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D―2 (2)
“꺼윽… 꺼으윽…….”
목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갑판을 적신다.
구원을 요청하기 위해 입을 뻐끔거려 보았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이게 끝일 리 없다. 내가 이렇게 허망하게 죽을 리 없다.’
악착같이 손을 뻗어 갑판 바닥을 마구 긁어 댔다.
백련은 여전히 조금 전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이해하지 못했다.
갑자기 안개 속에서 빛과 함께 나타난 사내.
분명 지상에 있던 그가 아무런 기척도 없이, 마치 순간 이동이라도 하듯 별안간 갑판에 나타났다.
더 믿기지 않는 일은 그 뒤에 벌어졌다.
그는 마치 춤을 추듯 순식간에 병사들을 도륙했고, 백련에게 달려들었다.
고작 3분도 되지 않는 동안 벌어진 일이었다.
‘모든 걸 손에 넣을 거다, 모든 걸…….’
이를 악물고 버둥거리는 가운데, 아크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당신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야, 백련. 모든 것을 당신 손아귀에 넣어.”
동원된 부대로 포트리스를 빼앗고, 이어 어리석은 포르투나의 손에 쥐어진 함대를 모조리 손에 넣을 것.
아크 탈로스의 마지막 시험이었다.
그러나 백련은 결국 아무것도 해내지 못했다.
‘난 신이야.’
툭.
살기 위해 발악하던 백련의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용병들에게 군림하던 사이비 교주의 끝은 너무도 초라했다.
백련의 숨이 끊어진 바로 그 순간, 지휘사령실에서는 팽팽한 긴장감이 맴돌고 있었다.
“소이탄을 투하해, 이 멍청이들아!”
포르투나의 고함 소리가 사령실을 쩌렁쩌렁 울린다.
그러나 정작 그 지시에 따라야 할 장교들은 꼼짝도 하지 못한 채 포르투나와 그 옆에 선 민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해 봐, 어디. 그 즉시 사령관의 목이 잘릴 거다.”
칼날이 살갗을 베자, 포르투나의 목덜미에서 한 줄기 피가 흐른다.
호위병들은 민호에게 총구를 겨누고 있지만, 만에 하나라도 사령관 포르투나를 맞출 수 있다는 위험성 때문에 어쩌지 못하고 있었다.
포르투나는 그 모습을 보며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너, 이 새끼……!”
잠시 시야가 차단된 사이, 민호는 호위병들을 뚫고 들어와 단번에 포르투나를 인질로 붙잡았다.
허무하게 붙잡혀 버린 포르투나는 굴욕감으로 인해 얼굴이 벌게진 상태였다.
“연합을 괴멸시킨 게 너희 부대인가?”
“…….”
포르투나가 입술을 깨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민호가 곧장 단검을 포르투나의 허벅지에 쑤셔 넣었다.
“끄아아악!!”
“그, 그건 닐스 사령관의 부대였다!”
포르투나의 비명 소리가 울린 직후, 그의 부관이 황급히 목소리를 높였다.
“닐스란 놈의 부대는 지금 어디에 있지?”
“알마티에서 합동작전을 펼 예정이다. 이틀 뒤면 알마티에 도착할 거야.”
“마틴 대령!”
더는 참지 못한 포르투나가 부관을 향해 고함을 내질렀다.
사령관인 자신이 적에게 사로잡힌 가운데, 부관은 적에게 기밀을 모조리 털어놓고 있다.
그 치욕스러운 상황을 견디지 못한 포르투나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순양함이 거세게 휘청거렸다.
콰쾅!!
“뭐, 뭐야?! 상황 보고해!”
포르투나는 단검이 여전히 자신의 목을 노린 그 와중에도 상황 파악을 위해 지시를 계속했다.
“하, 함선의 오른 날개 접합부에 파손이 발생했습니다!”
넋이 나간 채 인질극을 바라보고 있던 병사가 함선 상황을 살핀 뒤 급히 보고했다.
오른 날개 접합부는 사령함의 출격 직전에 보수가 마무리된 부위였다.
하필 이제 막 수리가 끝난 부분이 파손된 것이다.
터무니없는 보고가 이어졌다.
“조금 전, 상대편에서 사격이 이루어졌습니다! 총탄이 접합부를 타격한 것으로 보입니다!”
“뭐……?”
‘포탄’이 아닌 ‘총탄’.
고작 총 한 발이 순양함의 가장 약한 부위를 정확히 파고들었다는 뜻이었다.
“함선 고도가 급격히 떨어지고 있습니다!”
“함선 연료구가 피격당했습니다!”
“다, 당장 수리에 나서야 합니다!”
정신없이 보고가 밀려오는 와중에 함선은 다시금 거세게 휘청거렸고, 지휘사령실의 병사들 역시 모조리 균형을 잃은 채 비틀거렸다.
그러나 민호는 흔들림 없이 포르투나를 단단히 붙들고 있었다.
“하, 함선 갑판 위에 적이 올라탔습니다!”
잇따른 보고에 포르투나는 그만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정문이 열린 뒤 나타난 세 사람.
그들은 애당초 순양함을 격추할 생각으로 요새를 나선 것이다.
‘이건 악몽이다. 이럴 수는 없어.’
다시금 눈을 뜬 바로 그 순간,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던 병사의 목이 굴러 떨어졌다.
그와 함께 사령관실 벽면에 엄청난 양의 피가 튀었다.
“무, 무슨……!!”
순양함이 거세게 흔들리는 와중에 검을 휘두르는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뭐야? 굳이 번거롭게 인질을 잡은 거야?”
그녀는 조소와 함께 몸을 날리더니,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호위 병사들의 목을 연달아 베어 넘겼다.
그 와중에 민호의 냉철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번거로워도 이 방식이 나아. 정보가 필요하니까.”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평온한 말투.
비정상적일 정도로 평범한 둘의 대화는 오히려 더욱 공포스럽게 들렸다.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한 포르투나는 한탄과도 한마디를 뱉어 냈다.
“신이시여…….”
바로 다음 순간, 포르투나의 목에 민호의 단검이 파고들었다.
“뭐야, 저건?”
알렉세이 딘은 할 말을 잃은 채 추락하는 순양함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습격해 온 세 척의 순양함 중 가장 큰 대장함이 너무나도 허무하게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사인검과 권총, 그리고 낯익은 단검.
아무리 소울 웨폰이라 해도 대형급 전투 순양함을 순식간에 격추시킨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었다.
도무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사건이 바로 눈앞에 벌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와아아아아아!!”
엄청난 함성이 포트리스 장벽 근방에서 폭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대, 대단하다! 정말 장난 아니라고!”
“당주님이었어. 우리 당주님이 순양함에 올랐다고!”
“큰형님은 어떻고? 사격 몇 방으로 저 거대한 함선을… 저걸 격추한 거잖아, 지금!”
순양함을 보고 겁에 질렸던 패잔병들과 49구역 생존자들이 일제히 탄성을 내질렀다.
자켄과 강필 역시 넋이 완전히 나간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 나간 분이… 저 함선에 올라탄 검수가… 당주님이 맞죠?”
“그래, 잘못 본 게 아니야. 우리 둘 다 미쳐 버렸을 확률도 있지만…….”
강필이 고함으로 가득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마 현실인 모양이군.”
민호, 카츠미, 페이진. 단 셋이서 대장함을 순식간에 추락시켰다.
연합 병력을 몰살시킨 기종의 순양함을 너무나 쉽게 격파한 것이다.
그건 이미 ‘능력자’라는 말 정도로 설명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자켄은 그 비현실적인 장면을 바라보며 가만히 중얼거렸다.
“대체 50구역을 떠난 후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대체 무슨 일을 겪었기에…….”
쿠쿠쿵!!
거대한 울림과 함께 거대한 성채를 연상케 하는 전투순양함이 땅에 처박힌다.
쾅! 콰쾅!!
그와 동시에 순양함에 실려 있던 전투기들이 저희들끼리 부딪치며 연쇄적으로 폭발하기 시작했다.
강필과 자켄은 그 엄청난 광경에 압도된 나머지 제대로 기뻐할 수조차 없었다.
한편, 대장함이 터무니없이 추락해 버린 가운데, 나머지 순양함 두 척은 나아갈 방향을 잃은 채 가만히 공중에 머물렀다.
포격도, 후퇴도 하지 못한 채 멈춰 서 버린 것이다.
사령관을 잃은 병기는 두뇌를 잃은 몸뚱어리와 같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알렉세이 딘이 가만히 눈을 감았다.
지금껏 벌어진 일들을 숨어 있는 기계병단들 역시 지켜보고 있었다.
‘이긴 거야? 저렇게 쉽게?’
‘추락했어. 저렇게 쉽게.’
기계병단의 동요가 들려온다.
‘어쩌면 말이야…….’
그 와중에 또렷이 들려오는 신호.
‘우리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인형 병동에 갑작스레 떨어진 포격, 불길 속에 죽어 간 친구들.
기계병단이 센트럴 순양함에 가진 감정은 비단 공포뿐만이 아니었다.
증오와 분노.
‘부수자, 전부.’
‘복수하자. 그날의 복수를 하자.’
‘전부 격추시키고 파괴하자.’
한번 피어오른 불씨가 빠른 속도로 번져 간다.
가만히 눈을 뜬 딘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전력을 전환해. 실드 대신 기계병단의 갑주에 공급한다. 그리고… 남은 전력은 모조리 비행 전력으로 쏟아부어.”
[실드의 전력을 기계병단으로 전환합니다. 실드 충전율 90%… 85%…….]
시스템의 알림을 들으며 딘 역시 포트리스와의 연결을 끊었다.
회의실 안에서 눈을 떠 보니, 현태는 그 순간까지도 무릎을 꿇은 채 어찌할 바를 몰라 하고 있었다.
바깥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현태는 아직 모르고 있을 것이다.
“너의 사죄는 당사자에게 직접 하도록 해. 용서는 그들에게 받아.”
딘은 그렇게 현태를 남겨 둔 채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현태는 놀란 눈으로 그런 딘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다들 준비해.’
기계병단이 일제히 딘의 한마디에 호응하기 시작했다.
“우, 우와아아아!!”
불길에 뒤덮인 순양함에서 탈출한 센트럴 병사들은 비명을 내지르며 황급히 탈출해 뒤쪽에 대기 중인 순양함 쪽으로 내달렸다.
“살려 줘! 빨리 우릴 태워 달란 말이야!!”
그 누구도 민호, 카츠미, 페이진을 공격하려 들지 않았다.
그저 도망치기 바쁠 뿐이었다.
한편, 대기 중이던 순양함에서 소형 수송선들이 긴급 투입되었다. 대장함에서 도망쳐 온 병사들을 태우기 위해 천천히 지상에 착륙한다.
아마 대장함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듣기 위해 구조에 나선 것일 터였다.
“지쳤으면 돌아가도 좋아.”
페이진은 히죽 웃으며 수송선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재미없는 농담이야, 페이진.”
“이번에는 함부로 죽이지 마. 가능하면 인질도 몇 잡으라고. 이왕이면 고위직으로.”
“잔소리는 적당히 해.”
카츠미와 민호 역시 살기 어린 웃음을 지으며 천천히 수송선을 향해 다가갔다.
지난 두 달 동안 셋은 소울 웨폰을 완벽히 통제하기 위해, 자신의 힘을 온전히 사용하기 위해 훈련을 거듭했다.
순양함에 겁먹고 물러서야 했던 무력감.
더는 그런 나약함을 체감하고 싶지 않았기에 쉴 틈 없이 훈련했다.
무기에 담긴 악마와 끊임없이 맞섰고, 정신을 잃을 정도로 자신을 몰아붙였다.
오로지 복수의 순간을 기다리면서, 다시는 적을 눈앞에 두고 도망치지 않겠다는 각오로.
그러니 이젠 그 어떤 적 앞에서도 물러설 마음 따위 없었다.
“오, 온다!”
“빨리 출발해! 빨리!”
수송선에 간신히 올라탄 병사들이 셋의 모습을 보고는 고함을 질러 댔다.
“나, 나도 태워 줘!”
“빨리 이륙해! 빨리!”
세 사람이 수송선에 올라타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아차린 병사들이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 댔고, 아직 수송선 오르지 못한 병사들은 악착같이 몰려들었다.
그렇게 소란이 일어난 찰나, 뒤쪽에서 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올 때는 마음대로였지만…….”
쿠궁, 쿠구구구구…….
땅에 지진이라도 난 듯 거대하게 흔들리기 시작한다.
“갈 때는 아니야.”
곧이어 지하에 몸을 숨기고 있던 기계병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뭐, 뭐야?!”
“으아아아아!!”
혼비백산한 센트럴 병사들이 저마다 기괴하게 개조된 기계병들을 향해 총을 겨누었다.
“괴, 괴물이다! 괴물이야!”
“쏴! 쏘라고!”
탕! 탕! 탕!
총탄들은 기계병들의 단단한 갑주를 뚫지 못했고, 한번 날뛰기 시작한 기계병들은 오합지졸로 전락한 병사들을 닥치는 대로 살육하기 시작했다.
기계병들의 거대한 중장비에 의해 병사들의 몸이 으깨졌고, 갑주에 장착된 기관총이 불을 내뿜으면서 도망치는 병사들의 몸을 벌집으로 만들어 버렸다.
혼란 속에서 수송함은 채 병사들을 태우지도 못한 채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 모습을 본 기계병은 수송함과 순양함을 향해 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기계병단의 참전에 민호와 카츠미, 페이진은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그런 세 사람의 뒤로 딘이 천천히 다가왔다.
“너희의 각오는 충분히 확인했어.”
딘은 자신을 바라보는 셋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우리도 너희와 함께 싸우도록 하지.”
“뭐래?”
“…….”
“하, 어이가 없네. 겁먹고 숨어 있다가 대장 목을 따니까 그제야 기어 나온 주제에… 뭐? 함께 싸워?”
예상을 벗어난 페이진의 대꾸에 순간 딘의 사고가 멈추었다.
“어, 그러니까…….”
“너희가 우릴 돕는 게 아니라 우리가 너흴 돕는 거 아닌가? 저 요새, 당신들 거잖아.”
민호가 조곤조곤 말을 잇는다.
“그렇지. 우리 요새이긴 하지. 그렇긴 한데…….”
“그럼 감사부터 표해야지.”
“아, 아니…….”
당황한 딘이 카츠미를 바라보았지만, 이미 한 차례 딘에게 거절당한 카츠미는 더 말을 섞을 가치도 없다는 듯 냉정히 돌아섰다.
“이게 아닌데…….”
50구역 뒷골목에서 잔뼈가 굵은 셋과 협상하기에 딘은 지나치게 순진했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