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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호는 세희와 대련했던 곳에 태화와 함께 도착했다. 아무도 오지 않는, 학교 부지 끄트머리의 외진 곳에.
주변은 적막했다. 상호의 예상보다도 더 조용해서 아무 소리도 들리질 않았다. 기합 소리도, 칼 소리도.
그는 태화를 보며 입술에 검지를 붙였다.
“소리 내지 마.”
그리고 핸드폰을 들어 다시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도 역시 받지 않았다. 하지만 받기를 기대하고 건 것이 아니었다. 상호는 눈을 감고 주변의 소리에 집중했다.
나뭇잎에 바람이 스치는 소리, 들고양이가 배수로를 지나는 소리.
그 사이로 부우웅거리는 기계적인 소리가 들렸다.
“저쪽이다.”
상호는 태화와 함께 소리가 나는 곳으로 향했다.
앙상한 나무가 보였다. 다른 나무들은 다 푸릇푸릇하게 잎이 돋아 있는데 그 나무만 잎이 유난히 적었다. 그 아래, 카펫처럼 빈틈없이 깔린 나뭇잎 위에 분홍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누군가가 쓰러져 있었다. 손에 검을 꼭 쥔 채로.
세희였다.
“세희야!”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상호는 서둘러 다가가서 세희의 상태를 살폈다. 몸에도, 검에도 혈흔은 없다.
당장 죽을 상처를 입은 건 아닌 듯했다.
땀에 푹 절은 것을 보니 아마 무리를 한 모양이었다. 숨도 잘 쉬고 있고.
그는 허공섭물을 써서 한쪽 팔으로 세희를 안아들었다.
“태화 넌 가서 밥 먹어. 선생님이 알아서 할 테니까.”
“세희 괜찮아요?”
“치료 받으면 괜찮을 거야.”
상호는 다른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 전화번호부 목록을 훑었다.
그가 보건교사의 번호를 찾는 동안 세희가 그의 어깨에 축 늘어졌다. 온몸이 가늘었다. 그리고 놀랄 만큼 가벼웠다.
전투를 업으로 삼았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몸. 그녀의 우월한 신체능력이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수련이 먼저가 아니라 잘 먹여서 살부터 찌워야겠다.’
상호는 세희를 안고 보건실로 향했다.
치마 좀 줄이지 마라
눈을 뜨자 익숙하지 않은 천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세희는 그 천장을 멀뚱히 바라보며 눈을 끔뻑였다.
‘내가 왜 여기…….’
분명 수련중이었는데 왜 여기 누워 있을까. 48번째로 나무를 걷어찬 이후로는 기억이 없었다. 새 검에 익숙해지려던 참이었는데.
얇은 파란색 담요가 몸에 덮여 있었다. 베고 있는 베개도 푹신했다. 주변에 커튼이 쳐진 것을 보니 자신이 누운 곳은 병상이고, 이 방은 병원, 혹은 그런 일을 하는 장소 같았다.
그녀는 옆을 돌아보았다가 놀라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상호가 다리를 꼰 채로 책을 읽고 있었다.
“서, 선생님?!”
“아, 일어났네.”
상호는 세희가 일어난 것을 보고 책을 덮었다.
“너 쓰러진 거 보고 깜짝 놀랐다, 진짜. 덕분에 보건선생님이 짜증내시더라.
휴일에 수련하다 쓰러지는 애는 처음 본다고.”
“아……, 죄송해요.”
“그래서 그냥 내가 돌보겠다고 하고 보내드렸어. 나중에 보면 감사하다고 말씀드려.”
“죄송해요…….”
“나한텐 안 그래도 돼.”
하지만 그의 표정은 살짝 굳어 있었다.
물론 쉬는 날에 몇 시간씩 환자를 돌보게 되어서는 아니었다. 그는 날카로운 눈빛을 보내며 세희의 손목을 잡았다.
어찌나 가느다란지 뼈가 그대로 잡혔다.
“너는 네 몸에 미안해야 돼. 세희 너 몸무게 몇이야?”
“40이요.”
“3키로 찌우기 전까진 칼 압수야.”
“네?!”
세희는 청천벽력이라도 맞은 것처럼 머릿속이 멍해졌다.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상호는 울먹이는 그녀를 보며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검 중독이야, 검 중독…….’
“3키로 찌우는 건 일도 아니잖아. 그리고 더 찌워야 돼. 일단 3키로만 찌워.”
“그건…… 조금…….”
“그냥 살을 찌라는 게 아니라 근육을 만들어야 하니까 찌우라는 소리야.”
“저, 저 살 찌는 게 어려워요…….”
그때 누군가가 커튼을 확 열어젖히고 소리쳤다.
“뭐 이년아?! 살 찌는 게 어째?”
태화였다.
태화는 단숨에 침상에 달려들어 세희 위에 올라탔다. 하트 모양 꼬리가 세희의 뺨을 찰싹찰싹 때렸다.
“이 입이! 그런 망발을! 하지!”
“아야! 꺅!”
세희가 당황하며 몸을 웅크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세희는 이내 태화의 볼을 꼬집으며 반격에 들어갔다. 아무리 몸이 말랐어도 엄연히 무예 전공이라 싸움은 세희가 더 잘했다.
세희의 헤드락에 걸려버린 태화가 새빨개진 얼굴로 팔을 버둥거렸다.
“켁켁…… 항복! 항복!”
상호는 뒤엉킨 그녀들을 떼어놓았다.
“어허, 그만, 그만.”
“쌤! 얘 항복했는데도 계속 때려요!”
“네가 시작했잖아. 세희도 그만해.”
“네.”
세희는 언제 싸웠냐는 듯이 다소곳하게 앉아 흐트러진 머리를 새침하게 쓸어 넘겼다. 그 모습을 본 태화가 혀를 찼다.
“어유, 착한 이쁜이 납셨네…….”
상호는 그런 그녀들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천애고아인 세희는 어른의 격려와 칭찬을 바라며 자랐고, 가정폭력의 피해자인 태화는 어른과 싸우며 살아왔다. 두 아이의 성격차는 그런 과거에서 기인했다.
이 둘을 어떻게 해야 친해지게 만들 수 있을까.
상호는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앞으로 주말엔 같이 밥 먹자. 이렇게 셋이서.”
태화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김치……만 먹으라는 건 아니죠?”
“먹고 싶은 거 사 줄게. 배달이든 외식이든.”
“진짜요?! 아싸!”
태화는 벌떡 일어나 방방 뛰었지만, 세희는 곤란해하는 표정이었다.
“저는 괜찮아요…….”
“너 먹으라고 사주는 거야.”
지금까지 상호는 교사가 학생에게 가르침 이외의 것을 주면 안 된다는 입장이었지만, 생각이 바뀌었다. 헌터는 싸우는 직업이고, 싸우려면 몸을 만들어야 한다.
즉, 잘 먹이는 것도 일종의 교육이었다.
“토요일이든 일요일이든, 최소 한 번은 같이 먹는 거야. 알았지? 오늘부터.”
상호는 세희와 태화를 차례로 돌아보며 물었다.
“지금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태화가 눈을 반짝였다.
“저 그럼 백아웃 스테이크…….”
“태화는 아침에 먹었으니까 빼고.”
“너무해애애!”
***
다사다난한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이 되었다.
상호는 이른 아침에 남교사 숙소를 나섰다. 짚고 있는 검은 세희에게서 압수한 자신의 검이었다. 세희의 부러진 원래 검도 그의 방에 있었다.
필요할 때만 잠시 빌려주고, 끝나면 다시 압수하는 식으로 수업할 계획이었다.
“쌔애앰~~!”
뒤쪽에서 펑 하는 소리와 함께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지 않아도 누군지는 뻔했다.
상호는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일찍 나왔네? 등교 시간 아니잖아.”
“헤헤, 창문에서 쌤 보여서 나왔어요.”
그녀는 블라우스와 치마만 입고 있었다. 조끼도, 넥타이도 없이 맨발로 슬리퍼만 신은 것을 보니 옷을 갈아입던 와중에 그를 발견하고 바로 공간이동을 쓴 모양이었다.
상호는 그녀의 차림새를 보다가 치마가 확 짧아진 것을 발견했다.
“너 치마 줄였냐?”
이게 치마인지 천쪼가리인지 구분이 안 될 지경이었다.
심지어 주름치마라서 딱 달라붙지도 못하고 위험하게 살랑거렸다. 태화는 방글거리며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다리가 좋으시다면서요?”
“닭다리 말했지 언제 네 다리랬어? 너 이건 안 돼. 갈아입고 학교 와.”
상호는 이 문제에서는 절대로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딱 잘라 말했다.
하지만 태화는 입을 뾰로통하게 내밀고 샐쭉한 눈빛을 보냈다.
“다른 치마도 다 줄였어요. 저 꼬리 때문에 짧아야 편하단 말이에요.”
“꼬리를 치마 위로 빼면 되잖아.”
“그러면 치마를 허리가 아니라 엉덩이에 입어야 되는데요. 제 꼬리 어디 달렸는지 보실래요?”
“너 혼난다, 진짜.”
상호는 짐짓 눈에 힘을 주고 무서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저번 주만큼 늘려 와. 수요일까지. 안 그러면 치마 다 찢어버리고 바지만 입게 할 거야.”
그런데 태화는 오히려 얼굴을 붉히며 배시시 웃었다.
“그거, 에헤, 좀 좋은데…….”
“뭐?”
“쌤이 제 치마 찢는 거…… 히힛.”
상호는 얼이 빠져서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한숨을 푹 쉬었다.
“태화야.”
“넹.”
“치마 늘릴 때까지 말 걸지 마.”
“……네?”
이번엔 태화가 얼이 빠졌다.
상호는 그녀를 내버려두고 휙 돌아섰다. 정신을 차린 태화가 그의 팔에 달라붙었다.
“아이, 쌤. 그게 뭐예요~. 애도 아니고…….”
“…….”
“저 속옷 보일 일도 없다니까요. 계단도 안 쓰잖아요. 어차피 공간이동으로 다니는데……. 앉을 때도 담요 덮는단 말이에요.”
태화가 아양을 부리며 사정사정을 했지만, 상호는 반응하지 않았다. 아예 없는 사람 취급중이었다.
그러자 태화가 팔을 놓고 픽 토라졌다.
“치……, 몰라요! 저도 쌤이랑 말 안 해요!”
“…….”
“조회때도 종례때도 인사 안 할 거야! 흥!”
“…….”
상호는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숨기기 위해 걸음을 재촉했다. 이 유치한 꼴을 부대원들이 봤다면 분명 죽을 때까지 놀렸으리라.
그는 본관 문을 열고 들어가기 전에 뒤를 돌아보았다.
태화가 있던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검은 연기 한 자락이 허공에 흩날려갈 뿐이었다.
‘이 방법이 맞는지 모르겠네…….’
상호는 입맛을 다시며 수업 준비를 위해 교무실로 향했다.
***
조회 시간.
교실에 들어온 상호는 교탁에 출석부를 폈다.
“세희 왔고.”
“네.”
“나빛이 왔고.”
“네.”
세희와 나빛이 차례대로 대답했다.
상호는 한숨을 푹 쉬었다.
“태화는…….”
안 왔다.
세희와 나빛의 가운데 자리가 비어 있었다.
세희가 그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전화해 볼까요?”
“아니, 깨어 있을 거야.”
상호는 그렇게 대답하며 고민에 빠졌다. 분명 일찍 일어나서 준비하고 있었는데 왜 안 오는 건지.
당연히 둘 중 하나였다. 정말정말 낮은 확률로 갑자기 안 좋은 일이 생겼거나.
삐져서 뻗대는 것이거나.
‘그래도 확인은 해야지.’
기숙사에 가봐야 할 것 같았다.
그는 문으로 걸어가며 세희와 나빛을 향해 말했다.
“사감선생님 뵙고 올게. 자습하고 있어.”
그리고 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런데 손이 닿기도 전에 문이 절로 열렸다.
“──윽.”
그를 맞닥뜨린 태화가 흠칫하며 뒤로 물러났다.
아픈 안색은 아니었다. 대신 단단히 토라진 표정이었다. 붉고 도톰한 입술이 아기새처럼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상호는 그녀의 치마를 살폈다. 혹시 그새 늘려온 것은 아닐까.
‘……원래 길이가 어느 정도였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원래도 짧았던데다가 그렇게 관심 있게 본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아무리 봐도 헷갈렸다. 살짝 늘어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늘려온 걸 못 알아보면 엄청 속상해할 텐데…….’
그렇긴 해도 짧은 건 매한가지였다. 그의 기준에는 한참 모자랐다. 아무리 못해도 허벅지의 반은 가려야 된다는 게 그의 생각인데, 지금 태화의 치마는 가랑이 바로 밑까지만을 간신히 가리고 있었다.
‘안 늘린 것 같기도 하고. 젠장, 제자 치마 길이를 어떻게 일일이 기억해?’
상호는 태화의 허벅지를 관찰하다가, 문득 너무 대놓고 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들었다. 태화의 붉은 눈동자가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태화는 아랑곳않고 그를 지나쳐 교실로 들어갔다.
“흥!”
작은 콧방귀와 함께.
상호는 한숨을 푹 쉬었다.
‘누가 잘못한 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