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188화 (188/220)

188화 끝의 시작 (6)

49구역 주민들이 모인 방공호는 허술하기 이를 데 없었다.

수비병들이 교대로 방공호 근처 임시 초소를 지키는 게 고작이었고, 펑크 라이더들이 가끔 근처 순찰을 다니고 있었다.

대부분은 그럴듯한 장비조차 없이 둔기나 파이프 따위로 무장하고 있다.

딘은 별안간 원시시대로 떨어진 듯 얼빠진 얼굴로 물었다.

“너희, 총기조차 없는 거냐? 방공호를 몽둥이로 지킨다고?!”

“속 편한 소리 하는군. 이런 땅에서 총기를 어떻게 구할 수 있겠어?”

페이진의 말을 듣고 있자니,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폭격기 몇 대면 순식간에 끝장나겠군.”

“재수 없는 소리 지껄이기는.”

“됐어, 페이진. 틀린 말도 아니잖아.”

카츠미는 페이진을 제지한 뒤, 딘을 바라보았다.

“당신이 보기에는 한심해 보이겠지만, 우리로서는 이게 최선이었어.”

앨리스가 카츠미를 올려다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쩌다가 당주님이 여기에 있게 된 거예요?”

“연합 괴멸 소식을 들은 직후, 곧장 49구역에 왔어. 하지만 이미 모든 게 끝난 뒤였지.”

전쟁이 끝나 버린 황무지에는 시꺼멓게 타 버린 시신들만이 가득했다.

전쟁터 한가운데 정체불명의 괴물 나무가 자라난 가운데, 순양함과 센트럴의 대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부하들의 시신을 보고 눈이 뒤집힌 페이진은 당장에라도 센트럴 부대를 습격하려 했다.

“…무모한 일을 벌일 수는 없었어.”

민호와 카츠미는 그런 페이진을 뜯어말렸고, 살아남은 잔존 병력이라도 찾기 위해 조심스럽게 근방을 수색했다.

악몽에서나 볼 법한 참상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시신이 너무 많아 미처 수습조차 할 수 없었다.

“무슨 이유인지 센트럴 놈들, 괴물 나무 근처에 매미처럼 달라붙어 있더군.”

“주둔 중에 놈들이 근방 포인트들을 약탈했어.”

49구역에서 포인트는 온갖 물건을 구할 수 있는 만물상이자, 바이크를 고칠 수 있는 정비소였고,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충전소였다.

뿔뿔이 흩어져 유목민처럼 살아가는 49구역 주민들에게 있어 포인트는 오아시스와 같은 장소였고, 생존과 직결된 것이었다.

그러나 센트럴 부대는 주둔 중 포인트로부터 온갖 물품과 식량을 징발해 갔다. 아니, 약탈했다.

센트럴에게 모든 것을 무상으로 내놓아야 하는 의무, ‘센트럴 오더’에 근거한 약탈이었다.

이미 동부 통행 열차가 멈춰 서면서 생존을 위협받던 49구역 주민들에게는 사실상 사형선고와도 같은 행위였다.

“멍청한 펑크 라이더 무리가 놈들에게 덤볐다가 몰살당했지.”

“…말도 안 돼.”

라비가 입술을 깨물며 중얼거렸다.

라비 역시 한때는 펑크 라이더로 지내며 황무지를 누볐고, 포인트에서 바이크를 정비하기도 했다.

그랬기에 센트럴이 저지른 짓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나중에 가서는 아예 포인트를 상대로 작전행동을 벌인 거 같더군. 도적 떼처럼 전부 빼앗아 간 거야.”

민호는 침울한 표정으로 방공호 내부에 크게 펼쳐진 갈색 천막을 바라보았다.

“지난 두 달 동안 우리는 센트럴 놈들의 눈을 피해 생존자들을 모았어. 49구역 주민들도 있고… 연합 병력도 있었지.”

“잠깐. 센트럴 주력군은 얼마 전 떠난 걸로 아는데…….”

딘이 뭔가 물으려는 찰나, 천막 안에서 웬 노인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래, 맞네. 그들은 전부 떠나 버렸지.”

노인이 느릿느릿 말하며 딘 앞으로 다가온다.

“어………?”

노인의 얼굴을 본 라비가 다소 놀란 듯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곧 고개를 내저었다.

노인은 딘을 똑바로 바라보며 담담히 말을 이었다.

“센트럴 병사들은 이곳 주민들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들을 전부 쓸어가 버렸다네. 전쟁은 이제부터 시작인 게야.”

노인의 목소리는 마치 꿈을 꾸듯 몽롱했고, 흰옷을 입은 모습은 범접할 수 없는 느낌을 주었다.

“…당신은?”

“남대륙에서 온 사제님이야. 의술에 밝아서 지금은 우리를 도와주고 계셔.”

카츠미가 대신 대답하며 노인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선생님, 부상자들은 어떤가요?”

“노력 중이지만, 약품이 부족하네. 진통제가 특히 부족해.”

노인은 짧게 대답한 뒤, 일행을 천막 안으로 안내했다.

“무, 물 좀!”

“여기 붕대 좀 더 가져와!”

“젠장, 어디 진통제 남은 거 없어?”

부상자들로 가득한 천막 안은 그야말로 지옥과 다름없었다.

피 냄새와 약 냄새, 그리고 살이 썩어 가는 냄새들이 마구 뒤섞여 잠시도 버티기 힘들 지경이었다.

“사, 살려 줘!”

“아악! 악!!”

“참게! 부패한 부위를 도려내지 않으면 자네 온몸이 썩어 버릴 게야!”

애원하는 목소리와 고함 소리.

소수의 치료사들은 마취조차 없이 환자에게 응급조치를 진행하고 있었다.

딘은 불현듯 라비와 지우, 앨리스를 내려다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셋 모두 텐트 안의 끔찍한 상황에 바짝 얼어붙어 있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아직 어린 녀석들이 볼만한 장면은 아니었다.

딘은 라비에게 조용히 중얼거렸다.

“라비, 친구들이랑 밖에 나가 있어.”

그러나 바로 그때, 웬 목소리가 들려왔다.

“라비! 라비 맞지?!”

침대에 누워 있던 누군가가 목소리를 높였다.

웬 소년이 놀란 눈으로 라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침상에 누운 소년에게는 오른 다리가 없었다.

“매드독!! 너, 맞지?!”

라비가 소년의 병상 앞으로 다가갔다.

“무사했구나, 라비! 걱정 많이 했는데.”

“걱정은 누가 누굴! 이 꼴로…….”

“별거 아냐. 헤헤, 멋있는 무쇠 다리라도 붙여 볼까 생각 중이야. 장 영감님이 해 줬으면 좋겠는데, 무사하시지?”

“바보야, 영감이 무슨 재주로 신체 개조를 해? 그리고 넌… 이 꼴이 되어도 웃음이 나오냐?”

“그러게. 당분간 너랑 바이크 경주도 못 하겠다. 하긴 멀쩡할 때도 너한테 이긴 적은 없었지만 말이야.”

라비가 당장에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로 매드독의 다리가 있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정작 매드독은 힘겹게 웃음을 지으며 라비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런 표정 짓지 마, 라비. 어쨌든 살아 있잖아.”

“…다른 애들은?”

“C포인트가 습격당했을 때… 대부분 목숨을 잃었어.”

억지로나마 웃음 짓던 매드독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다들… 도망치라고 했는데… 우리들만으로는 지킬 수 없었는데……. 고릴라도, 사이코도, 베어도… 전부 죽어 버렸어…….”

“아…….”

끔찍한 소식에 라비의 표정 역시 무너져 내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노인이 조용히 말했다.

“수술 도구도, 약품도, 심지어 식량도 부족하네. 이러다 전염병이라도 돌면 전부 죽고 말 게야.”

노인의 시선이 딘을 향했다.

딘은 흐느끼는 라비를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마음을 정한 듯 조용히 입을 열었다.

“포트리스로 가자. 다 같이.”

어쩌면 처음부터 답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쉽게 선택할 수 없었다.

지금껏 인간들에게 벽을 쌓고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공간.

인간의 혐오로 인해 망가진 녀석들이 최후의 순간에 도달한 공간.

그런 공간을 인간에게 개방하겠다는 결정을 어떻게 쉽게 내릴 수 있을까.

그러나 처참한 텐트 안의 광경을 확인한 딘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아니, 이미 백여 명의 생존자들을 포트리스에 거둬들이지 않았던가.

전쟁이 벌어진 이상, 지금까지처럼 오로지 메타휴먼만을 위해 사용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들 서둘러.”

민호와 카츠미는 복잡한 표정으로 딘을 바라보았다.

둘은 이미 포트리스에 발을 들인 적이 있기에 그곳의 자원과 기술력을 잘 알고 있었다.

포트리스에 간다면, 환자들을 살릴 수 있다.

무기를 얻을 수 있으며, 다시금 센트럴과 맞설 수 있을지도 모른다.

결국 둘은 군말 없이 딘의 말에 따라 준비하기 시작했다.

“다들 환자를 차에 태워! 치료를 위해서 장소를 옮긴다! 바이크도 준비하고, 남은 기름은 전부 채워 넣어!”

뻔뻔한 행동이다.

“이동 자체가 어려운 환자들은 비공정에 실어! 이봐, 바깥에 경계병들도 와서 도우라고 해!”

메타휴먼들의 공간에 이 많은 이들을 이끌고 가는 것은 터무니없는 부담일 것이다.

그러나 49구역 주민들까지 책임지게 된 지금, 체면을 생각할 여유 따위 없었다.

그 와중에 단 한 사람, 페이진만큼은 철없이 입을 삐죽이고 있었다.

“…배신자 놈에게 의지해야 한다니.”

“입 닥쳐, 페이진! 빨리빨리 움직여!!”

그러나 카츠미의 성난 목소리에 페이진 역시 바삐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 * *

포트리스 회의실.

자켄과 강필은 침통한 얼굴로 원탁에 그저 앉아 있었다.

앞으로의 거취에 대해 고민해 보았지만, 뾰족한 해결책은 나오지 않았다.

병력 대부분을 잃고, 그나마 포트리스에 도착한 생존자들은 의지를 완전히 상실했다.

복수나 분노도 맞설 힘과 의지가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경험한 이들은 무기를 완전히 손에서 놓았다.

“돌아가는 게 낫겠어. 50구역으로.”

“결국 그렇게 결론을 내린 거군요.”

“우리가 이곳에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돌아간다 해도 결국은 가만히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는 꼴이겠죠.”

자켄의 목소리는 한없이 차가웠다.

그러나 자켄 역시 귀환을 말하는 강필을 비난할 수 없었다.

무슨 명분으로, 무슨 권리로 막을 수 있겠는가.

“그럼… 이 시간부로 연합은 해체군요.”

“히나코!”

강필은 한때 옷가게 마담이던 그녀의 본명을 불렀다.

“날 그렇게 부르지 말아요.”

“당신이 이렇게 고집을 부리는 건… 조직의 리더 자켄으로서 내리는 결정인가?”

“…….”

“아니면 어머니 히나코의 고집인가?”

“당신!”

자켄이 원탁을 내려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가면 사이로 비친 그녀의 눈동자가 살기로 번뜩였다.

“내 뒷조사라도 한 건가요?”

“LAPD가 비록 허술한 조직이긴 하지만, 귀까지 막고 있던 건 아니야. 50구역 뒷골목에서 온갖 정보들을 수집했지.”

“감히……!”

“알마티로 가고 싶었던 거겠지. 당신의 목숨보다 소중한 그녀를 위해서.”

“입 닥쳐!”

자켄은 고함을 내지르며 곧장 검을 뽑았다.

흉측하게 일그러진 피부의 오른손, 그 손에 쥐어진 검끝이 위태롭게 떨린다.

바로 그때, 회의실 문이 열리며 검은 가면의 사내가 회의실로 들어왔다.

한때 하얀 늑대의 부관이던 흑가면(黑假面)은 이제 레지스탕스를 대표하고 있었다.

그는 페이진에게 검을 겨누고 있는 자켄의 모습을 보며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영 좋지 않은 때 온 모양이군.”

“…….”

“그 칼로 목을 베어도 굳이 말릴 생각은 없다만.”

흑가면은 연합이라는 이름으로 묶인 마피아와 LAPD를 동료라 여기지 않았다.

그들 또한 결국 역사 시대의 종말 뒤, 50구역에 침입해 들어온 이방인일 뿐이다.

자켄은 입술을 깨문 채 천천히 검을 거두었고, 강필은 무표정한 얼굴로 흑가면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지?”

“생존자들이 이곳으로 오고 있다.”

“그래, 스무 명 정도 온다는 얘기는 들었어.”

“아니. 그건 30분 전에 온 소식이고.”

늘 잔잔하던 흑가면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조금 흥분한 상태였다.

“49구역 주민들을 비롯해 최소 5백 명 이상의 생존자들이 올 거다.”

“…뭐?”

“그게 선발대라더군. 급한 환자부터 이송 중인 모양이다.”

자켄과 강필은 놀란 표정으로 흑가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생존자들을 이끄는 이들은 민호, 카츠미, 페이진, 그 세 사람이다.”

툭!

자켄의 오른손에 들려 있던 검이 땅으로 땅에 떨어졌다.

“당주님이… 온다고?”

한편, 강필 역시 급히 물었다.

“잠깐, 프랑켄은?! 신태일은? 왜 그 셋만 오는 거지?”

흑가면은 가만히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나도 자세한 사정은 알지 못해. 그저 방금 딘에게 전해 온 소식을 전달했을 뿐이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하지.”

흑가면의 눈동자가 전에 없이 빛나고 있었다.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어.”

전의를 상실한 패잔병 속에서도 복수심을 불태우는 이가 없는 건 아니었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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