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화 혁명가, 세상을 박살내다 (5)
“나에게 뭘 어쩌라는 거지?”
“센트럴을 완전히 소멸시켜 주게.”
이고르의 황당한 요구에 태일은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수십억의 영혼과 동화된 존재, 수십억 인류의 힘을 오롯이 품어 낸 존재.”
“…….”
“자네야말로 한없이 ‘신’에 가까운 존재지. 자네의 힘이라면 어떤 세계든 좌지우지할 수 있으니까.”
“통에 담긴 뇌한테는 버거운 이야기 같은데.”
태일의 비아냥거림에 이고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문득 이고르의 말을 곱씹는다.
수십억의 영혼과 동화된 ‘인간’이 아니다.
수십억 인류의 힘을 오롯이 품어 낸 ‘인간’도 아니다.
“설마…….”
이고르가 가만히 온 사방에 흐르는 0과 1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 세계를 구축한 건 자그마한 전류 신호들이라네. 인류의 뇌 역시 그와 같은 신호들로 정보를 주고받지. 그래, 자네가 만들어 내는 바로 그 힘으로 말이야.”
태일의 손에서 담배꽁초가 굴러떨어졌다.
태일의 번개는 그 어떤 능력으로도 온전히 막아 낼 수 없었다.
오로지 태일만이 검은 눈동자를 가진 그대로 차원을 오 갔으며, 오로지 태일만이 수십억의 영혼과 동화할 수 있었다.
“자네는 통속의 뇌가 아니네.”
그건 태일이 인간이 아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우리는 각각의 세계에 ‘백신’을 만들어 뒀어. 백신은 평소 인간과 유사한 형태로 존재하지만, 인간들과 달리 코드에 접근 권한을 갖고 있다네. 모든 영혼들과 교감할 수 있어.”
“내가… 가짜라는 건가?”
“글쎄, 반대로 이 세계에서 ‘진짜’는 백신뿐일지도 모르지.”
“당신 말대로라면 나와 같은 녀석들이 또 있겠군.”
이쪽 세계에 온 직후 만난 아이, 앨리스.
그녀 역시 태일과 같은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 있었지.”
과거형이다.
“센트럴은 백신들을 찾아내 없애려 했다네. 자신들을 위협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으니까. 하지만 어느 순간, 놈들은 백신이 가진 힘이 꽤 유용하다는 사실을 알았지.”
“…메타휴먼.”
소울에너지를 채집하고, 차원을 넘어 전송하는 능력.
센트럴의 복제인간들은 그렇게 모인 에너지로 불로불사의 삶을 살아갔다.
“맞네. 붙잡은 백신들을 이용해 만들어 낸 존재가 바로 영혼을 담아내는 그릇, 메타휴먼이지.”
기괴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였다.
바깥에서 누군가 그런 상상을 들려줬다면 어처구니없어 하며 깨끗이 무시했을 것이다.
하지만 온 사방에서 바쁘게 돌아가는 코드들과 그동안의 기억들은 너무나도 생생했다.
이고르의 말이 사실임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건, 다름 아닌 태일, 자신이었다.
“오로지 자네뿐이네. 지금껏 그 누구도, 그 어떤 백신도 자네와 같은 힘을 지니지는 못했어.”
“그건 센트럴 역시 마찬가지겠지.”
“…그래.”
센트럴은 이미 몇 개의 세계를 파괴했고, 소울에너지를 통째로 빼앗았다.
태일이 수십억의 영혼과 함께한다 해도, 센트럴이 탈취해 간 영혼은 그 규모를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
“복제인간들 역시 통속의 뇌에 불과하다네. 개인이 수십억 명분의 에너지를 다룬다는 건 불가능하지. 아니, 가능하다 해도 놈들은 그 힘을 어느 한 사람에게 내맡기지 않을 거네.”
그들은 이미 인류에게 치명적인 무기를 제거하여 세계를 구원하겠다는 사명감을 잃어버렸다.
이젠 오로지 남들의 것을 빼앗기 위해,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더 갖기 위해 살아가고 있었을 뿐이었다.
“센트럴에 자네에 대적할 존재는 없을 거네.”
바로 그때였다.
“그 말이 맞아.”
뒤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더구나 내가 함께한다면 승리는 확실하겠지.”
“딘……!”
붉은 눈동자의 알렉세이 딘이 빙긋 웃으며 태일과 이고르를 향해 다가왔다.
태일은 그런 딘의 모습이 반가우면서도 당황스러웠다.
마지막 커널이 부서지며 메타휴먼들은 전부 기능을 정지하지 않았던가.
“너, 괜찮은 거냐? 대체 어떻게!?”
“물론. 내 몸에 이것저것 재미있는 장치들을 심어 놓았거든. 의도한 건 아니지만, 그중 커널과 유사한 물건도 있었지. 제법 오랫동안 영혼을 붙잡아 둘 수 있을 거야.”
“네가 직접 네 몸에 장치를 심었다고?”
“몸뚱어리야말로 가장 흥미로운 실험체거든.”
“그래. 알렉세이 딘, 자네라면 자격이 있지.”
이고르는 딘의 등장에 그리 놀라지 않은 듯 보였다.
아니, 오히려 딘의 기행을 태일만큼이나 잘 이해하고 있었다.
“영감님, 날 알고 있나?”
“당연히 알고 있지. 센트럴 복제인간 중 유일하게 본래의 신념을 고수했던 이가 바로 알렉세이 딘, 자네였으니까.”
“글쎄, 신념을 고수했다기보다 돼지로 전락한 녀석들이 꼴 보기 싫었을 뿐이야.”
딘의 대답에 태일은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딘, 너……!”
“그렇게 볼 거 없어. 나도 기억을 찾은 지 얼마 안 됐거든.”
딘은 어깨를 으쓱이며 빙긋 웃어 보였다.
한때 센트럴의 연구원이라 했던 그가, 셸터의 구성원이던 그가 본래 센트럴 설립자 중 하나였다는 사실은 꽤 충격적이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지. 센트럴의 돼지들을 없애러 간다고 하지 않았었나?”
“물론 강요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결국 센트럴은 이쪽 세계를 다시 공격해 올 거네.”
“보통은 그런 걸 강요라고 하는 거야, 영감.”
딘이 피식 웃으며 비아냥거리더니 태일을 바라보았다.
“어때? 준비는 됐어?”
태일은 결국 자신이 어떤 결정을 내리게 될지 알고 있었다.
머리를 쓸어넘기며 가만히 한숨을 내쉰다.
“…그래.”
“그렇게 비장한 표정 짓지 마. 죽으러 가는 것 같잖아. 빨리 끝내고 오자구. 늦으면 잔소리할 꼬맹이가 있어서 말이야.”
“…….”
태일은 가만히 주머니 속 회중시계를 꺼내 바라보았다.
제 역할을 마친 회중시계는 마침내 완전히 멈추었다.
세연 역시 더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영혼 사이의 인연은 끊어지지 않네. 그녀와도 다시 만나게 될 게야.”
이고르가 조용히 말했다.
“…센트럴만 없어진다면.”
보통은 이런 걸 강요라고 부른다.
“서두르지.”
태일은 회중시계를 조심스럽게 품에 집어넣은 뒤, 가만히 주먹을 움켜쥐었다.
곧이어 이고르의 지팡이 끝에서 다시금 빛이 뿜어져 나왔다.
* * *
딸칵!
“어서옵쇼!”
손님 하나 없는 레미제라블 안쪽에서 유쾌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도영이 얼굴 가득 웃음 지으며 황급히 달려 나왔다.
레미제라블 바텐더 도영의 인사는 언제 들어도 기분이 좋았다.
그 인사를 들을 때만큼은 끔찍한 전쟁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아, 서장님!”
“서장은 무슨. LAPD 따위 사라진 지가 언제인데.”
“그래, 이젠 서장님이 아니라 사령관님이라 불러야지.”
뒤따라 들어오던 카렌이 장난스럽게 쏘아붙이자, 강필의 얼굴이 귀까지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것만큼은 봐 달라고…….”
“어머, 왜 그렇게 부끄러워하실까? 강필 씨는 동대륙 연합군의 어엿한 사령관이라구요.”
“임시직일 뿐이잖아. ‘연합군’이라는 명칭도 너무 거창해.”
“그 ‘연합군’ 덕분에 동대륙이 이 정도라도 버티는 거예요.”
카렌의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알마티에서의 전쟁이 끝나고 난 뒤 1년.
센트럴이 무너지자 수십 개의 구역이 붕괴했다.
센트럴에 빌붙어 살아가던 정치가들이 숙청당했으며, 드림 코퍼레이션을 비롯한 캐피탈클럽 기업들 역시 무너졌다.
하지만 센트럴의 소멸이 곧 평화의 도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센트럴이 사라진 세계가 정의로운 것 역시 아니었다.
법과 질서가 무너졌고, 제도의 공백은 더 끔찍한 혼란을 불러왔다.
대륙 곳곳에서 군벌들이 득세했고, 살아남은 회사들은 그들을 상대로 무기나 식량 따위를 거래했다.
군벌들 간 전쟁이 계속되었고, 역사시대의 혼란이 재현되었다.
그 와중에 동대륙은 센트럴에 맞섰던 연합군 덕분에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물론 그조차도 위태롭기 짝이 없는 일시적 평화에 불과했다.
“센트럴을 무너뜨렸다는 명성 때문에 겁먹고 있지만, 군벌 중 겁 없는 놈들 몇몇이 이쪽을 노리고 있어요.”
“…그렇겠지.”
“군벌들 대부분 이미 우리의 전력을 대강 파악했을 거예요.”
연합군은 한때 마피아나, 레지스탕스, 펑크라이더였던 녀석들로 이뤄져 있었고, 가진 무기 역시 재래식 무기에 불과했다.
대부분의 군벌은 그런 연합군에 비해 월등히 앞선 장비와 병력을 갖춘 상태였다.
“하아… 49구역도, 50구역도 정말 너무 황량한 거 아녜요?”
한쪽 손으로 얼굴을 괸 채 술잔을 채우던 카렌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지금껏 잘해 왔잖나. 카렌 씨가 아니었다면 동대륙은 이미 오래전에 무너졌을 거야.”
“그게 어디 제 능력인가요? 루키우스 아저씨랑 안도 오빠가 도와준 덕분이지.”
“…그 두 사람이 우리를 돕는 것도 따지고 보면 카렌 씨 덕분이니까.”
“어쨌든 그런 식으로는 안된다구요! 자립을 해야죠, 자립!”
강필은 슬슬 카렌의 눈치를 보며 술 한 모금을 들이켰다.
도영은 어느새 슬슬 시선을 피해 잔을 닦는 척하고 있었다.
‘이 양반들은 왜 안 오는거야?’
애당초 카츠미와 민호, 페이진 역시 오기로 되어 있는 자리였다.
약속 시간이 꽤 지났건만, 셋 다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는다.
카렌은 술을 한 모금 들이켠 뒤, 뚱한 얼굴로 말했다.
“…제인이랑 레이가 결혼한다는 소식 들었어요?”
“당연히 들었지. 아마 지금 전 대륙에서 가장 관심을 끄는 이벤트일걸.”
제인은 막대한 유산을 가진 코르지 일가의 상속녀이자, 센트럴을 무너뜨린 ‘해방군’의 핵심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레이는 암흑가의 모든 것을 손에 쥔 변호사로서, 아무리 거물급 군벌이라 해도 그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
그런 두 사람의 결혼은 희대의 사건이었고, 대륙민들의 관심을 끌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과 인연을 맺게 된다면, 해방군의 상징성과 더불어 암흑가의 후원까지 받을 수 있을 테니까.
“난 그렇게 붐비는 곳은 질색이라서 말이지.”
“그런 소리 말고 꼭 참석하세요. 비밀 결혼식을 올리겠다는 걸 간신히 막았다고요.”
전 대륙의 권력자들이 모일 결혼식은 곧 전쟁을 막고 연합 정부를 꾸릴 협상장이기도 했다.
“친구의 결혼식에서까지 정치를 해야 하다니. 너무 피곤하지 않나?”
“어머, 남 일처럼 말씀하시네요, 사령관님!?”
“크흠…….”
강필은 곤란한 얼굴로 애꿎은 술잔만 매만지고 있었다.
바로 그때, 바의 문이 열리며 누군가 허겁지겁 뛰어 들어왔다.
“대, 대, 대표님!!!”
카츠미 일행인가 싶어 잠시 화색을 띠던 강필이 눈살을 찌푸렸다.
“꼬마?”
1년 새 키가 몇 뼘은 커진 지우가 헐레벌떡 바 안으로 뛰쳐 들어왔다.
“여긴 미성년자 출입 금지야.”
“하아, 하아, 하아, 지, 지금… 지금……!!”
“지우야, 숨 좀 고르고 천천히 말해. 대체 뭔 일인데 그래?”
카렌은 의아해하며 그런 지우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와, 왔어요.”
“…응?”
“왔다구요! 태일이 형이랑…….”
“뭐!?!?!?”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카렌과 강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 * *
붉은 언덕.
한때 검은 탑이 위치하던 바로 그 장소에 이제는 탑의 터만이 남아 있었다.
앨리스는 매일 저녁 붉은 언덕에 올랐고, 탑에서 태일을 기다렸다.
전쟁터에서 갑자기 사라져 버린 태일.
기분 탓인지 붉은 언덕에 올라 탑 앞에 설 때면 태일의 기척이 느껴졌고, 언젠가 그 자리에 다시 나타날 것만 같았다.
라비와 지우 역시 그런 앨리스를 따라 매일 저녁이면 붉은 언덕에 함께 올랐다.
특히 라비는 앨리스 못지않게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려 왔다.
그리고 바로 지금, 그 터 한가운데 장발에 긴 코트를 입은 태일과 붉은 눈동자의 딘이 서 있었다.
“아, 아저씨……!?”
앨리스가 울먹거리며 자신 앞에 나타난 천사 아저씨, 태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오랜만이야.”
태일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앨리스, 너 키가 꽤 컸네? 설마 시간의 흐름이 다른 건가? 저쪽 세계에서 대충 1년 정도 머무른 것 같은데.”
“그럴 리가. 그냥 애들 크는 게 빠른 거지.”
딘이 어깨를 으쓱이며 앨리스 옆에 돌처럼 굳어 있는 소녀 옆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어째 라비, 넌 별로 안 큰 거 같다?”
퍽!
“아악!”
잠시 얼어 있던 라비가 다짜고짜 딘의 정강이를 힘껏 걷어찼다.
“다시는 날 버리지 않겠다고, 떼어 놓지 않겠다고 했으면서!”
“우왓!!”
라비가 연달아 주먹질로 딘의 복부를 후려치자, 딘이 죽는 소리를 내며 뒷걸음질 쳤다.
“오해야, 라비. 오해라고! 나도 이렇게 오래 걸릴 줄은 몰랐어!”
딘과 라비가 실랑이하던 모습을 바라보던 태일이 피식 웃으며 언덕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공장은 멈춘 상태였고, 한때 환락가라 불렸던 거리에는 수많은 사람이 오갔다.
“그나저나 지우는 우릴 보자마자 어딜 간 거지?”
“아마 모두에게 알리러 갔을 거예요.”
하긴 처음 봤을 때부터 지우는 부산스러운 녀석이었다.
오래지 않아 허겁지겁 언덕 위로 오르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반가운 얼굴들이 보인다.
태일은 그런 이들을 바라보며 오랜만에 밝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 대륙의 역사는 오로지 이 대륙을 살아가는 이들의 손에서 결정될 것이다.
센트럴은, 그들의 세상은 완전히 박살 났으니까.
* * *
짙은 어둠이 내렸다.
그러나 여전히 거리 곳곳에서 노랫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영웅의 귀환을 기념하며 시작된 파티가 어느새 거리 전체로 번져 나간 것이었다.
카츠미와 민호는 흠뻑 취해 서로 머리를 맞댄 채 잠들었고, 페이진은 그 뒤에서 배를 드러낸 채 코를 골았다.
카렌과 강필은 주거니 받거니 계속해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다.
예비 신랑 신부인 제인과 레이는 물론 카심과 루키우스까지 당장 내일이라도 달려오겠다며 법석이었다.
태일은 그런 소란을 피해 레미제라블 지붕 위에 올랐다.
세연은, 그리고 태일은 레미제라블 지붕 위에서 보는 밤하늘을 정말 좋아했다.
“여기 있었나?”
딘이 그런 태일을 찾아 지붕 위로 올라왔다.
그러고는 태일의 옆에 걸터앉아 너털웃음을 지었다.
“난 역시 저렇게 시끌벅적한 곳보다 조용한 연구실이 좋아.”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지?”
“최대한 버텨 봐야지. 아마 결혼식 정도는 참여할 수 있을 거 같아.”
딘의 얼굴에 씁쓸한 웃음이 떠올랐다.
딘의 몸에 비축된 소울에너지는 어느새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후회는 없어?”
“너무 오랜 시간 살아왔어.”
센트럴의 설립자였던 ‘알렉세이 딘’은 탐욕에 젖은 배신자들에 맞섰지만, 사실 그 역시 나름의 방식으로 영생에 가까운 삶을 살아왔다.
기억과 지식의 계승을 통한 삶의 지속.
수십 번의 삶을 살았고, 그 과정에서 지식과 기억을 고스란히 축적해 온 것이다.
“포트리스에 돌아가기만 하면 이번에도 삶을 이어갈 수 있을 텐데.”
“아니.”
“…….”
“내 임무는 다했고, 사명 역시 완수했어.”
딘의 모든 지식에는 오로지 한 가지 목적이 있다.
‘인류를 위하여’
인류를 멸종으로 이끌었던 무기의 탄생을 막고, 센트럴을 소멸시킴으로써 딘은 자신의 역할을 다했다.
그러니 이제 딘은 진정한 의미의 죽음을 받아들이려 했다.
“다만,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딘이 슬쩍 시선을 내려 앨리스의 옆에 잠든 라비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곧 다시 고개를 돌려 태일을 바라본다.
“바로 너야.”
“…….”
“라비는 잘 커 가겠지. 영혼의 인연이 이어진다면 언젠가 다른 모습으로 다시 만날지도 몰라. 하지만 넌…….”
영생(永生).
태일은 센트럴의 지배자들이 그토록 원하던 것을 손에 넣었다.
수십억의 갈 곳 잃은 영혼들이 태일에게 녹아들었고, 센트럴에 의해 다시 태어날 공간을 잃어버린 영혼들은 모든 힘을 태일에게 넘겼다.
태일은 그 힘으로 센트럴을 완전히 부술 수 있었지만, 그 대가로 영생이라는 저주를 받았다.
수십억의 영혼을 짊어진 태일에게 죽음은 허락되지 않는다.
그렇게 태일은 영겁에 가까운 시간을 살아가게 될 터였다.
딘이 담담히 말했다.
“수많은 죽음을 목격하게 될 거다.”
“…….”
“그러다 보면 누군가에게 마음을 주는 게 쉽지 않을 거야.”
그건 다름 아닌, 딘 자신의 이야기였다.
“사랑한 만큼, 그 사람이 떠날 때 아픔이 더 커지거든.”
딘은 셸터라는 조직에서, 포트리스라는 성채에서 이미 그런 이별을 너무나 자주 경험했다.
“그래도 난 네가 사람들 속에서 살았으면 좋겠어.”
가혹한 말임을 딘 역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분명 태일을 그 누구보다 깊이 이해하는 친구의 조언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태일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할게.”
영겁에 가까운 시간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 시간 동안 대륙에서는 수많은 사건이 벌어질 것이다.
수많은 감정이 교차할 것이다.
전쟁과 파괴, 협상과 만남, 증오와 분노, 사랑과 이해.
태일은 그 모든 것을 지켜볼 테고, 때때로 어떤 선택을 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수십만 년의 시간이 흐른 뒤, 통 속의 뇌들에 공급되는 에너지가 끊어지게 된다면 그때에야 비로소 태일의 삶 역시 끝난다.
혁명가는 하나의 세상을 박살 냈고, 나머지 세상을 구원했으며, 남은 세상들과 끝을 함께할 터였다.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