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15/501)

***

다음 날.

상호는 교탁에 서서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어제와 똑같은 풍경이었다.

“……나빛인 오늘도 안 왔네.”

세희는 말없이 나빛의 자리를 흘끔거렸고, 태화는 발을 동동 구르며 책상에 엎어졌다.

“아이고~ 범생이랑 둘만 남았네, 아이고~.”

상호는 출석부를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반을 바꾼단 말은 아직 못 들었는데…… 오늘도 학교를 아예 안 오는 건가?’

아무래도 전화를 해봐야 할 것 같았다.

핸드폰에는 나빛의 집전화가 저장되어 있었다. 그는 핸드폰을 꺼내며 문으로 걸어갔다.

“선생님 통화 좀 하고 올게.”

교실 밖에 나온 그는 문을 닫고 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연결음이 들리기도 전에 누군가가 전화를 받았다.

[전화 받았습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젊은 남자 목소리였다. 상호는 순간 전화를 잘못 걸었나 싶었다.

하지만 다짜고짜 이름부터 묻는 것을 듣고 깨닫게 되었다. 이 번호가 평범한 집 전화번호가 아니란 것을.

아마 비서일 듯했다.

“예현여고 교사 강상호라고 합니다. 하 회장님 댁 맞습니까?”

[맞습니다. 말씀하시면 제가 전해 드리겠……. 음?]

전화 너머가 어째 소란스러워졌다. 상호는 귀를 기울였지만 잘 들리질 않았다. 내공으로 청각을 증폭시켜도 소리를 전해주는 건 기계라서 큰 소용이 없었다.

소란이 멈추고 목소리가 바뀌었다.

[날세.]

상호는 전화를 받은 사람이 봉진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버님. 나빛이는 오늘도 학교 쉬는 겁니까?”

[보냈는데?]

“아…….”

상호의 머릿속이 순간 멈췄다.

“……결국 반을 바꾸셨습니까?”

[아니? 교실에 안 갔나? 오늘 좀 늦게 출발하긴 했는데.]

“어…… 그럼, 나빛이는 제가 계속 가르치는 겁니까?”

그의 질문에 봉진이 툴툴거렸다.

[어쩌겠나? 하루종일 방에 박혀서 울기만 하는데. 도저히 이길 수가 없어서 그냥 허락해 줬지.]

“……감사합니다, 아버님.”

상호는 거듭 감사를 표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집사람이 그걸 봤으면 한바탕 뒤집어졌을걸. 지금 집에 없어서 다행이지……. 그러니까 자네 조심해. 이 일은 아직 자네랑 나밖에 몰라. 집사람 귀에 들어가면 큰일나니까, 알아서 잘 해보라고. 난 모른 척 할 거야.]

상호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봉진은 허락했지만, 아직 나빛의 어머니는 허락하지 않았다.

‘산 넘어 산이군…….’

“뼈에 새겨 듣겠습니다.”

[그럼…….]

봉진이 한숨을 푹 쉬고 말을 이었다.

[딸아이 잘 부탁하네.]

상호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최선을 다해 가르치겠습니다, 아버님.”

[아니, 최선이고 뭐고는 상관없고…… 제발 다치지만 않게 해줘.]

“그럼 나빛이가 안 다칠 수 있게 되도록 최선을 다해 가르치겠습니다.”

[자네…… 에휴, 바빠서 끊겠네.]

“예, 안녕히 계십시오.”

통화가 끊기자 상호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이로서 나빛의 부모 중 한쪽의 허락은 받아냈다. 산 넘어 산이라도 어쨌든 산 하나는 넘은 것이다.

그가 교실로 들어가려는데 계단 쪽에서 누군가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를 보며 세상 환하게 웃는 회색 머리 소녀.

어제 하루종일 울었다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밝은 모습이었다.

“선생님!”

나빛은 한달음에 달려와 상호를 덥석 끌어안았다. 상호는 화들짝 놀라 몸을 움찔했다.

“어, 음…… 나빛아?”

“다시 못 볼 줄 알았어요…….”

그녀가 그의 품에 얼굴을 비비며 웅얼거렸다.

상호는 예상치 못한 육탄공세에 어쩔 줄 몰라하다가 손을 들어 조심스럽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수업하러 가자.”

“네.”

나빛은 상호의 옆에 착 달라붙어서는 날아갈 듯 가벼운 발걸음으로 교실을 향했다. 상호는 살짝 흐뭇해지는 것을 느끼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예쁜 입가에 방실방실 웃음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외식날

상호는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토요일 아침의 교정에는 사복을 입은 학생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아이들은 이제 제법 친구를 사귀었는지, 지난 주말보다 화사하게 꾸미고 무리를 지어 수다를 떨었다.

한편으로는 기숙사 앞에서 학생을 태우는 자동차들도 보였다. 아이와 주말을 함께 보내기 위해 찾아온 가족들이었다.

그런 모습들을 보고 있으니 가슴 한켠이 무거워졌다.

‘우리 애들은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같이 놀지도 않을 거 같고…….’

그래도 오늘은 셋이서 외식하기로 한 날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또 있었다.

‘저번에 싸운 후로 둘이 한 마디도 안 하더란 말이지…….’

그때 마침 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상호는 핸드폰을 꺼내 확인했다.

태화의 문자였다.

-저희 밥 언제 먹어요??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답장을 보냈다.

-세희랑 이야기해서 언제가 좋을지 정해 봐.

-시러요ㅠㅠㅠ

-싫으면 세희만 사준다.

-미워요ㅠㅠㅠ

-그러니까 빨리 연락해서 물어봐.

-넹…

시간이 흐른 후에 답장이 왔다.

-쌤 편한 대로 하래요

-그럼 점심에 먹자.

-쌤 차 타고 가요?

-그래야지.

-쌤 운전할 수 있어요?

-운전은 원래 오른발로만 하는 거야.

-진짜요…

학생이니까 모르는 게 당연하다. 그는 피식 웃으며 재차 문자를 보냈다.

-12시쯤에 갈 테니까 부르면 세희랑 내려와.

-넹~~~

상호는 그녀의 대답을 확인하고 주머니에 핸드폰을 넣었다.

‘뭘 먹으러 갈까…….’

***

상호는 12시가 되자 그녀들에게 연락하고 기숙사 앞으로 자신의 차를 끌고 갔다.

먼저 나온 것은 세희였다. 딱 달라붙는 레깅스에 품이 큰 베이지색 긴팔티를 입은 그녀는 차를 향해 쪼르르 달려와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그의 차가 맞는지 긴가민가해하는 듯했다.

상호는 창문을 내리고 말했다.

“타.”

“앞에 타도 돼요?”

“응. 맘대로 해.”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세희가 조수석에 올라탔다. 누가 뺏을까 겁난다는듯이.

상호는 핸들을 검지로 두드리며 물었다.

“사감선생님한텐 말씀드렸고?”

“네. 담임선생님이랑 나간다고 허락 받았어요.”

“뭐 먹을지는 생각해 봤어?”

“아직이요.”

“태화 기다리는 동안 생각하고 있어.”

얼마 지나지 않아 태화도 기숙사에서 뛰쳐나왔다.

허벅지를 다 드러내는 검은 숏팬츠에 하얀 블라우스였다. 그녀는 잔뜩 신난 발걸음으로 차에 다가왔다가 조수석에 세희가 타고 있는 것을 보고는 흙 씹은 표정을 지었다.

“도둑고양이년…….”

“빨리 타라, 태화야.”

“히잉…….”

울상을 지은 태화가 뒷좌석에 앉으며 물었다.

“저희 뭐 먹어요?”

상호는 세희를 돌아보았다.

“정했어?”

“으음……. 순두부찌개는 어떠세요?”

세희의 말에 태화가 기막혀했다.

“와 씨, 뭔 순두부야! 너 몇 살이야?!”

그러고는 발을 동동 구르며 떼를 썼다.

“절대 안 돼요! 고기고기고기! 삼겹살소고기족발보쌈치킨돈까쓰스테이크!”

상호는 입맛을 다셨다.

“순두부찌개가 뭐 어때서? 나도 좋아하는데.”

“순두부는 살 안 찌잖아요! 살 찌는 거 먹어야죠!”

“그것도 그렇다만…….”

목적은 결국 세희 살 찌우기니까 말이다. 그는 세희에게 물었다.

“고기는 별로야?”

“그러면…… 삼겹살이 좋을 것 같아요.”

“그럼 삼겹살로 하자.”

“아싸!”

태화가 양팔을 쭉 펴며 환호했다.

“벨트 매.”

상호는 아이들이 벨트를 매는 것을 확인하고 교문 밖으로 차를 몰았다.

***

상호의 차는 작은 경차였다. 애초에 혼자 타려고 산 차였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성격도 아니었다. 차는 그냥 장 볼 때 짐이나 실으려고 산 것뿐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이렇게 아이들을 태우고 나니 차가 유난히 비좁게 느껴졌다.

덜컹

과속방지턱을 넘자 차가 크게 흔들렸다. 뒤쪽에서 뭔가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악!”

“괜찮아?”

상호는 백미러를 흘끗했다. 차 천장에 자국 두 개가 나 있었다.

두 자국의 간격은 정확히 태화의 뿔들의 간격과 일치했다.

가벼운 차에 가벼운 사람이 타서 그런 모양이었다.

“몸이 막 붕붕 뜨지? 미안하다, 살살 운전할게.”

“으으……. 아녜요. 고개 숙이고 있을게요.”

태화는 뿔을 부여잡고 허리를 푹 굽혔다.

상호는 조수석 쪽을 연신 흘끔거렸다. 세희 때문은 아니고, 오른쪽 눈을 가린 안대 때문에 사이드미러가 시야에 바로 들어오지를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세희는 그의 시선이 신경쓰이는지 자꾸 몸을 꼼지락거렸다.

그는 조수석 쪽 사이드미러를 곁눈질하며 말했다.

“세희야, 사이드미러 때문에 그런 거니까 신경 안 써도 돼.”

“아, 네.”

“우와, 자기 때문에 그러는 줄 안 거야? 완전…….”

태화가 핀잔을 날리는 순간, 왼쪽 교차로에서 차 한 대가 신호를 무시하고 쌩달려나왔다.

“염병하네.”

상호는 중얼거리며 침착하게 브레이크를 밟았다.

거기까진 좋았는데, 급제동을 하자 세희의 몸이 앞으로 확 쏠렸다. 그는 반사적으로 팔을 뻗어 손바닥으로 세희의 쇄골을 눌렀다.

신호위반을 한 자동차는 속도를 줄이지 않고 그대로 쭉 직진해서 사라졌다.

다행히 아무도 다치지 않았지만, 성질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저게 뒈질라고 환장을…….”

옛날 성격이 튀어나오려던 상호는 아이들이 듣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그는 세희를 잡은 손을 떼려 했다.

그런데 그녀가 손을 꼭 잡고는 놔주지 않았다. 상호는 세희를 돌아보았다.

깜짝 놀랐는지 붉게 상기된 얼굴로 정면만 응시하고 있었다.

“세희야?”

손 아래에서 그녀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놀랐어?”

물어도 대답 없이, 세희는 그의 손을 꼭 붙잡은 채로 쇄골에 지그시 눌렀다.

상호는 그녀가 정신을 차리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뒤쪽에서 침음이 들렸다.

“끄응…… 쌤.”

혹시 태화가 다친 걸까, 상호는 급히 뒤를 돌아보았다가 당황했다.

허리를 숙이고 있던 태화의 뿔이 앞좌석에 깊이 틀어박혀 있었다.

“태화야?”

“저 이거 좀 뽑아주세요…….”

태화가 낑낑대며 앞좌석을 밀었다.

상호는 그녀의 뿔을 잡으며 한숨을 쉬었다.

‘빨리 큰 차로 바꿔야지…….’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