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휴…….”
상호는 위를 올려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맑은 하늘에 구름이 둥실 흘러갔다.
숨기고픈 비밀을 들켜 버렸다. 그래도 그걸 알아낸 사람이 세희라서 다행이었다. 태화였다면 아마 입단속하느라 진땀을 뺐을 테니까.
그렇지만 세희에게도 남한테 말하지 말라는 부탁은 해 두었다. 입이 무거운 아이지만 말을 안 하면 오해가 생기고 실수가 생기는 법이었다.
그는 고개를 내려 눈앞에 펼쳐진 수많은 비석의 행렬을 바라보았다.
‘많이도 죽었네.’
선생과 학생들은 전시관 관람을 마치고 국립묘지를 견학하는 중이었다.
누군가가 상호의 어깨를 톡톡 쳤다. 상호는 옆을 돌아보았다.
해련이었다.
그녀의 품에는 하얀 꽃이 그득했다.
“꽃 안 사요? 저쪽에 기념품 가게에서 팔던데.”
“지금은 눈치가 보여서…….”
상호는 세희와 태화, 나빛이 있는 쪽을 흘끔했다. 그녀들은 약간 떨어진 곳에서 상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묘지에 여고생들이 와 봤자 할 일이 없는 게 당연했다. 그냥 구경 한 번 하면 끝인 것이다. 그래서 학생들은 모여서 수다를 떨거나, 사진을 찍거나, 교사들이 하는 일을 구경하고 있었다. 지금 상호네 반처럼.
해련이 씩 웃었다.
“기왕 온 김에 부대원들 보고 가요. 그러라고 사람 적은 날 골라서 온 건데.”
“애들 안 볼 때 슬쩍 가려고요.”
“아이들은 내가 데려갈 테니까, 걱정 말고 강 선생 볼일 봐요.”
“그러면…… 금방 갔다 오겠습니다.”
상호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절뚝거리며 해련이 알려준 기념품 가게로 향했다.
하얀 국화 일곱 송이. 꽃을 산 상호는 가게를 나서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저 멀리에 해련이 그의 학생들을 데리고 걸어가는 중이었다. 그는 안심하고 묘지의 가장 깊은 곳으로 향했다.
수많은 무덤을 지나자 그가 찾는 이들이 보였다.
총 일곱 개의 비석.
‘오랜만이네.’
상호는 몸을 굽혀 첫 번째 비석 앞에 국화를 놓았다.
‘다들 꽃보다 술을 더 좋아할 양반들이지만…… 참으쇼. 안 파는 걸 어떡해.’
그는 웃지도 못하고 울지도 못하는, 애매한 표정을 지으며 허리를 폈다.
그 때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선생님?”
상호는 괜스레 긴장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또 누구한테 들켰나 싶었다.
살짝 태운 갈색 피부와 짧게 기른 머리의 소녀였다. 팔뚝과 종아리에 오밀조밀하게 붙은 잔근육이 눈에 띄었다.
아까 저승부대 사진 앞에서 잠시 멈춰섰던 아이였다.
소녀가 드센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저희 학교 선생님 맞죠?”
소녀의 질문에 상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 예현여고.”
“왜 선생님이 거기에 꽃을 놔요?”
“응?”
그가 당황해하자 소녀가 그의 앞에 있는 비석을 가리켰다.
“그거 우리 아빤데요. 선생님 우리 아빠 아세요?”
“뭐?”
상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빠와 딸
“네가 성철이 형 딸이라고?”
상호는 어안이 벙벙해져서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눈썹 진한 게 좀 닮은 것 말고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성철은 바위처럼 생긴 사내였다. 그의 이목구비에는 여자에게 어울릴 만한 부품이 없었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소녀는 어딜 봐도 건강한 여자로 보이는 외모였다.
“그러네. 좀 닮았네.”
그래도 상호는 거짓말을 했다. 안 닮았다고 하면 양쪽에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하지만 소녀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뭐가 닮았는데요? 하나도 안 닮았던데.”
어째 짜증이 잔뜩 난 말투였다.
“그래서 선생님 우리 아빠랑 무슨 관계시냐구요.”
그 문제가 그녀에겐 아주 중요한 일인 모양이었다.
상호는 잠시 고민하다가 품에 든 흰 국화를 보여주며 저승부대의 비석들을 빙둘러 가리켰다.
“같은 부대였어.”
그는 소녀에게 국화를 한 송이 건넸다.
비석 하나가 비겠지만, 또 한 송이 사면 되는 일이었다.
“너도 드려.”
소녀가 국화를 받아들자 상호는 씩 웃었다.
“아버지가 기뻐하시겠다. 이렇게 다 자란 딸이 찾아와서…… 응?”
내팽개쳐진 국화가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콰직
발을 사납게 비비며 즈려밟는다. 상호는 처참하게 부서진 국화를 보고는 머릿속이 멍해졌다.
소녀가 그를 싸늘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흥.”
그때서야 상호는 이 아이가 아버지를 마냥 좋아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소녀가 무언가 말을 해주기를 기다렸다. 왜 이러는지, 왜 아버지에게 꽃하나 주라는 말이 그토록 상처가 되는지.
하지만 소녀는 결국 아무 말도 해주지 않고, 홱 돌아서서 자리를 떠 버렸다.
‘성철이 형. 딸이 형 엄청 미워하나 본데.’
상호는 멀어져 가는 소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남은 국화 다섯 송이를 전부 성철의 묘비 앞에 놓았다.
‘형 다 가져.’
그런데 바람이 휭 불어 묘비 앞의 국화들을 전부 날려 버렸다.
상호는 날아가는 꽃들을 잡을 생각도 못하고 멀거니 쳐다보았다.
‘삐졌구만…….’
딸에게 소박맞은 아비의 심정은 어떨까. 그는 한숨을 쉬며 돌아섰다.
***
추모관 견학에서 돌아온 후로 상호는 계속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학교로 돌아올 때도, 퇴근하고 방에서 잠을 잘 때까지도 계속 성철의 딸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그는 화요일에 출근하자마자 교내 전산망에 있는 학생기록을 확인했다. 다른 반 학생의 개인정보까지는 열람할 수 없었지만, 이름과 사진 정도는 볼 수 있었다.
‘오성철이니까 오씨에…… 1학년.’
얼마 지나지 않아 목록에서 소녀의 사진을 찾아낼 수 있었다.
오지윤.
담임교사는 S급 헌터 김규리. 무기 없이 주먹과 발을 쓰는 무예 계열의 여자 교사였다.
아마 지윤도 그녀와 같은 방식으로 싸울 것 같았다.
‘아버지도 그랬다는 걸 알까?’
상호는 성철을 떠올렸다.
***
전쟁의 막바지. 인간과 몬스터 양측이 전력을 다해 싸우던 때. 상호와 성철단 둘이서 특수임무를 맡고 아르게스 대륙 깊숙이 들어간 적이 있었다. 몰래 적진에 침투해서 몬스터들의 식수로 사용되는 강에 독을 푸는 작전이었다.
강에 독을 푸는 데는 성공했지만, 빠져나오던 도중 몬스터들에게 발각되어 전투를 치렀고.
성철은 그 과정에서 치명상을 입었다.
“이 시발…….”
욕을 내뱉는 성철의 등에 꽂힌 창. 상호는 지금도 그 창의 생김새를 그려낼 수 있었다.
“유서 안 썼는데……. 재수없어서…….”
“그 말이 더 재수없어요, 형. 염병 떨지 말고 일어나요.”
“안 되겠다, 상호야. 너 혼자 가라.”
성철은 그렇게 말하며 땅에 쓰러졌다.
당시의 상호는 다리가 멀쩡했지만, 그 역시 격한 전투 때문에 힘이 다 빠져 있었다. 그는 몇 번을 업으려고 시도했지만 성철이 그를 밀어냈다.
“가, 인마. 헛짓거리 하지 말고.”
“아니, 마누라도 있는 양반이 왜 벌써 포기해! 애도 있잖아!”
성철은 상호의 말을 듣고 헛웃음을 쳤다.
“임자 있는 놈한테 미안하지만…… 우리 큰딸 좀 잘 부탁한다. 내 딸이지만 좀 예쁘거든? 예경이 질리면 가끔 가서 얼굴 한 번 보고…….”
“뭔 개소리야? 형 지금 제정신 맞지?”
“정신은 말짱하다. 부탁 좀 들어주라, 인마…….”
“알았어, 시발. 내가 무조건 형 애들 다 입대시킬 거야.”
“아니 이 나쁜 자식아, 군인은 안 돼…….”
“그러니까 일어나라고!”
상호가 아무리 소리쳐도 성철은 듣지를 않았다.
“아오, 드럽게 안 빠지네…….”
성철이 낑낑거리더니 웬 반지를 내밀었다. 밋밋한 금반지였다.
상호는 성을 냈다.
“이거 시발 결혼반지 아냐? 미쳤어?”
“가져가. 가져가서 이거 팔으라 그래. 집에 돈이 없다. 그리고 미안하다고…… 꼭 좀 전해줘라.”
“난 몰라. 이거 내가 먹는다.”
상호는 반지를 받으며 혀를 찼다. 하지만 성철은 웃을 뿐이었다.
“넌 그럴 놈이 못 돼.”
멀리서 몬스터들이 몰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상호를 보느라 힘겹게 고개를 들고 있던 성철은 몸을 축 늘어뜨리며 눈을 감았다.
“이제 말하는 것도 힘들다. 좀 자야겠어. 죽은 척 자고 있으면 그냥 지나갈지도 몰라. 그리고 사실은 죽을 상처가 아니었던 거지.”
그가 킬킬 웃었다.
“그렇게 괜찮아지고…… 집으로 돌아가면…….”
성철의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상호는 멍하니 성철을 내려다보며 그의 어깨를 흔들었다.
“형?”
아무리 불러도 그는 눈을 뜨지 않았다.
“……하.”
상호는 떨리는 한숨을 내뱉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언젠가는 이곳에 다시 돌아오기 위해.
하늘에 용을 닮은 괴물들이 몰려오는 게 보였다.
‘젠장.’
그는 억지로 발을 옮겼다. 성철이 넘겨준 결혼반지를 손에 꽉 쥐고서.
***
그렇지만 반지는 끝내 전해주지 못했다.
성철의 집 주소나 가족의 번호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종전 후에 부고를 올리고 장례식을 열어 봤지만, 그때도 성철의 가족은 찾아오지 않았다.
상호는 컴퓨터 화면에 떠 있는 지윤의 사진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결국 찾긴 했는데…….’
이래서야 반지를 줬다간 진짜로 팔아버릴 것 같았다.
‘아직은 못 줄 것 같네.’
성철의 결혼반지는 남교사 숙소가 아니라 상호의 원래 집에 있었다. 그는 퇴근 후에 집에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컴퓨터를 껐다.
이젠 다른 반 아이 말고 그의 학생들을 신경써야 할 시간이었다.
상호는 지윤에 대한 생각을 멀리 치워버리고 그의 교실로 향했다.
***
“쌤. 그 반지 뭐예요?”
조례시간에 태화가 갑자기 상호의 손을 가리켰다.
상호는 당황하며 반사적으로 손을 뒤로 숨기려 했다. 하지만 이미 들켜버린 이상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입맛을 다시며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아는 사람이 잠깐 맡겼어.”
어제 집에 가서 가져온 성철의 결혼반지였다. 금색 반지가 그의 오른손 검지에서 빛났다.
태화에겐 그 대답이 전혀 충분치 않았던 모양이었다.
“누군데요? 여자예요?”
“아니, 남자.”
“순금이에요?”
“그것까진 모르겠는데.”
“흐으음…….”
태화의 집요한 눈길이 반지와 상호의 눈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세희도, 나빛도. 태화의 말 덕분에 반지를 알아차린 후로는 온통 그의 손에 관심을 쏟고 있었다.
상호는 반지를 빼서 주머니에 넣었다.
“별 거 아니니까 신경쓰지 마. 수업 준비 하자.”
“쌤.”
“응?”
태화가 눈을 가늘게 떠 새침한 표정을 지었다.
“여자친구 생기면 꼭 저희한테도 말해주셔야 해요.”
“……꼭 그래야 해?”
“꼭이요.”
“그…….”
그걸 왜 내가 너희한테 말해줘야 하냐, 상호는 그렇게 한 마디 하려다가 말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래, 그래. 알았어. 꼭 그럴게. 그러니까 선생님 손은 그만 보고, 수업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