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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판에 지글지글 고기가 익어갈수록 태화의 빨간 눈동자도 이글이글 불타올랐다.
상호는 삼겹살을 굽다가 맞은편에 앉은 태화의 표정을 보고는 피식 웃었다.
“다 익으면 먹어.”
“넹.”
안 먹을 것처럼 굴던 세희도 막상 앞에 두니 눈이 초롱초롱했다.
‘데려오길 잘했네.’
상호는 다 익은 고기를 가위로 잘랐다.
“먹어.”
“선생님은요?”
“난 구우면서 집어먹을게.”
그가 그렇게 대답하며 계속 고기를 굽는데, 눈앞에 쌈이 들이밀어졌다.
세희가 한 손으로는 쌈을 들고 한 손으로는 밑을 받치며 말했다.
“드세요.”
그 옆에서 태화가 상추를 들고 중얼거렸다.
“아오, 개빠르네…….”
“나 신경쓰지 말고 먹어.”
그래도 세희는 팔을 내리지 않았다. 상호는 하는 수 없이 쌈을 받아먹었다.
그가 입 안에 든 것을 목구멍으로 넘기자마자 이번엔 태화가 쌈을 들이밀었다.
“아~ 하세용, 아~.”
“안 먹는다.”
“힝, 진짜 완벽하게 황금비율로 쌌는데…….”
“그런 귀한 거는 너 먹어. 이모, 여기 콜라 두 병 주세요.”
태화는 이번엔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직원이 가져온 콜라를 잽싸게 집어 뚜껑을 땄다.
그녀가 상호의 잔에 콜라를 따르며 웃었다.
“당연히~ 첫잔은~ 원샷이겠죠?”
“너 그런 건 어디서 배웠어?”
“티비요.”
상호는 콜라를 쭉 들이키고 말했다.
“태화야.”
“넹.”
“술 먹다 걸리면 맞는다, 진짜.”
태화는 웃었지만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에이~ 안 먹어요, 술…….”
“담배도 핀 적 없지?”
“당, 당연하죠. 헤헤헤…….”
“둘 다 하지 마라. 부탁이다.”
“쌤은 둘 다 아예 안 하셨어요? 한 번도?”
상호는 멈칫했다.
담배는 핀 적이 없지만 첫 술은 18살에 마셨다. 전쟁 때 어른들 손에 이끌려서. 그래도 딱 한 잔이었다. 스승이 금방 빼내 주기도 했었고.
그는 대충 얼버무렸다.
“너희 나이 땐 안 했어.”
“쌤은 저희 나이 때 뭐 하셨어요?”
“너희 때?”
상호는 갑자기 술이 당기는 것을 느꼈다.
아주 쓴 술이. 전쟁 때 마셨던 것처럼.
그때도 참으로 독한 술이었다.
“내가 너희 땐 전쟁 중이었어. 7년 전이니까…… 너희 열 살 때네. 그때도 몬스터랑 싸우고 있었지.”
“쌤 군인이셨어요?
“응. 나하고 나이가 같거나 많은 헌터는 열에 다섯은 군인이야.”
세희의 눈이 반짝였다.
“선생님 현역 때는 몇 등급이었어요?”
“전쟁 때는 등급이 없었어. 그런 건 다 종전 후에 만든 거야. C급부터 S급까지……. 나는 뭐, A급쯤 됐겠지.”
“엑! 그럼 우리 학교에 쌤보다 센 쌤들이 있어요?”
태화는 잔뜩 실망한 기색이었다. 상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한 가닥씩 하는 사람들이니까. 왜, 나보다 강한 사람이 없을 것 같았어?”
“그치만! 얼굴만 보면 쌤이 제일 세 보이는데! 막 안대도 하고!”
“넌 얼굴 보고 쌤 골랐냐?”
“앗, 들켰네.”
태화가 입맛을 다셨다.
“그래도 안 믿기는데요. 쌤이 체육관에서 꽝! 할 때 다들 놀랐잖아요.”
“그건 그냥 놀란 거고.”
“쌤 진짜 S급 쌤들보다 약해요?”
상호는 고민에 빠졌다. 약하다고 말하려니 아이들 의욕이 없어질 것 같고, 강하다고 말하려니 어린애들 앞에서 제 입으로 말하는 것이 꼴사납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냥 어깨를 으쓱였다.
‘언젠가 증명할 날이 오겠지.’
“몰라. 그래도 너희 가르치긴 충분해. 그리고 선생님들끼리 비교하는 건 다른 데선 하지 마. 안 좋은 거니까.”
“아, 다른 쌤 이야기 나와서 말인데…….”
태화가 눈을 가늘게 떴다.
“쌤하고 맨날 같이 다니는 여자 쌤 있잖아요.”
“설미 선생님?”
같이 다니는 여자 선생이 한 명밖에 없는지라, 굳이 생김새를 묘사하지 않아도 단박에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 선생님은 왜?”
“사귀어요?”
태화의 물음에 상호는 진심으로 당황해했다.
“뭔 소리야? 아니야, 그런 사이 전혀 아냐.”
“그런데 왜 맨날 같이 다녀요? 밥도 그 쌤이랑만 먹고. 줄 설 때도 보면 항상 둘이 이야기하고.”
“그거는 내가 왕따라서 그래.”
장난 같지만 사실이었다.
“다른 선생님들은 나랑 별로 안 친하거든.”
“그럼 설미 쌤이 착한 거예요?”
“그런 셈이지.”
“오호…….”
태화는 뭔가 맘에 들진 않지만 납득했다는 듯 입술을 삐죽 내밀고 고개를 느리게 끄덕였다.
“그럼 특별히 허락해 드릴게요.”
“대체 뭐를?”
상호는 태화의 말에 황당해하다가 세희가 젓가락을 멈춘 것을 알아차렸다. 접시에는 고기가 한가득 남아 있었다.
몇 점 먹은 것 같지도 않은데, 확실히 입이 짧은 모양이었다.
“세희는 그만 먹는 거야?”
“배불러요…….”
세희가 울상을 지었다.
더 먹여 봤자 식고문이 될 것 같았다. 그래도 상호는 못내 아쉬워 한 번 더 물었다.
“찌개나 냉면 같은 건 안 먹어?”
“네. 배 터질 것 같아요…….”
그때 태화가 세희의 배를 검지로 쿡 찔렀다.
“배 터져? 임신했냐?”
그러자 세희가 사납게 확 달려들어 태화의 꼬리를 잡았다. 상호는 깜짝 놀라 주의를 주었다.
“세희야, 그런 거 함부로 잡으면 안 되지.”
“얘 꼬리 잡으면 조용해져요.”
말하는 것을 보니 이미 여러 번 잡아 본 듯했다. 그녀의 말대로 태화는 꼬리를 잡힌 순간부터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붉은 눈동자는 세희와도, 상호와도 마주치지 않으려 애썼다.
상호는 그녀를 바라보며 눈을 끔뻑였다.
‘진짜 조용해졌네…….’
“그래도 그러지 마. 아플 수도 있잖아. 태화가 뭐라고 안 했어?”
“한 번도 안 그랬는데…….”
세희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꼬리 끝부분을 슬슬 문질렀다.
그와 동시에 태화가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펄쩍 뛰더니 깜짝 놀란 토끼눈이 되어 세희의 손등을 철썩 후려쳤다.
“미쳤나봐! 미쳤나봐, 진짜!”
“갑자기 왜 그래? 평소엔 뭐라 안 했으면서…….”
“남들 다 보는데 어디를……!”
상호는 투닥거리는 그녀들을 보며 묵묵히 고기를 입에 집어넣었다.
***
‘배불러 죽겠군…….’
상호는 운전대를 돌리며 한숨을 쉬었다. 세희가 못 먹은 몫까지 다 먹어치웠더니 살짝 숨쉬기 힘들 정도였다.
빨리 방으로 돌아가서 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쌔앰~.”
뒷자리에 앉은 태화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태화야, 운전하는 사람은 건드리지 마라.”
“넵. 근데 저희 내일도 같이 먹으면 안 돼요?”
“내일은 학교 밥 먹어야지. 매일 사줄 순 없어.”
“이잉……. 그러면 저희 마트 가면 안 돼요?”
“마트? 뭐 필요한 거 있어?”
조수석에 앉은 세희가 대답했다.
“저희 월요일에 현장체험학습…….”
“아, 맞다.”
상호는 짧게 탄성을 냈다.
다음 주 월요일은 1학년들이 이계대전 추모관, 줄여서 계전추모관에 견학을 가는 날이었다.
“과자 사게?”
“네!”
태화가 잔뜩 신이 나 대답했다. 상호는 입맛을 다셨다.
“그래, 가자. 근데 너희 선생님 차 타고 가는 거 알지?”
“버스 말고요?”
“넷이서 버스 빌려서 뭐하냐. 우리끼리 타고 가야지.”
“뭐, 오히려 좋아요. 근데 쌤, 저 지갑 안 들고 왔는데.”
그녀의 말에 상호는 말문이 턱 막혔다.
“……사줄게.”
“아싸~!”
상호는 기뻐하는 태화를 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선생이 자꾸 해주면 안 되는데…….’
그래도 어쩌랴. 그녀들이 웃는 것은 술보다 담배보다 중독적이었다.
그는 세희도 방긋 웃는 것을 보고는 어쩔 수 없이 피식 웃으며 마트로 차를 돌렸다.
***
……그렇게, 마트에 도착해 물건을 샀는데.
“피난 가냐?”
실제로 피난민을 본 적 있는 상호였지만, 쇼핑카트 한가득 담긴 물건을 보니 그런 말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심지어 과자가 아닌 물건도 있었다. 상호는 수상하게 생긴 종이 박스를 집어들었다.
“이건 또 뭐야?”
“생리대요.”
태화가 뻔뻔하면서도 밝게 대답했다.
상호는 뭐라 한마디 하려다가 포기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용돈 한 번 못 받아 본 아이들인데 도저히 뭐라고 혼낼 수가 없었다.
“알았어. 나빛이 것도 샀지?”
“생리대를요?”
“아니……, 과자.”
“엥, 제 것만 골랐는데.”
“제가 샀어요.”
세희가 과자 두 봉지를 들어 보였다. 상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어. 두 개면 되겠지.”
“하나 샀어요.”
“하나?”
“이건 제 거예요.”
세희가 잡고 있던 두 과자 중 하나를 들어 보였다.
그러니까 나머지는 다 태화가 골랐다는 소리다. 상호는 눈을 부라리며 태화를 노려보았다.
“혼난다, 진짜.”
“헤, 헤헤헤…….”
태화는 당황하며 카트를 끌고 과자가 있는 코너로 달려갔다.
다시 돌아왔을 땐 확실히 수가 줄어 있었다. 그래도 여전히 많았지만, 상호는 그것까지는 눈감아 주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계산하러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