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화 협상 (1)
“오빠, 꼭 오빠가 직접 가야겠어?”
“…그래.”
안도 애슈턴은 동그랗게 뜬 라비의 눈을 슬쩍 피하며 작게 대답했다.
“너무 위험해. 닐스가 또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구. 더구나 오빠는 사람을 산 채로 구워 버릴 능력도 없잖아.”
못 본 동안 입이 걸쭉해진 그녀가 도무지 적응되지 않았다.
입만 걸쭉해진 게 아니었다.
펑크라이더들을 이끌고 나타나 전쟁터를 누비던 라비를 보고 얼마나 놀랐던가.
‘램’이라 불리던 시절에 비해 키는 훌쩍 커 버렸고, 피부는 까무잡잡하게 변해 버렸다.
팔뚝에 새긴 해골 문양을 보았을 적에는 까무러칠 뻔했다.
펑크라이더들 속에서 불량소녀로 커 버린 램의 모습에 눈물이 핑 돌았을 정도였다.
“아, 역시 마음이 안 놓여. 오빠 생긴 거 봐. 비실비실해서 한 대치면 다 부러지게 생겼잖아!”
…물론 그것도 처음뿐이었다.
지나칠 정도로 건강하게(?) 커 버린 것일 뿐, 착한 품성은 그대로였으니까.
“그냥 우리 애들 데려가서 기습이라도 해 버려? 깡통 놈들 숫자가 아무리 많아도 대가리만 깨부수면 끝이잖아!”
…아마도 그대로일 거다.
아마도.
“흠, 정 그렇게 걱정되면 우리가 따라가 볼까? 어때, 앨리스?”
“으응. 태일 아저씨도 가니까 나도 가고 싶어.”
라비의 곁에 나란히 앉아 있던 두 꼬맹이가 한마디씩 보탠다.
지우와 앨리스라고 했던가.
50구역에서 온 꼬마들은 라비와 친구가 되어 늘 붙어 다니는 모양이었다.
“너희들, 행여나 몰래 따라올 생각하지 마. 너무 위험하니까.”
조금 뒤, 알마티 북쪽 장벽 앞에서 협상이 열린다.
당연하게도 그 협상 자리는 어린애들이 갈 만한 곳이 아니었다.
“하, 이 아저씨도 우리가 어리다고 무시하네? 앨리스, 보여 줘!”
“으응……!”
파칫!
곧이어 앨리스의 손끝에서 푸른 전류가 피어올랐다.
“어, 이거……?”
“봐, 대단하지? 태일 아저씨랑 똑같은 능력이라구!”
신기한 장면을 보게 된 안도는 흥미롭다는 듯 그 전류를 살폈다.
‘같은 능력이 두 사람에게 발현될 수 있는 거였던가?’
아카데미 시절 본 논문에 따르면, 초능력의 원천은 인간의 소울에너지였다.
인간은 제각기 고유의 소울에너지를 지니기에 능력 또한 결코 같을 수 없다.
논문은 만약 모든 인류가 ‘능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된다면, 개개인의 능력은 외모의 차이처럼 제각각 다를 것이라고 끝맺었다.
‘세부적인 능력 발현은 다르겠지.’
의도치 않게 시간을 빼앗긴 안도는 앨리스의 능력에서 눈을 뗀 뒤, 준비한 자료들을 들고 일어났다.
협상 시 필요할지 몰라 준비한 각 구역의 자원 정보 및 군사력 자료였다.
혹시 몰라 준비한 자료였지만, 사용할 일이 없길 진심으로 바랐다.
‘이야기가 잘 풀렸으면 좋겠는데…….’
약속된 시간까지 채 20분이 남지 않았다.
방을 나서기 직전, 안도는 저희끼리 쑥덕이며 뭔가 꾸미고 있는 꼬맹이들을 향해 짐짓 엄숙하게 말했다.
“너희들, 말썽 부리지 말고 얌전히 있어. 정말 많은 이들의 목숨이 달린 일이니까, 절대 함부로 행동하면 안 돼. 알았어?”
“알았어, 오빠. 우리가 애도 아니고. 걱정 말고 다녀와!”
라비가 어깨를 으쓱하며 웃어 보인다.
그러나 안도는 그 웃음이 어째 불길하게 느껴졌다.
불안한 눈으로 라비를 바라보며 천천히 방문을 열었다.
“이제야 나왔군.”
“어, 어엇!”
안도는 방문 앞에 떡하니 서 있는 사내를 보고는 깜짝 놀라 뒷걸음질 치고 말았다.
딘은 놀라는 안도를 보며 히죽 웃어 보였다.
“뭐야, 날 보고 그렇게 놀랄 것까진 없잖아?”
“딘 아저씨!”
등 뒤에서 라비의 활기찬 목소리가 들려온다.
라비는 그 누구보다 알렉세이 딘을 잘 따랐고, 딘 역시 라비를 동생처럼 여기는 듯 보였다.
어쩌면 지금껏 안도가 해 주지 못했던 역할을 딘이 해 줬는지도 모른다.
“설마 아저씨도 나한테 잔소리하러 온 거예요?”
“그럴 리가. 네가 말한다고 들을 녀석도 아니고.”
“헷.”
“그보다 너희 애들끼리 또 싸움 났던데. 펑크라이더 녀석들은 어째 잠시도 가만히 있질 못하냐?”
“어어!? 진짜로? 이 자식들, 가만히 말썽 부리지 말고 있으라니까!”
라비는 깜짝 놀란 듯 황급히 방을 뛰쳐나갔고, 지우와 앨리스 역시 그런 라비의 뒤를 졸졸 따랐다.
딘은 어리둥절한 얼굴의 안도를 보며 피식 웃어 보였다.
“갑시다, 우리도.”
“아, 그러시죠.”
셸터를 이끄는 사내이자, 순양함마저 격추할 정도의 병기를 제작한 사내.
사실 알마티에 머무르는 이들 중 가장 미스테리한 인물 중 하나가 바로 눈앞의 알렉세이 딘이었다.
* * *
“준비는 됐나?”
루키우스는 담담한 표정으로 태일과 세연을 바라보았다.
세연은 붉은 눈동자를 가리기 위해 착용한 특수 렌즈가 못내 불편한 듯 눈을 깜빡였지만, 가만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네, 시장님.”
“…그래.”
그러나 정작 준비가 되지 않은 쪽은 알마티의 시장이자, 협상의 대표자인 루키우스 자신이었다.
약 두 시간 전, 센트럴의 아크로부터 갑작스레 협상 제안이 왔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루키우스 시장님.’
홀로그램에 떠오른 소년은 해맑게 웃어 보이며 유쾌하게 말했다.
‘전 평화를 좋아합니다. 불필요하게 피를 흘릴 마음은 없습니다.’
아크가 지금껏 저질러 온 짓에 대해서라면 루키우스 역시 알고 있었다.
메타휴먼이라는 괴물을 만든 것도, 그 괴물을 이용해 인간의 영혼을 착취한 것도 모두 아크의 짓이었다.
그러나 정작 악마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루키우스를 유혹했다.
‘협상을 하시죠. 나쁜 제안은 아닐 겁니다. 알마티에게는 지금까지의 희생에 걸맞는 보상이 주어질 테니까요.’
협상, 희생, 보상… 그럴듯한 단어들은 마음을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당장이라도 알마티를 등지고 떠나려던 각 구역 사절들은 반색하며 협상의 중계를 요청했다.
그리고 이제 약 15분 뒤, 협상이 시작될 것이다.
“안도 의원과 알렉세이 군은 아직인가?”
“아, 저기 오는군요.”
루키우스는 헐레벌떡 달려오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협상장에는 루키우스, 안도, 딘, 태일과 세연까지 총 다섯 명이 나갈 예정이었다.
카츠미와 페이진, 민호, 카심 등 많은 이들이 협상장에 나가겠다며 자원했지만, 결국 루키우스는 다섯을 정했다.
“하아, 하아… 늦어서 죄송합니다.”
서류 뭉치를 잔뜩 들고 온 안도와 완전히 빈손으로 온 알렉세이 딘의 모습은 그야말로 대조적이었다.
“협상장에서 오가는 모든 이야기는 곧장 다른 구역에도 실시간으로 중계될 거네.”
양측에서 다섯 명씩 나오는 협상장이었지만, 열 명이 나누는 대화는 전 대륙으로 순식간에 퍼져 나갈 것이다.
그 무게감을 알고 있었기에 루키우스는 긴장감을 숨길 수 없었다.
“말 한마디, 한 마디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명심해 주게.”
“알고 있습니다.”
태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선뜻 대답했다.
그러나 루키우스는 마지막 순간까지 태일과 세연을 두고 고민했다.
각자의 세력과 정치력을 가진 알렉세이 딘과 안도 애슈턴에 비해 태연과 세연은 조커 카드와 같았다.
돌발적인 행동을 저지르곤 했고, 감당하기 힘든 이야기를 꺼내곤 했다.
그런 행동들은 늘 판세를 뒤집어엎었고, 생각지 못한 결과를 만들어 내곤 했다.
이번 협상에서 두 사람의 그런 태도가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협상까지 남겨진 시간은 적었고, 의견을 조율할 시간 역시 부족했다.
“그럼… 갑시다.”
루키우스는 깊이 한숨을 내쉰 뒤, 천천히 열리기 시작한 알마티 북문을 바라보았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 * *
전쟁터 한가운데 세워진 협상장, 그 주변에는 외부에서 결코 뚫을 수 없는 실드가 둘러쳐져 있었다.
협상 테이블에는 오로지 열 명이 앉을 자리만이 마련되어 있었다.
동부 포위망의 지휘를 맡았던 렌야 준장은 닐스의 지시에 따라 협상장에 나왔다.
렌야의 옆자리에는 자룰 준장, 닐스 사령관, 유키 의원, 아크가 차례로 앉아 있었다.
‘전부 쓸데없는 짓 아닌가.’
렌야는 애당초 무너지기 직전의 알마티와 협상을 벌여야 하는 이유조차 이해할 수 없었다.
이제 앞으로 조금이다.
조금만 더 두드리면 알마티는 금세 무너져 버릴 게 분명했다.
그러나 아크는 메타휴먼을 전쟁에 투입하는 무리수를 뒀고, 닐스는 그런 상황을 방치했다.
심지어 전쟁에 참전한 아크는 알마티에 협상을 제안했고, 이런 자리까지 만들었다.
굳이 번거로운 짓을 저지르는 배후는 틀림없이 드림코퍼레이션의 아크가 있었다.
‘아크, 저 남자가 대체 얼마나 대단한 작자이기에 이렇게 월권을 저지르는 거지?’
문제는 협상과 메타휴먼의 참전뿐만이 아니었다.
지난밤, 북쪽 사령부 본진에서 패전의 책임을 물어 장교들에 대한 대대적 처분이 내려졌다.
렌야에게는 사전에 언질조차 없었던 조치였고, 그 과정에서 렌야가 알고 지내던 장교 몇도 휩쓸려 처형당했다.
렌야에게는 그저 처분 결과에 대한 통보만이 전해졌을 뿐이다.
지금껏 단 하룻밤 사이에 그처럼 많은 장교가 일시에 처형된 적은 없었다.
분명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었다.
‘뭔가 한참 잘못 굴러가고 있다.’
렌야는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가 벌어지고 있음을 알았지만, 스스로의 신분을 결코 망각하지 않았다.
군인은 그저 상부의 명령에 복종하며 최선을 다해 임무를 완수할 뿐이다.
상부의 지시에 의심을 품는다면, 그 순간부터 더는 군인이라 할 수 없었다.
그 와중에 아크의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저기 오는군요.”
알마티의 북문이 열리며 다섯 명이 모습을 드러낸다.
언뜻 보아도 군복과 거리가 먼 차림새에 하나같이 군인으로 보이지 않는 이들이었다.
양손을 휘휘 내저으며 건들거리는 양아치, 알 수 없는 서류 뭉치를 들고 오는 샌님, 당장이라도 은퇴해야 할 것 같은 늙은이까지.
기괴하기 짝이 없는 조합이었다.
아크는 협상장에 들어온 다섯을 향해 고개를 숙여 보이며 밝게 웃어 보였다.
“자, 이렇게 만나서 반갑습니다, 여러분. 어서 자리에 앉으시지요.”
“…그럼 실례하겠소.”
협상장에 앉은 이들은 서로 얼마가 눈치를 주고받았다.
이 자리에서 나누는 모든 대화는 전 구역에 중계된다고 했던가.
그러니 역시나 입을 떼기는 그리 쉽지 않겠…….
“이야, 당신들이 지금껏 학살을 저지른 쓰레기들이군요. 이렇게 만나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뭐?
순간 렌야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고 말았다.
구석진 자리에 앉은 붉은 눈동자의 사내, 그가 건들거리며 히죽 웃고 있다.
‘사막여우’라고도 불리던 사내, 알렉세이 딘이었다.
한편, 알마티 쪽 인사들도 딘의 돌발 발언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표정이 가관이었다.
여인은 한쪽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고, 노인은 입을 쩍 벌렸으며, 서류 뭉치를 들고 있던 사내는 그만 서류들을 손에서 놓치고 말았다.
유일하게 단 한 명의 사내, 태일은 이미 그런 상황을 예상한 듯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다.
“꽤나 재미있는 농담이군요. 그렇죠? 하하하하!”
아크 역시 아무렇지 않다는 듯 천연덕스럽게 웃어 보인다.
그러나 단단히 얼어붙은 분위기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바로 그때, 당황한 듯 얼굴을 붉히고 있던 여인이 한숨을 내쉬더니 말문을 열었다.
“좋아요, 이렇게 된 이상 말을 빙빙 돌릴 필요도 없겠네요.”
“자, 잠깐만……!”
노인이 황급히 말을 막으려 했지만, 여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당신들이 원하는 게 무엇이든, 그건 결코 이뤄지지 않을 거예요.”
그녀의 단호한 한 마디에 렌야는 그만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일까?
마음만 먹는다면, 단 한마디의 지시라면 알마티는 당장에라도 점령될 것이다.
메타휴먼 병사들과 순양함, 폭격기들과 전투기들까지.
여전히 센트럴 측 병력은 알마티를 압도하고도 남을 수준이었으니까.
그때 아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더 이상 피를 흘리고 싶지 않을 뿐이야, 누나.”
“……!”
아크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별안간 여인에게 집중되었다.
아크가 ‘누나’라 부를 수 있는 여인, 그건 드림코퍼레이션의 카렌 이사뿐이다.
과연 두 사람은 꽤 닮은 외모를 갖고 있었다.
여인은 눈살을 찌푸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대체 지금 무슨 소리를……!”
“당신에게 하는 소리가 아닙니다.”
아크가 차갑게 쏘아붙인다.
“당신 안에 숨어 있는 내 누이에게 하는 이야기에요. 당신은 나의 누이에게 기생해 있는 인격일 뿐이잖습니까?”
“그게 대체 무슨……!?”
“안타까운 가족 사이지요. 누나에게는 다중 인격이라는 끔찍한 증상이 있거든요.”
전 대륙에 아크의 목소리가 퍼져 나간다.
그리고 그가 의도하는 바는 명확했다.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여인에게는 정신 병력이 있다.
그러니 그녀의 발언에는 그 어떠한 영향력도, 설득력도 없다.
줄곧 침묵하고 있던 닐스가 가만히 입을 열었다.
“이건 우릴 너무 무시한 처사가 아닌가 싶군. 이렇게 중요한 자리에 정신병자가 앉아 있다니 말이야.”
“그건 너도 마찬가지일 텐데, 닐스.”
태일이 닐스를 똑바로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렌야 역시 태일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푸른 번개를 사용하는 이레귤러, 센트럴 군에서 가장 경계하는 인물.
지금껏 알마티를 점령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의 존재였다.
“닐스, 너도 사실은 센트럴의 사령관이 아니잖아. 안 그래?”
태일의 말투는 마치 오랜 친구를 대하는 듯 스스럼이 없었다.
닐스는 그런 태일을 죽일 듯 노려보고 있었지만, 선뜻 태일에 말에 뭐라 대꾸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 순간, 렌야가 품고 있던 의심의 씨앗이 빠른 속도로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