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화 (28/501)

***

“상호 너 주량 좋다.”

“어으…….”

상호는 조수석에 앉아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살짝만 취한 상태에서 자리를 파하려 했는데, 설미가 잔 안 받으면 버리고 간다고 말하는 바람에 주는 대로 다 받아마셨다.

“아니 왜 이렇게 자꾸 줘요, 돌겠네…….”

“취한 거 볼라고 그랬지. 덜 취한 것 같긴 한데…… 취하기 전에 토할 것 같아서 그냥 그만 했어.”

“이미 취했어요. 끙……. 이 꼴로 어떻게 돌아다녀요…….”

“차에서 좀 쉬다 가.”

어느새 학교에 도착해 있었다.

설미는 주차장에 차를 대고 운전석에서 내렸다. 그녀는 가기 전에 상호에게 손을 흔들었다.

“내일 봐. 상호 씨.”

상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창 밖으로 밤하늘이 보였다. 핸드폰을 꺼내 보니 9시 50분이었다 기숙사의 학생 통금 시간은 10시.

‘10분만 쉬다 가면 되겠네…….’

그는 등받이를 뒤로 쭉 뉘이며 한숨을 쉬었다. 스스로의 숨에서 술 냄새가 진동을 했다.

설미와의 상담으로 생각은 정리했지만, 감정은 아직 남아 있었다. 아이들을 때렸다는 죄책감. 스스로에 대한 혐오감.

내일 세희와 나빛을 어떤 낯으로 봐야 할지.

상호가 몸을 뒤척이며 고민하는데, 누군가가 창문을 두드렸다.

“선생님.”

“으잉?”

상호는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창문 밖에서 세희가 그를 바라보았다. 트레이닝복 차림에 검을 들고 있었다.

“세희 너 그 검은 뭐야?”

“친구한테 빌렸어요. 수련하려고……. 괜찮으세요? 편찮아 보여요.”

세희가 차 문을 열고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녀는 차 안의 냄새를 맡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선생님 술 마셨어요?”

“엉, 조금…… 마셨다.”

상호는 고개를 푹 숙이고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아이들에게 취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 도의적인 문제가 아니라 그냥 미친 듯이 쪽팔렸다.

그런데 상호의 속에서 갑자기 뭔가 울컥하는 것이 있었다. 그는 손을 뻗어 세희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양손으로 감쌌다.

“세희야.”

“네.”

“미안하다…….”

상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진짜 미안해. 너한테도, 나빛이한테도…….”

“……괜찮아요.”

세희는 검을 내려놓고 그의 등을 다독여 주었다.

“저는 다 알고 있으니까, 저한텐 미안해하지 마세요.”

“미안하다…….”

“괜찮다니까요.”

“미안해…….”

세희가 상호의 입술에 검지를 갖다붙였다.

“선생님. 저 통금 시간이라 이만 갈게요.”

“아, 어, 그래……. 어서 들어가.”

“이거 하나만 알아 주세요.”

두 사람의 눈동자가 마주쳤다.

“선생님이 저 포기 안 하면, 저도 선생님 포기 안 한다는 거.”

“……아.”

“진짜 갈게요.”

세희는 그 말을 남기고 검을 집어든 후 이화관으로 들어갔다.

상호의 얼굴이 붉어졌다. 언제 했던 말인지 잘 기억이 안 났지만, 분명 세희에게 자신이 했던 말이었다.

사내가 약속해놓고 지키지 않으려 하다니.

상호는 조수석 대시보드에 머리를 박으며 한탄했다.

‘멍청한 새끼……. 했던 말도 기억 못하는…….’

손끝에 남은 세희의 온기가, 나빛을 때렸던 감각을 기억나지 않도록 덮어주고 있었다.

넌 좀 맞아라

‘……조졌네.’

상호는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설미의 차의 천장을 보며 생각했다.

햇살 쏟아지는 창문 너머로 새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아오, 머리가…….’

그는 신음을 흘리며 몸을 일으키고 핸드폰을 확인했다. 8시.

화장실 가고 세수 한 번 하고 바로 교실로 달려가야 할 시간이었다. 달릴 순없지만.

‘몸이 염병을 하네. 젠장, 나중에 똑같이 되돌려줘야지.’

상호는 투덜거리며 차 문을 열고 나갔다.

***

약간 늦었지만, 그는 교실로 빨리 갈 수가 없었다.

발이 느린 것도 있지만, 걸음이 쉽게 떼어지질 않았다. 도대체 어떻게 나빛이를 봐야 할지 걱정이었다.

상호는 교실 문 앞에서 멈춰섰다.

“선생님 왜 안 오시지?”

“아직도 화나셨나?”

“혹시…….”

나빛이 울먹였다.

“나 때문에 화나신 거야……?”

상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아니야…….’

마음이 답답했다. 그가 복도에서 가슴을 퍽퍽 치고 있는데, 안에서 세희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빛아, 잠깐 나와 봐. 할 이야기 있어.”

상호는 신속하게 천장을 향해 뛰었다.

그리곤 태화와 세희가 싸웠을 때처럼 천장에 찰싹 달라붙었다. 그가 숨을 죽이고 인기척을 없애자마자 세희와 나빛이 교실 뒷문을 열고 나왔다.

다른 반은 다 교실에서 조례를 하고 있었다. 세희는 복도를 둘러보며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빛에게 말했다.

“선생님 어제 술 드셨어.”

“응?”

나빛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위에서 듣던 상호는 하마터면 떨어질 뻔했다.

‘세희야……, 그거 소문내면 안 돼……!’

“술 드시고 차에 누워 계시더라. 그래서 인사드렸는데 내 손 잡고 우셨어. 나하고 너한테 미안하다고. 계속 사과하셨어.”

“정말?”

나빛의 얼굴빛이 환해졌다가 다시 어두워졌다.

“그럼 지금은 어디 계셔?”

“그건 모르지. 술 많이 드신 것 같던데. 아직 못 일어나셨을지도…….”

세희가 나빛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어쨌든 그러니까, 선생님 오시면 웃어드려. 네가 그러고 있으면 선생님 더 슬퍼하시잖아.”

“……응.”

나빛이 헤헤 웃었다. 그 웃음소리를 듣자 상호의 마음 한켠이 아려왔다.

곧 세희가 나빛의 어깨를 감싸고 반으로 들어갔다.

태화와 지윤이 놀리는 소리가 들렸다.

“둘이 뭐했냐? 고백했냐?”

“뭔 이야길 그렇게 몰래 해?”

“몰라도 돼. 우리만 알 거야.”

세희는 그렇게 대답했다.

상호가 슬슬 천장에서 내려오려고 하는데, 안에서 태화가 말했다.

“야, 우리 몰카하자.”

“몰카? 그러다 선생님 진짜로 화나면 어떡해?”

“오늘 아니면 언제 하겠냐? 쌤 늦을 때 해봐야지. 이런 기회 쉽게 안 온다?”

“어떻게 하게?”

“나빛이 안 온 척 하자. 나빛아. 저기 좀 숨어 봐.”

아이들이 우당탕거리며 뭔가를 했다. 바닥에 내려온 상호는 소리가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적당히 안쪽이 정리되었을 때쯤, 검으로 바닥을 두드렸다. 일정한 속도로.

“야, 야. 쌤 온다. 빨리 앉아.”

상호는 한숨 뜸을 들이고 교실 문을 열었다.

책상 네 개에 학생 세 명. 세희와 태화, 지윤이 그와 눈을 마주쳤다.

그는 시선은 아이들에게 고정한 채로 주변에 주의를 기울였다. 나빛이 숨을만한 곳은 청소도구함뿐이었다.

‘속아…… 줘야겠지.’

상호는 교탁 앞에 서서 출석부를 폈다.

그리고 모르는 척 나지막이 물었다.

“나빛이는?”

“학교 안 왔어요.”

지윤이 걱정스러운 척 목소리를 지어냈다. 세희도 거들었다.

“어제 종례 때 울었는데…….”

“에이, 그렇다고 학교를 안 와? 뭐 사고라도 난 거 아냐?”

태화도 능청스럽게 말했다. 은근슬쩍 상호가 나빛을 걱정하도록 만들려는 듯했다.

그런데 그 때. 청소도구함이 갑자기 덜컹 흔들렸다.

모두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으음.”

속아 주려고 해도 안되는구나. 상호는 침음하며 청소도구함으로 다가갔다.

문을 열어보니 나빛이 가방과 함께 쪼그려 앉아 있었다.

둘의 눈이 마주쳤다.

“짜…….”

그녀가 얼굴 양옆으로 손을 펼치며 어색하게 웃었다.

“짜잔~, 헤헤…….”

아기와 까꿍거리며 놀듯 얼굴 옆에 펼친 손이, 꼭 꽃받침처럼 보였다. 꽃보다 화사한 미소까지 더해서.

‘……눈부시다.’

상호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서, 선생님. 울어요?”

“아니, 먼지가 들어가서.”

그는 눈시울을 꾹꾹 눌러 진정시키고 나빛의 손을 잡아 일으켜 주었다.

그러고 나서 뒤를 돌아보자 아이들이 웃고 있었다. 늘 그랬듯이.

상호는 얼굴을 문지르며 숨을 한 번 깊게 내쉬고 교탁으로 돌아왔다.

“수업하자.”

그의 입가에도 엷은 웃음이 떠올랐다.

***

“마각초살포!”

거창한 이름을 호탕하게 소리쳤지만, 막상 나가는 것은 손가락만한 보라색 에너지 덩어리였다.

광선은 운동장에 상호가 그려놓은 원에서 한참 멀리 떨어진 곳에 착탄했다.

태화는 고개를 들어 빗나간 것을 확인하고는 신경질적으로 발을 굴렀다.

“까비!”

“뭐가 아까워? 하나도 안 아깝구만.”

상호는 세희에게 검을 넘겨주며 혀를 찼다.

“계속 연습해. 한 번 맞췄다고 끝이 아니야. ……그런데 세희야.”

“네?”

그의 검을 받아든 세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상호는 어젯밤에 그녀가 친구에게 검을 빌렸다고 했던 것을 떠올렸다.

“어젯밤에 검술 수련했어?”

“아…….”

그 말에 세희는 찔리는 것이 있었는지 우물쭈물해했다.

“……네. 친구한테 빌렸어요.”

“지금 몸무게 몇이야?”

“42요…….”

43킬로그램을 찍기 전까진 검을 압수하겠다 했는데. 친구 검까지 빌려서 수련을 한다니.

상호는 순간 말문이 막혀 버렸다.

‘진짜 중독인가……?’

상담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제 중간평가를 위해 연습을 해야 하는데 검을 안 줄 수도 없었다.

상호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학교에 말해서 새 검 받아올게.”

세희가 눈을 반짝였다.

“정말요?”

“응. 대신 앞으로도 계속 잘 먹어.”

“네!”

상호는 씩씩하게 대답하는 세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좋은 칼을 사주고 싶지만, 아직 학생이니 가검을 쓰는 것이 맞고, 비싼 물건을 사주는 것은 교육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좋지 않았다.

세희가 그의 검을 뽑아들며 물었다.

“태화는 저거 할 거고…… 그럼 저는 지윤이랑 또 싸워요?”

“아니.”

상호는 그녀에게 목걸이를 내밀었다. 보호 아티팩트였다.

다른 것들과 똑같이 생겼지만, 초록색 보석 안쪽에 미묘하게 검푸른 색이 보였다.

상호의 강기와 똑같은 색이었다.

특별히 주문한, 강화 보호 아티팩트.

“오늘은 나랑 싸울 거야. 예전에 네 검 압수했던 날처럼. 발 안 떼고 상체만 움직여서. 기억나지?”

세희는 그 말을 듣고 불안한 눈빛으로 검을 내려다보았다.

상호는 그녀가 어제의 일을 떠올리는 줄 알고 안심시키려 했다.

“어제처럼 찔리진 않을 거니까 걱정하지 마.”

“그게 아니라…… 이거 선생님 검이잖아요.”

세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는 그 검의 원래 주인이 누구였는지 알고 있었다.

“제가 썼다가 부러지면 어떡해요…….”

“내가 안 부러트리면 되지 뭐. 그리고 난 오늘 칼 없이 하려고.”

그는 소매를 걷었다.

“자, 들어와.”

그 말에 세희는 준비동작 없이 바로 검을 휘둘렀다. 상호의 목에 시퍼런 빛이 날아왔다.

그는 오른손을 들어 검지로 검을 막았다.

간단히 막았지만 세희는 놀라지 않고 침착하게 다시 검을 찔렀다. 상호의 가슴팍을 향해서.

어제보다는 좀 더 깊숙이 찌르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애들은 확실히 잘 배우는구나…….’

상호는 세희의 시선이 자신의 오른손에 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왼손으로 몰래 기의 탄환을 쏘아냈다.

퍼억

“윽!”

세희는 검을 휘두르다가 어깨에 기탄을 맞고 움찔했다.

상호는 어리둥절해하는 그녀를 보며 웃었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모르겠지?”

“네.”

“시야가 좁아서 그래. 계속해 봐.”

세희는 다시 검을 휘둘렀다가, 또 어디선가 날아온 기탄에 복부를 얻어맞았다.

그녀는 혼란에 빠져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어? 어?”

“신기하지? 분명 코앞에서 보고 있는데.”

“……네.”

“눈의 초점이 맞는 곳만 집중하지 말고, 다른 곳도 관찰하고 있어야 해. 마음의 눈으로.”

“그…… 그걸 어떻게 해요?”

“모르면 맞으면서 배워야지 뭐.”

상호는 왼손으로 딱 소리를 내고는 오른손으로 몰래 지탄을 날렸다. 세희의 뺨에 지탄이 톡 소리를 내며 부딪혔다.

또 낚여버린 세희는 멍하니 뺨을 문지르다가 고개를 흔들며 정신을 차렸다.

“다시, 다시 해요.”

“그래.”

상호는 다시 손을 들어 세희의 찌르기를 막았다.

그렇게 신나게 싸우고 있는데, 갑자기 나빛이 기뻐하며 그를 불렀다.

“선생님! 선생님! 이것 좀 보세요!”

상호와 세희는 나빛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상호는 그런 와중에도 세희의 빈틈을 노리고 이마에 딱밤을 날렸다.

따악

“아얏…….”

“나빛아, 뭐가?”

“이거요!”

나빛이 가리킨 곳에는 삼각형 모양의 방어막이 떠 있었다. 방어막은 그녀의 손짓을 따라 위아래로 오르내렸다.

방어막은 아주 날카로운 예각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모서리로 치면 꽤 아플 것 같았다. 상호는 씩 웃었다.

“잘했어. 이제 그걸로 한번 나 공격해 봐.”

“어…….”

나빛은 당황하더니 그를 향해 느리게 손짓했다.

방어막은 굼벵이처럼 느리게 날아와서 그의 어깨를 살포시 누르고 떨어졌다.

머리도 아니고 어깨를. 때린 것도 아니고 눌러서. 모서리도 아니고 평평한 곳으로.

상호는 이마를 짚었다.

‘이게 공격이냐…….’

“……잘했어. 대신 좀 더 빠르게. 그리고 모서리로 치면 더 좋을 것 같다.”

“모서리는 너무 아프잖아요…….”

이젠 눈앞이 캄캄해진다. 상호는 한숨을 푹 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그건…… 내일 연습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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