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D―2 (1)
“뭐야, 겉보기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데…….”
거대한 몸집의 사내가 눈을 게슴츠레 뜬 채 황량한 전방의 대지를 바라본다.
그 와중에 전방 조종석에 앉아 있던 부하들이 연달아 보고하기 시작했다.
“이상 에너지 반응 감지되었습니다.”
“전파방해입니다! 기체 간 접속 불량입니다.”
“생명 반응 역시 미세하게 감지됩니다.”
보고를 들은 사내가 팔짱을 낀 채 히죽 웃어 보였다.
“호오, 그렇단 말이지? 어쨌든 여기까진 당신 말이 맞는 것 같군, 사이비. 그럼 어디 한번 당신의 능력을 보여 주겠나?”
사내의 옆에 서 있던 백련이 불편한 표정으로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무시해선 안 됩니다. 놈들이 가진 병력은 결코 만만한 수준이 아닙니다.”
멤브레인 안에 숨어 있는 포트리스, 그리고 그 성채를 지키고 있는 기계병단.
백련은 그들이 가진 저력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흐흐, 떨거지 용병이나 허접한 오합지졸 수준에서야 그럴지도 모르지, 사이비. 하지만… 그래, 사실 나 역시 놈들이 정말 강했으면 좋겠어. 진심으로 말이야.”
백련은 말끝마다 ‘사이비’를 붙이는 사내의 태도가 거슬렸지만, 감히 함부로 굴 수 없었다.
아니, 사실 그의 태도가 그처럼 건방질 수 있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전투순양함을 무려 세 척이나 통제하는 센트럴 사령관이자, 코카서스의 간부인 ‘포르투나 중장’.
그는 단연코 대륙 최강이라 부를 수 있는 부대를 이끌고 있었으니까.
바로 며칠 전까지는 말이다.
“닐스, 그 미친개를 압도할 만한 전공이 필요해. 놈이 제멋대로 날뛰는데, 고작 떨거지 메타휴먼 용병 몇 놈 붙잡아서야 면이 안 서잖아?”
이틀 전, 닐스가 전투순양함 여덟 척에 대한 지휘권과 더불어 10여 개에 이르는 구역 통치권까지 부여받았다는 소식이 들어오자 포르투나는 눈이 뒤집혀 길길이 날뛰었다.
“빨리 작전을 마무리하고 이 끔찍한 황무지를 떠야겠어.”
“…….”
백련은 자신의 충고 따위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어차피 이번 전투는 손쉽게 포르투나의 승리로 돌아갈 테니까.
그도 그럴 것이, 포르투나가 끌고 온 전투순양함 세 척과 그 순양함에 실린 병기들은 동대륙 전체를 초토화하고도 남을 전력이었다.
“뭐 하고 서 있나, 사이비? 빨리 나가서 그 멤 어쩌고 하는 걸 치워 버려!”
포르투나의 성화에 백련은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인 뒤, 지휘사령실을 빠져나와 순양함의 갑판 위로 올랐다.
흙먼지가 뿌옇게 시야를 가리고 있다.
갑판으로 오른 백련을 바라보는 장교들의 시선이 따가웠다.
갑판 끝으로 걸어가는 백련을 슬슬 피했고, 몇몇은 그가 지나간 자리에 침을 탁, 뱉었다.
포르트나 휘하 장교들은 백련을 ‘사이비 이레귤러’, ‘닐스의 끄나풀’ 따위로 부르며 노골적으로 무시했다.
‘신세가 한심하게 됐군.’
한때 수많은 용병들을 이끌며 49구역의 왕이 되려 했고, 신으로 군림하려 했다. 그러나 이젠 센트럴의 일개 장교에게도 절절매야 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결국 다시금 기회가 찾아올 것이다.
그 시작은 바로 그가 모든 것을 잃어버린 이곳, 포트리스가 될 것이다.
갑판 끝에 올라선 백련은 천천히 양팔을 들어 올렸다.
멤브레인의 흔적, 그 가운데 약한 지점을 찾는다.
스스스스스…….
백련의 양팔에서 하얀 안개가 뭉게뭉게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 * *
‘그놈들이야! 또다시 우리를 잡으러 왔어.’
‘싸워야 해.’
‘이길 수 있을까?’
‘어쩌면 우리를 찾지 못할지도 몰라.’
기계병단이 동요하며 신호들을 보내온다.
딘은 가만히 입술을 깨문 채 홀로그램에 떠오른 순양함 세 척을 바라보았다.
인형 병동에서의 탈출 당시, 단 한 척의 전투순양함이 선보인 화력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간신히 순양함을 격파하긴 했지만, 그 과정에서 딘 역시 중상을 감수해야 했다.
그만한 순양함이 무려 세 척이나 나타난 것이다.
“…젠장.”
홀로그램에 떠오른 순양함 갑판 위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백련, 포트리스를 습격한 사이비 교주.
그의 팔에서 하얀 안개가 뿜어져 나온다. 과거, 멤브레인을 찢고 포트리스를 위협하던 바로 그 능력이었다.
결국 싸움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놈들은 기어코 포트리스를 완전히 박살 내기 위해 여기까지 온 것이다.
홀로그램에 떠오른 기함을 본 현태 역시 공포에 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 전투 순양함……!”
“저놈들이 벌인 짓이겠지?”
갑자기 들려온 차가운 목소리에 딘과 현태는 놀란 눈으로 카츠미를 바라보았다.
“저놈들이 내 가족들을 살해하고 모든 걸 불태운 거겠지.”
카츠미가 자신의 검집을 움켜쥐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녀의 섬뜩한 표정에 놀란 현태가 입을 뻐끔거렸다.
“다, 당주…님?”
그녀가 쥔 검으로, 그녀의 힘으로 상대할 수 있는 적이 아니었다.
그 많던 연합 병력을 단 한 척의 순양함이 괴멸시키지 않았던가.
겁에 질린 눈으로 카츠미를 바라보는 현태와 달리 딘은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싸울 생각이냐?”
“달리 방법이 없으니까.”
“…….”
쿠구구구…….
하얀 안개가 포트리스 근방을 감싸며 멤브레인의 약한 틈을 뚫고 들어온다.
공간 전체가 불안하게 떨리고, 마치 지진이라도 난 듯 포트리스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카츠미는 말없이 검을 든 채 밖으로 나가 버렸고, 딘은 가만히 홀로그램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멤브레인 시스템을 해제해.”
어차피 지금 상황에서 은폐 따위는 의미가 없다.
오히려 멤브레인의 파괴는 소울의 오염 등 더 큰 위험을 초래할 수 있었다.
[멤브레인을 해제합니다.]
무뚝뚝한 목소리의 시스템이 화답하며 포트리스 주변에 씌워져 있던 막이 해제되었다.
딘의 지시가 떨어지자 조금 전까지 불안에 떨던 기계병단 역시 모두 침묵했다.
딘은 가만히 눈을 감은 채 포트리스 전체와 자신의 정신을 연결했다.
요새의 곳곳을 점검하며 모든 시설을 가동한다.
“대전투 모드 가동, 센서 가동, 비상 전력 준비, 무인 함정 준비, 실드 시스템 활성화…….”
지금껏 전투를 대비해 마련한 기능과 장비들을 일제히 가동한다.
포트리스 주변으로 투명한 방어막이 둘러쳐지고, 곳곳에 숨겨 둔 포탑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플루톤 데이터베이스를 기반으로 계산해서 보고해. 상대 포격에 대한 대응 체계는 어떻지?”
[포격 교란 시스템 운용 효율 24.2%, 실드 충전율 92.8%, 무인함정 정밀도 88.4%…….]
시스템을 통해 각종 수치가 떠오르는 가운데, 딘의 시선 역시 부산히 움직였다.
요새 곳곳의 장비들을 재배치하고, 최선의 상태를 구축한다.
“교란 시스템에 드는 전력을 실드와 비행 대기 전력으로 투입해.”
[포격 교란 시스템을 임시 정지합니다.]
센트럴 오더 전후로 암시장의 상황이 그리 좋지 못했기에 물자와 에너지의 조달이 원활하지 못했고, 녹스가 떠나 버린 이후 시스템의 완성도 역시 썩 만족스럽지 못했다.
요새의 세세한 부분까지 면밀하게 파악하고 늘 최상의 효율을 유지하던 녹스에 비해 새롭게 만든 시스템은 수동적으로 움직였고, 딘이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 써야만 했다.
‘이게 본체와 나의 격차겠지.’
지식은 그대로 물려받았지만, 녹스를 만든 ‘알렉세이 딘’에 비해 자신은 너무도 부족했다.
[실드 충전율 100.0%, 비행 대기 전력 30.5%…….]
“좋아, 그다음은…”
바로 그때, 시스템의 보고가 들어왔다.
[정문 개방 요청입니다.]
“뭐?”
딘의 눈앞에 정문의 영상이 떠오른다.
민호, 카츠미, 페이진.
달랑 셋이 문 앞에 서서 카메라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제정신인가?”
싸우겠다고는 했지만, 설마 맨몸으로 순양함 앞으로 나가겠다는 뜻일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것도 고작 셋이서 말이다.
카츠미가 카메라를 똑바로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열어.]
그녀의 옆에 선 민호와 페이진은 제각기 소총을 매만지고 있었다.
딘이 급히 음성 장치를 활용해 정문에 선 셋에게 목소리를 높였다.
“어리석은 짓 하지 마. 그대로 밖에 나가는 건 자살행위야!”
[열기 싫으면 말고.]
카츠미가 다짜고짜 검을 뽑는다.
그러더니 굳게 닫힌 문의 잠금장치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콰쾅!!
“저 미친!!”
[정문 록이 파손되었습니다. 긴급한 수리를 요합니다.]
시스템의 무미건조한 목소리와 함께 육중한 정문이 천천히 열린다.
공성전으로 이끌기 위해 가장 중요한 시설이 너무나 간단히 파괴되자, 딘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민호, 카츠미, 페이진은 열린 문틈을 통해 유유히 바깥으로 걸어 나갔다.
“할 수 있겠어? 무서우면 빠져도 되고.”
카츠미의 사인검에서 붉은 에너지가 뿜어져 나온다.
사인검은 피와 화약의 냄새에 반응하며 먹잇감을 찾고 있었다.
피에 굶주린 검은 설사 공중에 떠 있는 새라 해도 기어코 그 목을 찢어발길 것이다.
“누구한테 하는 말인지 모르겠는데? 당주야말로 뒤로 물러나 있어.”
페이진이 히죽 웃으며 탄창 없는 권총을 꺼내 들었다.
당장 눈에 띄지는 않지만, 거대한 성채를 무너뜨릴 만한, 단 하나의 작은 틈새.
사냥꾼의 눈은 이미 순양함의 미세하게 뒤틀린 균형을, 약간이지만 기울어진 양 날개의 축을 파악하고 있었다.
“입으로들 싸울 건가?”
민호가 짧게 한마디 내뱉더니, A.D 단검을 움켜쥐고는 흙먼지 속으로 잠깐의 눈부심과 함께 사라졌다.
“하여튼 재수 없는 자식.”
페이진이 쓴웃음을 지으며 총구를 공중의 순양함으로 겨누었다.
“뭐야, 저건? 설마 지금 정문을 연 거야? 항복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포르투나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포트리스가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당시, 포르투나는 깜짝 놀라 한동안 할 말을 잃었다.
황무지 한가운데에서 이제껏 본 적 없는 기술력으로 은폐하고 있던 요새가 나타났으니 놀라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백련의 이야기를 듣고 신기루라도 본 모양이라며 코웃음을 쳤지만, 정작 눈앞에 나타난 요새는 그의 상상을 아늑히 넘어서고 있었다.
그렇게 모습을 드러낸 요새의 정문이 갑자기 열린 것이다.
“세 사람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항복이라도 하려는 건가 보군.”
하긴 당연한 일이었다. 제아무리 잘 만든 요새라 해도 순양함 세 척을 버텨 낼 수는 없다.
순양함마다 20여 대의 전투기와 수만 발에 이르는 포탄들이 비축되어 있으니, 마음만 먹으면 고작 요새뿐만 아니라 49구역 전체를 초토화해 버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포르투나는 이쪽으로 다가오는 셋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마음에 안 들어.”
지금 포르투나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한 승리가 아니었다.
닐스 따위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전공, 부대의 위력을 확실히 과시할 수 있는 전공이었다.
그러니 어설프게 항복하는 얼간이들의 모습이 썩 달가울 리 없었다.
“항복을 받자마자 최소한의 주둔 병력만 남겨 두고 당장 여길 뜬다. 다른 함선에도 그렇게 전해 둬.”
“네, 알겠습니다!”
포르투나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는 와중에도 느긋하게 의자에 몸을 기댔다.
어차피 처음부터 이곳까지 온 것은 반란을 일으킨 메타휴먼들의 회수와 패잔병 잔당의 퇴치 목적이었다.
버려진 황무지에 오래 머물러 좋을 게 없었다.
그러나 잠시 뒤, 어처구니없는 보고가 이어졌다.
“사령관님, 전방에서 다가오던 셋 중 한 명의 모습이 사라졌습니다.”
“뭐?”
“나머지 두 사람 모두 무기를 꺼내 든 상태입니다.”
“하!”
포르투나는 어처구니가 없어 그만 코웃음을 치고 말았다.
“진심인가? 정말 싸워보겠다고?!”
포르투나는 설마 세 사람이 순양함을 격추시킬 의도로 나왔을 리는 없다고 여겼다.
“‘고귀한 희생’은 부대원의 사기를 올리기도 하지. 고전적인 방식이야. 하지만… 압도적인 화력 앞에서의 개죽음이라면 어떨까?”
그 속셈을 짐작한 포르투나가 냉정한 말투로 지시했다.
“소이탄을 쓴다.”
“네!”
소이탄은 고작 셋밖에 되지 않는 적에게 쓸 만한 무기가 아니었다.
그러나 소이탄을 사용한다면 거대한 불꽃과 더불어 처참한 죽음을 연출할 수 있다.
바로 그때였다.
“아악!”
“우와아악!!”
함선 어딘가에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갑작스러운 소란에 포르투나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뭐야? 감히 어떤 놈이 사령선에서 목소리를 높여!”
그러나 바로 그 순간.
탕!!
함선 내에서 명백한 사격음이 들려왔다.
그제야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은 포르투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단순한 다툼이나 오발이 아니다.
내부 반란이거나 숨어 있던 자객의 습격. 어느 쪽이든 함선 내부에 적이 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했다.
주변에 도열해 있던 호위병들이 황급히 그런 포르투나의 곁으로 몰려들었고, 어두운 복도 쪽을 향해 총을 겨누었다.
바로 그때, 복도 쪽에서 갑작스레 빛이 뿜어졌다.
“젠장, 어떤 멍청이가 섬광탄을……!”
포르투나는 눈부심으로 인해 팔을 들어 올려 눈앞을 막은 채 목소리를 높였다.
“다들 동요할 거 없어! 소이탄은 준비됐나?”
“예, 준비되었습니다!”
“지금 당장 투하…….”
“그건 곤란한데.”
순간, 음산한 목소리가 사령관의 귓가에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사령관의 목에 작은 단검이 겨눠졌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