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화 (30/501)

***

“쌤!”

상호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지윤이 링 위에서 손을 흔들었다. 손에는 글러브를 낀 채였다.

그녀의 말대로 체력단련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상호는 외투를 벗고 링 위로 올라서며 물었다.

“운동한 거야?”

“네!”

지윤의 옷은 이미 푹 젖어 있었다. 배를 드러내는 회색 민소매 상의와 살짝 펑퍼짐한 검정 트레이닝복 하의였다.

그녀는 땀이 흐르는 얼굴로 씩 웃다가 깜짝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앗, 저 설마 냄새나요?”

“아니, 딱히 안 나는데.”

상호는 권투선수들이 쓰는 펀칭미트를 손에 끼었다.

그리고 팔을 까딱였다.

“해 봐.”

지윤의 주먹이 미트를 향해 날아왔다.

상호는 그녀의 자세를 살폈다. 샌드백을 치던 때보다 많이 부드러워진 모습이었다. 미트가 그러라고 있는 물건이긴 하지만, 이젠 정해진 자세만 고집하지 않고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하고 있었다.

‘발이 살짝 아쉬운데…… 보법을 쉽게 가르쳐줄 수가 없구나.’

그는 지윤과 세희에게 보법을 어떻게 가르칠지 고민하며 미트를 대 주었다.

“후우. 잠시만요.”

지윤이 펀치를 날리다 말고 글러브를 벗었다.

그녀가 머리카락을 쓸어넘기자 땀이 뚝뚝 떨어졌다. 상호는 놀라서 물었다.

“안 더워?”

“더운데, 저는 땀 빼는 거 좋아해요.”

지윤은 손으로 뒷머리를 탈탈 털며 웃었다.

번들거리는 갈색 배에서 복근이 꿈틀거렸다. 상호는 살짝 감탄했다. 따지고 보면 아이들은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중학교 3학년이었는데, 이 정도로 육체가 단련되어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넌 운동 하나는 진짜 많이 했나 보다.”

“히힛.”

그녀는 다시 글러브를 끼고 미트를 쳤다.

한 시간에 걸친 훈련이 끝나자 지윤은 혀를 빼물며 바닥에 벌렁 널브러졌다.

옷만 젖은 게 아니라 링 위에도 땀이 흥건할 정도였다.

“우와, 이제 진짜 못 하겠어요…….”

“많이 했어. 슬슬 쉬자.”

상호는 미트를 벗고 바닥에 앉았다.

그의 얼굴과 등에도 땀이 송골송골 맺힌 채였다. 그는 구석에 놓인 정수기의 냉수를 허공섭물로 떠서 가져왔다. 그 모습을 본 지윤이 허탈하게 웃었다.

“뭐야! 쌤 그걸로 대주면 되잖아요.”

“사람 느낌이 안 나잖아.”

제자의 훈련을 대충 도와줄 순 없는 법이다.

“그리고 나도 땀 빼는 거 좋아해.”

“그럼 나중에 같이 운동하실래요? 쌤 3대 몇이에요?”

“해본 적 없는데. 그런 건 내공 없이 재는 거야?”

“네, 그거는 순수하게 육체만 따지는 거니까요.”

그럼 해볼까, 상호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물을 들이키려다 멈칫했다.

그는 지윤에게 종이컵을 내밀었다.

“마셔.”

“쌤 먼저 드세요.”

“난 이미 가져왔어.”

그 말이 끝나자마자 상호의 다른 손에 물이 가득 든 종이컵이 도착했다.

지윤은 그 종이컵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런 거 하려면 얼마나 강해져야 해요?”

“이거는 내공만 많으면 할 수 있어.”

“쌤 내공 얼마나 많아요?”

“나는 좀 많은 편이지. 좀 특수한 환경에서 자랐다 보니까.”

지윤이 아무도 없는 실내를 굳이 한 번 더 쓱 훑어보고 상호의 옆으로 바짝 다가와 앉았다. 그녀가 속삭였다.

“저승부대라서요?”

“응.”

상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몬스터를 자주 죽인 헌터는 몬스터가 죽을 때 흘러나온 마나에 영향을 받아.

그래서 자주, 강한 놈을 죽일수록 헌터도 따라서 강해져. 특히 몸 안에 기를 쌓는 무예가들이 더하지.”

저승부대원들은 밤낮으로 몬스터들의 땅에서 몬스터들을 죽여댔다. 덕분에 마나가 풍부한 환경에서 호흡과 축기를 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저승부대원보다 똑똑하게 전투를 하는 사람은 이론적으로 존재할 수 있어도, 저승부대원보다 무력이 강한 사람은 절대로 존재할 수 없었다. 적어도 국내에서는.

지윤이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러면…… 저도 몬스터를 잡으면 빨리 강해질 수 있어요?”

상호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니, 아니야. 넌 아직은 안 돼.”

“에이, 지금 하겠다는 건 아니에요.”

지윤은 웃었지만, 상호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지윤아.”

“네?”

“절대, 절대로 담임선생님 허락 없이 몬스터 있는 곳에 가면 안 된다. 부모님이 허락해도 안 돼. 네가 얼마나 강한지 알고 있는 건 담임선생님뿐이야. 그러니까…… 네 담임이 내가 됐든 다른 사람이 됐든 간에…… 꼭 담임선생님한테 허락 맡고, 헌터 활동 시작해. 알겠지?”

지윤은 상호의 손이 떨리는 것을 느끼고는 당황했다.

“네, 그럴게요…….”

상호는 괜히 너무 심하게 걱정시켰나 싶어서 지윤의 손을 살짝 쓰다듬었다.

“지윤이 너 점심은? 친구들이랑 먹어?”

“약속은 없는데. 같이 드실래요?”

“잘됐다. 너도 같이 가자.”

“네? 어디요?”

지윤이 갸웃했다.

상호는 그저 웃었다.

“씻고 열두시에 보자. 나빛이랑 갈 거야.”

***

상호는 준비를 마친 지윤과 함께 교문 앞에서 기다렸다.

11시 59분이 되자 칼같이 차가 도착했다. 상당히 큰 대형 승용차였다.

뒷좌석 창문이 열리더니 나빛이 고개를 쏙 내밀었다.

“선생님!”

“응, 그래, 나빛아.”

“안녕!”

상호와 지윤은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 차로 다가갔다.

안에 타 보니 심히 안락하고 쾌적했다. 상호는 조수석에 앉아 벨트를 매며 운전석을 돌아보았다. 2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청년이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아마 나빛의 운전기사, 비서, 경호원. 뭐 그런 개념의 수행원이리라.

청년의 시선이 그를 흘끗하고는 다시 정면을 향했다.

뒷좌석에서 지윤이 나빛에게 물었다.

“우리 어디 가?”

“밥 먹고 선생님이랑 신앙회 구원교단 본부 갈 거야.”

“신앙회? 근데…… 운전하시는 분은 누구야? 오빠야?”

“아니, 삼촌.”

“삼촌이 운전을 해?”

“……헤헤.”

대답하기 곤란해지자 나빛은 웃어버렸다.

지윤은 이번엔 상호를 붙잡고 물었다.

“밥 먹는데 세희랑 태화는요? 왜 안 데려가요? 간만에 나빛이 주말에 왔는 데…….”

“원래 나빛이랑 둘만 가려고 했어. 너는 데려가도 될 것 같아서 데려가는 거야. 그…… 만나려는 인간이 좀…… 귀찮은 인간이라.”

상호는 대충 얼버무리고 나빛의 수행원에게 말했다.

“출발하십시다.”

***

“우와…….”

지윤이 식당에서 걸어나오며 상호를 올려다보았다.

“이렇게 맛있는 거 처음 먹어 봤어요.”

“나도 이렇게 비싼 음식은 처음 먹어 본다.”

상호는 메뉴판의 가격표를 떠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대충 계산해보니 한 그릇에 5만원. 그것도 쥐꼬리만한 양으로 여러 접시가 나왔다.

지윤은 계산을 마치고 뒤따라나온 나빛에게 물었다.

“넌 맨날 이런 거 먹어?”

“아니야, 나도 집에서는 엄마 밥 먹어. 오늘은 선생님이랑 먹으니까 그냥 특별히…….”

“어쨌든 잘 먹었어. 으아~.”

밥을 먹고 난 일행은 신앙회 구원교단의 본부로 향했다. 식당도 서울이고, 본부도 서울.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신앙회에는 두 가지 계파가 존재했다. 하나는 기독교의 형태를 띄는 구원교단. 또 하나는 불교의 형태를 띄는 대승종단.

둘 다 개벽 전의 버릇을 못 버려서 한쪽은 종단이고 한쪽은 교단이었다. 덕분에 짧게 불러도 구분은 되었다.

왜 이렇게 되었냐 하면, 분명히 계시가 내려오고 성력이 존재하는데, 어느 한쪽 종교만 계시를 받고 성력을 쓰게 된 게 아니라 모든 종교에서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이 출현했기 때문이었다.

한국은 그나마 종교의 가짓수가 적어서 정리가 쉬웠지만, 아주 개판이 된 나라도 많았다.

그래도 이전의 종교와 모양만 같을 뿐, 계시를 통해 신의 이름과 상징 등이 바뀌어 사실상은 다른 신을 모시는 다른 종교가 되었다. 이전의 기독교와 불교도 신앙회와는 분리된 채로 사회에서 잘만 번성하고 있었다.

“도착했습니다.”

나빛의 수행원이 말했다.

상호는 창밖의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신앙회 구원교단의 본부. 하늘을 찌를 듯 높고, 축구 경기장만큼 넓은 대성당의 모습이었다.

와 본 적은 없지만 들어 본 적은 있었다. 이 건물은 외부 건물이고, 안쪽에 또 거대한 건물이 있어서 그 바깥을 둥그렇게 감싸는 형태라고.

그는 나빛과 지윤을 돌아보았다.

“선생님 먼저 들어가서 이야기 좀 할게.”

“네.”

“지윤이 핸드폰 들고 왔지?”

“네.”

“오면 될 때 전화 걸 테니까 그때까지 놀고 있어. 카페에서 디저트 먹으면 딱 시간 되겠다.”

상호는 그렇게 말해두고 차에서 나왔다.

그가 검을 짚으며 대성당에 들어가자 사제복을 입은 중년 남자가 다가왔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나효은 헌터님 만나러 왔습니다.”

“아…… 효은 수녀님은 바쁘십니다. 좀 많이 기다리셔야 할 텐데…….”

“서도현이라는 이름으로 약속이 잡혀 있을 텐데요.”

상호의 말에 사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그 서도현이란 분이 괴렵협회 부협회장님이 아니라…….”

“네. 접니다.”

상호는 능청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도현에게 전화해서 도현의 이름으로 약속을 잡아 달라 했다. 강상호라는 이름으로 전화하면 안 만나줄 것 같아서.

사제가 돌아서며 말하다가 멈칫했다.

“이쪽으로 오십…… 아, 부축해 드리겠습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상호는 사제의 뒤를 따랐다.

그들은 안쪽으로, 안쪽으로 들어갔다. 어느 정도 걷고 나니 외부 건물과 내부 건물 사이의 중정이 나타났다.

중정 한가운데엔 외부 건물보단 좀 작은, 그러나 여전히 거대한 성당이 위치해 있었다.

사제는 그 안으로 들어가서 상호를 어느 방의 문으로 안내했다.

“이 안에 계십니다.”

“감사합니다.”

상호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리고 사제가 돌아서서 걸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검을 칼집째로 높이 들어올렸다.

꽈아아앙

휘두른 검에 문짝이 박살났다. 나무로 된 문의 잔해는 안쪽으로 날아가 나뒹굴었다.

폭음을 들은 사제가 깜짝 놀라 되돌아왔다.

“도, 도현 님? 이게 무슨 행패입니까? 대체…….”

상호는 그를 향해 손을 휘휘 내저었다.

방 안은 드넓은 예배당이었다. 반원형의 공간 중앙에 낮은 단이 있고, 그 뒤의 벽에 신앙회의 문양이 거대하게 박혀 있었다. 육각형 속 정십자선.

그 문양을 향해 여럿이 앉을 수 있는 예배용 의자가 빼곡히 늘어서 있었다.

상호는 정중앙 열의 맨 앞줄에 앉은 수녀를 노려보았다.

수녀가 고개를 돌려 그를 흘끗 쳐다보았다. 손에는 담배를 들고 있었다.

“……참나.”

꾀꼬리처럼 고운 목소리.

수녀가 혀를 차며 손을 들자 거대한 황금색 창이 예배당 중앙 허공에 나타났다.

나빛의 방어막과 완벽히 똑같은 색깔이었다. 다만 좀 더 짙고, 마치 불꽃과 같은 기운이 주변에 흘렀다.

“뒈지기 직전까진 오지 말라니까. 기어코 왔네. 그럼 뒈지기 직전으로 만들어줘야지.”

수녀가 손짓하자 성력으로 만든 창이 상호에게로 쇄도했다. 상호는 날아오는 성창을 보며 짧게 숨을 들이마셨다.

‘간만에 스트레스나 좀 풀어야겠다.’

그의 손이 검을 뽑았다.

천사

“씹새끼…….”

수녀의 코에서 피가 주륵 흘렀다.

그녀의 멱살을 잡고 있는 상호의 뺨도 퉁퉁 부어 있었다. 하나 남은 왼쪽 눈에도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 상호는 그 멍든 눈으로 수녀를 바라보았다. 머리를 가리고 있던 수녀의 베일은 다 찢어져 바닥에 떨어진 채였다.

새치가 섞인 검은 장발. 다크서클 진한 눈. 성형한 티가 전혀 안 나는 고운 얼굴. 그리고 끝단 여기저기가 찢어진 수녀복.

상호보다 한 살 더 많은, 저승부대 출신의 X급 헌터 전투신관. 나효은.

그녀가 상호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여자 때리니까 기분 좋냐? 막 느껴?”

“여자였어? 시바 몰랐네. 개껌딱지 절벽이라서.”

주변은 완전히 개박살이 나 있었다.

의자는 멀쩡한 물건을 찾기 힘들었고, 신앙회의 문양은 바닥에 떨어졌다. 알록달록한 유리창도 다 깨져서 바닥에 유리파편이 굴러다녔다.

예배당 입구에는 부서진 잔해가 쌓여, 바깥에서 사제와 수녀들이 들어오지 못하고 문만 두드리며 효은의 이름을 불렀다.

“효은 자매님!”

“수녀님! 무슨 일입니까? 괜찮으십니까?!”

효은은 그쪽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가슴팍을 두드렸다.

“닌 이게 절벽으로 보이냐? 눈깔이 없어?”

“뭔 개소리야, 내가 직접 봤었는데. 그거 뽕이잖아. 어떻게 수녀복 아래에도 뽕을 넣고 다니냐?”

“이게 뽕인지 아닌지 니가 어떻게 알아? 자랐는지 아닌지 어떻게 아냐고? 만져봤냐? 만지진 마, 죽여버린다.”

“지랄, 지는 치료한다면서 은근슬쩍 다 만져놓고는…….”

“그……! 건…… 큭.”

효은이 얼굴을 붉히며 이빨을 갈았다.

상호는 그녀의 멱살을 놓으며 검을 칼집에 집어넣었다. 그러면서 한심하다는 듯 푸념을 늘어놓았다.

“전쟁중에 남자는 고픈데 주변엔 아저씨들밖에 없고, 결국엔 맨날 치고박고 싸우던 한 살 어린 남자애 잘 때 몰래 들어와서는…….”

“너…… 아가리해.”

효은의 주변에 평범한 크기의 성창이 수십 개 나타났다.

“실수라고 했잖아!”

“존나 깜짝 놀랐다. 아침엔 침을 뱉더니 밤에는 침낭에 들어와선 외롭다고, 우리 사귀자고, 염병을 그냥…….”

상호는 고개를 살짝 숙여 날아오는 성창을 피했다. 효은이 터질 것처럼 시뻘건 얼굴로 소리쳤다.

“뭐, 씨발! 그땐 너랑 언니랑 그런 사이인 줄 몰랐다고!”

“이해는 해. 전쟁하다 보면 사람 병신되는 거 한순간이니까. 근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싸우던 인간이랑 사귀고 싶었냐? 그리고 그냥 갔으면 말도 안해, 내가 싫다고 하니까 뭐했냐? 형들이랑 누나들한테 내가 니 덮쳤다고 구라 깠잖아, 씨발년아!”

상호가 효은을 죽도록 싫어하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진 누나 대접은 해 줬지만, 그 후로는 인간이 아니라 쓰레기 취급을 하며 살아왔다. 효은이 그를 취급하는 것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효은은 성창을 거두고 그나마 멀쩡한 의자를 찾아 앉았다. 길쭉한 예배용 의자였다.

“개새끼, 언제적 이야기를 아직도……. 그래서, 뭐 때문에 온 거야? 나 패려고 왔냐?”

“내 제자한테 조언 좀 해.”

해줘, 도 아니고 해. 하지만 효은이 주목한 부분은 그게 아니었다.

“니가 제자가 있어? 걔가 나한테 조언을 왜 받아? 무예가일 거 아냐.”

“나 교사야. 애는 신앙인이고.”

효은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부릅떴다.

“니가 교……?!”

“시끄러. 이 말만 하면 왜 다들 난리인지 모르겠네. 나 교사야. 여고 남선생이라고. 애 네 명 가르치는 담임선생님이라고.”

“……말도 안 돼.”

그녀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상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리도 아프고 슬슬 좀 앉고 싶은데 멀쩡한 의자가 효은이 앉은 곳밖에 없었다.

결국 그는 효은의 옆에 털썩 앉았다. 그녀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째려보았다.

“안 꺼져?”

“니가 일어나. 니가 감히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나한테?”

상호는 왼쪽 바짓단을 살짝 들어올렸다. 시커멓게 타고 뒤틀린 발목이 드러났다.

그 발목을 본 효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살짝 등을 돌릴 뿐이었다.

“……흥.”

상호는 핸드폰을 꺼내 지윤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쌤.]

“디저트는 잘 먹었어?”

[네. 조각케이크 먹었어요. 선생님은 뭐 좋아해요? 녹차? 초코? 딸기? 치즈?]

“쌤은 안 먹어.”

[그래도 만나는 분 선물로 사 가면 좋잖아요.]

“아냐, 사오지 마. 필요 없…….”

“딸기.”

효은이 툭 뱉듯이 말했다.

상호는 핸드폰을 든 손을 멀리 쭉 뻗고 효은을 향해 위협적으로 혀를 찼다.

하지만 그 정도에 쫄 여자는 아니었다.

효은은 뻔뻔한 표정으로 눈썹을 치켜들었다.

“도와주지 마?”

결국 상호는 못마땅해하며 핸드폰을 다시 귀에 붙였다.

“……딸기로 사 줘.”

[네~. 그냥 성당 안으로 들어가면 돼요?]

“응. 도현이란 사람 어디로 갔냐고 하면 돼. 기다릴게.”

[금방 갈게요~.]

그 말을 끝으로 통화가 끊겼다.

상호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다가 효은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뭐야? 왜?”

“아니, 그냥. 목소리가 확 달라지네.”

효은은 고운 미간을 찡그렸다.

“제자들은 네가 어떤 인간인지 모르는가 봐?”

“너도 방송에선 내숭 엄청 떨잖아.”

“……쳇.”

효은의 손에는 어느새 담뱃갑이 들려 있었다. 수녀복 어디에 주머니가 달렸는지 모를 일이었다.

“근데 너, 다른 언니오빠들이랑은 연락 하냐?”

“도현이 형이랑은 계속 하고. 얼마 전에 민정이 누나도 만났고.”

“그래? 눈은 왜 아직도 안 고쳤냐?”

“왜?”

“왜는 뭐가 왜야? 고치는 게 정상이지……. 내가 계시를 받았어, 새끼야.

너 그러고 다니다 멀쩡한 눈도 찔려서 어버버하다가 죽는다고.”

“뒈지면 뒈지는 거지, 뭐.”

“고치고 싶으면 말해.”

상호의 몸이 얼어붙었다. 이 여자가 이런 여자가 아닌데.

“갑자기 왜 그래? 미쳤냐? 설마 또 그때처럼 갑자기 고백…….”

“지랄! 눈깔 때문에 뒈져가지고 귀신돼서 꿈에 나올까 봐 그런다. 걱정을 해줘도…….”

툴툴거리며 담배를 입에 문 그녀는 갑자기 자신의 몸을 더듬거리더니 인상을 확 썼다.

“아 씨……. 떨어졌나 보네.”

“뭐가?”

“야, 나 불 좀.”

효은이 그를 향해 얼굴을 들이밀었다. 청초한 얼굴에 물린 담배가 퍽 엽기적이었다.

상호는 눈살을 찌푸리며 검지를 들어 담배 끝에 붙였다.

“작작 펴.”

내공이 담배를 태우자 연기가 살짝 피어올랐다.

효은은 담배를 한 모금 쭉 빨더니, 상호의 얼굴에 연기를 뱉었다.

“조까세요.”

“이런 씨바…….”

상호는 이를 갈며 주먹을 들어올렸지만, 깔깔거리는 효은의 면상을 차마 때리진 못했다.

그는 손을 내리며 고개를 기우뚱했다.

‘얘가 원래 이렇게 웃었나?’

웃음소리가 유난히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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