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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타고 학교로 돌아가는 와중에, 나빛이 상호의 어깨를 두드렸다.
“선생님.”
“응?”
“나효은 수녀님하고는 어떻게 아는 사이세요?”
“아…….”
지윤은 알지만 나빛은 모른다. 상호는 적당히 얼버무렸다.
“친구의 친구야.”
“혹시 지윤이네 아버지요?”
“응.”
“친구는 아닌 거예요?”
“절대 아니지.”
“정말요?”
그녀가 씩 웃었다.
“그런데 꼭 남매 같아 보였어요.”
“쿨럭…….”
상호는 가슴에 갑자기 뭔가 확 걸려서 헛기침을 했다. 사레가 들릴 지경이었다.
그는 잔기침을 몇 번 더 하고는 나빛을 돌아보았다.
“걔가 너한테 뭐라고 했어?”
그 말에 나빛은 투명한 연회색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았다.
“선생님은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세상에서 제일 걱정되게 만드는 말이었다.
“……그래.”
상호는 더 묻지 않고 몸을 돌려 차창 밖을 쳐다보았다.
효은이 물었던 것. 술, 담배, 게임. 다 중독과 관련된 요소였다. 그리고 아마 사랑까지도.
그리고 전투신관은 추천할 만한 길이 아니라는 것 같고.
효은의 백발은 그녀가 강해서고, 나빛의 연회색 머리카락은 아직 약하기 때문이라면.
술담배를 하는 이유가 따로 있는 거라면.
‘성력이 강해질수록 백발이 많아지고, 백발이 많아지면 뭔가 문제가 생긴다.
그걸 막아주는 게…… 중독인가.’
원리는 모르겠지만, 정리는 되었다. 효은도 아마 알아차려 주기를 바라고 단서들을 흘렸으리라.
‘중독……. 나빛이한테 술담배를 시킬 수는 없고.’
상호는 다시 나빛을 돌아보았다.
나빛은 계속 그를 바라보고 있었는지, 그가 고개를 돌리자마자 눈을 마주쳤다. 그녀는 말없이 웃었다.
그녀에게 전투신관의 길을 걷게 하는 게 맞을까.
나빛은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만, 최강의 전투신관인 효은은 자신의 길을 따라 오지 않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이 문제는 상호보다 효은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어떡하지…….’
상호는 차가 달리는 내내 고민을 멈출 수가 없었다.
당장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스스로를 달래도, 도저히 근심이 끊이 지를 않았다. 어떻게 걱정을 안 할 수 있을까.
이 천사같은 아이를.
제자를 기다리며
월요일. 4월 첫 수업.
“엣헴~, 오늘은 내가 선생이다~.”
“나와, 인마.”
상호는 출석부 모서리로 교탁 앞에 선 태화의 정수리를 톡 건드렸다. 그러자 그녀가 경기를 일으키며 몸을 웅크렸다.
“모, 모서리! 또 모서리이이!”
“앗, 미안. 그래도 아프진 않잖아.”
“만우절 그냥 지난 것도 서러운데! 이젠 맞기까지 해! 어헝헝헝…….”
“아, 그러네. 토요일이 만우절이었구나.”
어릴 땐 알았지만 전쟁 후로는 신경쓴 적이 없었다. 상호는 잘 기억나지도 않는 전쟁 전의 삶을 떠올렸다. 만우절이면 꼭 선생을 대상으로 장난을 치던 학생들.
태화가 한숨을 푹 쉬었다.
“쌤 놀래킬려고 완~전 쫙쫙 달라붙는 살색 반쫄바지 샀는데…….”
“그걸 어따 써?”
“그거 입고 만나자마자 치마를 확! 까버리면!”
“……그런 거 했다가는 쌤 진짜로 심장마비 걸린다.”
상호는 출석부를 폈다.
손은 출석란에 체크를 했지만, 눈은 계속 나빛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효은을 만났던 날 이후로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녀는 근심 걱정 없는 말끔한 얼굴로 환하게 웃고 있었다.
‘저게 진짜인지, 가짜인지…….’
그는 출석부를 덮으며 조례를 마쳤다.
“……이제 수업하자. 옷 갈아입고. 나빛이는 잠깐 얘기 좀 해.”
“네.”
나빛도 예상하고 있었는지 특별한 반응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화와 세희가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묻지는 않았다.
상호는 따라나온 나빛을 복도 구석으로 데려갔다. 둘은 창가에 기대어 가까이에서 눈을 마주쳤다.
“나빛아.”
“네.”
이름은 불렀지만, 어떻게 물어봐야 할지는 정하지 못했다. 효은과의 대화는 이미 물어봤다가 퇴짜를 맞았었으니까.
“선생님한테 뭔가 바라는 거 있어?”
그 말에 나빛은 얼른 답하지 못했다. 입술을 뗐다가 붙였다가, 말을 하려는 듯 말 듯 하고는, 이윽고 언제나처럼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저 목표가 생겼어요.”
“뭔데?”
“기숙사 들어와서 사는 거예요.”
상호는 말문이 막혔다. 그녀의 부모님이라면 절대로 허락하지 않을 게 뻔했다.
아이 곁에 경호를 두고. 세상 물에 물들지 말라고 핸드폰도 안 주는데, 집을 벗어나 기숙사에 살게 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나빛은 확언하듯 말했다. 꼭 그렇게 만들고 말겠다는 것처럼.
“올해 안에 꼭 전투 1등해서, 그걸로 부모님 설득해 볼게요.”
“전투? 전투 유형 1등으로? 치유 말고?”
“네. 그래야 제가 강하다는 걸 아실 테니까요. 치유 유형 1등은 중학교 때 많이 하기도 했고.”
“기숙사에 들어오고 싶은 이유가 있어?”
“기숙사에 살면…….”
나빛이 부끄러운 듯 손을 꼼지락거리며 헤실거렸다.
“친구들이랑 선생님…… 하루종일 볼 수 있잖아요.”
“그거면 돼?”
상호는 그녀의 뺨에 손을 얹고 살짝 들어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도록 했다.
전투로 1등을 하겠다는 말은, 전투신관이 되겠다는 것.
“정말 그거면 되는 거야? 아무 문제 없어?”
“네.”
나빛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면 아무 문제 없어요. 선생님도 제 걱정 전혀 안 하셔도 돼요.”
“……그래.”
네가 그렇다면야. 상호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그녀의 뺨을 놓았다.
“선생님한테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지 이야기해. 뭐든 들어줄게.”
“아, 저 그러면…… 소원권 쓸래요.”
갑자기 나빛이 손뼉을 치며 그에게 바싹 다가왔다. 상호는 일전에 아이들에게 소원권을 하나씩 주었던 것을 떠올렸다.
“응, 말해.”
“지금 이 순간부터…….”
나빛은 잠시 고민하다가 말을 이었다.
“단둘이 있을 땐, 손 잡아 주세요.”
“손?”
상호는 당황했다.
“그게 소원이야?”
“네.”
“으음…….”
한두 번은 잡겠지만, 누군가가 그걸 계속 보게 되면 곤란할 터였다.
하지만 토요일에 효은과의 일들을 떠올리니 안 들어 줄 수도 없었다. 나빛이 말하는 것은 전부 들어줘야 했다.
상호는 살짝 망설이다가 나빛의 손을 잡았다. 작고 고운 손은 그의 손에 쏙 들어와 감싸여졌다.
“이러면 돼?”
“네. 이렇게 계속……. 잡고 있어 주세요.”
나빛이 그의 손을 잡은 채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침 햇빛이 그녀의 얼굴로 쏟아졌다.
밝은 빛을 받으니 연회색 눈동자와 머리카락이 더 하얗게 보였다.
‘속눈썹도 희끗희끗하네…….’
꼭 햇살에 녹아내릴 것 같다고 생각하며, 상호는 나빛의 손을 잡은 채로 가만히 서 있었다.
그들은 아이들이 옷을 다 갈아입고 걸어나오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손을 잡았다.
***
“세희야. 자.”
운동장으로 나온 상호는 늘 그래왔듯 세희에게 자신의 검을 내밀었다. 그러자세희가 쭈뼛쭈뼛거리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선생님, 저 검 새로 받아 주신다고…….”
“……아차.”
분명 목요일에 새 검을 주겠다고 했는데, 깜빡 잊고 말았다. 효은과 나빛의 일에 온통 정신이 팔린 탓이었다.
많이 기대하고 있었을 텐데.
상호는 당황하며 뒤통수를 긁었다.
‘젠장, 네 명도 이렇게 챙기기 힘든데 어떻게 30명 40명을 챙기는 거지?’
“미안해. 미안해. 선생님이 정신이 없었어……. 지금 가지러 갈까?”
“네.”
세희의 얼굴이 환해졌다.
상호는 아이들을 잠깐 놀게 하고 세희와 함께 별관으로 향했다. 별관 3층에 쇠창살이 처진 구역이 보였다.
그게 바로 무기 보관소였다. 제법 삼엄한 방범 시스템과 마법으로 보호된 곳.
무기는 위험하기도 하고, 비싸기도 한 만큼 그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하고 있었다.
수업시간이라 별관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들은 조용한 복도와 계단을 걸어 보관소까지 이르렀다.
그는 문을 두드리며 외쳤다.
“교사 강상호입니다.”
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리고, 수위복을 입은 중년 남자가 고개를 내밀었다.
중년 수위는 허리에 짧은 검을 차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상호와 세희를 향했다.
“아, 강 선생님인가. 학생 무기 때문에?”
“예. 칼 좀 찾으러 왔습니다.”
“들어와, 들어와.”
수위는 문을 활짝 열고 그들을 들여 주었다.
안에는 온갖 종류의 병기가 두세 개씩 보관대에 세워져 있었다. 제일 많은 것은 도검과 창. 망치와 철퇴 같은 비주류 물건들도 있기는 있었다. 여학생들의 경우 둔기는 잘 배우지 않으려 했지만.
상호와 세희는 검이 놓인 곳으로 안내받았다. 상호는 자신의 검과 길이가 비슷한 검을 집어들었다.
“이게 네가 원래 쓰던 길이네. 써 봐.”
세희가 그 검을 받아 뽑아들었다.
그녀는 사람이 없는 쪽으로 돌아서서 검을 몇 차례 휘둘러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로 할게요.”
“좀 더 안 봐도 괜찮겠어?”
“튼튼한 것 같아요. 어차피 검이란 건…… 튼튼하고 길이만 맞으면 되고, 나머지는 적응해야 하는 거잖아요.”
“맞아.”
상호는 씩 웃었다.
그는 세희가 쥔 검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그녀가 이전에 쓰던 검과는 모양도, 품질도 확연히 달랐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세희가 전에 쓰던 검은 중학교에서 준 싸구려 가검이고, 지금 받은 검은 국내 최고의 사립학교에서 품질을 일일이 검수하고 납품받는 물건이었다.
그래도 가검인 것은 마찬가지여서 좋은 검이라 하기엔 민망했지만, 어쨌든 훨씬 튼튼하고 모양이 좋았다.
그런데 익숙한 기분이 들었다.
“……선생님?”
세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를 불렀지만, 상호는 그녀의 검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곧 그는 그 검을 어디서 봤는지 기억해냈다. 처음으로 검을 가르쳐줬던 소녀의 검.
당연한 일이었다. 같은 예현여고니까.
그런데 또 이상한 것은, 분명 같은 검이고 기분은 익숙한데 무언가 이질감이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수위님. 이 검…… 원래 자루감기가 이런 모양입니까?”
상호는 세희가 쥔 검의 손잡이를 가리켰다. 정확히는 그 손잡이에 감긴 천을.
자루감기는 칼을 휘두르다 미끄러지지 말라고 손잡이에 천이나 가죽을 일정한 모양으로 감는 것. 일본 검에서 자주 쓰는 방식이었지만, 없는 것보단 있는 게 좀 더 나았기에 개벽 후 발달된 한국 검에서도 차용해서 쓰고 있었다.
수위가 머리를 긁적였다.
“뭐 문제가 있나?”
“아니요, 똑같은 검을 본 적이 있는데 그때는 모양이 달랐던 것 같아서…….”
“아니, 그게 바뀐 적은 없는데……. 아! 혹시 주 선생님 반 아이를 본 거 아냐?”
“……예?”
상호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수위가 허허 웃고는 말을 이었다.
“주건흠 선생님 말이야. 자꾸 이게 아니라면서 자루감기를 다시 하시거든. 제대로 묶어야 안 미끄러진다나 뭐라나……. 그래서 그 반 아이들은 다 주 선생님 방식대로 자루감기가 되어 있지. 뭐 자네도 알잖아? 나이 든 사람 고집부리는 거…….”
“……그렇군요.”
상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살짝 놀랐지만 그의 마음은 금방 다시 가라앉았다. 찾았으면 뭐 할 것인가.
최후를 아는데.
그래서 여태껏 딱히 찾지 않았다. 마음 속에 묻어놨을 뿐.
‘그래도 담임선생님한텐 이야기를 해 줘야겠지.’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세희는 상호가 왜 그러는지 궁금한 모양이었다. 그녀가 검을 칼집에 집어넣고는 몸을 살짝 숙이며 상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무슨 일 있으세요?”
“아니, 아니야. 별일 아냐.”
상호는 씩 웃어주고 수위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가보겠습니다.”
“벌써 가게? 온 김에 좀 더 구경하다 가지.”
“수업하다 온 거라서요. 애들이 기다려 가지고…….”
“허어……. 그럼 어쩔 수 없지.”
수위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들을 보내주었다.
상호는 세희와 함께 별관을 나서며 생각에 잠겼다. 만약 그 소녀가 건흠의 학생이 맞다면, 건흠은 소녀가 죽은 것을 모르고 있을 터였다. 학교 몰래 일하러 간다고 했으니.
그는 옆에서 걷는 세희를 내려다보았다.
아이들이 그 모르게 어디 가서 죽는다면.
그래서 하염없이 기다리다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면.
‘……마음이 무너질 것 같은데.’
과연 제자의 비보를 알려주는 게 옳은 일일까.
상호는 심란한 마음으로 세희와 함께 아이들에게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