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괴물 (1)
“어째서 날 막지 않지?”
태일은 살짝 눈살을 찌푸린 채 자신 앞에 선 상대를 노려보았다.
동부에서 나타난 코카서스 군세는 틀림없이 센트럴 측 지원군이었다.
그러나 태일이 코카서스의 비공정들을 연달아 격추하는 와중에 태일과 마주한 9중대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태일이 능력을 사용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거리를 유지할 뿐이었다.
“우리의 임무는 당신과 정면으로 맞붙는 게 아니니까.”
“…뭐?”
콰콰쾅!!
9중대장 무명은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손을 들어 올려 태일과 자신을 중심으로 거대한 불길을 만들어 냈다.
원형 투기장을 형성한 불길 속에서 무명을 비롯해 9중대원들의 얼굴이 언뜻 비친다.
“우리의 임무는 사냥감의 힘을 빼놓는 거거든.”
“내 힘을 빼놓겠다고?”
태일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손을 움찔거렸다.
손 위에서 피어난 푸른 전류가 새의 형상을 띠며 공중으로 떠오른다.
피리리릿!
‘뇌조(雷鳥)’라 불리는 새가 울음처럼 들리는 스파크 소리를 내며 태일의 주변을 맴돌았다.
“우리를 너무 무시하는 건 곤란해.”
9중대장의 목소리에 이어 온 사방의 연기가 짙어졌다.
불길에서 뿜어져 나온 연기뿐 아니라 인위적인 안개가 뒤섞여 시야를 가렸다.
곧이어 붉은빛의 연무 속에서 무수한 그림자가 떠올랐다.
최소 수십, 아니, 수백에 이르는 그림자들이 태일의 주변을 겹겹이 둘러쌌다.
그러나 태일은 직감적으로 그 대부분이 허상임을 알았다.
뇌조는 불길 속 공간 곳곳을 맴돌며 적의 실체를 탐색했다.
‘사냥감의 힘을 빼놓는 것.’
태일 역시 그 말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놈들의 진을 파훼하는 건 사실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어설픈 환영 따위 그저 무력으로 깨 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큰 기술을 연달아 사용한다면 금세 소울이 바닥나 버릴 것이다.
놈들은 오로지 태일의 소울 소모만을 노리고 있었다.
쾅!!
붉은 연무 어딘가에서 뭉쳐진 불덩어리가 태일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쯧!”
재빨리 몸을 옆으로 빼며 날아온 불의 구를 피한다.
그러나 바로 그 틈에 뒤쪽에서 피어오른 그림자가 태일의 몸뚱어리를 붙잡았다.
파칫!
태일의 몸 주변을 맴돌던 뇌조가 그림자를 덮치자, 태일을 향해 덮쳐 오던 형체가 연기로 변해 사방으로 흩어진다.
처음부터 실체가 아닌 그림자에 불과했다.
‘노골적으로 시간을 끌겠다, 이거군.’
온 사방에 크고 작은 그림자들과 곳곳에서 날아오는 공격들.
그중 무엇 하나 치명적인 것은 없지만, 교묘하게 태일을 자극하며 장기전으로 전투를 끌어가고 있었다.
‘…귀찮게 됐군.’
피리릿! 피릿!!
태일의 어깨에 내려앉은 뇌조가 날카롭게 울부짖으며 온 사방을 비추었지만, 적의 실체를 잡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잠깐 고민하던 태일은 가만히 두 눈을 감은 채 제자리에 똑바로 섰다.
“잠깐! 대체 뭐 하는 거지? 날 빨리 여기서 피신시켜야 할 거 아냐!?”
9중대원들에 의해 구조된 도널드 중령은 갑자기 주변에 불길이 피어오르자 깜짝 놀라 목소리를 높였다.
졸지에 이레귤러들의 전투 현장에 서게 된 중령의 얼굴은 흙빛으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상식 밖의 능력을 사용하며, 예측하기 힘든 상황이 얼마든지 펼쳐지는 현장.
바로 어제만 해도 그런 장면을 멀리서나마 보지 않았던가.
번개의 창과 그 창을 막아서던 방패들을 떠올린 도널드 중령은 온 힘을 다해 버둥거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 와중에 조금 전까지 타고 있던 지프차의 모습이 보였다.
차는 거대한 불길에 휩싸여 있었고, 운전병은 물론 작전참모의 시신까지 함께 불타고 있었다.
쾅!
곧이어 엔진이 폭발하며 시신은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게 타 버렸다.
바로 몇 분 전까지 대화를 나누던 부하가 처참한 꼴로 죽어 버린 것이다.
매캐한 연기와 함께 시체 타는 냄새에 신경이 곤두선 도널드 중령은 그때껏 자신의 옆에 서 있던 9중대원의 멱살을 붙잡았다.
급한 와중에도 그의 가슴팍에 붙은 계급장을 바라보았다.
“주, 중사. 당장 날 밖으로 안내해!”
“…진정하시지요.”
“못 들었나? 이건 명령이야!”
“일단 작전이 시작된 이상, 함부로 여길 벗어나실 수 없습니다.”
그 와중에 시꺼먼 그림자들이 곳곳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뭐, 뭐야! 대체 무슨 일이야? 어!?”
도널드는 마치 유령처럼 보이는 그림자들의 모습에 소스라치고 말았다.
9중대 중사는 다소 지친 듯 보였지만, 인내심을 발휘하며 도널드 중령을 달랬다.
“이건 모두 저희 부대원들의 능력입니다. 지금은 중요한 작전 중이니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중요한 작전? 난 제7군단 부대장이야! 내가 적의 손에 잡히면 7군단이 무너진단 말이야! 내 목숨을 구하는 것보다 중요한 게 있을 거 같나!?”
“부대장님, 부디 목소리를 낮……!”
“어디 말대꾸인가, 망할 이레귤러 따위가! 당장 날 여기서 빼내라고 했을……”
파직!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고함을 내지르는 바로 그 순간, 뜨끈하고 끈적한 무언가가 도널드의 시야를 뒤덮었다.
파칫, 파칫…….
자신이 뒤집어쓴 게 피라는 사실을 눈치챈 바로 그 순간, 중사의 가슴팍을 비집고 나온 푸른빛의 칼날이 도널드 중령의 눈에 들어왔다.
“아, 아아…….”
깜짝 놀라 뒷걸음질을 치고 있으려니 뒤편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잡았군.”
장발의 사내, 태일이 가슴이 꿰뚫린 중사의 어깨 너머로 중령과 시선을 맞추었다.
“…당신 덕분에.”
“으, 으아아아아악!!”
온몸의 털이 곤두선 중령은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바로 그때였다.
“어딜…! 쿨럭!”
피를 머금고 있던 중사가 자신의 가슴을 뚫고 나온 태일의 팔을 자신의 양손으로 붙잡았다.
그와 동시에 중사의 피부를 빛나는 비늘이 뒤덮었다.
얼굴까지 은색 비늘로 뒤덮인 중사는 태일을 붙잡은 가운데 조용히 중얼거렸다.
“잡은 건… 내 쪽이야… 쿨럭!”
그와 함께 온 사방에서 불꽃과 얼음 칼날, 점액질 따위가 중사를 향해, 정확히는 중사가 붙잡은 태일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태일의 형체가 푸른 빛줄기에 휩싸였다.
곧이어 태일의 형체는 사라져 버렸고, 그 자리에 뇌조만이 남아 기묘한 울음소리와 함께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한편, 모든 공격을 온몸으로 받아 낸 중사는 온몸의 비늘이 찢겨 버린 가운데 초점 잃은 눈으로 도널드 중령을 바라보다가 무너지듯 무릎을 꿇었다.
“아, 아아……!”
도널드 중령은 그저 신음 소리를 낼 뿐, 엉덩방아를 찧은 자세 그대로 꿈쩍도 하지 못했다.
모든 건 순식간이었다.
도널드 중령의 고함이 터져 나온 그 순간, 눈을 감고 있던 태일이 움직였다.
순식간에 스넥 중사가 당했고, 그 직후 태일의 움직임을 놓쳤다.
9중대장 무명은 입술을 깨문 채 공중을 맴도는 뇌조를 노려보았다.
‘저 새가… 분신이라도 되는 건가?’
아니, 확실하지 않다.
태일이 있던 자리에 남겨진 뇌조가 하늘을 나는 가운데 미세한 전류가 안개 곳곳에 흐르고 있었다.
어떠한 능력으로, 어떻게 기척을 숨겼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당장 마음에 걸리는 쪽은 도널드 중령이었다.
태일은 도널드 중령을 살해하는 대신 그대로 남겨 두었다.
‘이건 함정이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도널드 중령.
지금 이 순간, 9중대원들은 모두 도널드 중령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느낄 감정은 정확히 무명과 같을 것이다.
살의.
동료를 잃게 만들고 작전을 망친 도널드 중령을, 이레귤러를 무시하며 폭언을 쏟아 낸 머저리를 당장 살해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너무나도 뻔한 함정이었다.
‘나서면 안 돼.’
도널드 중령을 처치하기 위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기척을 숨긴 태일 역시 또다시 행동에 나설 것이다.
다행히 중대원 중 누구도 나서지 않은 채 각자의 자리를 지켰다.
그렇게 몇 분이 흘렀을까.
하늘 위를 맴돌던 뇌조가 불의 장벽 밖으로 날아 사라져 버렸고, 미세하게 전장에 퍼져 있던 전류 역시 산산이 흩어졌다.
‘놓친 건가?’
태일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졌건만, 무명은 불안감으로 인해 불길을 거두지 못했다.
바로 그때였다.
움찔.
영락없이 죽은 것으로 생각했던 스넥 중사의 몸뚱어리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스넥……!’
이레귤러로 구성된 제9중대는 오랜 시간 함께하면서 남다른 유대를 형성했다.
이레귤러에 대한 차별을 함께 견뎌 냈고, 위험한 임무를 함께 수행했다.
그렇게 형성된 것은 고작 ‘우정’ 같은 게 아니었다.
동료는 곧 나다.
서로는 서로에게 분신과도 같았다.
동료가 받는 차별은 곧 나에 대한 차별이고, 동료가 느끼는 슬픔은 곧 내가 느끼는 슬픔이다.
이레귤러로서, 군인으로서 살아가며 중대원들은 한 몸뚱어리가 되어 있었다.
그러니 스넥의 움직임을 보고 중대원들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한 건 실로 당연했다.
하지만 찰나의 순간, 무명의 눈에 미세한 빛 한 줄기가 비쳤다.
“안 돼!!!”
완전히 타 버린 지프차 속에서 튀어 오른 스파크.
스파크는 스넥을 구하기 위해 몰려들던 중대원 넷을 향해 동시에 뻗어 갔다.
파치치치치치!!
거미줄처럼 사방으로 퍼져 나가며 끔찍한 문양을 그려 낸다.
“으아아아아!!!”
줄곧 침착을 유지하던 무명의 이성이 마침내 끊어졌다.
무명은 곧장 앞으로 내달리며 스파크 중앙을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쾅! 콰쾅! 쾅!!
그러나 연쇄적으로 폭발이 일어나는 바로 그 순간에도 스파크의 거미줄에 붙잡힌 네 명의 동료들은, 네 명의 또 다른 ‘나’는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멈춰! 멈추란 말이야!!”
그 와중에 안개가 걷히고, 그림자들 역시 사라진다.
중대원들이 연계해 만들어 낸 진형이 완전히 깨져 버린 가운데, 이성을 잃은 중대원들이 무명과 함께 푸른빛을 향해 마구잡이로 공격을 쏟아 냈다.
그러나 정작 그 자리에 태일은 없었다.
그저 태일이 남겨 둔 트랩 장치, 리펄서볼이 작동했을 뿐이었다.
잠시 뒤, 푸른빛이 완전히 잦아들자 시꺼먼 시체로 변해 버린 동료들의 몸뚱어리가 힘없이 앞으로 쓰러졌다.
“……티본.”
시꺼멓게 변해 버린 시신들 앞으로 다가간다.
“바일, 자쿠, 제이디…….”
무명은 그렇게 중대원 한 명 한 명의 이름을 부르며, 그들의 죽음을 확인했다.
동료들의 시신을 확인한 무명이 고개를 돌려 도널드 중령을 바라보았다.
겁에 질린 나머지 오줌을 지려 버린 도널드 중령 앞으로 천천히 다가간다.
“이, 이봐… 이보게, 중대장……!”
“닥쳐.”
무명의 손끝에서 그 어느 때보다 무시무시한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사, 살려 줘…!”
분노한 중대원들이 도널드 중령을 향해 다가가자, 겁에 질린 도널드 중령이 고개를 저으며 애원하기 시작했다.
다시금 주변에 안개가 피어올랐다.
전차를 버린 채 달아나기 급급한 병사들은 안개 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볼 수 없었지만, 도널드 중령의 끔찍한 비명만큼은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기분 더럽군.’
리펄서볼이 발동했음을 확인한 태일이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소울을 아끼기 위해 일부러 잔혹한 장면을 연출했고, 적의 시신을 이용하는 짓까지 벌였다.
리펄서볼이 작동했다는 건, 혹시나 살아 있을지도 모를 동료를 위해 서슴없이 달려들었다는 뜻이었다.
그런 이들과의 전투는 조금도 유쾌하지 않았다.
하지만 전쟁터에 명예로운 결투 따위는 애당초 없다.
그 어떤 비겁한 수를 써서라도 살아남을 수 있다면 그뿐.
그렇게 전쟁에 뛰어든 모두는 결국 피에 미친 괴물로 변해 간다.
“오랜만이야.”
“…딘.”
태일은 너무나도 달라져 버린 눈앞의 사내를 바라보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재기 넘치는 아이디어와 흥미로운 실험으로 눈동자를 빛내던 괴짜 과학자 알렉세이 딘.
그러나 이제 알렉세이 딘의 모습을 한 사내는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주변에는 딘이 이끄는 셸터 군단에 의해 살해당한 병사들의 주검이 온 사방에 흩어져 있다.
코카서스 전함의 잔해 속에서 펑크라이더들의 호위를 받으며 나타난 딘.
그는 이미 전장에 선 괴물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곧 태일, 자신의 모습이기도 했다.
태일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딘이 굳은 얼굴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클라이드가 죽었어.”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