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D―1 (1)
알마티.
“젠장, 보면 볼수록 엄청난 크기군.”
“그러게나 말이야. 대체 저 괴물은 어디서 온 거지?”
장벽 위에 올라선 경계병들은 침을 꿀꺽 삼키며 동쪽 수풀을 바라보았다.
아직 미개발 지대로 풀과 나무만 무성하던 수풀, 그곳에는 그야말로 용을 떠오르게 만드는 거대 뱀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처음 뱀이 나타났을 당시, 알마티 시민들은 모두 공포에 질렸다.
단번에 장벽을 무너뜨릴 수 있을 정도의 거대한 몸집과 섬뜩한 이빨, 피에 물든 비늘은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뱀은 알마티의 바로 앞까지 다가왔을 뿐, 공격하지 않았다.
“어쩌면 우리를 지키러 온 게 아닐까?”
“그렇다면야 좋겠지만…….”
한편, 장벽 위를 걷다가 경계병들의 대화를 듣게 된 태일은 고개를 돌려 뱀 쪽을 바라보았다.
어떤 경위로, 무슨 이유로 알마티에 온 것인지 알 수 없는 뱀.
동대륙 방향에서 온 것만큼은 확실했고, 알마티 내에서는 뱀에 관해 무수한 소문이 돌았다.
그러나 태일은 그 뱀의 정체를 잘 알고 있었다.
“인격이 사라지고, 분노와 절망에 사로잡혀 자신을 잃어 갔지… 불쌍한 장.”
알마티 캐피털 클럽의 지부장이었던 장 베르코프는 메데이아에 의해 제물로 바쳐졌고, 그렇게 태어난 뱀이 바로 눈앞의 요르문간드였다.
아버지인 루키우스 앞에서 장은 뱀으로 변해 버렸고, 그렇게 메데이아의 꼭두각시로 전락했다.
그리고 그 순간, 메데이아는 루키우스에게 가장 가혹한 말들을 쏟아 냈다.
“보호? 바깥세상으로부터 격리하는 걸 보호라고 부르나? 욕망을 억누르는 게 보호야? 당신은 장을 두려워했어. 당신의 아내를 잡아먹은 이 괴물을 말이야.”
요르문간드가 어떻게 알마티로 돌아오게 된 것인지, 그리고 무슨 이유로 그처럼 상처를 입은 것인지, 또 메데이아는 어디로 가 버렸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루키우스는 요르문간드가 나타난 뒤, 단 한 번도 장벽 위에 나타나지 않았다.
아들을 바라볼 용기를 내지 못했다. 자신의 죄악을 직면하지 못했다.
“어어, 이쪽을 본다!”
“어휴, 보기만 해도 소름이 돋는구먼. 저 눈 좀 보라고.”
뱀의 노란 눈동자가 태일을 향한다.
요르문간드가 인간일 적의, 장 베르코프일 적의 기억을 가졌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알마티를 기억하고 있는 것만큼은 확실해 보였다.
그렇게 태일이 뱀과 서로를 마주 보는 사이, 장벽을 올라온 제니가 태일의 등을 두드렸다.
“오빠, 곧 회의가 시작될 거야. 17구역과 18구역 사절도 방금 도착했어.”
“…그래. 내려갈게.”
태일은 가만히 한숨을 내쉰 뒤, 시선을 돌려 계단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요르문간드 역시 다시 고개를 숙인 채 눈을 감았다.
시청으로 향하는 사이, 알마티 골목은 수많은 이들로 인해 붐볐다.
“으와아아앙!! 엄마~!! 엄마!”
“어르신, 집에서 동생이 굶고 있어요. 제발 초 하나만 사 주세요. 싸게 드릴게요! 아니면 고급스러운 촛대도 있어요!”
“이 새끼가 감히 무전취식을 해?! 너 이 녀석, 잘 걸렸다! 이리 와! 너 어디서 왔어?!”
거리에서 온갖 목소리들이 뒤엉켜 들려왔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은 하나같이 혼란과 짜증, 분노와 당혹감 따위 부정적인 것들이었다.
카렌은 어두운 태일의 표정이 마음에 걸렸는지, 애써 밝은 말투로 말을 걸어왔다.
“소매치기 조심해, 오빠. 요새 부쩍 늘어난 것 같단 말이야.”
“왜? 너도 당한 적 있어?”
“흥, 그런 아마추어 녀석들한테? 내가 아무리 잠깐 기억을 잃었어도 그런 하수들이랑 비교될 수준은 아니지.”
“그럼 한 적은 있고?”
“…….”
“뭐야, 설마 너 아직도……!”
“에이, 아니야, 아니야! 이젠 손 털었다고. 알잖아?”
알마티가 본래부터 작은 도시는 아니지만, 이미 인구 수용의 한계에 부딪힌 상태였다.
지하에서 올라온 시민들에 이어 외부에서 피난민들까지 밀려 들어오면서 치안이 악화되었고, 온갖 소란과 분쟁이 일어났다.
문화의 차이와 경제력의 차이, 생각의 차이가 두드러지면서 외부인에 대한 갈등과 분노가 커지고 있었다.
루키우스의 행정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지만, 센트럴 오더가 발령되고 두 달이 흐르는 동안 곪아 온 문제를 전부 해결하기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17, 18구역에서 온 사절들은 어때 보였어?”
“…썩 좋은 소식을 가져온 것 같진 않아. 그리 보기 좋은 낯빛은 아니었거든.”
“그렇겠지.”
태일은 잠깐 발걸음을 멈춘 뒤, 시청 첨탑 위에 걸린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앞으로 몇 시간 뒤면 알마티와 대륙의 운명을 건 결정이 내려질 터였다.
도시 한가운데에 새롭게 증축된 알마티 시청.
한 번에 많은 이들을 맞아들일 수 있을 정도의 접견실과 회의실을 새로 갖추었지만, 알마티를 찾는 이들이 날이 갈수록 많아지면서 지금의 규모조차 작게 느껴질 정도였다.
지금 그 회의실에서는 무려 24개 구역에서 온 사절들이 초조한 얼굴로 모여 앉아 있다.
“다들 이렇게 모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루키우스의 얼굴에는 만성적인 피로가 새겨져 있었다.
그의 눈은 붉게 충혈되고, 눈 밑에는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얼굴의 주름 역시 더욱 깊게 파인 상태였다.
그럼에도 모두는 그런 루키우스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피로에 지쳐도, 노환으로 비틀거려도 지금 이 순간, 루키우스를 대체할 수 있을 정도의 정치가는 존재하지 않았다.
루키우스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49구역에서 연합이 괴멸되고 난 뒤, 지난 한 달 동안 센트럴은 대륙의 여러 구역들을 침략했습니다.”
각 구역에서는 연합의 괴멸과 함께 센트럴 오더 역시 종료될 것이라 여겼지만, 상황은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센트럴은 대륙 구역들에게 기반 시설 운영권을 반환하라는 명령을 내리는가 하면, 강제적으로 병력 징집을 지시했다. 심지어 구역 세금의 대부분을 양도하라는 지시까지 있었다.
센트럴 오더의 원인을 제공한 49구역과 50구역이 무너진 상황에서 센트럴의 지시는 명백한 ‘약탈’이었다.
구역 자치권을 완전히 박탈하고 식민지 대하듯 하는 센트럴의 태도에 분노한 몇 개 구역들이 공동으로 반발의 목소리를 냈다.
제법 탄탄한 경제력과 의회 발언권을 갖고 있던 서부 10개 구역, 이른바 서부연맹이 먼저 나섰다.
그리고 센트럴은 기다렸다는 듯 공격을 시작했다.
50구역으로 향해야 할 센트럴 병력이 총구를 돌린 것이다.
“그것은 불법적인 침략이었고…….”
회의실에 앉은 몇몇 의원들이 입술을 깨물었다.
“전례 없이 잔인한 학살이었습니다.”
센트럴은 처음으로 저항한 서부연맹 중 가장 큰 세 개 구역을 ‘평탄화’했다. LAPD 병력은 물론, 민간인들까지 모조리 학살했고, 해당 구역의 건축물들조차 단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
아이와 여성은 물론, 애완 강아지 한 마리조차 그 폭격 속에서 살아 나오지 못했다.
집요하고 철저한 파괴 행위에 놀란 서부연맹은 센트럴에 완전한 복종을 표했고, 다른 지역의 구역들 역시 그 후로 센트럴의 온갖 불합리한 요구에 더는 저항하지 않았다.
그러나 센트럴은 폭주를 멈추지 않았다.
“센트럴의 폭정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습니다. 아주 사소한 이유로 각 구역의 정치가와 사업가들을 제거하고 있지요.”
“…시장님.”
11구역의 대표 멜리사가 붉게 충혈된 눈으로 팔을 들어 올렸다.
루키우스가 잠시 말을 멈추었고,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집중되었다.
“모두가 아는 이야기는 그 정도만 해 두시지요. 우리에게는 시간이 없을 텐데요.”
멜리사의 부모는 센트럴의 요구로 인해 11구역의 행정권을 박탈당했고, 반역 모의로 체포되어 구금되었다.
멜리사는 알마티에 머물렀기에 화를 피할 수 있었지만, 멜리사의 일가족은 사실상 처참히 몰락했고, 11구역은 완벽히 센트럴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센트럴의 최후통첩 기한이 내일까지죠?”
“…맞습니다.”
“그럼 빙빙 돌리지 않고 곧바로 여쭤볼게요. 시장님은 어떻게 하실 거죠? 센트럴의 요구에 무릎을 꿇으실 건가요, 아니면…….”
센트럴의 최후통첩은 알마티의 완전 항복을 의미했다.
― 알마티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개발 행위의 전면 중지 및 센트럴의 재심사 절차 수용.
― 알마티에서 불법적으로 재구성된 자경단의 해체 및 지하 도시 반란 사건 재조사, 책임자 격리.
― 알마티 장인들과 작업장의 권리 양도 및 기술 인계.
― 알마티의 모든 장비들을 센트럴에 반환.
― 알마티 세금 징수권 및 예산 편성권, 자산 운용권을 센트럴에 반환.
― 알마티의 20대 이상 성인 대상 징집령.
하나같이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들이었다.
센트럴은 알마티의 재건을 막으려 했으며, 지하 도시 반란을 되돌릴 속셈이었고, 철저히 무장 해제한 뒤, 직접 통제하려 했다.
“…싸우실 건가요?”
회의실 전원의 시선이 다시금 루키우스에게로 몰렸다.
루키우스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하는 듯하다가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이곳에 계신 각 구역 의원님들께서는 알마티의 재건을 위해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재정적, 기술적 도움들이었죠.”
순수한 의미의 도움은 아니었을 것이다.
알마티를 방패막이로 쓰려는 속셈, 센트럴의 시선을 돌리고 견제하려는 의도 등 철저하게 계산된 행동이었다.
심지어 일부 구역에서는 피난민이 몰려들면서 도리어 알마티에게 막대한 부담을 안기기까지 했다.
“지금부터 알마티는 그 모든 지원들을 ‘동맹’의 의지로 받아들이려 합니다.”
회의실에서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지금 루키우스의 선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지 못할 사람은 이 자리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지원을 철회하고자 한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다만, 이미 저희에게 투자한 부분에 대해 당장은 반환이 불가함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시장님, 지, 지금 그 말씀은… 센트럴에 맞서겠다는 겁니까?”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17구역 대표가 말까지 더듬어 가며 물었다.
루키우스는 침착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결정은 저만의 몫이 아니라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저희와 동맹을 맺고 불합리한 요구에 맞설지, 혹은 저항을 포기할지 결정하십시오.”
의원들의 얼굴에 난감한 기색이 떠올랐다.
― 물적, 금전적으로 지원은 하되, 센트럴에 정면으로 나서기에는 부담스럽다.
― 센트럴과 맞서 줄 대적자는 필요하지만, 거기에 우리 구역의 명운을 걸 수는 없다.
이기적인 생각이지만, 지극히 합리적인 판단이기도 하다.
그래서 구역들은 센트럴을 지원하면서 공식적으로는 그 사실을 밝히지 않았고, 최소한 명목상 센트럴에 굴복하는 듯한 태도를 견지했다.
“동부에서 만들어진 연합이 무너졌고, 바로 얼마 전에는 서부연맹까지 무너졌어요. 정말 알마티에 승산이 있다고 믿으십니까?”
18구역 대표가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질문했다.
루키우스는 가만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도 확답을 드리기 어렵습니다. 객관적으로 보아 이쪽이 열세인 것은 명백한 사실이지요.”
“…….”
솔직한 루키우스의 대답과 함께 회의실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하긴 당연한 노릇이었다.
이미 내부 폭동이 일어나면서 한차례 거대한 소요를 거친 알마티가 센트럴과 맞서 버틸 수 있을 리 없었다.
서부에서 엄청난 자본을 축적하고, 난공불락의 요새를 자랑하던 세 개 구역이 단 일주일도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지 않았던가.
알마티가 처한 상황은 그야말로 절망적이었다.
“제가 여러분에게 요청드리는 것은 단 하나입니다. 저희와 함께하고자 한다면, 구역의 명운을 거십시오.”
“…….”
“싸움은 내일부터 시작될 겁니다.”
알마티 시민들은 센트럴의 최후통첩에 대해 알지 못했다.
그러나 이 회의가 끝나면 시민들은 바로 내일이 알마티 최후의 날이 될 수도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루키우스의 선언 후, 얼마간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침묵을 깬 이는 11구역의 멜리사였다.
“11구역의 정당한 대표자로서, 멜리사 마릴리에는 알마티와의 동맹을 선언하겠어요.”
“14구역의 대표자 잭 알폰소, 알마티와 함께하겠소.”
“15구역의 대표자 베일 블라트, 동맹을 선언하지.”
“13구역 대표자 조니 카일, 알마티에 동맹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엄숙한 선언이 이어진다.
그러나 잇따른 동맹 선언에도 다른 구역의 정치가들은 그저 불편한 기색을 내비칠 뿐이었다.
11구역 마릴리에 가문은 이미 센트럴에 의해 축출되어 11구역 전체가 센트럴의 손아귀에 들어간 상태였다.
또한 13구역, 14구역, 15구역은 서부연맹에서 본보기로 평탄화된 구역들이었다. 알마티로 도망쳐 온 피난민들을 제외하면 세 개 구역은 그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결국 알마티를 지원해 주기는커녕 도리어 지원받아야 하는 처지에 놓인 구역들만이 선뜻 동맹에 응한 것이다.
그럼에도 루키우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기꺼운 얼굴로 허리를 숙여 대표자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한편, 그 외의 다른 구역 대표들은 회의가 끝날 때까지 동맹을 선언하지 않았다.
심지어 안도 애슈턴마저도 침묵했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