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209화 (209/220)

209화 마지막 밤

붉은 눈동자의 군단들이 알마티를 포위하자, 순례자들은 자취를 감추었다.

어젯밤 밤새도록 들려오던 기도문도, 흐느낌도 들려오지 않았다.

장벽 밖에 늘어선 메타휴먼 군단의 한가운데, 높다랗게 선 십자가에 세이드가 매달려 있었다.

알마티 장벽에 선 대부분은 세이드의 얼굴을 알지 못했지만, 인간을 전장 한가운데 보란 듯이 매달아 놓은 야만적인 장면은 공포를 자아내기 충분했다.

태일은 꽤 오랫동안 고개를 숙인 채 늘어져 있는 세이드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아?”

세연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

“제니가 많이 놀란 것 같더라.”

온몸이 찢겨 버린 클라이드와 끔찍한 꼴로 전시된 세이드.

배신자들의 최후는 조금도, 정말이지 조금도 유쾌하지 않았다.

그리고 세연은 지금 태일의 감정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늘 그랬듯.

“네 탓이 아니야. 모두 각자의 길을 선택한 것뿐이야.”

“…….”

누구나 각자의 행동을 선택하고, 그에 따라 책임을 진다.

그 결말이 비극일 게 뻔해도 기꺼이 그 길을 가는 멍청이들… 그런 자들이 모여서 만든 조직이 바로 레지스탕스였고, 혁명군이었다.

그러나 미리 각오했다고 해서 그 결말에 담담할 수는 없었다.

태일은 가만히 고개를 돌려 세연을 바라보았다.

“모두에게 진실을 알려 준 거야?”

“그래, 그랬어.”

세연은 각 구역의 사절들에게 메타휴먼의 비밀과 센트럴의 목적에 대해 알려 주었다.

저항을 포기하는 순간, 대륙민들은 누군가의 영생을 위해 가축처럼 길러지고 관리될 것이다.

한낱 노예로 여겨지던 메타휴먼들이 대륙민들을 관리할 것이다.

“반응은 어땠어? 겁에 질려 벌벌 떨던가? 아니면, 분노해서 길길이 날뛴다던지.”

“대부분은 믿지 않더라.”

“…그랬겠지.”

끔찍한 진실 앞에서 대부분은 고개를 돌렸다.

몇몇 이들은 세연을 향해 미쳤다며 고함을 질렀고, 듣다못해 회의실을 나가 버린 이도 있었다.

“일부는 내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고 있었어.”

그래도 극소수는 공포를 직시하고, 맞선다.

“각자 선택하겠지.”

회의실 원탁에 앉은 사절들 역시 홀로그램을 통해 성 밖에 잔뜩 몰려온 메타휴먼 군단을 확인했을 것이다.

“과연 저 모습을 보고도 저항을 택할까?”

“인간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한 존재야.”

“하, 하하…….”

세연의 확신에 찬 말을 듣고 있으려니, 저도 모르게 냉소적인 웃음이 새어 나왔다.

태일은 언제나 낙관적인 그녀를 사랑했지만, 그 가운데 언뜻 비치는 세연의 비인간성이 낯설게 느껴지곤 했다.

세연이 고개를 돌려 태일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다짜고짜 물어 온다.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했니?”

“…….”

“결국 이 전쟁을 끝낼 수 있는 사람은 너뿐이야.”

세연은 알고 있다.

태일이 어떤 마음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차라리… 네가 하면 되잖아.”

“아니, 이 몸으로는 안 돼. 이 몸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카렌이니까.”

“어째서 나야?”

“너를 믿으니까. 그 누구보다도.”

세연의 마지막 한 마디는 너무나도 비겁했다.

째깍, 째깍, 째깍…….

회중시계의 소리가 유난히도 귀에 거슬렸다.

지금껏 버텨 낼 수 있도록 힘이 되어 주었던 그 초침 소리가 지금은 신경을 자극할 뿐이었다.

태일은 결국 세연의 물음에 답하지 못했다.

그러나 태일은 이미 자신이 어떤 결정을 내리게 될지 알고 있었다.

알마티 시청 회의실.

카렌이 모든 설명을 마치고 나가 버린 뒤, 한동안 그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믿기 힘든 음모론과 알마티를 둘러싼 메타휴먼 군단.

마침내 사절 한 명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침묵을 깼다.

“설마 정신 나간 여자의 헛소리를 믿는 건 아니겠지요?”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는 센트럴오더를 막기 위해 모인 겁니다. 그런데 저렇게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하다니요! 상식적으로 말이나 되는 이야기입니까?”

그때 안도 애슈턴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메타휴먼이 전쟁에 동원되었습니다. 이제 원칙과 상식 따위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뜻이죠.”

그와 함께 다시금 회의실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원칙과 상식’이란 메타휴먼을 생산한 드림코퍼레이션이 선포한 ‘아시모프 3원칙’을 말한다.

첫째, 메타휴먼은 인간에게 위해를 가할 수 없으며, 인간이 위험한 상황에 놓였을 때 방관해서도 안 된다.

둘째, 첫 번째 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한 메타휴먼은 인간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셋째, 첫 번째와 두 번째 원칙을 위배하지 않는 선에서 메타휴먼은 자신의 존재를 보호해야 한다.

시민권을 획득한 메타휴먼, ‘로보티안’의 등장과 함께 이미 아시모프의 원칙에 중대한 균열이 일었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껏 영혼 없는 기계, 메타휴먼이 인간에게 직접 위해를 가하는 일 따윈 벌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메타휴먼이 전쟁에 동원되면서 간신히 형체를 유지하던 마지막 원칙이 마침내 무너진 것이다.

기존에 유지되던 질서와 상식의 파괴, 그건 곧 걷잡을 수 없는 공포를 불러온다.

로보티안 사건 때에는 그저 증권 시장이 붕괴되고 경제가 무너지는 수준에 불과했다.

그러나 만약 메타휴먼의 원칙이 무너졌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대륙의 모든 정치 체계가 마비될 것이다.

사절들은 그 진실을 각 구역에 전할 수 없었다.

그러니 그 진실을 대체할 다른 이야기가 필요했다.

“이건 드림코퍼레이션의 반란이 분명합니다. 카렌 탈로스, 그 여자도 드림코퍼레이션 이사가 아닙니까? 탈로스 가문이 메타휴먼들을 이용해 대륙을 지배하려는 거예요.”

“그, 그래요. 그게 맞겠군. 이 사실을 센트럴에서 알게 된다면, 분명 센트럴오더를 멈추고 드림코퍼레이션을 제재할 겁니다.”

그럴듯한 주장이 제기되자 사절들은 저희들끼리 웅성거리며 동의를 표했다.

‘메타휴먼들을 이용한 일개 회사의 반란 사건’.

물론 대륙 최고 회사의 반란 역시 가벼운 사건은 아니었지만, 카렌이 들려준 진실에 비해 차라리 그편이 훨씬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이야기였다.

체계의 붕괴보다는 일개 대기업의 일탈 쪽이 차라리 낫지 않은가.

사람들은 이미 믿어야 할 것이 아닌, 믿고 싶은 것을 믿고 있었다.

‘한심하군.’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안도가 구석진 곳에 눈을 감은 채 앉아 있는 루키우스를 바라보았다.

루키우스는 카렌이 설명을 이어가는 동안에도, 사절들이 저희끼리 떠들어 대는 이 순간에도 줄곧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결국 참다못한 안도가 몸을 일으켜 목소리를 높였다.

“잠시만 모두 조용히 해 주십시오.”

센트럴 중앙의회 청년당의 당수이자, 9구역의 대표자이며, 거대 테크기업 ‘NineD’의 CEO인 사내.

그런 안도의 목소리에 모두 입을 다문다.

안도 애슈턴은 자신의 지위와 경력에 의존하는 것을 질색했지만, 지금과 같은 자리에서 그의 발언력을 높이는 것은 다름 아닌 그의 배경이었다.

인류가, 대륙이 끝장날 수 있는 순간에조차 사절들은 안도의 지위를 존중했다.

안도는 그런 사절들을 둘러보며 천천히 말했다.

“지금은 우리끼리 의미 없는 추리를 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날이 밝으면, 마지막 전투가 시작될 테니까요.”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붉은 눈의 병사들이 알마티를 향해 파도처럼 덮쳐 올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알마티가 점령되는 마지막 순간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싸울 것인지, 항복할 것인지. 우리는 그걸 선택해야 합니다.”

결국 본질은 바뀌지 않았다.

“시장님께 여쭤보고 싶습니다. 알마티는 끝까지 싸울 생각입니까? 그리고 조금 전 우리가 들었던 그 주장을 믿으시는 겁니까?”

안도의 직접적인 물음에 마침내 루키우스가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의 시선이 루키우스에게 집중된다.

“알마티는 대륙민의 자유를 위해 마지막 한 사람까지 싸울 생각입니다.”

원론적인 답변이었다.

그러나 그 한마디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루키우스는 전적으로 카렌의 이야기를 믿고 있으며, 알마티는 메타휴먼 군단에 맞서 싸울 것이다.

“정말이지 더는 못 들어주겠군!”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던 사절 하나가 벌떡 일어나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외쳤다.

“뭐가 어쩌고 어째? 소울에너지를 훔쳐 가? 우리가 누구의 가축으로 전락해? 그 지독한 이야기를 믿으라니!”

씩씩거리던 그가 원탁을 내리치며 고함을 질러 댔다.

“미친 자들의 음모론에 더는 어울릴 수 없소! 난 이만 돌아갈 거요. 돌아가서 센트럴의 지시에 순응하겠소. 알마티가 무너진다면 센트럴오더도 끝나겠지. 구역의 자치권은 언젠가 되찾을 수 있어!”

그의 목소리를 들은 몇몇이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삐리리리리리!!

그러나 바로 그때, 어딘가에서 날카로운 통신음이 들려왔다.

삐리리리리!!

귀를 울리는 소리가 회의실 전체를 울린다.

안도는 창백해진 얼굴로 자신의 주머니에 있던 기기를 꺼내 들었다.

비상 통신망을 통한 긴급 연락.

스크린에는 붉은빛과 함께 ‘YUKI’라는 글씨가 떠올랐다.

줄곧 침울한 얼굴로 안도의 곁을 지키고 있던 카를로스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 * *

‘이건 아니야.’

붉은 눈동자가 빈틈없이 온 사방을 메꾸고 있다.

‘이건… 뭔가 잘못됐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유키는 그저 새로운 세계를 꿈꾸었을 뿐이다.

구시대적 문화와 이해관계로 얽매인 구체계를 종식하고,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체계를 재구축하려 했다.

기술의 진보를 따르지 못하는 답답한 규제, 어리석은 말을 내뱉으며 진보를 가로막는 배불뚝이 의원들, 그저 권력에만 관심이 있을 뿐 인류의 미래에 대해 조금도 생각지 않는 권력자들.

그 모든 것을 부수려 했다.

그런 의미에서 유키는 스스로를 ‘혁명가’로 정의했다.

그러나 그토록 동경했던 기술이 자신의 주변을 메운 이 순간, 유키는 무언가 잘못됐음을 깨달았다.

사람을 십자가에 매달아 전시해 두는 것이 진정 ‘진보’인가?

반란군을 가려낸다는 명목하에 장교들을 한밤중에 끌고 나와 돼지처럼 얽어 두는 게 ‘합리’인가?

총칼이 오가는 전쟁터에 메타휴먼들을 동원하는 것이 ‘기술’인가?

유키의 머릿속이 온갖 의문으로 복잡하던 와중에 아크의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부터 군법에 따른 사형을 집행하도록 하지.”

아크의 엄숙한 목소리가 순양함 격납고를 울린다.

축구장만큼 넓은 공간에는 최소 수백의 장교들이 포박된 채 꿇어앉아 있었다.

“왜, 왜 이러는 거요!? 이건 약속과 다르지 않소! 우리는 당신의 요청을 받고 지원군으로 참전했을 뿐이오! 반란이라니! 이 무슨 얼토당토않은 누명을!!”

코카서스의 간부들.

“우리는 지휘관의 사망으로 인해 불가피하게 후퇴했을 뿐입니다. 결코 배신한 게 아닙니다!”

센트럴 제7군단 2대대 돌격대원들.

“사령관님, 살려 주십시오! 저희는 결코 반란을 꾸민 적이 없습니다!”

메타휴먼에 대해 험담을 퍼부었던 수많은 장교들.

그들은 자신들의 주변을 둘러싼 메타휴먼들을 둘러보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일부는 목숨을 구걸하며 사정했으며, 일부는 억울함을 호소하며 고함을 질러 댔다.

그러나 정작 아크와 그의 곁에 선 닐스 레오나드의 표정은 냉랭했다.

“사형을 집행하라.”

붉은 눈동자를 훤히 드러낸 닐스가 냉랭한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고, 그와 함께 온 사방에 끔찍한 비명이 울렸다.

“끄아아아악!!!!”

“아아악!! 살려 줘!!!”

“제, 제발! 제발!! 으아아악!!”

사형 집행을 맡은 메타휴먼들은 조금의 표정 변화 없이 칼을 휘둘렀고, 장교들의 머리가 격납고 바닥 곳곳을 뒹굴었다.

잠깐 사이에 수백에 이르는 장교들의 목이 날아갔다.

“우웁!”

유키는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손으로 감싸 쥐었다.

피비린내로 인해 속이 뒤집힐 것만 같았다.

그 끔찍한 광경을, 비명 소리를 온전히 마주할 수 없었다.

‘미쳤어. 이건… 미친 짓이야.’

혁명의 과정에서 일부 부패한 권력자와 지배층의 피는 필연적이다.

유키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의회의 붕괴를 방치했고, 제로구역 지배자들의 숙청에 기꺼이 협조했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은 그저 단순 학살에 불과했다.

메타휴먼의 전쟁 동원에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조금이라도 반대하는 이들을 모조리 제거한 것이다.

그 와중에 간신히 목숨을 건진 장교들과 인간 병사들은 겁에 질린 채 바짝 얼어 있다.

그들 역시 자칫하면 배신자로 명명되어 목숨을 잃을 수 있음을 알았다.

사형이 집행되는 사이, 아크의 뒤쪽에서 사형 집행을 지켜보던 몇몇 장교들이 오줌을 지렸지만, 아크와 닐스는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다.

그렇게 모든 절차가 끝난 뒤.

“유키, 표정이 좋지 않은데.”

차가운 얼굴로 사형을 지시했던 아크가 믿기지 않을 만큼 부드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무래도 너무 자극적인 장면이었나?”

“…아니, 괜찮아.”

유키는 애써 휘청이는 몸을 가누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지.”

“그래, 너라면 이해해 줄 줄 알았어, 유키.”

아크가 예의 해맑은 웃음을 지어 보인다.

그러나 정작 유키는 그런 아크의 웃음을 보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미치광이 학살자이자, 독재자로 변해 버린 아크의 얼굴은 마치 천진한 소년처럼 보였다.

유키는 애써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아크, 난 잠시 들어가서 쉬어야겠어. 내일 전투 전에 있을 협상에 대비해야 하니까.”

“아, 그래. 많이 피곤할 텐데 들어가서 쉬어.”

닐스가 그런 유키를 힐끗 보더니, 뒤쪽에 선 장교를 향해 손짓했다.

“이봐, 막스!”

“예… 옙, 사령관님!”

멍하니 전면을 바라보다가 깜짝 놀란 젊은 장교가 황급히 닐스를 향해 달려왔다.

“유키 의원님을 숙소로 모시도록 하게. 귀한 손님이니 정중히 대하도록.”

“네, 알겠습니다!”

막스는 겨우 현장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한 얼굴로 유키를 안내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이쪽으로……!”

“…고맙네.”

유키는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은 채 그런 막스의 뒤를 따랐다.

‘어떻게든 안도에게 연락을 취해야 한다. 어떻게든… 저 미친놈을 막아야 해.’

숙소로 향하는 와중에 아크와 닐스의 날카로운 시선이 등 뒤로 꽂히는 느낌이 들었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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