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212화 (212/220)

212화 협상 (3)

메타휴먼들이 마치 짚더미처럼 힘없이 넘어진다.

그렇게 쓰러져 버린 메타휴먼의 숫자는 잠깐 사이에 수십, 수백 대에서 순식간에 수천, 수만대로 불어났다.

어느새 수십만의 메타휴먼 중 절반도 넘는 규모가 힘없이 쓰러진 뒤였다.

“이, 이게 대체……!?”

아크는 눈앞에 벌어지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듯 말을 잇지 못했다.

“아무래도 부실한 기종들을 가져온 모양이지?”

세연의 비아냥거림에도 선뜻 대꾸할 수 없었다.

아크가 준비한 로보티안 기종은 여태껏 발견된 단점들을 모두 보완한, 가장 완벽한 기종이었다.

체내에 소울에너지를 보관하는 과정에서 로보티안으로 변이하는 부작용을 해결했을 뿐 아니라, 더욱 효율적으로 인간의 소울에너지를 넘겨받아 전송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개량했다.

이미 수천, 수만 번에 걸친 실험을 통해 그 성능을 입증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렇게 만들어 낸 역작들이 허무하게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무슨 짓을 한 거지?”

침착성을 잃은 아크의 목소리에 더는 장난기가 없었다.

그리고 세연은 분노와 적의를 고스란히 드러낸 아크를 보며 조소를 지어 보였다.

“단순한 이야기야. 네 인형들의 ‘커널’을 파괴했지.”

“뭐……?”

순간 아크의 머릿속에 사고가 정지했다.

대체 지금 이 여자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네가… 뭘 했다고?”

“들었잖아? 너희들이 만들어 놓은 브릿지와 커널, 전부 파괴했다고.”

세연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센트럴이 설립과 함께 제작된 50개의 브릿지(Bridge)와 한 개의 커널(Kernel).

각 구역에서 축적된 소울에너지는 브릿지를 거쳐 한 지점으로 모인다.

그렇게 모인 에너지는 커널을 통해 다른 세계, 이른바 ‘마더랜드(Mother-Land)’로 넘어간다.

핵심 장치인 커널의 파괴는 곧 모든 에너지그리드의 마비를 의미했다.

“물론 쉬운 작업은 아니었지. 각 구역에 숨겨 놓은 기물들을 모조리 찾아내는 것만으로도 정말 번거로운 일이었어.”

지난 두 달 동안 세연은 브릿지의 포탈 기능을 이용해 대륙 곳곳을 누볐다.

각 구역에 숨어 있는 검은 탑, 브릿지들을 일일이 파괴했으며 커널의 흔적을 찾았다.

아크의 눈을 피해 비밀리에 움직여야 했고, 그 과정에서 레이의 히트맨들이 총동원되었다.

그러나 가장 찾기 힘들었던 것은 다름 아닌 ‘커널’이었다.

“너희들이 왜 알마티에 그렇게 집착할까 생각했지.”

이전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센트럴은 기이할 정도로 알마티에 집착했고, 알마티의 방어 또는 탈환에 지나칠 정도의 힘을 쏟아 부었다.

역설적으로 그 어떤 힘을 쏟아 부어서라도 지켜 내야 하는 장소가 바로 알마티였던 셈이다.

“생각해 보면 간단한 문제였어.”

동대륙과 서대륙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 물리적 거리의 가까움은 에너지 전송에 드는 비용을 줄여 주기도 한다.

바로 그 때문에 센트럴은 역사시대를 끝낸 직후 알마티에 기술 역량을 집중시켰고, 바로 그곳에서 수많은 실험들을 자행했다.

드림코퍼레이션의 건립도, 소울벌룬의 제조도, 메타휴먼의 제작도 모두 알마티에서 시작되었다.

“커널은 바로 이곳, 알마티에 있었어. 그래, 어쩌면 눈에 뻔히 보이는 장소에 말이야.”

에너지광장에 위치한 거대한 터빈.

과연 누가 그 낡아 빠진 풍력 발전소 내부에 온 대륙의 에너지를 빼돌리는 장치가 숨어 있다고 상상이나 했을까.

그리고 조금 전부터 마침내 커널에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

그 균열만으로도 절반 이상의 메타휴먼이 기능을 정지했다.

“…….”

아크는 창백해진 얼굴로 세연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반박조차 하지 않았다.

“이제 넌 대륙민들로부터 그 무엇도 빼앗을 수 없어, 아크. 아니, ‘이고르’라고 불러야 할까?”

“하, 하하…….”

가만히 듣고 있던 아크가 조용히 웃음을 터뜨렸다.

“이고르… 그래, 그게 한때 내 이름이었지. 하하하하하… 아하하하하하하!!”

광기 들린 듯한 그의 웃음소리는 점차 커졌다.

협상장에 자리한 모두가 제각기 상기된 얼굴로 그런 아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웃음을 멈춘 아크가 세연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한세연, 이번만큼은 정말이지 놀랐어. 그래, 기대 이상이었어.”

아크는 처음으로 세연의 본명을 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부족해. 암, 부족하고말고.”

그러고는 천천히 세연 쪽으로 다가왔다.

“세연아, 넌 날 잘 알잖아? 내가 고작 그 낡아빠진 시스템에만 의존했을까? 정말 그렇게 생각해?”

태일이 그런 아크의 앞을 막아섰다.

태일뿐 아니라 딘과 루키우스, 심지어 안도까지도 세연의 곁에 바짝 붙어 섰다.

아크는 그런 이들의 면면을 살피고는 가소롭다는 듯 피식 웃어 보였다.

“닐스 사령관.”

“예.”

“협상은 결렬입니다. 지금 당장 알마티를 완전히 지워 버리세요.”

“알겠습니다.”

닐스가 담담한 목소리로 대꾸한 뒤 공격 지시를 내리려는 바로 그 순간, 센트럴 쪽 협상테이블에 앉아 있던 사내가 입을 열었다.

“아니, 미안하지만 그건… 곤란하겠어.”

창백한 얼굴의 청년당 의원, ‘유키 다다오’였다.

아크는 애써 웃음을 지으며 뒤돌아 유키를 바라보았다.

“유키, 그게 무슨 뜻이지?”

“말 그대로야, 아크. 더는 네 정신 나간 계획에 협조할 수 없어.”

“이런. 우리는 꽤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나태하고 이기적인 지배층에 대한 환멸, 어리석고 멍청한 대중에 대한 혐오, 규칙과 질서에 대한 동경, 지배와 통제에 대한 집착까지.

아크는 유키의 그런 면모를 진심으로 좋아했다.

그러나 정작 유키는 아크를 향해 손가락질하고 있었다.

“너는 완전히 미쳤어, 아크. 제정신이 아니라고.”

“…….”

“대륙민 전부를 가축으로 만들고 영혼과 수명을 빼앗겠다고? 그런 걸 내가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했어?”

“이런, 이런. 유키, 그건 내 계획의 절반에 불과해.”

“뭐?”

“그렇게 모은 영혼을, 수명을 어떻게 사용할지 정말 모르겠어?”

“…….”

“좀 더 우수하고 뛰어난 자들이 그 자원을 사용할 거야. 그렇게 얻은 수명과 능력으로 모두를 위해 평생 봉사하겠지. 그래, 대륙민들이 ‘지불’하는 약간의 소울에너지는 일종의 세금이라고 보면 되는 거야.”

“…….”

“유키 다다오, 영생은 말이지, 절대 선물이 아니야. 사실은 저주에 가깝지. 평생 수십 개의 세계를, 수백억의 생명을 안정적으로 유지해야 하는 사명을 띠게 될 테니까 말이야.”

유키의 눈동자가 희미하게 떨렸다.

“너에게는 자격이 있어, 유키. 바로 너 같이 선택받은 자들이 인류의 영원한 번창을 위해 그 자원을 사용하게 될 거야.”

마침내 유키가 말문을 열었다.

“궤변 따위 집어치워. 난 그런 세계를 꿈꾼 적 없어. 넌… 너는 완전히 미쳐 버렸어.”

“유감이야, 유키. 너만큼은 나와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유키는 결국 기회를 차 버렸다.

어쩌면 짚단처럼 쓰러져 가는 메타휴먼들을 보고 아크의 패배를 지레짐작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건 착각에 불과했다.

결국 최종 승자는 늘 그랬듯 마더랜드의 지식과 기술을 가진 쪽이 될 것이다.

“닐스 사령관, 유키 군은 우리와 함께할 수 없겠군.”

그러나 닐스의 대답 대신 냉랭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센트럴과 함께할 수 없는 쪽은 바로 당신이오, 아크.”

“……렌야 장군.”

잠자코 있던 마지막 한 사람까지 결국 반기를 든 것이다.

“당신의 음모가 이미 전 대륙에 알려졌소. 그리고 이 대륙에 당신의 뜻에 순순히 복종할 자는 없겠지.”

렌야의 말이 끝난 바로 그 순간, 뒤쪽에서 거대한 함성이 일었다.

콰쾅! 쾅!!

이어지는 폭발음과 함께 그나마 버티고 서있던 메타휴먼들이 차례로 부서지기 시작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동부 전선에 배치되어 있던 병력이 북부로 진격해 도리어 센트럴 사령부를 공격하고 있었다.

렌야는 협상장에 나오기 전부터 이미 닐스와 아크에 대한 배신을 각오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사이, 유키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렌야의 옆에 섰다.

“감히 너희들이……!”

“아크 탈로스, 닐스 레오나드. 당신들을 반역죄와 살인죄로 체포하겠소.”

그렇게 협상장과 전장이 일제히 혼란에 휩싸인 가운데, 루키우스가 회담장 중앙의 통신기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대륙민들은 모두 듣고 있소? 듣고 있다면 지금 당장 무기를 드시오!”

뒤이어 안도가 마치 선동이라도 하듯 고함을 내질렀다.

“대륙민을 전부 노예로 만들어 버리려는 미치광이에 맞섭시다! 이 전쟁에서 패한다면 미래란 없을 거요!”

그리고 마침내 두 사람의 목소리에 화답이라도 하듯 알마티의 성벽 문이 열렸다.

“와아아아아아아!!!”

지금껏 숨죽이고 있던 알마티 전 병력이 일제히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 * *

“자리를 지켜!!”

닐스가 협상장에 나간 사이, 임시로 군의 지휘를 맡은 9중대장 무명은 동요하는 병사들을 향해 고함을 내질렀다.

협상장의 대화는 이곳까지 전달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협상에서 무슨 대화가 오가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한창 협상이 진행되던 중, 최전방에 배치되어 있던 메타휴먼들이 차례로 쓰러지면서 사달이 났다.

그리고 바로 그 이변을 신호로 몇 개 중대가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전부 부숴 버려! 메타휴먼들을 모조리 없애라!!”

명령을 내린 적조차 없건만, 중대장들은 제멋대로 메타휴먼의 파괴를 지시하고 있었다.

‘숨어 있던 코카서스 잔당인가?’

무명은 당황한 와중에도 제멋대로 날뛰는 중대들을 살폈다.

결코 충동적이거나 갑작스러운 움직임이 아니다.

오히려 매우 조직적인 움직임이었고, 사전에 계산된 행동이었다.

‘메타휴먼에게 이상 현상이 벌어질 거라는 사실을 미리 안 건가?’

무명 역시 아크가 데려온 메타휴먼들에 거부감을 느끼긴 마찬가지였지만, 적어도 그 군단이 아군이라는 사실만큼은 확실했다.

“중대장님, 저건 아무래도……!”

중대원은 차마 자신의 말을 끝맺지 못했지만, 모두가 그 의미를 알고 있었다.

“그래, 반란이다.”

실제 움직임에 나선 중대는 소수에 불과했지만, 그런 일탈만으로 부대는 일제히 혼란에 빠져 버렸다.

대부분은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멍하니 파괴 행위를 구경했고, 일부는 얼떨결에 휩쓸려 메타휴먼에 대한 파괴에 동참했다.

누가 반군이고, 누가 아군인지, 그런 지시를 내린 이가 누구인지조차 확실하지 않았다.

그 꼴을 하릴없이 바라보고 있던 중대원 하나가 무명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중대장님, 저희는 어떻게 하면 됩니까?”

“섣불리 움직이지 말고 대기해.”

이번 일의 배후가 누구인지부터 알아야 했다.

만약 소수의 일탈에 불과하다면, 그 지휘관을 색출해 없애 버리기만 하면 곧 진정될 것이다.

그러나 잠시 뒤, 부대가 혼란에 빠진 와중에 동쪽에서 거대한 함성이 들려왔다.

“저, 저거……!”

“5군단, 6군단 병력입니다!”

알마티 동쪽에 주둔하고 있어야 할 부대가 일제히 북쪽을 향해 진격해 오고 있었다.

‘렌야, 이 개자식이!’

무명은 마침내 상황을 파악하고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주, 중대장님, 대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다들 대장함에 올라타!”

닐스에게 임시 지휘권을 넘겨받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것에 불과했다.

무명은 지금껏 이레귤러로 손가락질 받으며 다른 중대장들에게조차 인정받지 못했다.

그러니 비록 반란에 동참하지 않은 중대라 하더라도 무명의 지시에 따를 리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무명이 취할 수 있는 조치는 단 하나뿐이었다.

“플루톤은… 순양함만큼은 어떻게든 지켜 낸다!”

“네, 알겠습니다!!”

그러나 9중대원들이 지시에 따르기 위해 등을 돌린 바로 그 순간, 잠자코 있던 병사들이 갑자기 9중대원들의 뒤통수를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아, 안 돼!!!”

뒤늦게 그 모습을 본 무명이 고함을 내질렀다.

그러나 이미 수백 개에 이르는 총구가 일제히 불을 내뿜은 뒤였다.

탕! 탕! 타탕! 타탕!!

셀 수 없이 많은 총알이 날아들었고, 9중대원들은 능력을 사용할 틈조차 없이 벌집이 되어 차례로 쓰러졌다.

지금껏 9중대는 무수한 전장에서 선두에 섰다.

거점 방어에서부터 잠입, 암살 같은 특수 임무까지 도맡았으나, 공적을 인정받기는커녕 차별받으며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그처럼 괴물 취급을 받으면서도 9중대원들은 기어코 버텨 냈다.

그러나 그렇게 힘겹게 살아온 중대원들이 너무나도 허무하게 쓰러지고 있었다.

“아,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무명은 그 끔찍한 광경에 이성을 잃은 채 비명을 질렀고, 그 사이 그의 몸뚱어리에도 무수한 총알이 박혔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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