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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216화 (216/220)

216화 혁명가, 세상을 박살내다 (2)

검은 안개가 회담장 전체를 메운 가운데 거센 바람이 불어온다.

세연은 가만히 서서 풍화되어 사라져 가는 닐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스스스스…….

시신조차 온전히 남기지 못한 채, 애당초 존재조차 하지 않았던 것처럼 쓸쓸히 사라져 간다.

센트럴의 병기이자, 첩자로 살아온 닐스에게는 자신을 위해 울어 줄 친구도, 동료도, 가족도 없었다.

“닐스…….”

세연은 처음 닐스와 만났던 순간을 기억했다.

공허한 눈동자에 기계적인 반응, 꾸며진 표정과 꾸며진 감정.

닐스는 마치 잘 만들어진 인형처럼 보였다.

‘난 태어나자마자 버려졌어. 그 뒤로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살아왔지.’

닐스의 모든 것이 거짓이었더라도, 그 이야기만큼은 진실이었음을 안다.

그의 이야기에서 묻어난 슬픔 역시 솔직한 감정이었음을 안다.

그랬기에 세연은 닐스를 진심으로 동정했다.

“영혼과 영혼 사이의 인연은 끊어지지 않아.”

심장이 멈춰서도, 몸뚱어리가 사라져도 영혼은 멈추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그저 순환할 뿐.

그리고 그 순환 속에서 인연의 끈은 오래도록 이어진다.

“다시 만나면 좋은 친구가 되길…….”

어지러이 휘날리던 먼지들이 세연의 뺨을 부드럽게 스친다.

그때, 뒤쪽에서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드시 그렇게 될 거네.”

“이고르… 왔군요.”

“그래, 전쟁의 끝을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네.”

지팡이를 든 노인, 이고르가 검게 내리깔린 안개를 가만히 둘러보았다.

세연이 피워 낸 식물들은 검은 안개에 삼켜져 시커멓게 썩어 가고 있었다.

“보아하니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한 모양이군.”

“…네.”

세연은 어둠이 가장 짙게 깔린 방향을 바라보았다.

바로 그곳에 태일이 있다.

조금 전까지 보이던 스파크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꽤 시간이 지났건만, 아직 태일로부터 그 어떤 신호도 없었다.

“하지만 전 태일이를 믿어요.”

“‘믿는다’라. 참으로 신비한 행위지. 그래, 그것만큼은 도무지 과학적으로 규명할 수 없었어. 하지만 그런 믿음이 늘 보답받는 건 아니라네.”

“전 태일이를 잘 알아요. 얼마간 헤매더라도 결국 옳은 선택을 해 왔죠.”

세연의 대답을 들은 이고르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자네의 믿음이 맞길 바랄 수밖에.”

이고르와 세연은 나란히 서서 아크와 태일이 대치하고 있을 바로 그곳, 어둠의 한가운데를 바라보았다.

빛 한 점 들지 않는 어둠의 한가운데.

태일은 발걸음을 멈춘 채 가만히 서 있었다.

그 무엇도 보이지 않는다.

강력한 번개를 뿜어낼 수도, 필드를 펼칠 수도 없다.

‘모든 것을 먹어 치우는 블랙홀, 그게 바로 아크의 능력이야.’

소울에너지로 생명을 피워 내는 세연의 능력과 완전히 대척점에 서 있는 능력.

그 이질적인 힘 속에서 태일은 가만히 담배를 꺼내 들었다.

아크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설마 시간을 끌다 보면 네가 이길 거라 여기는 건 아니지? 커널이 파괴되었다 해도 상관없어. 내겐 무한에 가까운 소울에너지가 있거든.”

아크가 가진 엄청난 양의 소울에너지, 그건 전부 다른 누군가로부터 빼앗은 것들일 터였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무릎을 꿇어. 그럼 네 연인을, 친구들을 모두 살릴 수 있어.”

“…….”

“뭘 망설이는 거지? 내가 죽는다면, 네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아.”

알고 있다.

아크가 죽는다면, 그나마 간신히 육체를 얻어 숨 쉬고 있는 세연 역시 사라질 것이다.

알렉세이 딘, 제니, 프랑켄, 보니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눈을 감을 것이다.

“네가 다른 세계에서 혁명군을 만들어 저항했을 때, 왜 널 죽이지 않았는지 알아? 힘이 부족해서였을까? 천만에!”

어둠 속에서 아크의 킬킬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쪽 세계의 관리자들도 네 가치를 알았던 거야.”

“…….”

“넌 말이지. 자신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전혀 모르고 있어. 네가 나와 함께한다면 영생을 누리면서 모두의 위에 군림할 수도 있지. 네가 원한다면 누군가를 죽이거나, 살리는 것 역시 일도 아니게 될 거야.”

어둠 속에 단둘이 남겨지고 보니, 아크는 생각보다 훨씬 수다스러운 녀석이었다.

목이 꽤 아플 법도 하건만, 쉴 새 없이 말을 쏟아 낸다.

“어때, 이제 좀 구미가 당겨? 당연히 그렇겠지! 네가 신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니까.”

“이봐, 아크.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천천히 담배를 꺼내 문다.

그러고는 손가락을 몇 번 퉁겼다.

탁, 타탁, 탁!

애써 만들어 낸 스파크 속에서 자그마한 불꽃이 튀더니, 마침내 담배에 불이 붙는다.

시끄럽게 떠들던 아크의 목소리가 돌연 멈추었다.

모처럼의 침묵 속에서 태일은 오랜만에 맛깔나게 연기를 들이켰다.

폐까지 진득한 담배 연기가 단번에 닿는다.

묘한 쾌감과 함께 죄책감이 밀려왔다.

세연이 그토록 싫어하던 담배.

‘이번만큼은 이해해 주겠지.’

하긴, 담배 한 개비 정도야 얼마든지 용서받을 수 있는 수준일 것이다.

‘지금부터 저지를 죄악에 비한다면… 가벼운 비행이니까.’

아크는 꽤 인내심 있게 태일의 흡연을 기다려 주었고, 침묵 속에 담배 불빛만이 주변을 밝혔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나자 꽁초의 크기가 꽤 줄어들었다.

츠츠츠…….

태일은 꽁초를 발로 비벼 끄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직… 포기할 마음이 없나?”

정적.

만약 이 순간, 아크의 얼굴이 보인다면 과연 어떤 꼴을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곧이어 무언가가 태일의 숨통을 조여 왔다.

“크윽……!”

전과 달리 차가운 목소리가 사방에 울린다.

“그게 네 대답이구나, 신태일.”

어둠 속에서 형체 없는 벌레들이 코와 귀, 입을 비집고 들어오는 듯했다.

그렇게 들어온 벌레들이 체내에 축적된 소울에너지를 마구 먹어 치운다.

“조금은 더 똑똑할 줄 알았는데.”

숨이 가빠 왔고,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이젠 작은 불꽃을 일으킬 정도의 스파크조차 만들어 낼 수 없었다.

그 와중에 다시 열린 아크의 입은 닫힐 줄 몰랐다.

“뭐, 어쩔 수 없지. 하지만 적어도 네 몸뚱어리는 내가 회수해야겠어. 네 몸뚱어리를 해부해 보면 마더랜드에 들어갈 방법도 찾을 수 있겠지.”

“끄…으윽…….”

흐릿해져 가는 의식 속에서 태일은 자신의 외투 속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세연의 회중시계를 가만히 움켜쥔다.

째깍, 째깍, 째각…….

손을 타고 전해지는 규칙적 떨림을 느끼며 가만히 눈을 감는다.

결코 하고 싶지 않았던 선택.

‘누군가의 영생은 누군가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 거야. 소수가 소울에너지를 독차지한다면, 수많은 생명들이 다시 태어나지 못하게 되는 거지.’

사용하고 싶지 않았던 에너지.

파칫!

어렵게 끌어모은 태일의 에너지 한 줌이 회중시계를 타고 들어간다.

째깍, 째깍, 째깍, 째깍, 째깍.

요란한 소리와 함께 시계 초침이 수십 배의 속도로 돌기 시작했다.

다섯 개의 열쇠와 회중시계… 다섯 개의 브릿지와 한 개의 소형 커널이 감응하며 한 줄기 빛을 뿜어낸다.

바로 그 순간, 어둠 속을 하릴없이 바라보고 있던 세연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마침내… 선택했구나.”

곧이어 회담장을 덮은 어둠 속에서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 * *

“아저씨! 괜찮아? 정신이 좀 들어?”

“…그래. 쿨럭!”

세이드의 시선은 회담장에 고정되어 있었다.

실드마저 뚫고 나오는 하얀빛.

세이드는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평생을 원했던 일이, 그러나 결국 해낼 수 없던 일이 마침내 벌어지려 하고 있었다.

‘결국 대장… 네 몫이구나.’

문득 허탈한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센트럴을 무너뜨릴 자격조차 없던 자신이 태일을 배신자라 비난했다.

‘쪽팔리게 됐어.’

그 와중에 제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저씨……!”

시선을 돌려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울부짖는 제니를 가만히 바라본다.

바로 몇 분 전, 귀신처럼 날뛰며 세이드를 구출해 냈던 제니가 지금은 어린애처럼 눈물 콧물을 쏟아 내고 있었다.

“괘, 괜찮을 거야. 그러니까……!”

“고생 많았어, 꼬맹이.”

모든 것을 잃은 채 복수만을 위해 살아온 세이드는 그런 제니를 줄곧 ‘약점’이라 생각했다.

센트럴의 파괴보다 꼬맹이의 안전을 먼저 신경 쓰는 자신을 보면서 애써 제니와 거리를 두려 했다.

혁명군이 무너지던 날, 세이드가 가장 먼저 한 행동 역시 제니를 피신시키는 일이었다.

그러나 세이드의 의도와 달리 제니는 기어코 태일을 찾아갔다가 센트럴의 손에 당하고 말았다.

“내가 어리석었어.”

세이드는 가만히 팔을 뻗어 제니를 가만히 안아 주었다.

“아, 아저씨!?”

“좀 더 일찍 깨달았어야 했는데.”

늘 가까이 다가오는 제니를 일부러 매정하게 대했다.

이쪽 세계에서는 태일을 찌르도록 지시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결국 세이드는 자신의 약점을 없앨 수 없었다.

“너는… 내 약점이 아니었는데…….”

그 사실을 깨달은 건, 세연과의 마지막 만남 당시였다.

아크의 군단과 마지막 전투를 치르기 몇 시간 전, 세연이 세이드를 찾아왔다.

“너도 알다시피 센트럴을 무너뜨리고도 남을 만큼의 소울에너지가 봉인되어 있어. 다섯 개의 열쇠만 있다면, 이쪽 세계에서도 그 힘을 사용할 수 있어.”

과거라면 그 무엇보다 반겼을 이야기였다.

“하지만 센트럴을 무너뜨린다면 붉은 눈동자를 가진 모두가 이 세상에서 사라질 거야. 너와 나는 물론… 제니까지도.”

세이드는 그런 세연의 설명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죽음이 두려운 건 아니었다.

센트럴을 없애기 위해서라면, 아무리 끔찍한 최후를 맞이해도 상관없다고 여겼다.

그러나 제니는 아니었다.

태일의 보호 아래든, 자신이 직접 보호하든 제니가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히 만족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만약 센트럴을 무너뜨림으로 인해 제니가 죽게 된다면, 세이드는 멈춰 설 것이다.

자신의 손으로 제니의 삶을 끝장낼 자신이 없었다.

세이드는 오로지 단 한 사람, 제니를 위해 센트럴 파괴마저 포기할 수도 있었다.

결국 세이드는 그때껏 모았던 열쇠들을 그 자리에서 세연에게 건넸다.

“센트럴을 완전히 없앨 수 있는 녀석에게 전해 줘.”

센트럴을 없앨 수 있는 이는 결국 자신이 아니었다.

“…내겐 자격이 없으니까.”

약점이라 생각했던 소녀를 자신의 목숨보다 사랑하게 된 이상, 세이드는 자신의 손으로 복수를 완수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 순간, 센트럴을 끝장낼 자격을 가진 이가 마침내 열쇠를 사용했다.

퍼석! 콰지직!

협상장을 둘러싸고 있던 실드가 내부에서부터 부서지기 시작했다.

* * *

회중시계에 끼워져 있던 두 개의 열쇠와 세연을 통해 전해 받은 열쇠 세 개.

총 다섯 개의 열쇠가 공명하며 엄청난 에너지를 뿜어냈다.

째깍, 째깍, 째깍, 째깍, 째깍, 째깍…….

그동안 단단히 숨겨져 있던 멤브레인이 열리며 통제하기 어려울 정도의 에너지가 태일을 향해 집중되었다.

단번에 매료될 정도로 아름답고 화려한 빛.

그러나 세연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지금, 그 빛은 조금도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았다.

‘센트럴의 손에 멸망해 버린 세계, 그 세계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의 에너지.’

대륙에서 흔히 ‘센트럴’이라 불리는 세력은 한낱 그림자에 불과했다.

진정한 센트럴은 아예 다른 차원의 세계, 즉, ‘마더랜드’에 존재하는 이들을 의미한다.

“마더랜드의 센트럴은 다른 차원의 세계를 발견해 닥치는 대로 파괴했어. 소울에너지를 탈취하기 위해 무슨 짓이든 서슴지 않았지.”

센트럴 통치자들은 압도적인 기술력으로 몇 개의 세계를 파괴했다.

에너지를 빼앗기 위해, 자원을 약탈하기 위해 자신들과 같은 인류를 몇 차례나 절멸시켰다.

오로지 자신들의 영생을 위한 침략이었다.

“놈들은 곧 파괴만으로 모은 에너지가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어. 그래서 실험을 시작했지. ‘농장’을 만들고자 했던 거야.”

온갖 생화학 무기들이 사용되었고, 또다시 몇 개의 세계가 붕괴되었다.

그러나 그 속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이들이 센트럴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멸망한 세계의 생존자들이 만든 조직, 그게 바로 셸터야. 나 역시 이미 멸망해 버린 세계의 생존자이고, 딘도 마찬가지지.”

차원을 무대로 게릴라전이 지속되었지만, 셸터는 시간이 갈수록 불리한 상황에 내몰렸다.

압도적인 센트럴의 기술력에 대원들은 하나둘 쓰러져 갔다.

“…최후까지 살아남은 건 나와 딘, 둘 뿐이었어. 온갖 야수와 소통하던 켄타도, 시간의 속도를 조종하던 데본도 목숨을 잃었지. 그렇게 모든 희망을 잃어갈 때쯤, 널 만난 거야.”

태일의 혁명군은 센트럴을 상대로 대대적 반격에 나섰다.

세연과 딘 역시 힘을 보탰지만, 혁명군의 위력은 둘의 예상을 아늑히 뛰어넘었다.

혁명군은 센트럴의 선진 무기에 맞서 몇 차례나 기적적인 승리를 만들어 냈고, 센트럴의 소울에너지를 탈취하기까지 했다.

“혁명군이 탈취한 소울에너지는 혁명군을 궤멸시키기 위해 마더랜드에서 조달해 온 에너지였어. 하나의 세계를 철저히 파괴해 얻어 낸 에너지를 혁명군이 통째로 탈취한 거야.”

하지만 바로 그 힘 때문에 혁명군은 무너졌다.

혁명군을 무너뜨린 것은 센트럴이 아니라, 욕심과 배신이었다.

그리고 바로 지금, 당시 혁명군이 탈취했던 에너지가 태일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째깍 째깍 째깍 째깍…….

한 개의 세계를 구성하던 소울 에너지… 그건 곧 수십억의 영혼을 의미한다.

그 영혼들이 일제히 태일과 교감하기 시작했다.

쉴 틈 없이 들려오는 속삭임, 머릿속에 파고드는 기억의 파편들, 그리고 온갖 능력들.

주변을 모조리 태울 듯한 불길이 피어올랐다가 그대로 얼어붙는다.

안개가 내려앉았다가 광풍이 몰아치기도 했다.

그 사이 태일의 피부에 비늘이 돋아났다가 단단한 껍데기가 형성되었고, 등 뒤로 날개가 생겨났다가 사라지기도 했다.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의 거대한 에너지가 태일의 몸에 홍수처럼 밀려들고 있었다.

그 혼돈 속에서 태일은 그저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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