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동토의 지원군 (1)
날이 밝아 왔다.
어둠 속에서 순례자의 의식들이 마무리된 뒤, 다시금 펼쳐진 전장의 상황은 알마티에게 실로 절망적이었다.
북쪽에 이어 동쪽과 서쪽까지 배치된 순양함.
밤사이 포대와 전차가 전열을 정비했고, 무인드론 수천 기와 폭격기 수백 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시청 회의실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각 구역의 대표자들은 안절부절못한 채 홀로그램에 떠오른 알마티의 상황을 바라보았다.
“완전히 포위되어 버렸군.”
“오늘도 놈들을 상대로 버틸 수 있겠소?”
“어젯밤을 그냥 보내서는 안 되는 거였어요. 사절조차 보내지 않았다니.”
대표자들이 불안감에 한마디씩 보태는 가운데, 안도 역시 창백한 얼굴로 홀로그램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어제의 승리는 분명 통쾌하고 대단했다.
센트럴을 몰아붙이던 그 순간만큼은 회의실의 모두가 탄성을 내지르며 박수를 보냈을 정도였다.
태일과 메타휴먼 병력이 보인 전투력은 상상 이상이었고, 지원군으로 합류한 클라이드와 보니의 능력 역시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그처럼 대단한 능력에도 불구하고, 전황을 뒤집을 정도의 승리를 얻어 내지 못했다.
센트럴 측 순양함 한 척을 완파했지만, 여전히 네 척이 건재했다.
특히 태일의 공격을 막아 낸 닐스의 능력은 흥분에 차 있던 회의실에 찬물을 뿌려 버렸다.
첫날도, 둘째 날도 센트럴과 알마티의 전력 차이는 명백했다.
결국 달라진 건 없다.
그러나 지금 대표자들을 두려움에 빠뜨린 것은 다른 이유였다.
“당장 이곳 회의실에 폭격이 가해질 수도 있어요! 시청과 도심부가 표적이 될 거란 말입니다.”
“맞는 말이오. 당장 도심이 전장이 될 텐데, 루키우스 시장에게는 무슨 대책이라도 있는 거요?”
알마티 측이 공세에 나서면서 도시가 안전했던 어제와 달리, 이젠 알마티 도심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장소가 되어 있었다.
순양함의 포격은 다른 구역에서 온 대표자와 알마티의 시민을 식별하지 않을 것이다.
도시 전체가 불바다가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알마티의 시민이 아닌 타 구역 대표자들은 순순히 이곳에 머물러 죽음을 맞이할 의무도, 용기도 없었다.
회의실에 앉은 모두가 두려움과 불신으로 웅성거리는 가운데, 이 모습을 지켜보던 루키우스가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여러분, 알마티는 마지막 순간까지 싸울 겁니다. 어제 여러분이 보셨듯 저희에게는 센트럴에 맞설 힘을 갖고 있습니다.”
“이보시오, 시장.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잖소!”
“네, 여러분의 염려처럼 지금 이 순간부터는 모두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루키우스의 선언에 대표자들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잠시 뒤, 일시적으로 남문을 개방할 예정입니다. 아시다시피 남쪽에는 센트럴의 군단이 배치되지 않았습니다.”
루키우스의 말처럼 알마티 남쪽에는 센트럴 병력이 주둔하지 않고 있었다.
대신 그곳에는 간밤에 기묘한 형태의 텐트와 비닐지붕이 세워졌다.
어제 의식을 치렀던 순례자들이 임시 거처를 만든 것이다.
닐스는 순례자의 구역에 진입하지 않았고, 남부를 비워 두었다.
언뜻 종교에 대한 배려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사실상 탈출로를 열어 둔 것이었다.
‘지금이라도 도망쳐라.’
그건 대표자들에게 마지막 기회였고, 치명적인 유혹이었다.
루키우스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남문을 봉쇄하지 않았다.
대신 대표자 개개인에게 선택을 넘겼다.
“알마티 전투에 휘말리는 것이 두려우신 분들은 남문을 통과해 알마티를 빠져나가십시오. 떠나시는 분들에게는 연료가 충분히 채워진 차량을 제공하도록 하겠습니다.”
루키우스는 그 말을 끝으로 고개 숙여 인사한 뒤, 회의실을 나가 버렸다.
조금 전까지 두려움과 공포로 인해 웅성거리는 소리가 가득했지만, 이젠 누구 하나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대신 슬슬 눈동자를 굴려 제각기 주변의 분위기를 살필 뿐이었다.
‘대체 어쩌자는 겁니까?’
안도 애슈턴은 가만히 고개를 숙인 채 입술을 깨물었다.
알마티 동쪽 성벽 터.
바로 얼마 전까지 우거진 숲이었지만, 이젠 넓은 개활지로 변해 있었다.
요르문간드가 몸을 숨기고 있던 바로 그 장소에 지금은 순양함 플루톤이 주둔하고 있다.
전차가 늘어선 가운데 수천 개의 총구와 포문이 정확하게 알마티를 겨누었다.
“몇 명이나 되는지 알아보겠나?”
“모르겠습니다.”
멀찌감치에서 언뜻 한 눈으로 보고 병사가 대략 몇천에 이르는지, 혹은 몇만에 이르는지 집계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개척촌과 연결된 동쪽에는 성벽이 굳건한 북쪽과 서쪽과 비교해 압도적으로 많은 수의 돌격 전차와 병사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더구나 요르문간드와 같은 우군도, 클라이드와 같은 지원군도 기대하기 힘들었다.
“…괜찮겠나?”
어지간한 카심 역시 꽤 긴장된 듯 태일을 힐끗 바라보았다.
태일의 표정은 담담했다.
그저 태연하게 담배를 꺼내 들며 플루톤을 노려볼 뿐이었다.
“네, 이젠 꽤 익숙합니다.”
생각해 보면 지금껏 싸워 온 모든 전투는 불리한 환경에서 치러졌다.
병력에서도, 무기에서도 늘 혁명군은 열세에 몰렸다.
차라리 지금의 알마티 환경은 훨씬 낫다고 여겨질 정도였다.
태일은 슬쩍 고개를 돌려 붉은 눈동자를 빛내는 탱크를 바라보았다.
강철로 조립된 팔과 다리, 인공 심장, 그리고 캐터필러까지 겉보기에 인간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태일은 탱크와 전투를 치르고 그를 지켜보았다.
탱크는 동료들을 대신해 총구 앞에 섰으며, 항복하거나 도망치는 인간을 살해하지 않았다.
그는 무엇이 옳은지에 대해 늘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기에 태일은 탱크가 누구보다 인간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탱크, 너도 긴장한 거냐?”
탱크는 늘 그렇듯 별다른 답변 없이 태일로부터 시선을 돌렸다.
태일은 그 와중에 자신을 곁눈질하는 카심을 바라보며 조용히 물었다.
“어제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허, 허허… 무슨 일은.”
“있었대도 말하지 마십시오.”
“…응?”
“전투에서 살아남는데 도움이 될 정보 외에는 머리를 비우는 편이 낫습니다.”
태일의 말이 끝난 바로 그 순간, 상대 진영에서 전차들이 우렁찬 엔진 소리와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더불어 폭격기와 무인드론들이 일제히 공중으로 떠올랐다.
둘째 날의 시작이었다.
* * *
알마티 제7군단 제2순양함 사령부.
렌야 준장은 긴장 어린 눈으로 부대의 진격을 지켜보고 있었다.
렌야는 닐스 레오나드와 사관학교 동기이자, 같은 귀족 출신으로서 오랜 시간 친분을 쌓아 왔다.
한편으로는 경쟁자였고, 또 한편으로는 둘도 없는 친구였다.
그러나 닐스는 약 두 달 전의 49구역 연합과의 전투 이후 완전히 변해 버렸다.
순식간에 동부와 서부의 반군 수뇌부를 섬멸했으며, 그 공로로 서부 열 개 구역의 통치권까지 위임받았다.
닐스는 단번에 군부의 유력 인사로 떠오르면서 동기와 선배들을 앞질렀다.
렌야는 이제 알마티 제7군단장이자, 사실상 군부 총사령관의 입지를 갖게 된 닐스의 부대에 소속되어 전투에 임하고 있었다.
“알파 편대, 진입합니다.”
부관의 목소리와 함께 열 대의 폭격기와 드론 수백 대가 알마티의 상공으로 진입했다.
쾅! 콰쾅!!!
알마티 성벽에 배치되어 있던 포대들에서 폭격기를 향해 굉음과 함께 미사일이 날아든다.
수백 개에 이르는 총구에서 발사된 납탄들이 하늘에 화망을 형성했다.
드론들은 작은 몸집으로 새처럼 공중을 날며 미사일을 막아 내거나 포대를 파괴했다.
잠깐 사이에 무인드론 수십 기가 폭격기를 대신해 몸을 날려 공중에서 폭파되었다.
“알파 편대 열 대, 전원 진입 성공하였습니다!”
마침내 알마티 동쪽 상공에 진입한 폭격기들이 연쇄적으로 폭탄을 투하하기 시작했다.
쿵! 콰쾅!!!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알마티 시내에서 불길이 올랐다.
동쪽뿐만이 아니었다.
알마티 북쪽과 서쪽에서 출격한 폭격기들이 알마티 시내 곳곳에 폭탄을 쏟아 내고 있었다.
렌야는 그 광경을 바라보며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군인이 아닌 민간인 거주 지역을 상대로 한 무차별 폭격.
그야말로 전쟁범죄라 할 법한 작전이었다.
닐스는 이미 수차례의 공습에서 민간인 폭격의 효과를 톡톡히 누렸다.
가족들이 거주하는 시가지가 폭격당하면 공성전에 임한 병력의 사기는 크게 떨어지며, 순식간에 전열이 무너진다.
죽음에 대한 공포보다 더 끔찍한 것, 그건 사랑하는 이들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였으니까.
그러나 렌야는 곧 알마티가 다른 구역과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번 전투는… 힘들겠군.’
폭격은 성공적으로 시작되었지만, 막상 눈앞에 진열해 선 알마티 쪽 병력은 누구 하나 뒤로 물러섬 없이 진열해 있었다.
전방에서 다가오는 전차, 후방에서 시가지에 이루어지는 무차별 폭격.
그 가운데에도 흔들림 없는 부대의 모습은 그들의 각오와 역량을 보여 주기에 충분했다.
‘오합지졸은 아니라는 뜻인가.’
렌야는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알마티는 이미 어제 그들의 저력을 입증하지 않았던가.
일단 전투가 시작된 이상, 전력을 아껴 둘 이유가 없었다.
“9중대 투입해.”
렌야의 부관이 조금 놀란 듯 렌야를 바라보았다.
“못 들었나?”
“하지만 사령관님, 그자들은…….”
닐스가 동부에 파견한 이레귤러 부대.
물론 그들의 강력한 힘과 능력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더없이 거북한 존재였고, 통제하기 힘든 자들이었다.
정보에 따르면 9중대는 닐스의 개로 전락해 수많은 군 간부들을 암살했으며, 그중에는 닐스의 상급자와 동료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어젯밤, 렌야의 부대에 9중대가 파견되자, 부관은 그 즉시 렌야의 경호 병력을 증원했다.
그만큼 부관은 닐스와 9중대원을 믿지 않았다.
9중대의 출동을 허락하는 순간, 그들에게 붙여 둔 감시는 느슨해질 것이다.
목줄이 풀린 그들이 이후 무슨 일을 벌일지 알 수 없었다.
부관이 망설이자, 렌야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바로 그때, 사령부실에 긴급한 보고가 전해졌다.
“사령관님, 긴급통신입니다.”
“동쪽에서 정체불명의 군단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각각 통신과 관제를 담당하던 병사들로부터 연달아 보고가 전해졌다.
홀로그램으로 구현된 알마티 조감도 한쪽 끝에 붉은빛의 점들이 렌야의 부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얼마간 점의 움직임을 살피던 렌야가 살짝 한숨을 내쉬더니 부관을 바라보았다.
“뭘 하고 서 있는 거지? 9중대를 당장 출격시키라고 했을 텐데.”
잠시 넋을 놓고 있던 부관이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사령관님. 즉시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전차 부대의 돌격과 폭격기의 알마티 진입 직후, 9중대장 무명 대위에게 출동 명령이 내려졌다.
명령을 들은 직후, 무명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현명하군.”
렌야는 결코 도박을 걸지 않는 사내였다.
절대 방심하지 않으며, 전력을 최대한으로 활용하여 안정적인 승리를 끌어낸다.
사소한 변수에도 철저히 대응했다.
9중대를 출격시키겠다는 결정 역시 그런 렌야의 성격 덕분일 것이다.
“조금만 늦었어도 선발대는 전멸해 버렸을 거야.”
명령을 전달한 렌야 측 장교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우리 부대를 모욕하는 건가?”
“모욕? 아니, 냉정하게 평가하는 것뿐이야. 하지만 기분이 나빴다면… 사과하지.”
홀로그램에 떠오른 장교는 불쾌한 눈으로 무명을 쏘아보며 내뱉듯 말했다.
“허튼짓은 하지 마라. 석연찮은 이유로 네놈들의 통신 신호가 끊어지기라도 한다면, 무인드론들이 네놈들을 찾아 말살할 거다.”
경고를 끝으로 홀로그램이 꺼져 버렸다.
“…까칠하긴.”
렌야의 장교들은 무명을 비롯한 9중대원들을 인간으로 여기지 않았다.
언제든 인간을 위협할 수 있는 위험천만한 괴물로 볼 뿐이다.
그러나 무명 역시 그런 장교의 시선이 새삼스럽지는 않았다.
한평생을 그런 시선 속에서 살아오지 않았던가.
이전 주인이던 닐스 레오나드 역시 그들에게 온갖 지저분한 일을 시키면서 사냥개 취급을 할 뿐이었다.
그러나 한 사람만큼은 달랐다.
닐스의 얼굴을 한 채 새롭게 주인이 된 사령관.
‘난 너희와 같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무명에게 기회를 주었다.
그는 어제의 거대한 참격 앞에서도 9중대원들을 소모품이나, 방패막이로 쓰지 않았다.
“다들 준비됐나?”
“예!”
무명은 텐트 밖으로 언뜻 보이는 알마티 관문을 바라보았다.
‘어제 그 참격을 날린 자가… 저기에 있군.’
난생처음 목격한 힘, 아스트라페.
그 경이로운 힘을 가진 사내가 동부 전선에 있다.
그의 존재를, 그의 소울을 느낄 수 있었다.
“가자. 괴물 사냥하러.”
무명은 평소 좀처럼 보이지 않던 미소를 보이며 텐트를 나섰다.
그저 수동적으로 살기 위해 싸우던 노예 병사, 사악한 주인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던 꼭두각시 암살자.
그러나 이젠 달랐다.
순전히 자신의 의지로,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기 위해 적 앞에 섰다.
무명의 손끝에서 이전까지와 다른 푸른빛의 불꽃이 일었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