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218화 (218/220)

218화 혁명가, 세상을 박살내다 (4)

부서진 실드, 악룡의 출연과 소멸, 알마티 쪽에서 비쳐온 황금색의 빛.

프랑켄과 보니는 포트리스 조종실 안에서 그 광경을 모두 지켜보았다.

어떤 경과로 그런 현상들이 벌어진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태일, 제인, 세연은 성공적으로 각자의 임무를 마쳤다.

마침내 센트럴에 붙잡혀 있던 영혼들을 해방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끝났군.”

“그래, 끝났어.”

프랑켄과 보니의 대화는 한없이 담백했다.

“다시 만나게 되겠지?”

보니, 아니, 녹스에게는 알렉세이 딘이 축적해 온 인류 최대의 지식이 녹아 있었다.

그러나 그 방대한 지식 속에도 영혼의 순환이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에 대한 정보는 없었다.

아니, 애당초 영혼이라는 것이 어떻게 순환하는 것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나도 몰라.”

보니는 조용히 웃으며 프랑켄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렇게 믿어.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프랑켄은 줄곧 메고 있던 두 자루의 소총을 자신과 보니의 사이에 내려 두었다.

‘Nox—Franken’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녹스의 소총과 클라이드이 사용하던 소총, 스핏파이어.

그 두 자루는 프랑켄과 남매의 인연을 상징했다.

“눈뜨자마자 우릴 찾아와, 프랑켄. 늦으면 가만 안 둘 거야.”

보니의 농담 섞인 말에 프랑켄이 조용히 웃음 지었다.

“먼저 찾아야 할 사람이 있어.”

F—2020에게 ‘프랑’이라는 이름을 선물했던 최초의 동료, 유리.

프랑켄은 단 한순간도 그녀를 잊은 적이 없었다.

“유리와 먼저 만나고 나면, 널 찾아갈게.”

“…….”

보니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가만히 앉아서 소총을 바라보던 보니의 몸뚱어리가 힘없이 기울어진다.

프랑켄은 보니를 조심스레 눕힌 뒤, 협상장 쪽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 협상장에 진입해 들어간 노인.

그는 과거 대륙 남부에서 만났을 당시 프랑켄에게 모든 답을 알려 주었다.

‘붉은 눈을 가진 인공 인간. 신의 뜻을 거스르고 인간의 의지로 만들어진 생명체.’

노인은 메타휴먼들의 존재 이유를, 그 역할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피조물이 조물주의 통제에서 벗어나는 건 꽤 흔한 일이라네.’

어쩌면 메타휴먼들의 최후 역시 미리 알았는지도 모른다.

‘운명에 맡기면 곧 보게 될 거네.’

프랑켄은 그 마지막 한마디를 기억하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자동 비행 모드로 전환합니다.]

쿠구구구구…….

조종사를 잃은 포트리스는 천천히 방향을 선회하여 원래 있던 사막 한가운데로, 그 누구도 찾지 못할 아공간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전쟁이 멈추었다.

조금 전까지 곳곳에서 들려오던 구호 역시 더는 들려오지 않는다.

메타휴먼들은 기능을 멈추었고, 그와 함께 전쟁터의 시간 역시 멈추었다.

그 고요 속에서 태일은 한동안 가만히 서 있었다.

멈춰 선 메타휴먼들로부터 저마다의 색을 띤 에너지들이 빠져나와 어디론가 사라져 간다.

수많은 영혼들과 교류한 덕분인지 태일은 영혼의 움직임을 두 눈으로 볼 수 있었다.

“다들 본래 머물렀어야 할 곳으로 가는 거네.”

웬 노인이 태일을 향해 천천히 다가오며 조용히 말했다.

“당신은……?”

“반갑네, 태일 군.”

노인은 반갑게 웃어 보였지만, 정작 태일의 표정은 어둡게 굳어졌다.

“당신이 본체로군.”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노인에게서 아크로 위장했던 사내와 정확히 같은 형질의 소울에너지가 느껴졌다.

“그래, 난 ‘이고르’라고 하네. 앞서 자네가 쓰러뜨린 그 아이 역시 나로부터 비롯되었지.”

“…….”

이고르의 목소리에는 태일에 대한 적의도, 소울에너지에 대한 욕망도 없었다.

더없이 차분한 표정이었고, 한편으로는 슬퍼 보이기도 했다.

“자네와 따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네만,”

태일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이고르는 지팡이를 들어 올려 허공에 커다란 원을 그렸다.

스스스스스…….

곧이어 지팡이 끝으로 그려 낸 원을 따라 허공에 자그마한 문이 생겨났다.

태일은 이미 그런 광경을 몇 차례 본 적 있었다.

과거 셸터의 기지 역시 그와 같은 방식으로 숨겼으니까.

하지만 그 대단한 알렉세이 딘조차도 그렇게 간단히 멤브레인에 균열을 내지는 못했다.

자신의 능력을 총동원하여, 정교한 작업을 거쳐 간신히 틈을 만들어 낸 것이었다.

반면, 이고르는 너무나 간단하게 문을 만들어 냈다.

“당신, 정체가 뭐지?”

이고르는 대답 대신 빙긋 웃어 보이며 자신이 만든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뒷모습을 보고 잠시 망설이던 태일은 결국 노인을 따라 멤브레인의 균열 속으로 발을 디뎠다.

아공간, 즉 세계 뒤의 공간은 ‘공허’, 그 자체였다.

일단 그런 공허의 한가운데 발을 디디자, 지금껏 태일과 함께하던 모든 영혼들의 기척이 사라졌다.

온몸에 넘쳐흐르던 에너지도, 쉴 새 없이 들려오던 목소리도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알렉세이 딘이 사용하던 공간과는 전혀 다른 세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곳은 그보다 훨씬 깊은 곳이군.’

끝도 없이 펼쳐진 백색의 공간에는 그 어떤 생명도, 오브젝트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어째서인지 태일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했다.

“코드룸(code room)에 온 걸 환영하네.”

부드러운 목소리와 함께 이고르가 모습을 드러냈다.

“코드룸?”

“그래, 이 공간의 명칭이라네. 겉보기에는 아무것도 없는 공간처럼 보이겠지만…….”

이고르가 양팔을 벌린다.

그와 동시에 새하얗던 공간에 검은 글씨들이 무수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0101011110110010101111101010101011111101011011110100000000……’

수도 없이 많은 0과 1의 조합.

“이 세계의 모든 것이 기록된 공간이지.”

“…뭐지, 이건?”

“자네의 세계를 구성하는 질서이자…….”

0과 1들은 백색의 공간 전체를 빽빽하게 메웠고, 그렇게 새겨진 글자들은 실시간으로 0에서 1로, 1에서 0으로 바뀌었다.

“이 세계의 본질이지.”

“…….”

그 거대한 숫자의 흐름 속에서 태일은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

0과 1의 조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고르가 무엇에 대해 말하려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이 세계가… 컴퓨터로 설계되기라도 했다는 뜻인가?”

“대강 비슷하네.”

이고르는 부정하지 않은 채 가만히 태일을 바라보았다.

“그리 충격받을 필요는 없어. 정교하게 설계된 자연 질서는 정교한 프로그램과 같으니까. 오히려 인간이 만든 프로그램이야말로 자연을 모방한 것일 뿐이라네.”

태일은 가만히 담배를 꺼내 들었다.

파칫.

짧은 스파크와 함께 담배에 불이 붙는다.

담뱃불이 공중의 글씨에 닿았지만, 글씨들은 홀로그램처럼 조금의 영향도 받지 않았다.

“이 코드들은 당신이 만든 건가?”

“정확히는 나와 동료들이 함께 만들었지.”

“…….”

‘신’.

문득 그 이름이 떠오른다.

씨앗을 뿌리거나, 주문을 외우고, 불을 피우며 신을 숭배하던 종교인들.

그들의 행동은 전부 무엇이었을까?

이런 상황에서도 문득 웃음이 비어져 나올 것 같았다.

“생각보다 놀라지 않는군.”

“아니, 이미 충분히 놀라고 있는 중이야. 무려 신과 만나는 중이니까 말이야.”

“신이라…….”

이고르가 피식 웃더니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난 그런 존재가 아니네. 그저 평범한… 과학자에 불과하지.”

“이 세계를 만든 조물주가 고작 평범한 과학자라. 그건 그거대로 지독한 농담인데.”

“우리들이 만든 건 그저 ‘환경’과 ‘규칙’ 뿐이야. 그것들을 이용하고, 계량하고, 발전시키는 건 오로지 대륙민의 몫이지.”

“…….”

“인간의 의지에 영향을 끼치고, 선악에 따라 상벌을 주는 존재가 신이라면, 난 그런 존재가 아니네. 모두가 나를 신으로 믿고 숭배한다 해도 난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지.”

“그건 다행이군.”

만약 이고르가 정말 전지전능한 신이라면, 태일은 이 자리에서 그를 죽이고자 했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나는 완성된 세계의 일원이 되고자 했네. 함께 살아가길 바랐지.”

“…‘완성’이라고?”

“그래. 우리는 수백 개의 시뮬레이션 우주를 만들어 멸망을 막고자 했거든.”

이고르의 표정은 그 엄청난 내용에 비해 너무나 담담했다.

“내가 살던 세계는 오래전, 그러니까… 2037년에 멸망했다네.”

인간은 늘 강함을 추구했다.

타인을 지배하고자 했고, 권력을 갖고자 했다.

욕망으로 인해 국가 간 전쟁이 계속되었고, 급기야 국가 연합 간 전쟁까지 터졌다.

전 세계 곳곳이 불길에 휩싸였고, 수많은 이들이 죽어 갔다.

그러나 전쟁의 가장 끔찍한 결과물은 ‘기술’이었다.

“인간은 스스로 감당하지 못할 무기를 만들었지. 전 세계를 끝장낼 수 있는 무기 말이야.”

파괴와 재건은 인류의 역사에서 몇 번이나 반복되었지만, 1945년에 개발된 무기는 달랐다.

단순한 파괴를 넘어 대지를 오염시켰고, 무기가 투하된 땅에서는 생명이 피어나지 못했다.

“무기는 수십 년의 연구 개발을 거쳐 더욱 강력해졌고, 셀 수 없이 많아졌다네. 위협용으로, 전쟁 억제용으로 제각기 무기를 비축하기 시작했지.”

강력한 무기는 전쟁을 막는 억제기의 역할을 한다.

그러나 결국 무기는 사용되었다.

“2037년, 한 국가가 마침내 무기를 사용했네.”

“…….”

“전쟁은 금세 끝났어. 아니, 전 세계가 끝장났지. 처음 무기가 사용되고 채 일주일이 지나지 않아 모든 국가가 소멸했거든.”

지상은 지옥이 되었다.

매일같이 검은 비가 내렸고, 토지와 공기는 전부 오염되었다.

지상에 머무르던 생명체는 풀 한 포기조차 남지 않았다.

“나와 동료들은 정말 운 좋게 살아남았다네. 연구소 지하 벙커의 방호 시설 덕분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어.”

목숨은 건졌지만 그뿐이었다.

물과 식량을 비롯한 생명 유지에 필요한 모든 것이 부족했다.

남은 거라고는 연구소에서 비축한 엄청난 양의 에너지뿐이었다.

수백 대의 슈퍼컴퓨터를 수십만 년 동안 운영할 수 있는 양의 에너지.

“시뮬레이션 세계를 구축하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었지. 각 국가들이 아카이브에 모아 놓은 시민들의 DNA 정보들을 이용해 인류를 재건할 수 있었어.”

“인류를… 재건했다고?”

“그렇다네. 이미 멸망한 인류의 뇌를 복제하여 새로운 세계에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건 꽤 획기적인 해결책이었지.”

과학자들은 전 인류를 ‘통 속의 뇌’로 부활시켰다.

그런 뒤, 시뮬레이션 세계 속에서 살아가도록 만들었다.

자신들이 그저 자그마한 통속 존재라는 사실을 모른 채.

“시뮬레이션 우주의 코드는 실제 우리의 세계와 최대한 똑같이 구축했지. 자네들이 살아가던 세계는 사실상 내가 살던 곳과 거의 다르지 않아.”

시뮬레이션 속에서 벌어지는 일은 컴퓨터의 연산을 거쳐 실험실에 영향을 끼쳤다.

남녀가 만나 출산을 하면, 컴퓨터는 부모들의 DNA를 조합하여 새로운 뇌를 탄생시켰다.

시뮬레이션 속에서 사망한다면 통속의 뇌 역시 기능을 멈추었다.

“수백 개의 실험실을 이용해 수백 개의 세계를 구축했지. 지금 이곳 역시 그 세계들 중 하나라네.”

“…미쳤군. 당신들, 제정신이 아니야.”

태일은 한 손으로 이마를 감싸 쥔 채 이를 악물었다.

‘통 속의 뇌’.

결국 지금껏 살며 겪어 온 모든 것들은 그저 컴퓨터 프로그램 속 가상현실에 불과했다.

기쁨도, 행복도, 고통도, 슬픔도, 분노도 모조리 자그마한 통을 벗어나지 못했다.

태일은 망연한 얼굴로 주변을 감싼 코드들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이고르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 갔다.

“우리는 안정적인 세계를 구축하고자 인류의 역사를 시뮬레이션 세계에 구현했다네. 다만, 1940년대에 벌어진 사건만큼은 반드시 막아야 했지. 우리의 세계를 부순 무기의 탄생 말이네.”

과학자들은 시뮬레이션 세계에 가장 이질적인 집단, 센트럴을 만들었다.

센트럴은 1900년대에 결코 존재할 리 없는 기술력으로 무장했고, 무기의 개발을 진행하던 제국들을 압도적 힘으로 무너뜨렸다.

“우리의 계획대로 센트럴이 만들어지자 시뮬레이션 세계에서는 무기가 개발되지 않았지. 하지만… 미처 예상치 못했던 일이 벌어졌어.”

센트럴은 그저 무기의 개발을 막는 데 그치지 않았다.

“제1실험실의 센트럴이 다른 시뮬레이션 우주들까지 침입하여 식민지를 개척하기 시작한 게야.”

수백 개의 연구실에서 제각기 돌아가던 시뮬레이션 우주들이 서로 연결되기 시작했다.

“상황의 발생을 뒤늦게 알았을 때, 이미 그 누구도 손쓸 수 없게 된 상태였다네. 아니, 손쓰지 못하게 만들어 놨지.”

“설마…….”

“그래, 제1실험실 센트럴의 관리자들은 나를 비롯한 연구진들의 복제였어. 우리들은 스스로의 사명감을 믿었고, 복제인간들 역시 임무를 마치고 나면 센트럴을 소멸시키리라 믿었지.”

목적을 갖고 만들어진 생명체.

‘…하지만 피조물이 조물주의 통제에서 벗어나는 건 꽤 흔한 일이라네.’

이고르를 비롯한 과학자들의 복제인간은 그저 무기의 탄생을 막는데 그치지 않았다.

적극적으로 세계를 지배했으며, 다른 시뮬레이션 세계까지 침입했다.

영생을 누리기 위해 다른 뇌에 공급되던 에너지까지 독차지했다.

복제인간들은 세계의 질서를 이미 알고 있는 만큼, 살아남기 위해 적극적으로 그 지식을 이용했다.

한편, 과학자들에게는 이 소동을 바로잡을 시간이 남아 있지 않았다.

“시뮬레이션 세계는 불안정했지만, 연구실에 더는 살아갈 자원이 남아 있지 않았어. 살기 위해 동기화를 서둘러야만 했지.”

과학자들은 마침내 각자의 뇌를 통 속에 집어넣었고, 그들이 살던 세계는 컴퓨터와 무수한 통속의 뇌들만 남긴 채 완전히 멸망했다.

“하지만 이쪽 세계에 들어온 지 오래 지나지 않아 팀원들은 복제인간들의 손에 살해당했다네.”

센트럴은 시뮬레이션 세계의 일원이 된 과학자들을 집요하게 추적했고, 살해했다.

“이제 센트럴을 막을 수 있는 이는 단 한 사람뿐이네.”

과학자들의 복제인간인 센트럴 지배자들은 시뮬레이션 세계의 원리를 이해하고 있었고, 그 지식을 바탕으로 ‘신’이 되고자 했다.

실제 그들은 신에 가까운 영생과 힘을 누리고 있었다.

그렇게 괴물로 변해 버린 이들을 막아 낼 방법은 그들을 뛰어넘는 수준의 에너지를 갖는 것뿐이었다.

“바로 자네만이… 괴물들을 없앨 수 있어.”

이고르가 가만히 태일의 어깨를 붙잡았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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