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끝의 시작 (7)
셸터의 기지, 포트리스는 오랫동안 한산하고 고요했다.
관리자 녹스만이 홀로 남아 포트리스를 관리할 당시에는 깡통 로봇들만 복도 곳곳을 돌아다니며 의미 없는 청소를 계속했다.
알렉세이 딘과 기계병단이 들어온 뒤에도 포트리스는 여전히 조용했다.
최근 용병대장 백련의 습격으로 곤욕스러운 상황도 있었지만, 대개는 평온했다.
하지만 지금, 포트리스에는 몇 차례에 걸쳐 수백에 이르는 인파가 연달아 밀려 들어왔다.
그중에서도 가장 부산한 것은 포트리스 입구 쪽에 마련된 임시 진료소였다.
“화, 환자 상태가 심각해요. 빨리 수술실로. 내가 곧 갈게요.”
“여기 좀 도와주게! 진통제가 필요하겠어!”
메타휴먼 이네사는 인간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말을 더듬는 와중에도 환자들을 살리기 위해 움직였고, 사제들이 그런 이네사를 도왔다.
“치료실이 다 찼습니다!”
“임시로 방 몇 개를 더 만들어 놨어. 상처가 그렇게 심하지 않은 사람들은 일단 임시 치료실로 옮겨. 내가 가서 직접 치료한다.”
치유 능력을 가진 흑가면의 지휘에 따라 도영을 비롯한 레지스탕스 대원들이 바삐 움직였다.
“식량은 아직이야? 물도 좀 더 필요해!”
깡통 로봇들이 부산스럽게 물과 식량을 조달해 왔고, 페이진은 기아 상태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환자들의 입에 물통을 물려 주었다.
“현태, 너도 빨리 뭐든 좀 먹어.”
“…큰형님.”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하자.”
페이진은 얼굴이 반쪽이 되어 버린 동생 현태를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다.
현태를 비롯한 형제들이 그동안 무슨 일을 겪었는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들의 상처투성이 몸뚱어리가, 부어오른 눈과 터져 버린 입술, 쩍쩍 갈라진 피부가 모든 걸 말해 주고 있었다.
“살아 있으면 된 거야, 살아 있으면.”
페이진은 그렇게 되뇌며 한 명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부산히 움직였다.
한편, 얼마간 페이진의 모습을 바라보던 현태의 얼굴에 비장한 각오가 떠올랐다.
포트리스 내부 작업실.
문을 활짝 열어젖힌 장 영감은 고물이 되어 버린 바이크들을 손보며 혀를 차고 있었다.
“젠장, 이런 고물들을 어떻게 타고 다닌 거지?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게 용하군!”
그렇게 투덜대면서도 펑크 라이더들의 바이크를 정비하는 장 영감의 손은 쉴 틈이 없었다.
제법 장비를 손볼 줄 아는 민호가 그런 장 영감에게 힘을 보탰다.
“실린더 남는 거 없습니까?”
“실린더? 보면 몰라? 없어! 볼트, 너트에서부터 엔진까지 전부 부족하다고!”
“일단 급한 것부터 말해 줘, 영감!”
“젠장, 창고에 가면 오일과 철사들이 좀 있을 거다. 그거라도 가져와!”
“알았어!”
라비는 장 영감의 지시에 따라 바삐 움직였다.
마음속으로는 수술을 앞둔 매드독의 안부를 걱정하고 있었지만, 오히려 그 걱정을 잊기 위해 더욱 열심히 움직였다.
“라비, 같이 가!”
앨리스와 지우 역시 그런 라비를 쪼르르 따라갔다.
“세상에… 대체 여긴 뭐지?”
많은 이들이 바삐 움직이는 와중에 몇몇 펑크 라이더들이 몰려다니며 포트리스 곳곳을 둘러보고 있었다.
난폭하게 바이크를 타고 다니던 이들이지만, 이제 고작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소년들이다.
그런 소년들의 눈에 포트리스는 그저 신기해 보일 뿐이었다.
“이런 곳이 있었다니, 끝내주잖아?!”
평소 바이크를 타고 누비던 황무지 한가운데에 성채처럼 보이는 요새가 갑자기 나타났다.
그리고 그 요새 안에는 온갖 기괴해 보이는 장치들이 가득했다.
호기심을 참지 못한 아이들은 정신없는 인파 속에서 슬쩍 벗어나 포트리스 외벽 곳곳을 구경했다.
끼리릭.
그런 소년들을 향해 렌즈들이 자동으로 집중된다.
“어라, 이건 또 뭐야?”
호기심을 견디지 못한 녀석 하나가 반짝거리는 렌즈를 향해 다가갔다.
렌즈 아래쪽으로 붉은 불빛이 깜빡이는 모습을 본 그가 천천히 손을 내뻗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거나 만지지 마, 죽고 싶지 않으면.”
알렉세이 딘이 굳은 얼굴로 다가오고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화들짝 놀란 소년이 손을 거두자, 그를 향한 렌즈들이 다시 원위치로 돌아간다.
“시끄러운 소리 내지 말고, 말을 조심해. 경고하는데, 여기서 함부로 행동한다면 너희 목숨을 지켜 줄 수 없어.”
딘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더럭 겁을 집어먹은 소년들이 몸을 웅크렸다.
“다들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데, 너흰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우, 우린 그저 근방 수색을…….”
“헛소리 집어치워. 여긴 내 구역이야. 너희 폭주족들 따위가 범접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니란 말이야.”
소년들은 겁에 질린 얼굴로 차갑게 빛나는 딘의 붉은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조심하는 게 좋아. 너흰 우리에게 그리 반가운 손님이 아니거든.”
딘이 눈을 가늘게 뜬 채 경고하자, 소년들은 얼굴을 붉히며 허겁지겁 자리를 떠났다.
“하아…….”
딘 역시 치졸한 협박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반드시 필요한 경고였다.
‘왜 인간들이 여기에 들어온 거지?’
‘저자들에게 속아선 안 돼, 딘. 우리를 해칠지도 몰라.’
‘인간은 잔인하고 비정한 자들이야. 언젠가 우리를 모두 없애려 들 거야.’
‘전부 쫓아내자. 지금 당장.’
패닉에 빠진 기계병단의 신호들이 끊임없이 딘을 자극했다.
잠수함처럼 몸을 숨긴 기계병단은 카메라로 주민들을 경계하고 있었다.
‘다들 진정해. 별일 없을 테니까.’
기계병단에게 있어 인간이란 그저 공포와 증오의 대상일 뿐이었다.
패잔병들을 받아들일 때부터 불안해하던 그들은 수천에 이르는 주민들이 포트리스에 진입해 들어오자, 그야말로 공포에 질려 버렸다.
하지만 과연 누가 그런 기계병단을 탓할 수 있을까.
그들은 메타휴먼으로 제조되어 인간에게 온갖 학대를 경험했다. 그러다가 결국 인형 병동에 버려진 채 치료조차 받지 못하고 죽어 갔다.
그리고 딘 역시 그런 병동에서 눈을 떴다.
사실 그 누구보다 이방인의 존재에 거부감을 느끼는 이는 알렉세이 딘 본인인지도 몰랐다.
바로 그때, 뒤쪽에서 누군가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딘.”
카츠미가 조심스럽게 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잠시 얘기를 했으면 하는데…….”
“감동적인 상봉은 끝난 건가?”
“…그래.”
자켄에게 그동안의 상황을 보고받은 카츠미의 얼굴에는 어두운 그늘이 져 있었다.
“잠시 당신과 이야기를 하고 싶어.”
“…….”
“당신에게 신세를 지고 있다는 걸 알아. 우리도 언제까지나 이곳에 숨어 있을 생각은 없어.”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딘 역시 주변에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기계병단의 신호를 언제까지나 무시할 수 없었다.
“당신과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
그러나 이들은 결코 빈손으로 포트리스를 나서지 않을 것이다.
딘은 쓴웃음을 지으며 카츠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내게 요구할 게 많은 모양이군.”
“…….”
무기와 식량, 이동 수단, 어쩌면 기계병단의 무력까지.
염치를 모르는 인간들은 언제나 메타휴먼들에게 더 큰 희생을 강요했다.
센트럴이 주변 구역을 대하는 태도와 조금도 다를 게 없었다.
“들어가서 자세히 듣지.”
딘은 굳은 얼굴을 한 채 앞장서서 포트리스 회의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카츠미는 붉어진 얼굴로 그런 딘의 뒤를 따랐다.
* * *
“폭격 후, 두 달이 넘게 지났어.”
알렉세이 딘과 마주한 카츠미는 회의실에 앉아 그동안 벌어진 일들을 중언부언 늘어놓았다.
“지난달 남부에서 올라온 능력자들이 센트럴 부대와 충돌했고…….”
메데이아와 센트럴 군단의 충돌, 그리고 메데이아의 패배.
그 뒤, 사제들은 뿔뿔이 흩어지거나 남부로 다시 돌아가 버렸다.
“그 싸움 직후, 센트럴 부대는 서부로 병력을 움직였어. 50구역이 있는 동부가 아닌 서부로 말이야.”
딘은 별다른 대꾸 없이 카츠미의 말을 그저 가만히 듣고 있었다.
“센트럴은 처음부터 전 대륙을, 전 구역을 통제하기 위해 센트럴 오더를 이용했어. 우리는… 처음부터 제물이었던 거고.”
“그래서?”
그러나 더는 듣고만 있을 수 없었다.
아니, 듣고 있는 의미가 없었다.
“내가 그런 이야기를 왜 들어야 하지?”
“…….”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야.”
49구역에 진입해온 센트럴 군단은 포트리스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더불어 현재 포트리스의 멤브레인 기술이 있는 이상, 외부에서 포트리스의 존재를 찾기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우리들은 너희 인간들의 전쟁에 끼어들지 않을 거다.”
딘은 기계병단과 함께 오랜 시간을 보내면서, 50구역 메타휴먼들을 구해 내면서 그들이 가진 인간에 대한 분노와 두려움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인간과 메타휴먼은 결코 함께 싸울 수 없다.
“너희에게 이 공간을 무한정 허락할 마음도 없어. 부상자들의 치료가 끝나고 나면 여기서 나가라.”
“딘…….”
“지난번에 너희를 도운 건 우리에게 그만한 의리를 보였기 때문이야. 우릴 도와서 코카서스 놈들과 함께 싸워 줬지.”
“…….”
“하지만 비공정과 녹스까지 내주면서 빚은 모두 갚았어. 아닌가?”
카츠미가 입술을 깨문 채 고개를 숙였다.
“연합이 메타휴먼들을 학대하고 테러까지 저질렀음에도 참았어. 센트럴의 편에 서서 놈들을 공격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까지 하진 않았지.”
그건 어디까지나 의리 때문이었다.
태일과 민호, 카츠미, 페이진 일행과의 인연 때문에 연합을 적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딘을 적대한 건, 메타휴먼을 혐오한 건 연합 쪽이었다.
“연합의 패배 뒤, 우린 패잔병과 부상병들을 구조했지. 그렇게 구조받은 녀석들 중 일부는 우릴 배신자라고 비난하더군.”
바로 그때였다.
“자, 잠깐 기다려 주십시오!”
회의실 문이 열리며 한 사내가 다짜고짜 회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뭐지?”
퀭한 얼굴에 앙상하게 마른 팔다리는 언제 쓰러질지 모를 만큼 위태로워 보였다. 차림새를 본 딘이 눈을 가늘게 뜬 채 사내를 바라보았다.
“이번에 가이가 구조해 왔다는 녀석이군.”
“페이진을 따르던 사람이야.”
카츠미 역시 몇 차례 본 적 있는 얼굴이었다.
“혀, 현태라고 합니다!”
현태는 곧장 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갑작스러운 현태의 행동에 당황한 딘이 눈살을 찌푸렸고, 카츠미느 반사적으로 검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이게 무슨 짓이지?”
“50구역 메타휴먼들을 공격했던 건… 그건 전부 제가 벌인 일입니다.”
현태는 이마를 땅에 박은 채 말했다.
“가이 씨를 공격한 것도 접니다. 전부 제가 그랬어요.”
깊은 적막이 회의실을 맴돈다.
침묵을 깬 이는 다름 아닌 딘이었다.
“왜 그랬지?”
“전 메타휴먼을…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이 아니면서 사람처럼 행동한다고,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 모습이 싫었습니다.”
“싫었다고?”
“몰랐습니다. 메타휴먼도 고통을 느낀다는 걸, 두려움을 느끼고 슬퍼할 수 있다는 걸… 인간과 다르지 않다는 걸 몰랐습니다!”
“몰랐다라… 그게 전부란 말이지?”
딘은 허탈한 목소리로 그런 현태의 말을 되뇌었다.
“모두 다 제 탓입니다. 간부님들은 메타휴먼도 모두 우리와 같다고, 동료라고 말했지만, 제가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저 하나만 처벌하고 부디 저희를… 도와주십시오.”
현태를 무겁게 짓누른 것은 다름 아닌 죄책감이었다.
자신의 혐오가, 자신의 비뚤어진 판단이 연합의 모든 것을 좌초시켰음을 알았다.
자신을 구해 준 가이가 자신과 다를 바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아니, 도리어 자신보다 훨씬 나은 품격의 존재임을 알았다.
자신으로 인해 간신히 생존한 이들이 버림받는다는 결과만큼은 결코 견딜 수 없었다.
“네 비행을 정말 아무도 몰랐나? 정말 너 혼자 했냐고.”
“그, 그건!”
“너와 함께한 친구들이 있었을 거야. 그 친구들이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었을 리도 없겠지.”
“아닙니다. 그 녀석들도 전부 제가……!”
“연합의 많은 이들이 네 비행을 알았겠지. 너희들의 테러는 50구역을 출발하던 그날부터 메타휴먼들이 탈출할 때까지 계속되었으니까. 그럼에도 말리지 않았어. 널 처벌하지 않았지.”
가만히 듣고 있던 카츠미는 입술을 깨문 채 한 손으로 눈을 감쌌다.
처음에는 알렉세이 딘을 원망했다.
중요한 전투를 앞두고 메타휴먼을 모조리 빼돌렸으며, 기계병단의 투입까지 거부했으니까.
하지만 자켄으로부터 구체적인 사정을 전해 들은 뒤, 진실은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알았다.
메타휴먼들을 학대하고 파괴한 가해자는 오히려 연합 쪽이었다.
연합의 패배는 결국 자멸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카츠미는 딘의 지원을 자신했다.
과거, 그와 형성했던 약간의 친분을 과신했다.
뿌리 깊은 증오와 적대를 너무나 가볍게 생각했다.
“제발, 제발 저를 처벌하고 나머지는 용서해 주십시오. 제발…….”
“그건 내가 결정할 사항이 아니야.”
현태의 자기 고백을 비롯해 지금 포트리스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대화들은 전부 포트리스 곳곳에 숨은 기계병단에 의해 수집되고 있다.
포트리스 전체는 기계병단의 감시하에 있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기계병단은 바로 지금, 이 순간까지도 외부에서 들어온 49구역 주민들과 연합 패잔병들을 적대하고 있었다.
‘우리의 거처를 빼앗으려 하고 있어.’
‘우리를 이용할 생각뿐이야. 늘 그랬듯.’
‘우리는 결코 인간을 위해 싸우지 않을 거야. 인간에게 이용당하지 않을 거야.’
딘은 무릎 꿇은 현태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우리들에게 이만한 힘이 없었다면, 이만한 기지가 없었다면, 과연 네가 사과했을까? 내 앞에 무릎을 꿇었을까?”
카츠미도, 현태도 대답하지 못했다.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여길 떠나. 너흰 용서받지 못해.”
현태는 이마를 땅에 찧으며 흐느꼈고, 카츠미는 힘없이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바로 그때, 회의실 원탁의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정체불명의 비행체 접근 중…….]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