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화 (22/501)

***

“……오늘도 고생했다.”

상호는 초췌해진 몰골으로 종례를 시작했다. 얼굴이 반쪽이 되어 있었다. 아이들이 쉬지 않고 기습할 틈을 노려서.

무슨 생각으로 이 고생스러운 일을 자처한 건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분명 공격에 익숙해지라고 시작한 건데…….’

그런 의도였는데, 아이들은 너무 신나게 즐기고 있었다. 등 뒤에서 노리고, 머리 위에서 노리고. 교탁 밑에서 노리고.

다행히 공격을 허용한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하도 피곤해서 눈만 감으면 뒤로 넘어가 버릴 것 같았다.

상호는 한숨을 푹 쉬었다.

‘오늘은 업무도 봐야 하는데…….’

나빛이 그를 보며 측은한 눈빛을 보냈다.

“선생님이 제일 고생하신 것 같아요.”

“아니야. 내가 하자고 한 건데 뭐.”

학생 가르치는 일이니 피곤해도 어쩔 수 없다. 상호는 눈을 비비고 교탁에 손을 올렸다.

“조심히 들어가.”

“네.”

“안녕히 계세요~.”

다행히 종례를 마치고 난 후에는 그를 건드릴 생각이 없는 듯했다. 상호는 터덜터덜 걸어 교무실로 들어갔다.

오늘은 업무가 있어 퇴근이 늦는 날이었다. 그동안의 수업 내용과 앞으로의 수업 계획을 정리해서 전산으로 보고하고, 곧 있을 학교 행사들에 대해 검토하는 일이었다.

전자는 혼자 하는 일이었지만, 후자는 같이 작업할 사람이 있었다.

“상호 씨. 왜 이렇게 피곤해 보여?”

설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상호는 자신의 자리에 앉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별 것 아니에요. 그냥…….”

그는 대답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책상 아래에 뭔가가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누군가가.

상호는 허리를 숙여 아래를 확인하다가 세희와 정통으로 눈을 마주쳤다.

“…….”

“…….”

상호의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왜 니가 여기 있냐…….’

상호는 몸을 일으켰다.

주변에선 다들 조용히 일을 하고 있고, 설미는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책상 밑에서 여학생을 내보냈다가는 미친놈 취급을 받을 것이 뻔했다.

그는 태연한 척 의자를 당겨 책상 앞에 앉았다.

“무슨 일 있어? 상호 씨?”

“아뇨. 괜찮아요.”

상호는 설미에게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하며 컴퓨터를 켰다.

그리고 남들에게 보이지 않도록 종이에 연필로 글자를 적어 책상 아래로 가져갔다.

-왜 여기까지 왔어?

세희는 종이와 연필을 받아 답장을 적었다.

-죄송해요…

-세희야, 나 교무실에선 막내야……. 대체 언제 들어온 거야?

-진짜 죄송해요…

-일단 조용히 있어.

상호는 설미를 돌아보았다.

“선생님, 커피 드실래요?”

“응? 나 원래 믹스 잘 안 먹는데…… 상호 씨가 타 주면 한번 먹어 볼래.”

설미의 대답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교무실 한쪽 구석에는 정수기와 믹스커피 박스, 그리고 주전부리용 과자가 비치되어 있었다. 상호는 뜨거운 물 두 컵을 받아서 하나에는 커피를 타고, 하나에는 녹차를 탔다. 그리고 과자도 넉넉히 집어 자리로 돌아왔다.

상호가 커피를 건네자 설미가 씩 웃었다.

“고마워.”

그녀는 곧 다시 일에 집중했다.

상호는 설미에게 보이지 않도록 몰래 책상 아래로 쪽지와 함께 녹차를 건네주었다.

-오늘 일이 많아서 좀 오래 걸릴 거야.

과자는 그냥 주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날 것 같았다. 그래서 껍질을 까서 내밀었다.

세희가 그의 손에 있는 과자를 받아먹었다. 손으로 집어들지 않고 입으로 바로.

꼭 어린 강아지에게 간식을 주는 것 같았다.

-더 먹고 싶으면 오른발 눌러. 할 말 있으면 무릎 누르고.

그가 쪽지를 보여주자 세희가 그의 종아리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상호는 이제 슬슬 업무에 집중하기로 했다.

‘야근할 것 같은데. 얘를 언제 내보내지…….’

***

안 좋은 예감은 왜 항상 이리도 잘 들어맞는지.

종례를 4시에 하고 바로 교무실에 들어왔는데 7시가 되도록 퇴근하는 사람이 없었다. 저녁을 먹으러 갈 법도 한데, 다들 그냥 일을 끝내고 퇴근해서 먹으려는 듯했다.

상호는 학생이 적은 대신 다른 업무를 더 맡은 탓에 아직도 많은 양이 남아 있었다. 그래도 그가 얼마나 남았는지는 상관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언제 퇴근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남들이 다 가야 세희가 빠져나올 수 있었다.

-몸 안 불편해?

-괜찮아요. 다리 뻗으셔도 돼요.

세희는 그렇게 쪽지에 적었지만, 상호는 다리를 곱게 모아 한쪽으로 치워놓은 자세를 고수했다.

다행히 7시가 넘어 시간이 흐르자 선생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얼마 가지 않아 상호와 설미를 제외한 모든 교사가 업무를 마치고 퇴근을 마쳤다.

창밖에 떨어지는 노을이 교무실을 주황빛으로 물들였다.

상호는 설미를 흘끗 보며 물었다.

“선생님은 얼마나 남았어요?”

“거의 다 했는데. 상호 씨는?”

“전 좀 남았어요.”

“그럼 도와줄게.”

“괜찮아요. 먼저 들어가요.”

“에이, 그러지 말고 좀 봐봐.”

설미가 그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뭐야, 다 했네? 이제 인원종합만 하면 되잖아.”

“제가 엑셀 다루는 게 느려서…….”

“줘 봐, 내가 해 줄게. 보고 배워.”

상호는 설미에게 키보드를 빼앗겼다.

설미는 순식간에 표 정리를 마치고 그에게 다시 키보드를 넘겨주었다. 상호는 살짝 감탄했다.

“짬이 다르네요. 역시.”

“푸후후, 나는 헌터 되기 전에도 사무직이었으니까.”

설미가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근데 상호 씨.”

“네?”

“둘이니까 할 이야기가 있는데 말이야.”

상호는 마른침을 삼켰다. 책상 아래에서 세희가 몸을 뒤척이는 게 느껴졌다.

‘둘만 있는 게 아닌데…….’

“뭔데요?”

“교장선생님한테 들었어.”

견학 갔을 때 이야기를 말하는 것 같았다. 상호는 눈을 질끈 감았다.

‘결국 말했구나…….’

“상호 씨 나보고 어린애같다고 했다며?”

“그렇게까진 말 안 했어요. 나보다 어려 보인다고 했지……. 외모가요.”

“근데 연상이 취향이라며?”

“그런 것까지 말씀하셨어요?”

“어허, 누가 선배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해?”

말은 그렇게 하지만 방글방글 웃는 것이 영락없는 여학생 얼굴이었다. 잘 쳐줘야 대학 새내기.

“그럼 나는 상호 씨 취향은 아닌 거네?”

“따지자면…… 그렇죠. 제 취향은 첫사랑 기준이라서.”

“첫사랑이 연상이었어?”

“네.”

“몇 살 때? 몇 살 위랑?”

“16살에, 여섯 살 위랑요.”

상호의 말에 설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이차가 좀 나네. 그래서, 사귀었어?”

“네. 바로 사귄 건 아니고. 1년쯤 후에.”

“근데 첫사랑이라는 건…… 지금은 헤어졌다는 거야?”

“……네.”

상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설미는 더 묻진 않았다. 대신에 다시 웃을 뿐이었다.

“그거 알아, 상호 씨?”

“뭐를요?”

“내가 볼 땐 상호 씨도 엄청 어려 보인다는 거.”

그녀가 키득거렸다.

“입학식 때도 사고쳤지, 컴퓨터도 잘 못 다루지, 아이들 못 다뤄서 고생하지.

교장선생님이랑 내가 얼마나 상호 씨 걱정을 하는 지 알아? 완전 손 많이 가는 동생 취급이야.”

상호의 뺨이 살짝 붉어졌다. 세희에게 들려주기 약간 쪽팔린 내용이었다.

“그랬어요?”

“물론 혼자서 다 잘 하고 있는 건 기특하지만, 그래도 취급이 그렇단 말이야.

아무리 어른스러운 척해도 짬이 다른 법이니까.”

“……그거야 그렇겠죠. 특히 교장선생님한텐.”

“말이 좀 빙 돌았네.”

설미는 팔짱을 끼었다.

“그러니까 하고 싶은 말은…… 좀 적당히 기대도 된다 이거야. 혼자서 다하려고 하지 말고……. 오늘도 봐. 딱 봐도 피곤해 죽으려고 하는데 내가일 달라고 하니까 거절부터 했잖아. 그러지 말란 이야기야.”

상호는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래도 저는 이렇게 사는 게 편해서 그래요.”

“상호 씨 반에는 바보같이 성실한 아이 없어? 말수 적고. 모범생 타입 있잖아.”

“……있죠.”

지금 책상 밑에 있었다.

“그런 애 보면 어떤 생각이 들어? 좀 편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애들이랑 잘놀면 좋겠다, 그런 생각 들지 않아?”

“그렇죠.”

“상호 씨가 그렇다니까.”

설미에 말에 상호는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알았어요. 가끔은 기대어 줄게요.”

“그럼 그런 의미에서 같이 저녁 먹을까?”

설미가 씩 웃었다.

그 때.

정말로 예상치도 못한 때.

세희가 책상 아래에서 뛰쳐나와 상호에게 달려들었다.

“꺅!”

“윽……!”

설미는 놀라서 펄쩍 뛰어올랐고, 상호는 세희에게 밀려 그대로 뒤로 넘어졌다.

“끙…….”

호신강기는 제때 펼쳤지만, 만약 세희의 동작이 더 빨랐다면 진짜로 한 방 먹을 뻔했다. 상호는 침음하며 자신의 위에 올라탄 세희를 쳐다보았다.

“세희야……?”

“기습 성공.”

그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인정해 주실 거죠?”

상호는 반박도 못하고 한숨만 푹 내쉬며 바닥에 널브러졌다.

“그래…….”

그의 옆에서 설미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들을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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