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화 동토의 지원군 (4)
“어이가 없군. 정말이지… 당황스러워.”
기세등등하게 참전을 선언하며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는 더없이 완벽했다.
― 현 시간부로 드림코퍼레이션의 모든 자산을 회수한다. 메타휴먼들의 모든 권리는 드림코퍼레이션에 귀속되며, 로보티안의 권리 또한 더는 인정되지 않는다.
모든 책임은 드림코퍼레이션에게, 코카서스의 존재감은 확실하게.
의도대로 전장에 위치한 모두의 시선이 코카서스의 순양함 두 척에 집중되었다.
동부 전선에 추가로 투입된 두 대의 순양함.
사실상 전쟁은 그걸로 끝난 것과 다름없었다.
그러나 크리스토퍼 마인의 참전 선언 직후,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 펼쳐졌다.
― 여긴 셸터(Shelter). 다들 무사한가? 제군들, 지금부터 우리도 전투에 참전하겠다. 모쪼록 너무 놀라지 말길 바란다.
장난스러운 목소리.
그리고 그에 이어진 또 하나의 통신.
― 현 시간부로 동부 연합도 전투에 참전하겠다.
동쪽에 갑자기 만들어진 정체불명의 거신병과 수십 대의 비공정.
서쪽 지하에서 나타난 수백 기의 강철 거인들.
그리고 그 와중에 철저하게 잊힌 코카서스의 순양함들.
― …정체불명의 메타휴먼 병력이 병사들을 교란하고 있다!
― 북쪽 전선에 연합이라 칭하는 병력이 전투에 참전. 정보를……!
― 북쪽 전선 순양함 한 척 파괴! 복구 불능.
기껏 참전을 선언했건만, 닐스로부터 감사의 말 한마디조차 없었다.
센트럴과 연결된 통신망을 통해 믿기 힘든 보고가 이어질 뿐이었다.
그러더니 닐스로부터 단 한 마디의 전언이 도착했다.
― 셸터를 막아라.
어찌 보면 명령처럼 보이는 한 마디.
뿌득.
마인의 관자놀이에 힘줄이 솟아올랐다.
“감히……!”
‘셸터’라면 마인 역시 익히 들은 바 있었다.
동부에서 백련의 용병단을 괴멸시킨 메타휴먼 조직.
그래 봐야 열등한 메타휴먼들로 구성된 오합지졸이 아니던가.
포르투나가 기어코 놈들을 괴멸시키겠다며 무려 세 척의 순양함을 이끌고 출동했다.
그런데 정작 포르투나가 아닌 셸터가 알마티 전장에 나타난 것이다.
‘포르투나로부터 도망친 놈들인가? 멍청한 녀석, 고작 저런 놈들을 완벽히 처리하지 못해서…….’
설마 포르투나가, 그가 이끌고 간 세 척의 순양함이 당했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저 포르투나가 놓친 패잔병일 것이다.
“장군님, 지시를……!”
부하의 목소리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마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전쟁은 우리 코카서스가 끝낸다.”
닐스 따위의 지시에 따를 이유는 없었다.
“포격 준비해. 전투기와 드론들 전부 출격한다. 보병들도 출격 준비를…….”
콰쾅!!
“…뭐지?”
별안간 마인의 순양함이 거세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뒤쪽으로부터 포격입니다!”
순양함이라기에는 어딘가 기묘하게 생긴 정체불명의 비행체가 동쪽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셸터라는 놈들인가?’
하긴 포르투나에게 도망치려면 그만한 비행체 정도는 가지고 있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메타휴먼들이 만들어 낸 조악한 비행체 따윈 애당초 순양함에 비할 수조차 없는 모조품일 것이다.
순양함 플루톤을 넘어서는 기체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존재한 적 없었고,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그러나 이름조차 없는 비행체가 감히 순양함을 향해 공격을 가한다는 사실이 못내 불쾌했다.
“…건방지군.”
턱을 매만지던 마인이 가만히 한숨을 내쉬며 지시를 내렸다.
“제논과 연결해라. 포르투나가 놓친 뒤쪽 패잔병 놈들을 흔적도 없이 지워 버리라고 전달해.”
닐스의 지시에 따르는 것처럼 보여 모양새가 썩 좋지 않았지만, 상대가 도발해 온 이상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곧이어 제논 부사령관이 통제하는 코카서스 순양함이 뒤쪽 셸터의 함선을 향해 방향을 틀었다.
애초에 크리스토퍼 마인이 지휘하는 순양함 한 척만으로도 알마티 전체를 뒤엎고도 남을 화력이었다.
약간의 변수가 발생했다 해도 코카서스의 전력이 투입된 이상, 알마티 전투는 금세 끝날 것이다.
결국 달라진 건 없었다.
“최대한 빠르게 전투를 마무리 짓는다. 다들 준비해!”
“예, 장군님!”
곧이어 마인의 대장함으로부터 수십 척의 전투기가 발진했다.
그와 함께 전차와 병력 등 지상군을 태운 비공정이 알마티를 향해 날아들기 시작했다.
그 웅장한 모습을 지켜보던 마인의 입가에 의기양양한 미소가 떠올랐다.
어리석게 뭣 하러 공성전을 치른단 말인가.
곧장 비공정을 투입하여 알마티를 안에서부터 파괴시켜 버리면 될 일이었다.
‘멍청한 닐스 놈. 무려 다섯 척이나 되는 순양함을 보유하고도 고작 이런 작은 도시 하나를 점령하지 못하다니.’
아무리 근방 구역의 반군들이 합류했다 해도, 닐스가 가진 지휘권을 생각한다면 그의 무능은 놀라울 정도였다.
하긴 연합과의 첫 전투에서 형편없이 패배했던 그가 아닌가.
“흥, 과대평가되었던 게지.”
센트럴군 제일의 실력자로 알려진 닐스의 무능은 마인에게 기회였다.
“코카서스도 이제는 양지로 나설 때가 되었어.”
‘마왕’이나 ‘그림자 군대’라 불리며 음지에 숨어 있던 코카서스였다.
센트럴 군부와 정계에서 독자적인 영향력을 갖추었음에도 공공연히 정체를 감추어야만 했다.
그건 선대 지도자였던 코르지 브레드필드의 의지였지만, 크리스토퍼 마인은 그런 소심함에 동의할 수 없었다.
코르지의 뒤를 이은 크리스토퍼 마인은 ‘센트럴 사령부 중장’보다 ‘코카서스의 지도자’라는 신분을 진정한 자신으로 여겼다.
처음에는 메타휴먼에 반대하며 만들어진 조직이었지만, 이제 코카서스는 대륙을 지배하고 남을 정도의 무력과 정치력을 손에 넣었다.
알마티의 점령과 함께 코카서스는 센트럴의 새로운 통치 세력으로 자리 잡을 것이다.
‘제로구역의 파괴와 구 지배세력의 일소.’
아크가 전해 온 소식은 그 신호탄이었다.
제 놈들끼리 분열해 무너진 제로구역의 센트럴 중앙정부와 캐피탈 클럽.
알마티 전투가 끝나고 코카서스가 그 모두를 집어삼킨 뒤, 대륙은 위대한 코케이시언이 통치할 것이다.
그렇게 의기양양한 웃음을 짓던 중.
콰쾅!!
뒤쪽에서 거대한 폭발음이 들려왔다.
“자, 장군님……!!”
“뭐지?”
벌써 셸터의 패잔병들이 궤멸된 걸까?
그러나 정작 보고를 전해 온 병사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부사령관님의 함선이… 격추당했습니다……!!”
“…뭐?”
깜짝 놀란 마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금 무슨 헛소리를!”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전방에서 거대한 빛이 번쩍이더니 사령실 차창 밖을 푸른빛이 뒤덮었다.
눈부신 빛과 함께 거대한 폭발음이 연달아 들려온다.
저도 모르게 두 눈을 감은 채 휘청거린 마인이 급히 몸의 균형을 잡고는 전방을 바라보았다.
“이, 이게 대체 무슨……!?”
조금 전 출격시킨 전투기들과 지상군을 실은 수십 기의 비공정이 동시에 지상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비공정에서 떨어져 나온 병사들이 착륙 장비도 제대로 가동하지 못한 채 맨몸으로 바닥에 추락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한편, 뒤쪽에서는 거대한 굉음과 함께 불길에 휩싸인 코카서스 순양함이 지상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지금껏 코카서스가 비축해 왔던 전투기와 병사들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 고작 이 정도였나.
“뭐, 뭐냐!?”
핏발 선 눈으로 고개를 돌린 마인의 눈앞에 웬 사내의 모습이 보였다.
홀로그램으로 형상화된 사내는 차가운 얼굴로 마인을 노려보고 있었다.
“통신망을 해킹당했습니다, 장군님!”
― ‘알렉세이 딘’이라고 한다. 지금은 셸터를 이끌고 있지.
“네놈……! 감히 메타휴먼 따위가!!”
딘의 붉은 눈동자를 본 마인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 내 친구들은 하나같이 코카서스를 두려워하더군. 너희가 그렇게나 많은 사람들을 잔혹하게 살해했다지?
“사람? 하, 사람이라고 했나? 메타휴먼이 감히 내 앞에서 사람 행세를 하는 거냐!? 어?”
딘의 얼굴이 살기로 번뜩였다.
― 솔직히 실망했어. 정체를 감춘 채 비밀리에 활동하는 너희는 너무나도… 거대해 보였거든. 하지만 정작 실체를 보니 겉만 번지르르한 쓰레기일 뿐이야.
“네놈!!!”
마인이 더는 참지 못한 채 고함을 내질렀다.
― 이만 끝내지. 고작 너희 따위를 상대로 오랜 시간을 끌 필요는 없겠어.
바로 그 시점부터 마인에게 보고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우측 날개 파손되었습니다!”
“좌측 구동부가 피격당했습니다. 조치가 필요합니다.”
“환기 장치에 이상이 발생했습니다!”
정신없이 쏟아지는 보고 속에서 마인은 그 어떤 지시도 내리지 못했다.
최강의 함선, 순양함 플루톤이 그렇게 추락하고 있었다.
그렇게 순양함이 추락하는 가운데, 마인의 눈에 동쪽 황무지로부터 이쪽으로 새까맣게 무리 지어 달려오는 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펑크라이더들이 알마티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야만과 문명, 구식 기술과 첨단이 뒤섞인 전장에서 마인은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이건… 악몽이야.”
* * *
코카서스 순양함 두 척의 궤멸.
“멍청한 놈이라고는 들었지만, 그 정도인 줄은 몰랐군.”
정작 보고를 들은 닐스의 감상은 그뿐이었다.
애당초 태일과 같은 능력자가 날뛰는 전장에서 대책 없이 병사를 실어 비공정을 띄운 것부터가 터무니없는 오판이었다.
심지어 알렉세이 딘이 이끄는 셸터를 상대하면서 부대를 나누기까지 했으니, 자신의 손으로 패배를 앞당긴 셈이었다.
“…하지만 나도 면목이 없게 됐군.”
닐스의 대장함 바로 앞, 센트럴 순양함 한 대가 시뻘건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알렉세이 딘이 만든 거병의 폭격에 순양함 한 대를 더 잃고만 것이다.
“다섯 대 중 벌써 두 대째 잃었으니 말이야.”
그러나 정작 닐스의 표정은 담담했다.
알렉세이 딘이 개입한 이상, 순양함 한 척의 손실은 그리 놀랄 일도 아니었다.
아니, 그 정도로 녀석을 막아 낼 수 있다면 오히려 남는 장사겠지.
“9중대로부터 별다른 보고는 없나?”
“표적을 찾았다고 합니다.”
9중대의 임무, 그건 오로지 하나뿐이었다.
태일의 발목을 붙잡아 둘 것.
예상대로 놈은 동쪽 전선에 있었다.
닐스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아. 그럼 나도 나가 봐야겠군.”
서쪽과 동쪽, 그리고 닐스가 위치한 북쪽에 이르기까지 모든 전선이 밀리고 있었다.
알렉세이 딘이 이끄는 셸터가 참전하면서 전세는 급격히 기울었고, 당장이라도 센트럴 부대가 패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닐스는 잘 알고 있었다.
순양함을 전부 잃더라도, 부대가 궤멸당하더라도 상관없다.
애당초 닐스의 목적은 오로지 하나뿐이었다.
과거 함께 혁명군에 속해 있었던 친구들을 다시금 자신의 손으로 끝장내는 것.
아크의 통제를 벗어나 제멋대로 날뛰기 시작한 클라이드.
센트럴에 대한 분노로 폭주하고 있는 세이드.
전과 달리 호전적으로 변한 과학자 알렉세이 딘.
그리고 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리더, 신태일.
‘오랜 친구들과의 인연도 이제 곧 마무리되겠군.’
사실 이제는 조금 고단했다.
* * *
알마티로부터 고작 수십㎞ 떨어진 공터.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고?”
“예.”
“…아크는 그곳에 있나?”
“참전하지 않은 듯합니다.”
세이드는 알마티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며 가만히 입술을 깨물었다.
얼마 전.
‘개는 주인을 물지 않는다네.’
코르지 브레드필드가 남긴 마지막 한마디는 세이드의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다.
‘헛소리겠지.’
그렇게 애써 무시하려 했지만, 한 번 시작된 의심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아크는 분명 세이드에게 센트럴의 붕괴를 약속했다.
그의 비밀스러운 도움으로 붙잡혔던 혁명군 정예들을 탈출시켰고, 그가 건넨 정보 덕분에 센트럴 의회와 제로 구역을 파괴했다.
그러나 아무리 방화와 살인을 거듭해도 위화감과 의심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저 제로구역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리기만 한다면, 살찐 센트럴 지배자들을 모조리 없애 버리기만 한다면 센트럴은 무너질까?
무의미한 파괴를 거듭하던 세이드는 결국 직접 아크와 만나기 위해 대륙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막상 돌아와 보니, 전 대륙은 전쟁으로 인해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 거지?’
센트럴의 중앙정부 역할을 하던 제로구역은 이미 파괴되었고, 의회 역시 붕괴했다.
즉, 지금은 센트럴 군에 명령을 내릴 상부가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그래야 했다.
그러나 센트럴군은 존재조차 하지 않는 정부의 명령을 위시하여 대륙 곳곳을 불태우고 있었다.
그제야 세이드는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알았다.
의회가 무너져도, 제로구역이 파괴되어도 센트럴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니, 도리어 더욱 폭력적으로 대륙민들을 유린했다.
“아크의 행적을 수배해. 놈을 찾아야 해.”
이를 악문 세이드가 낮은 목소리로 지시를 내리던 바로 그때였다.
― 날 찾는 건가, 세이드?
줄곧 연결이 끊어져 있던 통신기에서 낯설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동안 온갖 정보를 전해 왔던, 아니, 온갖 지시를 내렸던 바로 그 목소리.
― 제로 구역의 파괴는 아직일 텐데. 왜 벌써 대륙에 온 거지?
세이드는 대답하지 않은 채 그저 듣고 있었다.
아크는 세이드가 대륙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 아쉽게 되었어. 좀 더 쓸모가 있을 줄 알았는데 말이야.
쿵… 쿵…….
미세하게 땅이 진동한다.
“대장, 저기……!”
세이드의 곁에 서 있던 동료 하나가 입술을 깨문 채 멀지 않은 곳에서 일어나는 먼지바람을 가리켰다.
쿵… 쿵… 쿵…….
정체를 알 수 없는 군단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 우리의 인연은 여기까지인 걸로 하지. 그동안 고생 많았어.
아크의 통신은 그렇게 끝났다.
세이드는 자신의 검을 뽑아 들며 낮은 목소리로 지시했다.
“전원 전투 준비.”
무수히 많은 눈동자들이 붉게 빛나고 있었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