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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호는 수업 결과가 기분이 썩 좋았다. 뭘 가르쳐야 할지 확연하게 보였던 것이다.
세희는 손은 빠른데 눈이 느리고.
태화는 센스는 좋은데 뒤를 생각 안 하고 질러버리는 경향이 있었다.
나빛은 일단은 전투 인원이 아니니 그렇다 치고.
이제 남은 것은 한 명씩 차근차근 조언해 주는 것. 덤으로 담임으로서의 면담도.
“앉아.”
사복 차림의 세희가 그의 앞 의자에 앉았다. 하얀 후드티와 밝은 색깔 청바지였다.
지금은 방과 후. 그것도 종례 직후가 아니라 상당히 시간이 지난 때였다. 3월초의 짧은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가고 있었다. 주홍빛 하늘이 커튼을 넘어 교실 안을 물들였다.
곰인형과 싸우고 나니 땀에 젖고 흙투성이가 되어서, 교복으로 갈아입지 말고 종례 후 기숙사에 가서 씻고 오도록 했다. 덕분에 세희의 머리카락에선 싱그러운 샴푸 향기가 났다.
상호는 그녀의 책상 앞 의자에 앉아 반으로 갈라진 곰인형을 기워 붙이는 중이었다.
“싸우면서 느낀 게 있어?”
그의 물음에 세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뭔데?”
“너무 느려요.”
“뭐가?”
“검이요.”
그녀는 검을 책상에 올려놓고 빤히 내려다보았다.
“조금 더 빨랐으면 닿을 수 있었는데…….”
상호는 그녀가 눈보다 손이 빠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손이 느리다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더 빠르게, 속도만 고집하며 그 방향으로만 자신을 채찍질했다.
아마 중학생 수준에서는 그 정도 눈으로도 충분히 다른 학생들을 따라잡을 수 있었을 테다.
이제는 더 나아가야 했다.
“넌 손은 충분히 빨라.”
그의 말에 세희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제가요?”
“아까 보니까 찌르는 공격을 주로 하더라고. 맞지?”
“네. 찌르는 게 더 효과적이니까…….”
“찌르기를 자주 쓰는 사람들은 시야가 좁아지는 버릇이 있어. 칼끝에 시선이 몰리고, 거기 집중하고……. 그렇게 되면 그 좁은 시야에서 상대가 살짝만 벗어나도 놓쳐버리게 돼.”
상호는 바늘을 살짝 들어올렸다.
“시야가 좁아지면 안 된다. 몬스터하고 싸울 때는 특히 더. 몬스터는 무리짓는 놈들이 많거든. 그런데 한 놈한테만 집중하면 언제 기습을 당할지 모르니까.”
“네.”
세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언은 끝. 그는 곰인형을 내려놓고 세희 옆 태화의 책상에 올려놨던 학생기록부를 집어들었다.
“이제 면담 좀 하자. 괜찮아?”
“네.”
상호는 기록부를 펴고 그녀의 신청서를 읽었다.
“부모님이 안 계시지?”
“네.”
“한 번도 뵌 적 없어? 아기 때부터 그랬냐는 뜻이야.”
“네. 고아원에서 자랐어요.”
거침없는 질문에도 세희는 담담하고 의연하게 잘 대답했다.
그는 그녀를 힐끗하고 입을 열었다.
“선생님도야. 어릴 땐 계셨지만.”
그 말에 세희의 눈빛이 달라졌다. 더 부드럽고 여리게.
“그래요?”
“응. 태화도 어머니가 안 계셔.”
다른 학생의 집안 이야기를 하는 게 좋은 일은 아니었지만, 그에게도 나름 생각이 있었다.
“친하게 지내. 아, 물론 나빛이랑도.”
“그럴게요.”
상호는 다음 이야기로 넘어갔다.
“어쨌든 그러면 친척도 없겠네. 등록금은 어떻게 하고 있어?”
“저는 중학교 성적이 좋아서 1학년 등록금은 면제받았어요.”
“그럼 2학년부터는?”
“대출이요. 학교 졸업하고 갚는 거예요. 아니면 1학년 성적이 또 좋으면 또 면제를 받고…….”
“성적이 얼마나 좋아야 면제를 받는데?”
“학년 10등……안으로 알고 있어요. 1등은 지원금도 추가로 받는대요.”
“잘 알고 있네.”
홀로 자란 아이라 그런지 스스로에 대한 일들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상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네 목표는 중학교 때처럼 학년 1등이겠네?”
세희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네.”
“자신 있어?”
“글쎄요. 아직 다른 애들이 얼마나 강한지는 잘 모르지만…….”
그녀는 검지로 책상 위의 칼 손잡이를 툭툭 건드리며 생각에 잠기더니, 곧 상호와 눈을 마주치며 말을 맺었다.
“자신 있어요.”
“그래?”
“네. 그러니까 검술 가르쳐 주세요.”
자신 있냐고 물어봤더니 오히려 요구를 한다. 상호는 당돌한 세희의 표정을 보고 입꼬리가 조금 올라갔다.
지금 그의 눈에는 나뭇잎을 베던 소녀와 세희가 겹쳐지고 있었다.
“물어보면 알려줄 수는 있지. 하지만 수업 중엔 못 가르쳐. 알지?”
태화와 나빛이 있는데 세희만 가르칠 순 없으니까. 애초에 다른 둘을 가르치면서 병행할 수 있을 정도로 얕은 내용이 아니었다.
그녀도 대충 배우려고 말하는 건 아닐 터.
“나머지 공부로 배워야 할 거야. 괜찮겠어?”
상호가 묻자 세희는 단 1초도 고민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 약속 하나만 하자.”
그는 주먹을 쥔 채로 새끼손가락만 펴 그녀에게 내밀었다.
“내가 포기하기 전까지 포기하지 마. 나도 네가 포기하기 전까진 포기 안 할 테니까.”
세희는 손을 들다가 멈칫했다.
“그냥 서로 포기하지 말자는 말 아니에요?”
“그렇지 뭐.”
“……좋아요.”
책상에 놓인 검 위로 두 사람의 새끼손가락들이 엮였다.
상호는 살짝 놀랐다. 가느다란 손가락과는 달리 손바닥 쪽에 굳은살이 단단하게 박혀 있었다.
“약속 어기면 어떻게 해요?”
“뭐, 벌칙이라도 줄까?”
“제가 어기면 선생님 집 가서 평생 집안일 다 할게요.”
곤란한 말을 서슴없이 하는구나, 상호는 웃지도 못하고 헛기침만 했다.
“크흠, 그냥 서로 믿자.”
“그래요.”
그녀가 살짝 웃었다.
“언제부터 가르쳐 주실 거예요?”
“학기초에는 바빠서 힘들 거 같고…….”
그는 학생기록부를 톡톡 쳤다.
“대신 숙제를 하나 줄게.”
“숙제요?”
“응. 나무를 발로 차서, 떨어지는 나뭇잎을 몇 개까지 벨 수 있는지 세어 와.”
특별한 이유는 없고, 그냥 궁금해서 내 준 테스트였다. 그때 그 소녀와 어느 정도 차이가 나는지.
그 말을 들은 세희는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본 상호는 세희가 당장 오늘부터 밤을 세워가며 개수를 늘리려고 노력할 거란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열심히 안 해도 돼. 지금 네가 어느 정도인지 알아보려고 하는 거니까.”
“네.”
입으로는 예쁘게 대답하지만, 눈빛을 보니 귓등으로도 안 들은 게 분명했다.
그 증거로 그녀는 지금 손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칼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상호의 이마가 지끈거렸다.
‘다음부터 세희 앞에서는 말조심해야겠군…….’
이태화
“우와! 테디 씨 부활했어!”
아침 조회 시간, 등교한 태화가 교실에 들어오자마자 방글방글 웃으며 한 말이었다.
문제는 그 말을 곰인형을 인정사정없이 걷어차며 하고 있다는 것.
“아파? 아파? 이렇게 무력하게 당하니까 기분이 어때? 꺄하하!”
“태화야, 앉자.”
“넹.”
그녀는 언제 그랬냐는 듯 자리에 다소곳이 앉았다. 상호는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제일 어려워 보이는 아이.
오늘 방과후에 면담할 상대가 그녀였다.
‘힘들다, 힘들어…….’
소위 ‘노는 아이’, 그 중에서도 줄타기를 잘 하는 여자 아이. 참으로 다루기 어려운 타입이었다.
상호도 그런 타입의 여자를 많이 봐 왔지만, 선생으로서 가르쳐야 하는 입장에 놓이니 여간 곤란한 게 아니었다.
그는 한숨을 쉬며 출석부를 덮었다. 꼴랑 세 명이 끝이라 부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자, 수업 시작하자.”
***
어제 곰인형으로 한 수업은 일종의 전투 수업.
예현여고의 수업에는 전투만 있는 게 아니었다. 몬스터의 생태, 법과 윤리, 도덕. 그리고 기초적인 수준의 국사, 국어, 가정.
그걸 담임이 다 가르쳐야 했다. 예현여고는 담임과 학생의 유대를 최우선시했기 때문에. 사실 연봉이 2억인데 못할 짓은 아니었다.
그래도 시험은 안 치는 것과 다름없었고, 겨우 중학교 수준이라서 상호도 충분히 가르칠 수 있었다. 교생으로 일하는 동안 공부를 끝내놓았기도 했고.
지금은 가정 시간.
상호는 가정 교과서를 펴고 목차의 첫 줄을 읽었다.
[단원 1. 성의 이해]
“자, 오늘은 2단원 청소년의 생활…….”
“지금 도망치고 계십니다!”
태화가 소리쳤다.
“1단원은요?”
“30페이지…….”
“에이, 쌤! 다른 반은 다 배우고 시험 볼 텐데 우리만 안 배우면 어떡해요.”
맞는 말이라 반박할 수가 없다. 상호는 결국 1단원이 시작되는 10쪽으로 돌아왔다.
그는 교과서를 쓱 읽어보고 그녀들을 바라보았다.
“솔직히 너희도 다 아는 내용 아니니?”
“몰라요.”
“저도 몰라요.”
처음에 대답한 태화는 그렇다 치겠는데, 이어서 대답한 나빛이 문제였다. 상호는 귀를 의심했다.
“뭐라고? 나빛이도 모른다고?”
“네.”
“중학교에서 안 가르쳐 줘?”
“네. 하나도 몰라요.”
그녀가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무리 그래도 완전히 모를 수가 있나.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얼마나 집이 보수적이면…….’
“알았다. 보자, 모든 생물은 번식을 통해 자손을 만들고, 이러한 번식의 방법에는 무성생식, 유성생식이 있다. 사람은 암수로 나뉘어 번식하는 유성생식…….”
“번식은 어떻게 해요?”
상호는 툭 끼어드는 태화를 무시하고 교과서를 계속 읽었다.
“……을 함으로서 보다 다양한 유전자를 나누어 가져 종족 보존에 유리해지게 되고, 더불어 가정을 이룸으로서 하나의 작은 사회를 구성…….”
“빨리 가정을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하고 아이를 보육해 완전한 성인으로서의 의무를 시작하게 된다.”
“아이는 어떻게 만들어요? 아이만 만들면 자동으로 어른 돼요?”
은근히 뼈가 있는 질문이었다. 의도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상호는 교과서를 덮으며 태화를 빤히 쳐다보았다.
“궁금해?”
“네!”
“알았다. 가르쳐 줄게.”
그가 물백묵을 들고 칠판 앞에 서자 태화가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냈다.
상호는 선을 찍찍 그어 막대기 인간을 두 명 그렸다.
“자, 여자랑 남자가 있어. 서로 사랑하는 사이야.”
그리고 둘을 네모난 이불로 덮었다.
“그러면 같이 자겠지?”
“네.”
“그냥 자면 허전하니까 손도 잡고 그러겠지?”
“네!”
“손을 잡아보니까 더 가까워지고 싶네? 그럼 이제 끌어안겠지?”
“네에에! 꺅!”
“그럼 학이 날아와서 아기를 놓고 날아간다. 그게 끝이야.”
“꺄아…… 엥? 네?”
태화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눈을 끔뻑였다. 상호는 팔짱을 꼈다.
“이게 진실이다.”
태화는 할 말을 잃고 입만 벙긋거리다가 양 옆을 둘러보았다. 세희는 미묘하게 웃음을 참는 듯했고, 나빛은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태화가 나빛을 보며 황당해했다.
“얘는 진짜로 믿는데요?”
애들 앞에선 뭔 말을 못하겠다, 상호는 입맛을 다시며 교과서를 폈다.
정확한 내용은 가정 시간이 아니라 성교육 시간에 배울 테고, 그건 그의 역할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이상한 질문 하지 마. 수업 계속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