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다음 날. 등교 시간.
교실로 향하던 상호는 복도에서 태화를 마주쳤다.
“아, 태화야.”
그의 시선이 그녀의 치마로 향했다. 뭔가 미묘하게 느낌이 달랐다.
“……아직 안 늘린 거지? 내일 늘려올 거지?”
“늘렸는데요!”
태화가 울상을 지었다.
“1센티나 늘렸는데! 어떻게 못 알아볼 수가 있어요? 흥!”
“1센티가 많이 늘린 거야?”
상호는 침음하며 그녀의 다리를 살폈다. 치마 끝이 허벅지의 반보다 살짝 위에 있었다.
“조금만 더 늘려오면 안 될까?”
“으음…… 그러면 내일, 아니다. 매일 아침마다 맞춰 보세요. 늘렸는지 안늘렸는지.”
“응?”
태화는 당황하는 상호를 보며 웃었다.
“그러면 쌤이 제 다리만 계속 보겠죠?”
그녀는 놀리듯이 치마 끄트머리를 살짝 들어올리고는 교실로 쏙 들어가 버렸다.
상호는 그녀가 있던 자리를 멀거니 바라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에휴, 늘렸으면 된 거지…….’
그는 교실을 향해 터덜터덜 걸어갔다.
학부모는 하늘과 같다
수요일.
방금 막 국사 수업이 끝난 참이었다. 상호는 칠판을 지우며 아이들을 향해 말했다.
“다음 교시 밖에서 하지? 밖에서 기다릴 테니 옷 갈아입고 나와.”
“네.”
“선생님…….”
세희와 태화의 대답 사이로 조그마한 목소리가 기어나왔다.
상호는 나빛을 보며 눈을 둥그렇게 떴다.
“응? 나빛이 왜?”
“저 체육복 집에 놓고 왔나 봐요…….”
나빛은 안절부절못해하며 상호의 눈치를 살폈다. 가슴 앞에 모인 양손이 초조한 듯 꼬물거렸다.
상호는 세희와 태화를 둘러보았다.
“세희는 무예라서 체육복이 다르고……. 태화야, 기숙사에 체육복 있지?”
태화는 꼬리 때문에 치마만 입으니까, 남는 바지가 있을 터였다.
그런데 태화가 그의 눈길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팔았는데…….”
“팔아?”
“여고생 체육복은 비싸게 팔 수 있어서…… 어차피 전 안 입으니까요.”
그게 왜 비쌀까. 상호는 모르는 이야기였다.
“어쨌든 없다 이거네. 음…….”
세희와 태화에게 사복이 있긴 하겠지만, 흙투성이가 될 게 뻔한데 억지로 빌려주라고 할 순 없었다.
상호는 잠시 고민하다가 나빛에게 물었다.
“선생님 거라도 입을래? 숙소에서 가져오게.”
“아니요, 그러면 그냥 이대로 수업 받을게요. 괜찮아요.”
“그러다 무릎 까진다.”
“저는 제가 치료하면 돼요.”
나빛이 애써 밝게 웃었다.
상호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다들 준비하고 나와. 운동장에서 기다릴게.”
“네~.”
그는 아이들의 대답을 들으며 반을 나섰다.
***
“꺅!”
나빛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곰인형의 공격을 피하다가 발이 꼬여 넘어진 것이었다. 상호는 서둘러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괜찮아?”
“아으으…….”
나빛이 울먹이며 고개를 들었다. 까진 무릎에서 피가 또르르 흘러내렸다.
무릎뿐만이 아니라 교복도 온통 흙투성이가 되어 버렸다.
상호는 그녀를 일으켜서 바로 앉혔다. 그가 나빛의 어깨를 털자 흙먼지가 풀풀 날렸다.
“말이 씨가 됐네. 아이고…….”
“으…….”
나빛이 울상을 지으며 무릎으로 손을 뻗었다. 손에서 은은한 빛이 났다.
피부로 열기가 느껴지는 빛은 아니었지만, 느낌이 따스했다.
그 빛이 지나간 자리마다 새 살이 돋아나더니 금세 피부가 말끔해졌다. 상호는 그 모습을 보고는 나빛의 등을 토닥였다.
“그래도 금방 치료하네. 다행이다.”
“이 정돈 별거 아니예요.”
나빛이 웃었다.
그녀는 언제 다쳤냐는 듯 벌떡 일어나서 곰인형을 향해 방어막을 쳤다. 상호는 원래 나빛에게 쉬라고 말하려 했지만, 그녀가 수업을 하고 싶어하는 것 같아서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대신에 인형을 다시 조종했다.
“간다, 나빛아.”
“네!”
곰인형이 방어막을 향해 달려들었다.
***
종례 시간.
상호는 평소보다 유난히 꾀죄죄해진 나빛을 바라보았다. 부잣집 아가씨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흙먼지가 교복 여기저기 남아 있었다.
“나빛이는 가면 빨래부터 해야겠다.”
“헤헤…….”
웃기는 하지만 어째 뭔가 불안한 눈치였다. 상호는 그런 그녀의 기색을 눈치 채고 물었다.
“무슨 일 있어?”
“아니요…….”
나빛은 눈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눈빛을 가려버렸다. 그가 읽을 수 없도록.
“괜찮아요. 별 일 아니예요.”
“그래?”
캐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상호는 더 묻지 않고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고생했고, 내일 보자.”
“네!”
“안녕히 계세요.”
태화와 세희는 크고 밝게 인사하며 교실을 나섰지만, 나빛은 풀이 죽은 표정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상호는 그런 그녀를 보며 지금 붙잡아서 상담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
‘……괜찮다는데 지나치게 간섭하면 안 되겠지. 일단 내일 지켜보고 결정해야겠다.’
그는 문을 잠그며 퇴근할 준비를 했다.
내일 나빛을 볼 수 없게 된다는 것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채로.
***
다음 날 아침.
아직 아이들이 등교하기 전, 상호는 교무실에 앉아 마나 이론에 대해 공부하고 있었다.
오늘따라 왼쪽 다리가 쑤시고 저린 게 뭔가 느낌이 좋지 않았다.
‘염병, 이거 아무리 봐도 틀린 내용인데…….’
그가 잔뜩 눈살을 찌푸리며 두꺼운 책의 페이지를 넘기는데, 갑자기 교무실 문이 부서질 듯이 열렸다. 상호는 고개를 퍼뜩 들었다.
“상호 씨! 상호 씨이이!”
뛰쳐들어온 사람은 설미였다.
그녀가 부리나케 달려와 상호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사, 상호 씨. 혹시 상호 씨 학생 중에…… 아차.”
설미는 자신의 뺨을 찰싹찰싹 때리고는 상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상호 씨네 반에 태궐그룹 회장님 따님 있어?”
“아…….”
상호의 속이 뜨끔했다.
나빛의 아버지.
‘올 것이 왔구나.’
국내 굴지의 대기업, 태궐그룹의 회장.
그러나 그딴 직위는 중요치 않았다. 돈이 많든 적든, 신문 1면에 오르내리는 유명인이든 아니든 상호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단 하나.
학부모라는 것.
교사에겐 하늘과 같은 존재였다.
‘나빛이가 걱정한 게 이거였구나.’
흙 때문에 들켰을 테다. 상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있어요. 혹시 학교로 오셨어요?”
“큰일났어! 지금 교장실에서 화내고 계셔. 빨리 가자. 빨리!”
설미가 상호의 팔을 어깨에 둘렀다. 상호는 그녀의 부축을 받으며 빠르게 교장실로 향했다.
교장실이 시야에 들어오기도 전부터 성난 고함소리가 들렸다.
설미의 불안한 눈빛이 상호를 향했다.
“들어가자마자 절부터 해.”
“아무리 그래도 절은 좀…….”
“해! 상호 씨 짤리면 또 내가 막내란 말이야.”
상호는 설미에게 등짝을 얻어맞으며 교장실 문 앞에 섰다.
‘……돌겠네.’
진짜 절이라도 해야 할까. 상호는 한숨을 푹 쉬고는 문고리를 잡았다.
설미가 양손을 기도하듯 모아잡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잘 하고 와.”
상호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문을 열었다. 소란스럽던 안쪽이 일시에 조용해졌다.
총 네 명이었다. 해련과 처음 보는 남자 셋. 해련은 늘 그랬듯 책상 앞에 앉았고, 남자들은 전부 소파에 앉은 채였다. 모두의 시선이 방에 들어온 상호를 향했다.
한 명은 신문에서 가끔 본, 수염을 단정하게 기른 올백머리의 중년 사내.
그 옆에는 젊고 다부진 체격의 청년.
그 앞에는 날카로운 인상을 가진 30대 정도의 사내가 마주앉아 있었다.
‘누구지?’
상호는 잠깐 고민했다. 일단 중년 사내는 나빛의 아버지고, 그 옆에는 경호원일 것이고.
그런데 그 앞에 앉은 사내는 누구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아니, 생각해보니 누구인지 알 것도 같았다.
학교 관계자이면서도 그가 본 적 없는 사람. 그리고 교장과 태궐그룹 회장이 모인 자리에 떡하니 앉아 있을 정도로 무언가를 대표하는 사람.
예현여고의 이사장.
‘……이겠지, 아마도.’
상호는 문을 닫고 허리를 꾸벅 숙였다.
“강상호입니다.”
“당신이 강상호야?”
올백머리 중년 사내가 벌떡 일어섰다. 얼굴에 노기가 가득했다.
“당신이 우리 딸한테 바람 넣었어? 신앙인도 싸워야 한다고?!”
상호는 갑자기 확 말대꾸가 튀어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전장에서 직접 굴러본 그의 입장에서는 신앙인도 당연히 싸울 줄 알아야 한다는 게 상식이었다.
싹싹 빌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들어왔는데도 자꾸 속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그래도 화를 낼 수는 없었다.
“분명 당신 말고 다른 선생으로 신청했는데, 어떻게 당신이 담임이 된 거야?
이 학교 뭔가 잘못된 거 아니야?!”
“죄송합니다, 아버님.”
상호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따님을 맡겨만 주신다면…… 스스로 자기 몸 지킬 수 있는 아이로, 자기 앞가림 충분히 해내는 아이로 키우겠습니다.”
“내 딸 앞가림은 내가 하면 돼!”
나빛의 아버지, 하봉진이 으르렁거렸다.
“지키는 건 경호원 시키면 되고! 당신이 뭘 안다고 우리 애를 싸우게 해? 나 빛이는 성력 치료만 잘 하면 돼! 그게 내가 이 학교에 학비를 내는 이유야!”
상호는 말없이 잠자코 들었다.
“당신이 가르치다 애가 자기가 싸울 줄 안다고 착각하면, 그래서 몰래 헌터일 하다가 사고나면, 당신이 책임질 거야? 책임질 수 있느냐고!”
몰래 헌터 일을 하다가 사고난 아이. 그 말이 상호의 역린을 건드렸다.
상호는 그렇게 된 아이를 이미 한 명 알고 있었다.
“……그게 무서우시면 더더욱 제게 맡기셔야 합니다.”
상호의 말에 봉진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그건 무슨 억지야?!”
“경호원만 철썩 믿고 있다가, 경호원보다 강한 몬스터가 갑자기 나타나면 어떻게 합니까? 아무것도 못하고 죽어야 합니까?”
“그런 식이면 안 죽는 사람이 어딨나!”
“현실에선 그런 일이 허다합니다.”
“현실? 당신이 뭔데 아는 척을 해!”
상호는 해련과 눈을 마주쳤다.
해련은 말없이 눈을 감았다. 다 이해한다는 듯.
상호의 시선이 다시 봉진을 향했다.
“그냥 퇴역 헌터입니다.”
“그런 주제에……!”
“저는 최선을 다했는데도 죽은 사람들을 수없이 봐왔습니다.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훨씬 더 쉽게 죽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학생들은 절대 죽게 하지 않으려고, 자기 능력 내에서 최선을 다해 싸우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게 무예든, 마법이든, 주술이든, 신앙이든. 상관없이요.”
상호는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봉진을 바라보았다.
“나빛이는 아버님 생각보다 강합니다. 딱 1년만이라도 제가 가르치게 해 주시겠습니까? 2학년 때는 얼마든지 담임을 바꿀 수 있으니 그때까지만이라도 부탁드리겠습니다.”
봉진은 말없이 그를 노려보았다.
이윽고 그의 입이 열렸다.
“안 돼.”
상호의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봉진이 고개를 저었다.
“내 딸한테 전투를 가르칠 순 없어. 다음 주부턴 다른 선생에게 맡길 테니 그리 알게.”
“아버님…….”
“이미 결정했어. 이 교장, 부탁합니다.”
“정 그렇다면 아버님. 이 말 한 번만 들어 주십시오.”
“뭔가?”
“아버님 입장을 나빛이한테 잘 설명하시고…… 그 다음에 나빛이가 스스로 결정하게 해주십시오. 만약 나빛이가 담임을 바꾸겠다고 하면, 저도 깔끔하게 포기하겠습니다.”
봉진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
“왜 이렇게 내 딸한테 집착하는 거야? 당신…….”
“제자가 포기 안 했는데 선생이 포기할 순 없습니다.”
상호는 결연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봉진은 그 눈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고려해 보지.”
“감사합니다.”
상호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러자 여태까지 그들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날카로운 인상의 사내가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럭저럭 해결이 된 것 같군요. 회장님 바쁘실 텐데 이쯤 하고 일어나지요.
제가 교문까지 모시겠습니다.”
“그러지요. 아침에 미안합니다. 그래도 시간이 지금밖에 없어서.”
봉진이 교장실을 나갔고, 그 뒤를 경호원과 이사장으로 보이는 사내가 따랐다.
‘휴…….’
상호는 한숨 돌리며 해련을 보았다. 그녀도 그와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잘했어요, 강 선생.”
“잘한게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학생을 포기했다가는 이사장한테 더 찍혔을 거예요. 적당히 고집 부리는 게 나았어요.”
그쪽 이야기인가. 상호는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이사장님은 어떤 타입의 선생을 좋아하시는데요?”
“엄하고 뚝심있는 교육자. 나랑 비슷해요. 이사장이 강 선생을 안 좋아하는 건 그냥 능력이 증명이 안 돼서 그래요. 뭐 하다 온 사람인지 알았으면 엄청 좋아했을걸요. 강한 사람을 좋아하거든.”
겉으로 봤을 때는 날카롭고 사무적인 분위기라 전투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는 데, 들어보면 또 그런 건 아닌 모양이었다.
상호는 축 처진 채로 검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봉진과 다툰 건 그렇다치고, 나빛이 제일 걱정이었다.
“나빛이는 그럼 학교 안 온 건가요?”
“그렇겠죠. 왔다면 아버지랑 같이 왔지 싶네요.”
“후…….”
하필이면 나빛은 핸드폰이 없었다. 그녀와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상호는 답답해져 오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입맛을 다셨다.
“결석 처리해야겠죠?”
“그래야죠. 안 온 건 안 온 거니까. 학부모 눈치를 볼 필욘 없어요.”
해련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서 수업해요. 고생했어요.”
상호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교실로 향했다.
출석시간을 이미 훌쩍 넘겼다. 그가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태화와 세희가 반겼다.
“쌤 지각! 지각!”
“선생님, 나빛이 안 왔어요.”
상호의 근심어린 표정을 본 그녀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그래요?”
“나빛이 무슨 일 있어요?”
“너흰 걱정 안 해도 돼.”
상호는 출석부를 펴고 펜을 들었다. 출석란에는 위에서부터 세희, 태화, 나빛이 쓰여 있었다.
천세희, 체크.
이태화, 체크.
하나빛.
그의 손이 우뚝 멈췄다.
‘체크 안 하기가 엄청 어색하네.’
처음으로 공란이 생긴 날이었다. 상호는 고개를 들어 나빛의 자리를 쳐다보았다.
출석부의 빈칸처럼 비어 있었다.
그 또한 참으로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항상 저 자리에 그녀가 있었는데.
‘나빛이가 알아서 잘 하겠지. 바보가 아니니까.’
그는 그렇게 스스로를 안심시키며 출석부를 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