기에 정확히 누가 죽었는지, 몇 명이 행방불명 되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정황상 전원 사망했을 것이라 결론지어졌을 뿐이었다.
기적이 일어난다면 살아 돌아올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반 년이 되어가는 지금 그럴 확률은 낮았다.
그 사실을 건흠이라고 모르지는 않을 터였다.
하지만 그래도, 아무리 가능성이 낮더라도.
당연히 제자가 살아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필요하시면 저도 돕겠습니다.”
“고마워.”
상호는 건흠의 엷은 웃음을 확인하고 계단을 향해 돌아섰다.
동시에 그의 마음속에 결의가 끓어올랐다. 다혜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적어도 세희와 태화만은 반드시 10등 안에 집어넣고 말겠다고.
우리 쌤 완전 싫어해
“상호 씨~.”
“음?”
복도를 걷던 상호는 뒤를 돌아보았다. 설미가 그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그녀가 앞까지 오기를 기다렸다.
“왜요?”
“그냥, 걷다가 보여서. 오늘 인사 못했잖…… 어머.”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이렇게 폭삭 늙었어?”
“……그래요?”
그는 당황하며 턱을 쓸었다. 면도를 덜 했나. 그건 아니었다.
설미가 호들갑을 떨며 그의 얼굴을 살폈다. 볼을 잡아당기고, 이마에 손을 얹고.
“요즘 또 힘든 거 있어?”
“많이 그래 보여요?”
“응. 가뜩이나 지팡이 짚는 노인 같은데…….”
그 정도인가. 상호는 머리를 긁적였다.
요즘 이런저런 일이 많긴 했다. 애들 네 명 가르친 지 한 달밖에 안 됐는데.
다른 선생들은 이걸 어떻게 하나 싶을 정도였다. 아무리 전투를 제외한 교과가 중학교 수준이고 필기시험도 왜 있나 싶을 정도로 대충 친다지만, 혼자서 몇 과목을 쉬는 교시 없이 쌩으로 풀타임을 달려야 한다는 게 정말 노동과 다름없었다. 거기에 대련까지.
전쟁에서 남들보다 갑절은 힘들게 굴러봤음에도, 아이들 한 명 한 명에게 온 신경을 쏟다 보니 몸에도 마음에도 피로가 가득 쌓였다.
“좀 정신없긴 해요.”
“아프면 병가 쓰면 되는 거 알지? 눈치보인다고 앓지 말고.”
“알죠. 아니 어린애 아니라니까…….”
“늙은애야, 늙은애. 꺄하핫!”
설미는 그의 등을 팡팡 두드리고 먼저 가 버렸다. 상호는 침음하며 반으로 걸어갔다.
‘꼴랑 두 살 많으면서…….’
그렇게 투덜거리는데, 반에서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발과 검의 소리를 죽이며 반으로 다가갔다. 요즘에는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를 엿듣는 것이 인생에 몇 안 남은 낙이었다.
“강쌤 어떠셔? 반 옮긴 거 후회 안 해?”
모르는 목소리였다. 상호는 고개를 기웃하며 문 옆의 벽에 등을 기댔다.
말하는 것을 보니 아마 지윤의 친구인 모양이었다.
또 모르는 목소리들이 거들었다.
“귤쌤이랑 비교하면 어때?”
“잘 가르치셔? 착해?”
“음…….”
지윤이 곰곰이 고민했다.
“후회는 안 해. 확실한 이유가 있어서 옮긴 거라……, 뭐, 규리 쌤은 규리 쌤이고 상호 쌤은 상호 쌤 아니겠어?”
“그럼, 만족이야?”
“만족……하지? 아무래도 우린 넷이니까. 많이 챙겨주셔. 주말에도 만나서 미트 들어주시고…….”
“밥도 사준당~.”
지윤과 친구들의 대화에 태화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상호는 한숨을 쉬었다.
‘소문내지 말라니까.’
그래도 알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 주말마다 그와 학생들이 차 타고 밖에 나갔다 온다는 걸.
다른 반 아이들도 별로 놀라지 않는 눈치였다.
“으아, 좋겠다. 귤쌤! 나도 맛있는 거 사줘요오!”
“난 강쌤이 사줬으면 좋겠어. 엄청 자상하다며. 아, 낮에는 귤쌤 수업 듣고 저녁엔 강쌤 개인교습 받고 싶다…….”
“그럼 너희도 우리 반 올래?”
지윤이 키득거리며 묻자 태화와 세희가 동시에 중얼거렸다. 한겨울 칼바람보다 싸늘한 목소리로.
“안 돼.”
“절대 안 돼.”
그 쌀쌀맞은 반응에 지윤은 당황했다.
“응? 어…… 왜? 우리 쌤 좋잖아…….”
“지윤이 너는 모르나 본데……. 우리 쌤 원래 개빡세.”
세상 진지한 목소리였다.
상호는 태화가 장난으로 말하는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어지는 세희의 말을 듣고는 그녀들이 장난을 치는 게 맞는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내가 중학교 때부터 아끼는 칼이라고 하니까 물건에 정 붙이지 말라면서 바로 부숴버리시고…….”
“나 치마 줄이니까 당장 안 늘려오면 옷 다 찢어버린다면서 화내고…….”
“수업할 때 맘에 안 드시니까 나빛이 머리 몇 번이고 후려치시고…….”
그는 가슴을 퍽퍽 두드렸다.
‘내가 언제 그랬어!’
말이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조금씩만 바꿔 말하는데 순식간에 인간쓰레기가 완성되어 버렸다.
지윤의 친구들이 당황하며 물었다.
“어머, 머리를? 강쌤 그렇게 안 봤는데…….”
“진짜야?”
“응.”
나빛이 밝게 대답했다. 아마 헤실헤실 웃고 있으리라.
“주말에는 나랑 지윤이 앞에서 여자친구 때리셨어. 물건도 막 부수시고…….”
믿었던 나빛마저 화룡점정을 찍어버린다. 상호는 그대로 주저앉고 싶었다.
‘나한텐 여자도 아니고 친구도 아니라고…… 그리고 너희 앞에서는 안 그랬잖아…….’
“지윤이 너도 봤잖아.”
“어…… 음……, 틀린 말은 아니지만…….”
지윤이 혼란스러워하는 틈을 타 태화가 쐐기를 박았다.
“그러니까 우리 반 오지 마. 너희 상상이랑 완전 달라. 난 솔직히 후회중이야.”
“으응……, 근데 의외네, 진짜…….”
“우리는 얼굴은 무서워도 의외로 잘 웃으셔서, 되게 자상한 분인 줄 알았는 데…….”
“그거 다 쌤이 직접 퍼트린 소문이야.”
“엑, 진짜?”
‘진짜겠니……?’
얼마나 쓰레기로 만들 셈인가. 상호는 다른 반 학생들의 발소리를 듣고 천장으로 도망칠 준비를 했다.
“와, 신기하네……. 어머, 야. 시계 봐. 지윤아, 우리 갈게.”
“응, 이따 봐.”
“빠이~.”
아이들이 교실 문을 열고 빠져나갔다. 상호는 아래로 지나가는 아이들을 내려다보며 속으로 한탄했다. 안 그래도 여자들 소문 빠른데, 대체 어떤 후폭풍이 몰아칠지 가늠이 안 됐다.
그가 바닥에 착지해서 교실로 들어가려는데, 지윤이 뚱한 목소리로 물었다.
“너희 쌤 싫어해?”
“아니.”
“좋아서 이러는 거지.”
세희와 태화는 간만에 맘이 맞는다는 듯 차례대로 척척 대답했다. 태화가 지윤에게 핀잔을 날렸다.
“너는 쌤 주변에 쌤 좋다는 여자애들 막 몰려왔으면 좋겠어?”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반이 좀 시끌벅적해지는 게 좋지 않아? 쌤도 자주 그러시잖아. 넷은 너무 휑하다고.”
“난 넷이 좋은데? 세희, 나빛. 너희는 사람 많은 게 좋아?”
“아니. 난 지금이 딱이야.”
“나도 조용한 게 좋아. 헤헤.”
지윤은 못내 아쉬운 듯했다.
“그래도 한두 명은 더 받을 수도 있지…….”
“네가 아까 그랬잖아. 넷이라서 쌤이 미트도 들어 주고 그런다고. 근데 다른 애들 들어와서 다섯 되고 여섯 되면, 쌤이 걔들 봐주느라 우리 못 봐주면, 우리만 손해인 거야! 넌 그래도 좋아?”
“아니…… 그건 아니지.”
그녀도 수긍한 모양이었다.
“근데 너희는 어쩌다 쌤 반으로 왔어? 나야 쌤이 아빠 친구라고 알려줘서 온 거지만…… 너희는 처음부터 쌤 반으로 온 거잖아.”
“그렇지.”
“어떤 점이 좋았어?”
상호는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제일 먼저 태화가 입을 열었다.
“난 잘생겨서.”
“……너답네. 세희는?”
“난…….”
세희는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강해 보여서. 그때 선생님이 검으로 바닥 치셨잖아. 그거 보고 엄청 강하다고 생각했거든. 나랑 같은 검사인 것도 맘에 들었고…… 부상당하신 걸 그대로 놔두는 것도 뭔가 맘에 들었어. 경험 많은 베테랑 같아서……. 특히 우리 어릴 때면 몰라도 요즘은 선생님처럼 다친 채로 사는 사람 별로 없잖아.
그게 특이해서…… 끌렸던 것 같아.”
태화가 피식 웃었다.
“사연 많은 남자 좋아하는 스타일?”
“좋아하는 거랑은 상관 없거든?!”
“근데 말이 돼?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쌤은 B급이잖아. 사실은 너도 그냥 쌤이 좋아서 온 거 아냐?”
“처, 처음 봤을 땐 안 그랬어! 진짜로 강해 보여서…….”
“처음 봤을 땐? 그 말은 지금은 그렇다는 거네?”
“아니……!”
“응~ 니도 얼빠야~.”
“그, 그리고, B급은! 다치셨으니까 등급이 내려간 줄 알고 신경 안 쓴 거야!
내가 니 같은 줄 알아?!”
“지랄~ 변명~ 부들부들~.”
지윤은 투닥거리는 둘을 내버려두고 나빛에게 물었다.
“나빛이 너는?”
“나는 엄한 선생님한테 인정받고 싶어서…….”
“다들 왜 골랐는지를 이야기하네. 내가 잘못 질문했나 보다. 왜 선생님 좋아해? 뭐 태화는 이미 대답한 것 같고.”
“어…….”
세희와 나빛이 당황했다.
“그냥…… 잘해주시잖아.”
“그냥이 어딨어. 나부터 말해 봐? 나는 쌤이 결혼반지 줬어.”
“뭐?!”
세희, 태화, 심지어 나빛까지 놀라서는 우당탕 소리를 냈다.
“뭐야, 뭐야? 이거? 진짜야?”
“이거 저번에 그거잖아. 선생님이 끼고 계셨던…….”
“커플링이야?”
“아니, 푸흐흣…….”
지윤의 목소리가 아련해졌다.
“우리 아빠 유품이야. 가족 놔두고 전쟁하러 간…….”
교실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상호는 팔짱을 낀 채로 고개를 푹 숙이고 그녀의 말을 들었다.
“나는 원래 아빠 싫어했었거든. 가족 버린 줄 알고. 근데 쌤이 이거 주면서 알려줬어.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가족 이야기만 하셨대……. 덕분에 아빠를 더 이상 미워하지 않게 됐고…… 내가 해야 할 일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됐어. 난 그거 때문이야. 너희는?”
“나는 그냥 첫날에…… 상담할 때 느낌이 왔어.”
세희였다.
“다른 선생님들하고는 달랐어. 그냥 학생으로 대하는 게 아니라…… 날 위해 시간도 가르침도 아낌없이 내어 주려고 하셨고, 무엇보다 내가 포기하지 않으면 선생님도 포기 안 한다고 하시는 게…… 좋았어. 여태 그런 선생님을 본 적이 없었거든. 중학교 때 선생님들은 나쁜 분들은 아니었지만, 한 명 한 명 챙겨주시지는 않았으니까.”
“네~ 천세희 양의 사연 잘 들었…… 끄응.”
태화의 말이 갑자기 끊겼다. 꼬리를 잡힌 모양이었다.
지윤이 물었다.
“나빛이는?”
“나? 나는…… 헤헤, 나쁜 사람만 아니면 다 좋아.”
“맥빠지게 하지 말고! 난 봤어. 너 그분한테 대답할 때 어디 보는지.”
상호는 나빛이 효은의 질문에 대답할 때 자신을 봤던 것을 떠올렸다. 지윤도 그 옆에 있었다.
나빛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게…… 으음……, 선생님이 나 때문에 우리 아빠한테 화내셨대. 그걸 들었을 때 느낀 것 같아.”
“엥? 아버지한테? 왜?”
“부모님은 내가 치유 전형으로 가신 줄 아셨거든. 엄마는 지금도 그렇게 알고 계시고……. 그러다 옷에 흙이 묻어서 아빠한테 들켰었는데, 아빠가 학교가지 말라는 거야.
그래서 그때 하루 종일 울었어. 이제 못 보는 줄 알고……. 근데 또 다음날에 아빠가 학교 가도 된다고 하시는 거야. 나중에 듣게 된 건데 선생님이 아빠한테 화내면서 부탁하셨대. 꼭 가르치고 싶다고…….”
상호는 진땀을 흘렸다.
‘내가 화를 냈었나?’
지윤은 아직 이해가 안 되는 게 있는 듯했다.
“못 만나게 돼서 울었다며. 그럼 그 전부터 좋아했다는 거 아냐?”
“그런가? 근데 너희도 알잖아. 선생님은 그냥 딱 봐도 좋은 사람인 거…….”
나빛이 웃었다.
상호는 그 말을 듣고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자신은 네 명 챙기기가 힘들어서 골골대며 미안해하고 있는데, 아이들은 잘 챙겨 준다면서 좋아하는 게 퍽 공교로웠다.
뭔가 부끄럽기도 했다.
‘슬슬 들어가야지…….’
시간이 꽤 늦었다. 상호는 문을 열었다.
그가 안으로 들어서자 아이들이 화들짝 놀라며 몸을 움찔했다.
“서, 선생님?”
“어? 칼 소리 안 들렸는데…….”
‘아차.’
칼로 땅 두드리면서 와야 하는데. 깜빡하고 소리를 지어내지 못했다. 상호는 최대한 태연한 표정으로 교탁 앞에 섰다.
“왜 그리 놀라? 뭐 비밀 이야기라도 했어?”
“네. 쌤이 주말에 여자친구 때린 거 이야기하고 있었어요.”
태화가 방글 웃었다.
“막 물건도 부수고 대단했다는데…… 진짜예요?”
“아니. 그런 적은 없는데.”
“나빛이가 말해준 건데요. 얘는 거짓말 안해요.”
“다른 건 부정 안 하겠다만 여자친구는 아니야.”
상호는 그렇게 일축하며 교과서를 폈다.
“자. 책 펴자. 시험은 망쳐도 되지만 도덕은 알아야 한다.”
“선생님.”
“응?”
그가 고개를 들자 지윤이 씩 웃었다.
“저희 주말에 다같이 놀러가면 안 돼요? 나빛이도요.”
태화도 음흉하게 웃고 있고, 나빛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세희만은 별반응 없이 눈만 깜빡였다. 노는 걸 별로 안 좋아하니까.
상호는 그 표정들을 보고 깨달았다.
대화를 엿들은 것을 들켰음을.
그리고 그가 그 사실을 알리는 걸 부끄러워하고 있다는 것까지도.
“……하루쯤은 괜찮을 것도 같고. 근데 어디로?”
“벚꽃이요. 저희끼리 나들이 한번 가요.”
주말쯤 되면 딱 좋게 피었을 때다. 상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풍 정도면 뭐, 선생으로서 막 눈치 보이는 일도 아니고…….’
“그래. 금요일 저녁에 준비해서 토요일 점심에 가자. 그럼 되지?”
“네!”
“아싸~!”
아이들은 뛸 듯이 기뻐하며 난리를 피웠다. 상호도 오랜만에 마음이 좀 가벼워지는 듯했다.
그는 교과서의 내용을 확인하고는 서둘러 칠판을 향해 돌아섰다.
자꾸 아이들이 한 이야기가 생각나서 자꾸만 입꼬리가 올라가는 탓이었다.
‘자꾸 웃네, 이거. 큰일났네…….’
물칠판에 비친 그의 얼굴은 참으로 헤프게 웃고 있었다.
꽃피는 봄이 와도
대련 수업은 성과가 좋았다.
아이들은 목걸이가 걸려 있을 때만은 진심으로 공격하고 죽기살기로 피하게 되었다. 물론 상호에게는 이제야 기본을 가르쳤을 뿐이지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틀은 확실히 잡혔다.
그리고 오늘, 그 한 걸음을 가르치는 중이었다.
“오늘은 보법 가르쳐 줄 거야.”
상호의 말에 세희와 지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들의 뒤쪽에서는 태화가 마법 명중 연습을 하고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나빛도 다양한 모양의 방어막을 만들으려 낑낑거렸다.
저 둘은 혼자서도 연습할 거리를 주었지만, 무예가인 세희와 지윤에게는 아직 그런 게 없었다. 칼 휘두르고 주먹 휘두르는 건 평소에도 충분히 해왔으니까.
이제 줄 예정이었다.
“중학교에서 보법 배우나? 너희는 보법이라고 하면 뭐를 뜻하는 거 같아?”
“달리는 방법이요.”
“어느 근육에 얼만큼 내공을 집중하는지, 또 어떻게 뛰는지 정리한 거요.”
지윤에 이어 세희가 대답했다.
대충 맞는 말이었다. 상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보법에서 제일 중요한 건?”
“다리 근육이요.”
“정확히 어디?”
“허벅지…… 대퇴근?”
지윤이 잘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상호는 양 주먹을 앞으로 들어올렸다.
“경우에 따라 달라. 너희가 마법사랑 싸운다면 일단 빠르고 강한 도약력이 필요하겠지. 그래야 이렇게 확 달려들어서 공격할 기회를 잡을 수 있으니까. 그럴 땐 네 말이 맞아. 폭발적인 에너지를 내는 대퇴근에 집중해야지.”
상호는 한쪽 손만 움직여 다른 손을 쳤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만약 무예가 대 무예가라면? 그것도 너희처럼 아직 내공이 적어서 원거리 공격 수단이 없다면? 어차피 이 둘은 맞붙게 되어 있어.”
그의 양 주먹이 서로를 향해 다가가 부딪혔다.
“그럴 때 굳이 빠르게 달려야 할까? 빠르게 달릴수록 몸을 제어하기 힘들어지 는데?”
“빠르면 불리해지는 건가요?”
세희가 당황하며 물었다. 속도광다운 질문이었다.
상호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가 반응할 수 없는 거리에서는 빠를수록 좋지만, 상대가 반응할 수 있는 거리에서는 빠를수록 나쁘다. 보법이란 건 상대가 반응할 수 없는 거리까지 어떻게 다가가느냐야. 높이 뛰어오르는 것, 공중에 뜨는 것, 도약한 상태에서 방향을 꺾어 뛰는 것, 상대의 뒤를 잡는 것. 그 모든 보법의 이유가 그거야.”
“그 과정에서는 속도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씀이세요?”
“전투만 생각한다면 그렇지. 뭐 옆에서 동료나 민간인이 위험에 빠졌다면 그 땐 그냥 빨리 달려들어서 결판을 내야겠지만. 자. 속도가 중요하지 않다면 뭐가 중요할까?”
“상대를 보고 유연하게 대처하는 거요.”
“그러려면 어디에 내공을 줘야 하지?”
“어…….”
세희는 답을 찾는 듯이 다리를 이러저리 꼼지락거렸다.
그녀가 그러는 동안 지윤이 번쩍 손을 들었다.
“발이요! 특히 엄지발가락.”
“잘 아네. 누가 가르쳐줬어?”
“흐흐, 복싱에서도 엄지발가락 쪽으로 계속 뛰게 시키거든요.”
“정확히는 발가락 쪽 잔근육들이지.”
상호는 그녀들과 눈을 마주쳤다.
“오늘부터 발가락 운동 해. 줄넘기를 하든, 발끝으로 걷든. 할 수 있으면 외줄타기가 제일 좋은데…… 다치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방법을 찾아봐. 그렇게 잔근육을 키워야 정확히 어디에 내공을 넣을지 느낄 수 있게 되니까.”
“그거 하고 나면 진짜 보법 가르쳐주실 건가요?”
“아니. 보법은 지금.”
그가 말을 끝내자마자 지윤이 세희의 뒤로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세희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움직인 지윤도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엥?”
“내가 너희 몸을 직접 움직여 줄 테니까, 어느 근육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발걸음 폭이 어떻게 되는지 느껴 봐.”
이번엔 세희가 지윤에게서 훌쩍 뛰어 멀어지더니 지그재그로 천방지축 뛰어다니며 다시 다가왔다. 세희의 눈이 핑핑 돌았다.
“서, 선생님. 이거 어지럽…….”
“어쩔 수 없어. 선생님 다리가 이래서 보여줄 수가 없다……. 느낌에 잘 집중해. 자주 해줄 순 없으니까.”
상호는 그녀들을 향해 손을 들어올린 채였다.
검이나 인형처럼 간단한 물건은 눈동자로 보기만 해도 조종할 수 있었지만, 인간의 다리는 관절이 많아서 그러기 힘들었다. 대충 조종했다간 접질리는 건 예사요, 뼈가 부러질 수도 있었다.
아무리 그가 내공이 많고 기를 잘 다뤄도, 사람을 다치지 않도록 조종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것도 동시에 둘을.
“간다.”
그의 말과 동시에 세희와 지윤의 몸이 제멋대로 뛰기 시작했다.
“으으아아아악! 쌤! 빠른 게 중요한 게 아니라면서요!”
“그 정도 속도엔 익숙해져야지.”
“서, 선생님. 너무 빨라서 순서를 못 외우겠어요…….”
“몸에 새기는 거야. 외우려고 하지 말고 다리에 집중해.”
“아이고……!”
두 아이는 상호의 앞에서 흙먼지가 일도록 달리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