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화 협상 (2)
“닐스, 너도 사실은 센트럴의 사령관이 아니잖아. 안 그래?”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아크가 애써 태연하게 대꾸했지만, 태일의 한마디는 한 순간에 렌야의 머릿속을 뒤흔들었다.
렌야는 아주 오랜 세월 동안 닐스 레오나드라는 인간을 곁에서 보아 왔다.
닐스는 사관학교 동기이자, 둘도 없는 친구였으며, 승진을 두고 치열하게 경쟁해 왔다.
그렇기에 렌야는 닐스에 대해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괄괄하고 저돌적인 성격으로 작전을 과감하게 밀어붙이는 사내.
계산보다 본능에 의존하고, 정치보다 의리를 중시하는 군인.
‘이야, 이게 얼마만이지? 렌야, 오늘은 어디 코가 비뚤어지게 마셔 보자고!’
야전에서 마주치면 다짜고짜 술부터 꺼내 들던 녀석이었다.
그러나 동부 연합과의 전투가 있은 뒤로 닐스의 성격이 완전히 변해 버렸다.
상관조차 말리지 못할 정도로 막무가내였던 그가 갑자기 침착하고 과묵하게 변해 버린 것이다.
‘렌야, 넌 나의 동기이기 전에 내 부하로서 이곳에 있다. 그러니 선을 지켜.’
서부에서 수년 만에 다시 마주했을 때, 닐스의 눈에는 한 점의 온기도 없었다.
무언가에 쫒기는 것처럼 여유가 없어 보였고, 조급해 보였다.
그러나 그보다 가장 크게 달라진 것은 따로 있었다.
“센트럴의 사령관 닐스가 언제부터 능력자였지?”
피와 뼈, 살까지 동원하여 만들어 낸 방패와 순식간에 전장을 휩쓴 모래 파도.
닐스가 보인 능력은 이전까지 들어 본 적조차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뒤늦게 능력이 발현되는 사례도 있지만, 닐스의 변화는 지나칠 정도로 부자연스러웠다.
“쓸데없는 음모론은 이 정도로 해 두죠.”
“닐스, 날 똑바로 보고 진실을 말해. 한때 함께 했던 동료로서 마지막 부탁이다.”
태일은 아크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닐스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렌야는 당혹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동료?’
사관학교에 입학하여 평생을 군인으로 살아온 닐스 레오나드, 그가 대체 저런 범죄자와 무슨 연관이 있단 말인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난 당신을 몰라.”
닐스는 굳은 얼굴로 그런 태일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닐스!”
태일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닐스는 태일을 보며 가만히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봐, 닐스. 또 혼자 술이나 마시고 있는 거야? 마침 달빛도 좋은데 같이 마시자고!’
바보같이 웃으며 의심 없이 자신을 대하던 남자.
‘센트럴을 왜 그렇게 싫어하냐고? 글쎄, 난 그저 좀 더 자유로운 세계를 만들고 싶을 뿐이야.’
터무니없는 꿈속에 빠져 살던 이상론자.
‘난 언젠가 모두 같이 웃으면서 이날을 떠올렸으면 좋겠어. 모든 게 끝나고 나서 말이야.’
그래도 아주 조금은 그의 꿈이 이뤄져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의 곁에서 함께 생활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죄책감이 커졌고, 계속 그의 곁에 머무르고 싶다는 욕망 또한 함께 몸집을 키워 갔다.
그러나 결국 닐스는 그를 버렸다.
배신자들과 함께 그의 모든 것을 무너뜨렸다.
하지만 그렇게 오랜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한 직후 느낀 감정은 허탈감이었다.
그래, 이미 전부 끝난 이야기다.
자신의 손으로 모든 것을 부수었고, 태일과는 다시 함께 할 수 없다.
아니, 처음부터 함께한 적조차 없었다.
“헛소리는 그쯤 해 두지.”
닐스의 차가운 말에 태일도 더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저 슬픈 눈으로 닐스를 바라볼 뿐이었다.
약간의 신경전 이후, 다소 지난한 협상이 이어졌다.
대부분의 이야기를 끌어간 쪽은 온갖 자료를 준비해 온 안도 애슈턴과 아크였다.
“이대로 센트럴오더가 이어진다면 상호 전력의 피해는 점차 커질 겁니다. 이미 각 구역에서 알마티에 지원 의사를 표하고 있습니다.”
갖가지 통계와 의원들의 서명이 담긴 서류가 오간다.
“대륙 각 구역 대표들은 정식으로 센트럴오더의 중지를 요청하고자 합니다.”
“센트럴오더의 발령은 의회를 통해 정식 논의를 거친 사항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선뜻 종료할 수 있는 사안은 아니죠.”
“근거 법령과 시행령에 따르면 사령관에게는 조치의 중지를 요청할 수 있는 권한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 이 자리에는 사령관님이 있지 않습니까?”
“유감이지만, 아직 센트럴오더의 주요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소.”
“그 목표는 대체 누가 정하는 겁니까?”
“방금 그 발언, 센트럴의 법과 절차에 대한 불신이라고 이해해도 되겠소?”
그럴듯한 문구들로 포장되어 있었지만, 사실상 겉핥기에 불과한 말장난일 뿐이었다.
“다들 잠깐 말씀을 멈춰 주시오.”
한동안 말없이 듣고 있던 루키우스가 마침내 말문을 열었다.
“이 협상은 결국 전쟁 외의 대안을 찾기 위함이오. 아닙니까?”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루키우스가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알마티에 원하는 조건을 말하시오. 무엇을 바라시오?”
그 와중에 안도의 손목시계 알람음이 갑작스레 요란하게 울렸다.
띠리리리!
“아, 실례합니다.”
안도가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급히 시계를 매만진다.
“그럼 우리 센트럴 쪽 조건을 말씀드리죠.”
마침내 아크가 자신만만한 미소와 함께 말문을 열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단순합니다. 알마티의 문을 열어 주십시오. 더불어 알마티의 무장 해제를 요청합니다. 자경단과 LAPD를 비롯해 그 어떤 단체의 무장도 더는 허락되지 않을 겁니다.”
“…….”
“알마티뿐만이 아닙니다. 다른 구역 또한 마찬가지로 모든 무장을 해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LAPD 역시 공식적으로 해체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는 센트럴의 새로운 경찰들이 담당할 겁니다.”
“새로운 경찰……?”
아크가 만면에 웃음을 지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들어 자신의 뒤쪽을 가리켰다.
“네, 알마티까지 제가 직접 데려온 저 친구들이 바로 그 역할을 맡을 겁니다.”
수십만에 이르는 붉은 눈의 메타휴먼들은 하나같이 레이저건과 나노 무장을 갖추고 있었다.
군인의 중무장이 아닌 LAPD식 경무장이었다.
애당초 메타휴먼을 각 구역에 배치할 각오로 이 모든 일이 시작된 것이었다.
아크의 파격적인 발언에 협상장은 일순간 침묵에 빠졌다.
그러나 아크는 부드럽게 말을 이어 갔다.
“아, 여러분들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잘 압니다. 인간이 어떻게 메타휴먼의 통제를 받느냐 하는 거부감이 있겠지요. 그러나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메타휴먼은 오로지 인간의 안전을 위해 움직일 겁니다. 센트럴은 모든 대륙민의 안전과 진보를 보장할 겁니다.”
바로 그때 센트럴 측 테이블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기다려 주시오.”
루키우스 역시 익히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센트럴의 영관급들 가운데 가장 말수가 적고, 무뚝뚝하기로 유명한 자룰 준장.
알마티 서쪽 포위망 지휘를 맡은 인물로 매우 유능하고 위협적인 인물이었다.
만약 셸터의 지원군이 없었다면, 알마티 서쪽 장벽이 가장 먼저 무너졌을 것이다.
가장 눈에 띄는 활약을 보였던 그가 아크의 말에 반발하고 있었다.
“아크 군, 메타휴먼을 치안에 투입한다고? 그게 무슨 말인가?”
“자룰 준장, 자네가 나설 문제가 아니네.”
닐스가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불쾌감을 표했지만, 자룰은 물러서지 않았다.
“이건 원칙의 문제입니다. 메타휴먼을 무장시켜 투입한다니, 이건 말도 안 되는 얘기 아닙니까?”
“자룰, 그만 입을 다물게!”
“사령관님, 메타휴먼은 결코 인간의 머리 위에 설 수 없습니다!”
목소리가 높아지는 찰나, 아크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아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 보인 뒤, 자룰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자룰 준장님, 혹시 센트럴의 법령 가운데 메타휴먼의 역할이나, 직업에 관한 규정이 존재합니까?”
“그야……!”
“없지요.”
당연하게도 메타휴먼의 역할이나, 직업에 대한 규정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존재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기계나 노예에 불과한 메타휴먼의 권리와 의무를 법에 명시할 이유가 없으니까.
바로 그 때문에 로보티안 법 제정 당시, 그처럼 난리가 나지 않았던가.
“그러나 항명에 대한 사항은 군법에 명시되어 있지요.”
“자, 자네……!!”
아크가 무슨 소리를 하려는지 깨달은 자룰이 깜짝 놀라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지금 대체 무슨 헛소리를 하는겐가!?”
“사령관님의 지시를 두 차례나 어기고 발언하셨습니다. 게다가 지금은 전시 상황이지요.”
“이 무슨 헛소리를……!”
자룰이 경악을 금치 못하며 주먹을 움켜쥐었지만, 아크는 여유롭게 닐스 쪽을 바라보았다.
“사령관님, 이 경우 군법에 따르면 어떤 조치가 내려집니까?”
“…즉결 처형까지 가능하네.”
“사령관님!!!”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스스스스스…….
자룰이 발을 디딘 지면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이, 이게 대체 무슨……!!”
깜짝 놀란 자룰이 허우적대며 닐스를 바라보았지만, 닐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자룰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 이놈들!!!”
자룰의 고함이 협상장을 쩌렁쩌렁 울렸지만 그것도 잠시, 자룰의 몸뚱어리는 완전히 흙속에 파묻혀 그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그 와중에 루키우스를 비롯해 협상장에 자리한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자자, 분위기가 너무 얼어붙었군요. 오해하지 마십시오. 저는 지금 여러분들을 위협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협상과 별개로 군법을 집행했을 뿐이지요.”
아크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천진하게 말했지만, 그 자리에 앉은 이들 모두 조금 전 벌어진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아크는, 센트럴은 메타휴먼을 이용해 대륙민 모두를 통제할 생각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그 어떤 저항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자룰의 죽음 직후 얼마간 소름 끼치는 침묵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 침묵을 깬 건, 조그마한 목소리였다.
“한 가지 의문이 있는데.”
아크가 입을 연 여인을 향해 고개를 돌려 빙긋 웃어 보인다.
“아, 누나. 무슨 할 말이라도?”
“저 메타휴먼들, 제대로 움직이긴 할까?”
카렌의 말이 끝나는 순간.
툭.
뒤쪽에서 무언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전열의 가장 앞에 서 있던 메타휴먼 한 대가 갑자기 앞으로 넘어진 것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툭, 툭, 툭…….
그렇게 쓰러진 메타휴먼을 시작으로 주변의 메타휴먼들이 차례로 힘없이 쓰러지기 시작했다.
“무슨……!?”
그 모습을 확인한 아크의 얼굴이 처음으로 일그러졌다.
“아무래도 네가 데려온 녀석들, 어딘가 문제가 있는 거 같아서 말이야.”
그리고 이번만큼은 그 누구도 세연을 향해 정신병자라는 비난을 퍼붓지 못했다.
* * *
알마티 에너지 광장, 전 대륙에서 가장 거대하게 만들어진 터빈 밑.
“후유, 드디어 찾았네.”
“…설마 이 안에 있을 줄이야.”
제인과 레이는 이마의 땀을 훔치며 발전소 안에 숨겨진 검은 탑을 바라보았다.
50구역 붉은 언덕 위에 있는 탑보다 훨씬 크고 거대한 규모였지만, 줄곧 발전소 안에 숨겨져 있었기에 이제야 발견한 참이었다.
“어때, 부술 수 있겠어?”
“해 봐야지.”
레이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눈앞의 탑을 올려다보았다.
제인의 능력을 사용한다면 한순간에 부술 수 있겠지만, 그만한 괴물이 아니고서야 이 단단한 탑을 부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창 협상 중일거야. 서둘러야 해.”
대륙 곳곳에 설치된 51개의 탑.
그중 이미 49개가 파괴되었으니, 이제 남은 건 눈앞의 탑을 포함해 단 두 개뿐이다.
“다들 준비해!”
닐스의 지시에 따라 히트맨들이 탑을 둘러쌌다.
사실 탑을 둘러싼 이들은 히트맨이라기보다 해체업자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거야, 원. 내 손으로 내 무덤을 파는 기분이군.”
“아직도 우는 소리야?”
“너도 내 입장이 돼 봐, 제인. 내 팀들은 전부 메타휴먼들로 구성되어 있단 말이야. 이 탑들을 전부 부수면 내 사업도 끝장나는 거라고.”
“…내가 책임지면 되지, 뭐.”
“뭐?”
레이가 고개를 돌려 묻자 제인이 얼굴을 붉히며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아무것도 아니야. 빨리 끝내자고!”
“…그래.”
사실 별 의미 없는 푸념이었을 뿐이다.
레이 역시 알고 있었다.
지금 자신이 하는 일이야말로 그 어떤 일보다 가치 있고 중요한 일이라는 사실을.
‘인공 몸뚱어리에 묶여 있던 영혼들을 원래의 자리로.’
레이가 지금껏 인간보다 신뢰해 왔던 메타휴먼 동료들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
그건 바로 ‘해방’이었다.
“시작한다!”
콰쾅! 쾅!!
곧이어 사방에서 탑을 향해 광학 레이저가 쏘아지기 시작했다.
세계와 세계 사이를 잇는 포탈이자, 메타휴먼의 존재를 가능케 하는 탑.
쩌적… 쩌저적!
모든 사건의 시작과 끝에 있었던 탑이 마침내 무너지기 시작했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