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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과 후가 되기 전까지는 지윤을 만나러 갈 시간이 나지 않았다.
종례를 마친 상호는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지윤이 있는 교실로 향했다. 김규리 선생이 가르치는 반으로.
그녀의 교실 앞에 도착해 보니, 마침 지윤이 친구들에게 둘러싸여서 반을 나서고 있었다.
‘……인기 만점이네.’
얼굴은 예쁘고 몸매도 여자다웠지만, 피부가 갈색인데다 근육이 탄탄해서 중 성적인 매력이 풍겼다. 그래서 여자인데도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은 모양이었다.
상호는 살짝 물러나서 몸을 숨기고 그녀들이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지윤아, 오늘도 별관 갈 거야?”
“요즘 엄청 열심히 운동하네.”
“무슨 일 있어? 기분 안 좋아 보여. 견학 갔다 온 뒤부터.”
모르는 목소리들 사이에서 지윤의 목소리만은 구별해낼 수 있었다.
“그냥. 조금 신경쓰이는 일이 있었어.”
친구들 사이에서 쓱 빠져나온 지윤이 그녀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나 갈게. 이따 저녁에 봐.”
인사를 나눈 후 지윤의 친구들은 기숙사 쪽 계단으로 향했고, 지윤은 별관 쪽 계단으로 향했다.
상호는 지윤의 뒤를 몰래 밟았다. 검이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양손으로 검 손잡이와 검집을 같이 잡은 채.
별관에는 도서관과 무기 보관소, 체력단련실 등이 있었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아마 체육단련실로 가려는 모양이었다.
상호의 예상대로 지윤은 체력단련실로 들어갔다.
그는 살짝 열린 문의 틈 사이로 안쪽을 쓱 훑어보았다.
‘시설 좋네.’
덤벨과 바벨, 런닝머신처럼 기본적인 것들은 물론이고 복잡하게 생긴 운동기 구들까지. 벽이 전부 통짜 거울이라서 자세를 확인하기 편할 것 같았다.
종례가 끝난 지 얼마 안 된 시간이라 그런지, 안에는 지윤 혼자뿐이었다. 애초에 방과 직후에도 단련하는 학생은 거의 없을 터였다. 저녁 먹고 심심할 때라면 또 모를까. 물론 훈련에 미친 괴짜가 어딘가에 있긴 하겠지만.
상호가 알기로 그런 괴짜는 세희뿐이었다.
‘근데 한 명 더 늘었네. ……켁!’
상호는 체력단련실 안을 슬쩍 들여다보았다가 화들짝 놀랐다. 지윤이 블라우스를 훌렁 벗어던진 것이었다.
알고 보니 옷 아래에 딱 달라붙는 운동용 스포츠웨어를 입고 있었다.
‘깜짝이야…….’
그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꼭 이렇게 몰래 훔쳐봐야 할까.
그래도 수련하는 모습은 한 번 보고 싶었다. 성철 또한 국내의 최강자들 중 한 명. 그의 딸은 얼마나 강할지 궁금했다.
이윽고 지윤이 샌드백에 주먹을 날리기 시작했다.
퍽 퍽
바람을 가르고 가죽이 터져나가는 소리.
깔끔하긴 했다. 자세가 정석적이니 소리도 깨끗할 수밖에 없었다. 좋게 말하자면 기본에 충실한 스타일.
허나 그뿐이었다.
빠르지도 않고. 힘이 강하지도 않고. 특별한 것 하나 없이 기계적인 동작만 반복할 뿐이었다.
‘좀 실망인데…….’
상호는 성철의 주먹을 떠올렸다. 그 솥뚜껑같은 주먹은 몬스터의 뼈까지도 단숨에 박살을 내곤 했다.
지금 지윤의 주먹으로는 몬스터는커녕 사람 뼈도 못 부술 지경이었다.
그런데 샌드백을 치는 소리가 조금씩 달라졌다.
쩍 쩌억
‘응?’
처음보다 훨씬 난폭해진 타격음.
일정한 박자로 내질러지던 주먹이 이제는 마구잡이로 휘둘러지고 있었다. 그저 주먹을 날리는 데에만 집중한 탓인지, 샌드백을 칠 때마다 몸의 무게중심이 무너져서 이리저리 비틀거렸다.
그래도 주먹은 멈추지 않았다.
빠각 뻐억
상호는 마른침을 삼켰다.
‘저러다 손 부러지겠는데…….’
우드득
아니나 다를까, 심상찮은 소리와 동시에 지윤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끄흑……!”
붙잡은 손은 양쪽 다 퉁퉁 부어 있었다.
상호는 더 이상 두고 보지 못하고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앗…….”
지윤은 성큼성큼 다가오는 상호를 보고는 당황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녀는 곧 예의 싸늘한 표정을 지으며 가방과 옷을 챙겨들었다.
허나 상호는 그녀를 그냥 보내줄 생각이 없었다.
그는 옆을 지나쳐가는 지윤의 팔목을 낚아챘다.
“……놔요!”
“뭐 때문에 그래?”
상호는 그녀의 양 손을 잡고 손등이 보이도록 들어올렸다. 살은 퉁퉁 붓고 관절에는 멍이 들어 있었다.
그의 이마에 핏줄이 솟았다.
“뭐 때문에 이러냐고. 뭐 때문에 아버지를 그렇게 싫어하는데? 아니면 선생님이 잘못했니? 선생님이 너한테 뭔가 잘못했어?”
“신경 끄세요! 선생님이랑 상관 없으니까!”
“난 상관 있어!”
상호의 언성이 높아졌다. 지금 그와 지윤은 선생과 학생의 관계가 아니었다.
“네 아버지가 왜 미움받아야 하는데? 난 지금 그게 이해가 안 가서 이러는 거야. 너 설마 성철이 형이 가족들 버리고 갔다고 생각하냐?”
“그럼 어때서요? 그렇게 생각하면 어쩔 건데요? 선생님이 저랑 무슨 상관이냐고요. 왜 저한테 이러냐고요!”
상호는 화를 내는 지윤을 노려보았다.
지윤은 이를 앙다물고 있었지만 눈가는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단순히 화만 내는 게 아니었다. 어딘가 애원하는 듯한, 그런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호 또한 제정신이 아니어서 그 느낌을 신경쓰지 못했다.
“대답해. 너희 아버지가 뭘 잘못했어?”
“손 놔요! 안 놓으면 신고할 거예요!”
“해! 씨발, 신고해! 느그 아버지가 퍽도 좋아하시겠다. 신고하라고!”
상호는 버럭 소리치며 핸드폰을 꺼내 집어던졌다. 핸드폰이 바닥에 부딪혀 박살이 나자 지윤이 몸을 움찔했다.
상호를 노려보는 지윤의 눈에서 서서히 눈물이 흘러내렸다.
“버리고 간 거, 맞잖아요…….”
그녀가 울음을 터트렸다.
“가족들 버리고 가서……, 바보같이 죽어 버렸잖아요……!”
그 말에 상호는 진짜로 머리꼭지가 돌아 버렸다.
그는 지윤의 어깨를 꽉 붙들고 눈을 부릅떴다.
“너 진짜로 그렇게 생각하냐?”
손이 덜덜 떨렸다.
“바보같이 죽었다고? 성철이 형은 너 살리려고, 형수 살리려고 그 개고생을 하다가 죽었는데, 바보같다고?”
“가지 말았, 말았어야죠……!”
지윤이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다.
“가, 같이 있었어야죠……! 우, 우릴 생각했으면, 우리 옆에서, 우릴 지켜줬어야 하는 거잖아요……!”
“형이 싸우러 갔으니까 네가 살아 있는 거야! 네 가족, 이 학교, 네 친구들 다!”
분통을 터트리던 상호는 갑자기 힘이 쭉 빠지는 것을 느꼈다.
‘젠장, 이젠 화도 못 내겠어…….’
상호는 그녀를 놓아주고 돌아섰다.
반지는 줄 수 없었다. 화딱지가 나서 주기 싫기도 했고, 줘 봤자 전혀 소중히 여기지 않을 터였다.
싸운 채로 헤어지긴 싫은데, 도저히 좋은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부서진 핸드폰을 주워들었다.
“후우…….”
그리곤 체력단련실을 나갔다.
뒤쪽에서 지윤이 소리 죽여 흐느끼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달래 주기에는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위로해 봤자 또 같은 부분에서 충돌할 것이다.
상호는 결국 그녀를 내버려 두고 체육단련실에서 멀어졌다.
그는 별관 밖으로 나와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미안해, 형. 잘 부탁한다고 했는데…… 결국 울려 버렸네.’
상호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따지고 보면 형 때문이니까. 나한테 뭐라 마쇼. 미친놈한테 딸을 맡긴 형 잘못이지.’
겨울은 다 가고 완연한 봄날이 왔는데, 때늦은 찬바람이 상호의 얼굴을 때렸다.
그는 진이 다 빠져서는 남교사 숙소로 처량하게, 터덜터덜 걸어갔다.
오지윤
다음 날 아침.
상호는 눈을 뜨자마자 생각했다.
‘……사과해야겠지.’
그래도 가르쳐야 할 아이들이 있는 입장인데 너무 막 나갔다. 교사에서 짤리기 싫으면 지윤에게 사과하는 것이 옳았다.
그래서, 조례가 끝나자마자 지윤의 반으로 갔는데.
“안 왔다고?”
“네.”
지윤의 친구들이 대답했다.
뒤쪽에 그를 보며 꺅꺅거리는 여학생들이 몇 있었지만, 상호는 신경쓰지 않고 재차 물었다.
“왜? 아파서?”
“그런가 봐요. 방에서 안 나오는 것 같던데. 무슨 일이에요?”
“그냥…… 일이 있어. 근데 얘들아, 지윤이는 평소에 성격이 어때?”
여학생들은 턱을 괴거나 눈살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음, 요즘은 좀 우울해 보이는데…… 원래는 전혀 안 그래요.”
“첫날부터 애들이랑 다 친해져서 수다 떨고 그랬어요.”
“평소엔 엄청 말 많아요. 특히 아재개그 엄청 좋아하고. 가끔 사투리 쓰는데 그것도 웃겨요.”
“운동도 잘하고 말도 잘해서 애들한테 인기 많아요. 인싸예요, 완전 인싸.”
상호는 당황했다. 인기가 많을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수다쟁이일 거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그런데 지윤이는 왜요? 혹시 지윤이 무슨 일 있었는지 아세요?”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전해줄 물건이 있거든.”
“저희 주시면 저희가 전해 드릴게요.”
“아니야, 아버지한테 직접 부탁받은 거라서.”
그 말에 아이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지윤의 가정사를 알고 있는 듯싶었다.
“그래요? 그럼 방으로 한번 가 보세요.”
남의 반 학생인데 기숙사까지 쫓아가기는 심히 눈치가 보였다. 적어도 애들 앞에서 그러겠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상호는 휘휘 손을 내저었다.
“됐다. 내일 오지 뭐.”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지금 바로 찾아갈 생각이었다. 방과후가 되면 기숙사에 학생들이 넘쳐날 테니까.
아직 쉬는 시간이지만 곧 수업을 시작해야 했다. 상호는 그의 반으로 향했다.
교실에서는 세희와 나빛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가 문을 열자 그녀들이 대화를 멈추고 그를 돌아보았다.
“선생님?”
“뭐 찾는 거 있으세요?”
상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태화가 보이지 않았다.
“태화는?”
“모르겠어요. 화장실 갔을 것 같은데…….”
“으음…….”
세희는 상호의 표정을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복잡한 심경이 얼굴에 드러난 모양이었다.
“태화 찾아올까요?”
“아니야. 괜찮아. 세희야, 나빛아.”
“네.”
세희와 나빛이 상호의 앞으로 다가왔다.
상호는 그녀들을 내려다보며 잠시 망설였다. 지윤을 만나러 가는 것은 따지고 보면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인데, 수업하고 싶어하는 아이들을 팽개치고 혼자가버리자니 양심에 찔렸다.
특히 세희에게는 더욱 그랬다. 태화와 싸웠던 날 복도에서 한 이야기를 들었으니까. 수업하는 1분 1초가 소중하다던 말을.
상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정말 미안한데…….”
“괜찮아요. 말씀하세요.”
“선생님 옛날 친구 관련한 일이 있어서…….”
“저한테 말씀하셨던 친구분들 말씀하시는 거예요?”
세희가 물었다.
세희는 그의 출신을 알고 있다. 상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자세한 건 말하기 힘든데…….”
“다녀오세요.”
세희가 생긋 웃었다.
“대신 나중에 꼭 보충수업 해주셔야 해요.”
“……고마워.”
상호는 세희와 나빛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태화한테도 잘 전해 줘. 그리고 누가 찾아와서 물으면…… 그냥 헌터협회부협회장이 불러서 갔다고 해. 그럼 문제 없을 거야.”
“그럴게요.”
“부탁한다.”
그는 아이들에게 손을 흔들고 반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