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501)

***

그날 저녁, 상호는 소녀를 만났던 길에 갔다.

약속날은 아니었다. 11일을 채우려면 이틀이 남았다. 하지만 혹시 몰라서 나와 본 것이었다.

소녀는 오지 않았다.

‘당연하지, 오늘 만나기로 한 것도 아닌데…….’

상호는 마음 한켠에 피어오르는 불안감을 억누르며 집으로 돌아갔다.

***

다음 날에도.

그 다음 날에도, 소녀는 오지 않았다.

약속날까지, 밤이 깊도록 기다렸는데도.

그는 소녀가 발로 차던 나무에 기대어 멍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좀 더 일찍 만나서 일찍 가르쳤다면…….’

그가 후회할 일은 아니었다. 우연히 만난 인연이었고, 일주일만에 눈에 보일정도로 실력을 키우기는 불가능했다.

상호가 잘못한 일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냥 재능을 꽃피우기도 전에 짓밟은 세상이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가을의 밤바람이 골을 시리게 했다.

‘이렇게 하라고 내 앞에 나타난 거였냐?’

상호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전화를 걸었다.

“형.”

[얌마, 시간이 몇 신데 지금 전화를…….]

그는 검을 짚은 손에 힘을 주었다.

“할게, 선생.”

예현괴렵특성화여자고등학교

고등학교답지 않게 큰 건물이었다.

대학을 방불케 할 정도로 넓은 부지에 많은 건물. 전부 번쩍번쩍하고 세련된 최신식이었다.

상호는 교문 앞에서 발을 멈췄다.

교명이 검은 바탕에 금색으로 예스럽게 적힌 게 보였다.

‘예현괴렵특성화여자고등학교’

사립이라고 따로 쓰여 있진 않았지만, 그냥 건물부터가 사립이라고 시끄럽게 외치고 있었다.

일부러 일요일에 왔는데도 학교에 사복 차림 학생들이 돌아다녔다. 아마 기숙사가 있는 듯했다.

아직 애들을 만나기는 좀 부담스러웠다. 애꾸도 애꾸지만 절룩거리는 다리 때문에. 어린애들은 특히 그런 데에 관한 관심을 숨기지 않아서 더욱 그랬다.

그래도 부끄러운 일은 아니니까.

어차피 선생이 되겠다고 마음 먹은 이상 다 각오한 일이었다.

“쩝…….”

상호는 입맛을 다시며 교문으로 들어갔다.

예상대로 순식간에 주변의 눈길이 몰려들었다.

애꾸, 절름발이, 검.

어딜 가든 주목받는 조합이었다.

본관까지 가는 길이 멀기도 하다. 그는 한참 동안 주목을 받다가 마침내 본관으로 들어서서 시선들을 떨궈낼 수 있었다.

‘교무실…… 교무실이…….’

길다란 복도를 둘러보던 그는 안내도를 발견하고 그 앞으로 갔다.

‘2층이네.’

상호는 복도를 이리저리 살피다가 당황했다.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고?’

그의 등에 식은땀이 배어났다.

계단은 그에겐 태산 같은 존재였다. 바닥에 닿기만 해도 고통이 몰려오는 왼쪽 다리 때문에.

그는 계단 앞에 다다라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말이라서 건물 안은 한적했다.

그냥 확 기어갈까 생각해 봤지만.

‘그럴 수는 없고…….’

상호는 검과 난간을 힘껏 부여잡고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으며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옮기는데, 앞에 웬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 그림자의 주인에게서 당혹성이 튀어나왔다.

“괜찮으세요?”

상호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키가 작은 아담한 여인이 그를 말똥말똥한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단아하고 어른스러운 차림을 보니 학생은 아니고 선생인 듯했다.

그녀는 뭔가를 알아차린 듯이 손뼉을 쳤다.

“아! 오늘 오시기로 했던…….”

“네, 강상호라고 합니다.”

“다리가 불편하시다고 들었어요. 엘리베이터 못 찾으셨구나. 이따가 알려 드릴게요.”

“엘리베이터가 있었어요?”

상호는 맥이 빠져서 한숨을 쉬었다.

여인은 연갈색 곱슬머리에 베이지색 가디건, 고동색의 긴 치마를 입고 있었다. 키가 작고 얼굴이 어려서, 옷이 조금만 짧거나 색이 달랐다면 선생이 아니라 학생이라고 생각했을 터였다.

여인의 얼굴에서 놀란 기색이 사라지자 포근한 인상이 되었다.

“도와드릴게요. 마저 올라가요.”

도움을 마다할 입장이 아니었다. 상호는 그녀의 부축을 받으며 남은 계단을 올랐다.

계단을 다 오르자 여인이 물었다.

“괜찮겠어요? 교장실까지 데려다 드릴게요.”

“아뇨, 평지는 전혀 문제없어요.”

그는 검을 짚으며 여인의 옆에서 걸었다.

“선생님은 성함이…….”

“설미예요. 임설미. 상호 씨는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스물둘이요.”

상호의 대답에 설미가 당황했다.

“엄청 어리네요. 좀 비슷하거나 위일 줄 알았는데…….”

“임 선생님은요?”

“저는 스물넷이에요.”

“아하.”

상호가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데 설미가 뭔가를 항변하듯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도 제가 교원들 중에서 제일 어려요.”

상호는 ‘이젠 아닌 것 같습니다.’ 라고 말하려다가 관뒀다.

곧 그들은 교장실 앞에 도착했다.

설미가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교장선생님, 강상호 씨 오셨어요.”

“들어오세요.”

중후한 여인의 목소리와 함께 문이 저절로 열렸다.

그들은 깔끔한 방에 들어섰다. 창가에는 난초, 책상에는 검은 명패. 자개로 무지갯빛을 낸 장식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그곳에 적힌 이름, 이해련.

그 뒤로는 백발을 단정하게 묶고 몇 가닥을 이마에 늘어트린, 30대 초반처럼 보이는 여인이 앉아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상호는 허리를 푹 숙여 인사했다.

교장이 또렷한 눈빛으로 그를 훑었다. 눈빛에 묻은 세월을 보니 얼굴이 아니라 머리카락으로 나이를 가늠하는 게 더 확실할 듯했다. 늙은이가 젊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다만 상호에게는 생소한 모습이 아니었다.

교장에게도 그런 듯했다. 그녀의 눈이 반짝였다.

“구면이지요?”

“예.”

그녀의 물음에 상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습니다.”

설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는 사이세요?”

“오며가며 한두 번……뵈었죠.”

상호는 대충 얼버무렸다.

해련을 만난 것은 전쟁 때였다. 해련이 속한 부대는 최전방 중의 최전방이었고, 상호가 속한 부대는 그 최전방을 넘어 적극적으로 몬스터들을 섬멸하는, 일종의 돌격대였다.

둘 다 막중한 임무를 가진 부대였고, 그 구성원들 또한 최고의 강자들이었다.

소문이 안 날래야 안 날 수가 없었다. 최전방 부대에는 백발의 중년 여검사가 있다고.

상호의 부대가 보급을 위해 전선으로 돌아갈 때, 실제로 한 번씩 마주치기도 했다.

그러나 그뿐, 부대가 달랐기에 서로 자세한 정보는 몰랐고, 이야기를 나눈 적도 없었다. 그저 생김새만 기억하고 끝.

“그때보다 훨씬 더 젊어지신 것 같은데요.”

분명 전쟁 중 봤었을 땐 40대는 넘어 보이는, 확실히 중년이라고 부를 법한 외모였는데. 지금은 피부가 팽팽하고 말끔한 것이 꼭 나이를 거꾸로 먹기라도한 것 같았다.

그런데 해련은 상호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소문을 들어 본 모양이었다. 그녀의 입가에 미묘한 웃음이 떠올랐다.

“강상호 헌터. 별명이 미친개였지요.”

“크흠!”

상호는 헛기침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해련은 말을 이었다.

“성격이 아주 불같다던데, 학생들이랑 잘 맞을지 모르겠군요.”

“다 어릴 때 이야깁니다.”

그는 고개를 푹 숙였다.

해련이 설미를 향해 씩 웃었다.

“수고했어요, 임 선생. 돌아가서 일 봐요.”

“네.”

설미는 뭔가를 엄청 궁금해하는 표정이었지만, 지금은 물어보기 좋은 때가 아니었다. 그녀는 군말 없이 꾸벅 인사하고 교장실을 나섰다.

닫힌 문을 쳐다보는 상호에게 해련이 말했다.

“앉으세요, 강 헌터.”

그는 그녀가 가리킨 소파에 앉았다. 해련도 그 맞은편에 와서 앉았다.

그녀가 손짓하자 찻잔이 두둥실 떠올라 상호의 앞에 놓였다. 안에는 김이 피어오르는 녹차가 담겨 있었다.

“늙은이 방이라 마실 게 그것밖에 없네. 이해해요.”

“전 뭐든 잘 먹습니다.”

한 달 넘게 안 닦은 우의에 빗물 받아 마신 후로는 뭐든 잘 마시는 몸이 되었다. 상호는 녹차를 홀짝였다.

해련은 그의 안대와 다리를 흘끗했다.

“저승부대 부대원들은 도저히 다칠 것 같지 않았는데. 어쩌다 그렇게 됐어요?”

예의 때문에 묻지 못하는 이들과는 달리, 해련은 상호와 같은 처지였었기 때문에 스스럼없이 물어볼 수 있었다.

저승부대는 상호의 부대 이름이었다. 전선 너머에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저 승 사람들이나 다름없다는 뜻의 부대.

그러나 한편으로는 괴물 중의 괴물들만 모아 놓은 부대였기 때문에, 해련의 말대로 절대 다치거나 죽을 것 같지 않는, 무적의 특수부대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겉으로 보이는 분위기일 뿐.

“죽은 사람도 있는데요, 뭐.”

진짜 저승으로 가 버린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상호는 그리 대답하고 잔을 기울였다.

해련은 눈과 다리에 대해서는 더 묻지 않았다.

“원래부터 교직에 뜻이 있었어요?”

“아니요.”

“그럼 어쩐 일로?”

상호는 목이 타서 차를 더 마시고 대답했다.

“애들이…….”

죽는 것을 막으려고.

“저처럼 다치는 걸 막으려고 지원했습니다.”

“어떻게?”

“이론보다는 실전 위주로 가르치려고 합니다.”

“구체적인 계획이 있어요?”

“그건…….”

상호의 눈빛은 확고했다.

“맡겨 주시면 보여 드리겠습니다.”

해련은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

“상호 씨~.”

상호가 뒤를 돌아보자 설미가 손을 흔들며 달려오고 있었다. 둘 다 방금 막 교문을 지나 출근한 참이었다.

해련의 면접을 통과하고 교원이 된 지 세 달째.

해가 지나 상호는 스물 셋이 되었다. 이제 2월, 곧 새학기가 시작될 시기였다.

설미가 그의 옆에서 걸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입에서 입김이 뿜어져 나왔다.

“오늘 학생들 앞에서 소개하는 거 알지?”

호칭에만 씨를 붙여 부르지 실상은 말을 놓은 것과 다름없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떨리지. 뭐라고 말할지는 생각해 놨어?”

“대충은요.”

딱히 떨리진 않았다. 상호는 본관 옆 체육관을 바라보았다.

큰 건물은 총 여덟 동. 교무실과 교실이 있는 본관, 그 외의 모든 교육 관련시설을 모아 놓은 별관.

학생 기숙사가 세 동, 그보단 작은 교직원 숙소가 두 동.

그리고 마지막으로 거대한 체육관.

예현여고는 국내 최고 수준의 헌터 양성 고등학교였다. 거기에 사립이기까지해서 그런지, 12월부터 2월까지 달마다 예비입학생과 학부모들을 위한 설명회를 열고 있었다.

오늘이 그 마지막 설명회 날. 입학이 확정된 학생들과 학부모 앞에서 선생들이 자기소개를 하는 날이었다.

“설미 선생님도 작년에 했댔죠? 그땐 뭐라고 했어요?”

“나는…… 특기가 정령이니까, 정령 몇 명 보여드리고 열심히 하겠다, 뭐 그런 식으로 했지. 길게 안 해도 돼.”

“그래요?”

상호는 잘 알겠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설미가 그의 팔을 잡아 자기 어깨에 둘렀다.

“빨리 가자. 막내는 일찍일찍 다녀야 돼.”

그들은 서둘러 체육관으로 들어갔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