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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시간.
상호는 급식소의 교직원 전용 입구에서 설미와 함께 줄을 서고 있었다.
바로 옆에 줄을 서고 있는 학생들이 이따금씩 그를 힐끔거리는 게 느껴졌다.
설미가 그를 돌아보며 씩 웃었다.
“상호 씨, 역시 인기 많네.”
“인기랑은 좀 다른 거 같은데요.”
그는 검을 짚으며 설미의 뒤를 따라갔다.
“몸이 멀쩡했으면 이렇게 안 봤겠죠.”
“몸이 멀쩡했으면 보는 걸로 안 끝났을 거야.”
“무슨 말이에요?”
“지금은 무서워 보여서 말을 못 거는 거지, 안대만 없었어도 모르는 여자애들이 쫄래쫄래 따라다녔을걸?”
상호는 설미의 말을 듣고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1학년보다는 2학년, 3학년 학생들이 더욱 유난이었다. 그동안 소문으로만 들었던, 교무실에 처박혀 있던 젊은 신입 남선생을 보겠다고 우르르 몰려들어 구경하곤 했다.
지금 줄을 서면서도 그랬다. 이미 밥을 먹고 나온 2, 3학년 학생들이 먼발치에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설미에겐 그런 그녀들이 한심하면서도 귀여운 모양이었다.
“에휴, 좋을 때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던 차에 교직원 전용 줄이 줄어들었고, 이윽고 상호의 차례가 왔다.
사립학교, 그것도 학비 높은 명문 사립학교라 그런지 급식이 상호가 먹었을 때와는 달랐다. 입학식이라고 힘을 준 건지 아주 휘황찬란할 지경이었다. 그는 식판을 보며 학생 때 먹었던 정체 모를 생선튀김과 부대에서 먹었던 콩나 물국을 떠올리고는 쓰게 웃었다.
그는 배식을 받은 후 교직원들이 식사하는 구역에 앉았다. 밥 먹을 때 이야기하는 것을 즐기지 않아 혼자 후딱 해치우는 것이 습관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아무도 없는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별안간 그의 옆에 누군가가 식판을 내려놓았다.
“쌤!”
옆을 돌아보니 태화가 실쭉 웃고 있었다.
“같이 먹어도 돼요?”
“응?”
상호는 살짝 당황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교직원이 식사하는 구역이라 학생이라고는 태화 한 명밖에 없었다.
그는 원래 남의 눈치 안 보고 사는 성격이었지만. 괜히 튀는 행동을 했다가는 앞으로 귀찮아질 게 뻔했다.
그렇다고 매정하게 돌려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래서 그냥 유연하게 대처하기로 했다.
“오늘만이야. 다음부턴 반 친구들하고 같이 먹어.”
“넹~.”
태화는 능청스럽게 대답하고 그의 옆에 앉았다.
상호는 태화의 뒤에서 촐싹맞게 흔들리는 악마 꼬리를 보고 꼭 강아지 같다는 생각을 했다. 저 꼬리가 그녀의 심리를 반영하는 게 맞다면, 지금은 꽤나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쌤.”
“응?”
“저 그거 먹어도 돼요?”
태화가 젓가락으로 그의 식판에 담긴 튀김을 가리켰다.
상호는 별 생각 없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먹어, 너.”
“이것도요?”
“응.”
“이거는요?”
“너 다 먹어.”
반찬을 싹 집어간 태화가 몸을 앞으로 숙이며 고개를 돌려 상호를 쳐다보았다.
“그럼 쌤은 뭐 먹게요?”
“난 밥이 제일 맛있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전쟁 때 한겨울에 야전에서 작전을 한 적이 있었다. 이틀 내내 쫄쫄 굶다가 오밤중에 겨우 밥 먹으란 명령이 떨어져서 보급받은 식량 봉투를 열었는데, 소금만 친 맨밥이란 걸 깨닫고 집어던질 뻔했다가 먹어보니 너무 맛있어서 서로 남은 걸 뺏어먹으려 했었다.
그러고도 전쟁 동안 벌레, 몬스터 시체 등을 생으로 먹은 후로는, 밥만 있으면 어떤 반찬이든, 아니 설령 반찬이 없더라도 절대 불평하지 않는 몸이 되었다.
맨밥을 퍼먹던 상호의 코앞에 튀김이 들이밀어졌다.
“드세요.”
그가 밥을 삼킨 다음 괜찮다고 말하려 입을 벌리는데, 태화가 그 안에 튀김을 쑥 집어넣었다.
그녀가 상호의 입에 넣었다 뺀 젓가락을 쪽 빨며 씩 웃었다.
“맛있죠?”
웃는 것이 어째 음흉한 것이, 꼭 계획대로 되었다는 표정이었다. 무슨 계획인지는 모르겠지만.
‘……요즘 애들은 어렵군.’
상호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태화는 뭐가 그리 좋은지 콧노래를 불렀다. 그녀의 등 뒤에서 하트 모양 꼬리가 연신 살랑거렸다. 봄낮에 산들바람 맞는 강아지풀처럼.
천세희
대부분의 선생들은 입학 첫날이라고 아무 수업도 하지 않았다. 오후가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상호의 반은 그렇지 않았다.
신입생들이 학교에 빨리 적응하려면 편안하게 풀어줘야 한다는 선생이 있고, 학기초부터 신나게 쪼아야 한다는 선생이 있지만, 그는 생각 자체가 달랐다.
적응은 하느냐 마느냐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그냥 새로운 환경을 마주하자마자 바로 적응을 완료해야 했다.
“어때? 불편하진 않아?”
상호는 운동장에 서서 체육복을 입은 그녀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세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편해요.”
평범한 트레이닝복과는 상당히 다르게 생긴 물건이었다. 온몸에 달라붙는 검은 타이즈, 그 위에 입은 검은 후드 집업.
근접전을 하게 될 세희에게 알맞도록 제작된 체육복이었다. 질기고 불에 타지 않는 재질로.
반면 태화와 나빛의 복장은 달랐다. 태화는 세희와 같은 집업을 입었지만 꼬리 때문에 교복치마를 그대로 입었고, 나빛은 평범하게 펑퍼짐한 체육복을 입고 있었다. 후방에서 지원하는 신앙 유형 헌터라서 그런 것이었다.
세희가 가죽장갑을 낀 손으로 허리에 찬 검을 만지작거렸다.
“저희 대련하는 거예요?”
“대련이지만 실전이라고 생각해줬으면 좋겠네. 자.”
상호는 커다란 갈색 곰인형을 운동장 흙바닥에 던졌다.
곰인형의 손에는 뿅망치가 달려 있었다.
“이게 나 대신 너희랑 싸울 거야.”
그가 손을 뻗자 곰인형이 스스로 일어났다. 상당히 커다란 인형이라서, 일어 서니 그녀들과 비슷한 정도의 키가 되었다.
나빛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로봇이에요?”
“아니, 내가 움직이는 거야.”
허공섭물. 내공을 뻗어서 사물을 조종하는 기술.
상호는 뛸 수가 없기에 그녀들이 얼마나 빨리 움직이는지를 보려면 이런 방식을 써야 했다.
“세희부터 시작하자. 둘은 물러나.”
“네.”
세희가 앞으로 나서고, 태화와 나빛은 뒤로 물러났다. 상호도 곰인형을 두고 그녀들 옆에 섰다.
너른 운동장 한가운데에서 세희가 검을 뽑았다.
“이번에도 똑같아. 너희가 공격하고 싶을 때 공격해.”
그의 말에 세희가 검을 치켜들고 곰인형 주위를 돌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눈빛을 쏘아내며.
방금 그가 주문한 대로 이 상황을 실전처럼 여기고 있는 것이었다.
상호는 그걸 깨닫고 슬쩍 흐뭇한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태화에게는 그냥 헛짓거리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달려들어~, 달려들어~.”
그녀가 팔을 붕붕 휘두르며 소리쳤다.
세희는 잠시 빈틈을 더 살피다가, 마치 슬라이딩을 하듯 한쪽 다리를 앞으로 쭉 뻗으며 자세를 낮추고 달려들었다.
그리곤 인형의 턱을 향해 칼끝을 번개처럼 내질렀다.
‘날카로운데.’
상호는 감탄하며 곰인형을 조종해 칼을 피했다. 옆으로 단 한 걸음만 움직여서.
삑
뿅망치가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내리쳤다.
세희는 몸을 움찔하고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문질렀다. 이렇게 쉽게 피할 줄 몰랐던 듯했다.
“어……?”
“기죽지 마. 내 시야가 더 넓으니까 어쩔 수 없어. 지금은 네가 어떻게 싸우는지를 알아보는 것뿐이야.”
상호는 그렇게 외치고 다시 인형을 조종해 세희를 공격했다.
곰인형이 펄쩍 뛰어 그녀를 향해 뿅망치를 내리찍었다. 세희는 그 궤적을 예측하고 아슬아슬하게 옆으로 빠졌다.
그런데 인형이 허공에서 세희를 향해 몸을 빙글 돌렸다.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움직임이었다.
삑
두 번째 공격이 세희의 어깨를 쳤다.
태화가 그 모습을 보고 소리쳤다.
“엑! 사기야!”
“꼬리가 굵은 놈들은 저렇게 움직여. 무게중심이 달라서.”
만약 그녀들이 이 사실을 모르고 리자드맨 같은 몬스터를 상대했다면, 적어도 한 번은 크게 다쳤을 것이다. 상호는 곰인형을 땅에 착지시켰다.
그때 세희가 왼손을 뻗어 곰인형의 멱살을 덥석 낚아챘다.
“오…….”
상호가 살짝 놀란 틈을 타, 그녀가 인형을 확 끌어당기며 오른손의 검으로 찌르기를 날렸다.
초근접거리에서 들어간 일격.
상호는 대부분의 몬스터라면 죽을 수밖에 없겠다고 인정했다.
‘근데 인형이 좀 비싸더라.’
째애앵
세희의 검이 시끄럽게 울었다. 꼭 돌에 부딪힌 것처럼.
그녀는 칼끝을 막은 뿅망치를 보고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뿅망치에 검푸른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앗…….”
“잘했어, 잘했어. 이제 그만하자. 이리 와.”
상호는 손뼉을 치며 그녀를 불러들였다.
“다음, 태화.”
이번엔 태화가 앞으로 나섰다. 그녀는 꼬리를 흔들며 걸어가다가 갑자기 검은 연기를 남기고 사라졌다.
태화가 다시 나타난 곳은 곰인형의 등 뒤였다. 그녀의 붉은 뿔 사이에 보랏빛 기운이 둥그렇게 뭉쳐져 있었다.
“이얏!”
기합과 함께 보라색 광선이 인형을 향해 날아갔다.
‘처음 보는 마법이군.’
상호는 인형의 허리를 숙여 광선을 피했다.
악마 융합체들은 인간과는 다른 마법을 썼다. 좀 더 본능적으로 마나를 사용하고, 주술을 섞어 기이한 마법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래서 평범한 인간 마법사들은 마법을 쓸 때 주문을 외웠지만, 악마 융합체는 그런 영창 과정이 필요가 없었다.
태화가 휘두른 손의 궤적을 따라 검은 결정의 창이 쏘아져 나갔다.
파파파팍
인형은 창을 요리조리 피하며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결착을 내기는 힘들어 보였다. 태화는 순간이동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었기에. 하지만 태화의 마법도 인형을 맞추기에는 너무 느렸다.
그녀는 잠시 뜀박질을 멈추고 손등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하아…….”
태화는 한숨을 쉬며 인형을 노려보더니, 검은 연기를 흩날리며 인형 주변을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녀가 지나간 땅에 시뻘건 불꽃이 피어올랐다.
둥그런 화염의 감옥은 인형을 향해 점점 조여들어갔다.
그 화염 위로 태화가 펄쩍 뛰어올랐다. 뿔 사이에 보랏빛 기운을 모은 채로.
“오호.”
불길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올라 상호의 시야를 막았고, 그 때문에 반응이 늦어 버렸다.
‘노린 건가?’
그는 흥미진진해하며 태화가 인형을 향해 광선을 날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히야아압!”
콰아아앙
보랏빛 폭발이 운동장 한가운데에 작렬했다.
시끄러운 폭음과 함께 땅이 진동했다. 시각, 청각, 촉각. 셋 모두 맛이 간 게 아니고서야 모를 수가 없는 폭발이었다. 본관의 창가에 학생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뭐야? 뭐야?”
“어느 반이야? 쟤네 누구지?”
“저긴 첫날부터 수업해?”
상호는 시끌벅적해진 학교를 뒤로하고 운동장을 바라보았다. 곧 연기와 흙먼지의 막이 걷히고, 움푹 파인 땅과 멀쩡한 인형이 드러났다.
태화는 착지를 잘못했는지 엉덩이를 쭉 뺀 채로 얼굴부터 땅에 처박혀 있었다.
내민 엉덩이에서 꼬리가 흐느적거렸다.
“으으……. 테디 씨 너무 강해…….”
꼬리는 한 번 경련하더니 축 늘어져 버렸다.
상호는 그녀에게 걸어가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흙을 털어주며 살펴보니 다친 곳은 없는 듯했다.
“괜찮아?”
“조심해요, 쌤. 귀여워 보이지만 엄청난 실력이…….”
“알겠으니까 가서 쉬어. 잘했다.”
“헤헤.”
태화는 키득키득 웃고는 세희의 옆에 가서 섰다.
마지막으로 남은 사람은 나빛. 그녀가 상호를 향해 걸어왔다.
그렇지만 상호는 손을 들어 막았다.
“나빛이는 거기 있어. 너는 반대로 할 거야.”
“반대……요?”
나빛이 회색 눈동자를 반짝이며 의문을 표했다. 그는 그녀의 발치를 가리켰다.
“이번엔 네가 거기서 방어막으로 인형을 지키는 거야. 내가 공격하고.”
나빛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바로 시작하자.”
상호는 검을 뽑았다.
아주 은은한 푸른빛이 검에 감돌았다. 가능한 한 약하게 내공을 불어넣은 것이었다. 그는 검기를 조절하며 나빛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양손으로 목걸이에 달린 신앙회의 문양을 잡고 눈을 감았다.
곰인형의 앞에 반투명한 황금빛 막이 나타났다. 신앙 유형 헌터의 성력으로 만든 방어막. 총알 정도는 우습게 막아내는 방어막이다.
그는 거기에 검을 살며시 가져갔다.
카가각
검은 금색의 막을 긁기만 할 뿐 나아가지 못했다.
방어막이 뚫리지 않자 상호는 점차 기를 강하게 불어넣었다. 흐릿하던 푸른 기운이 조금씩 짙어지며 뚜렷해졌다.
그래도 검은 막의 앞에 멈춰 있었다.
나빛의 방어막은 의외로 튼튼했다.
‘잘 버티는데?’
상호는 조금 더 힘을 줘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의 검에서 검푸른 불꽃이 조그맣게 타올랐다.
그렇게 검강을 쓰는 순간.
마치 두부처럼 검이 방어막을 썩뚝 가르고 지나갔다.
“앗!”
그와 나빛의 입에서 동시에 당황성이 터져나왔다.
그대로 휘둘러진 검에 인형이 깔끔하게 두 동강 나버렸다.
촤아악
“꺅! 테디 씨이이이!”
운동장에 태화의 처절한 비명이 울려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