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끝의 시작 (3)
제로 구역.
50개 구역이 존재하는 대륙의 바깥, 바다 건너 멀리 떨어진 또 하나의 대륙을 그렇게 부른다.
‘한때 이곳에 거대한 연방 제국이 존재했다지.’
세계대전의 판도를 뒤바꿀 수 있을 정도로 강력했던 국가.
센트럴의 설계자들은 그처럼 강력하게 군림하던 국가를 철저히 파괴했고, 오로지 자신들만을 위한 사유지로 삼았다.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50개 구역 대륙민 대부분은 제로 구역의 존재조차 알지 못했다.
그나마 제로 구역의 존재를 아는 대륙의 부자와 권력자들은 제로 구역을 동경했다.
그리고 지금, 그 땅이 세이드에 의해 철저히 불타고 있었다.
“제, 제발… 제발 살려 주시오!”
설계자들의 후손 중 하나가 세이드의 발밑에서 두 손 모아 빌면서 울부짖는다.
뒤룩뒤룩 살찐 사내의 몸뚱어리에는 가치를 따지기조차 힘든 보석들이 치장되어 있다.
남자의 저택에서 시작된 불길이 빠른 속도로 정원으로 번져 갔다.
정원을 메우고 있던 역사 시대 조각상들은 산산이 부서진 상태였다.
“뭐든, 뭐든 주겠어. 원하는 게 뭐든! 그저 목숨만, 목숨만은……!”
세이드는 사정하는 남자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멀리 보이는 산맥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까지가 네 땅이지?”
“그, 그게…….”
“저 산맥까지인가? 아니면 저 멀리 흐르는 강까지?”
사내는 대답하지 못했다.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걸까, 아니면 대답하기 부끄러운 걸까.
고작 수십 명에 불과하던 센트럴 설계자들은 제로 구역의 거대한 땅을 저희 멋대로 나누어 가졌다,
산과 강이 그들의 경계였으며, 그 안에서 생산되는 모든 것은 오롯이 그들의 소유가 되었다.
꽃 한 송이에서부터… 인간에 이르기까지.
“뒤에 있는 자들은 모두 네가 가진 노예들인 모양이지?”
사내의 뒤편으로는 수백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덜덜 떨며 모여 앉아 있었다.
제로 구역에서 살아가는 노예들은 오로지 자신의 주인만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
자신들이 생산한 모든 것을 빼앗기고, 심지어 몸마저 주인에게 귀속된다.
“모, 모든 걸 내놓겠소. 난 이런 걸 원한 적 없소! 나는 그저 이곳에서…….”
“그래, 넌 그저 태어났을 뿐이지. 네 아비가 물려준 것을 그대로 물려받았을 뿐이야.”
“그, 그렇소! 그러니 제발 목숨만… 목숨만 살려 주시오!”
사내가 허겁지겁 대답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사내.
어쩌면 그에게는 죄가 없을지도 모른다.
“센트럴은 부의 상속을 금지했지.”
하지만 센트럴의 법에 따르면 그는 죄인이었다.
“땅의 사적 소유를 금지했고.”
센트럴의 설계자들이 만든 법이 그러했다.
“노예제 따위 센트럴이 성립되기도 훨씬 전에 사라졌지. 모든 대륙민들의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겠다던 센트럴이잖아. 그렇지?”
“흐윽, 제발……!”
설계자들은 이상 세계를 만들겠다며 대륙민들 앞에서 ‘역사 시대의 종언’을 말했다.
물론 세이드는 처음부터 그런 헛소리를 믿지 않았지만, 제로 구역의 돼지들을 사냥하며 목격한 현실은 상상을 아늑히 넘어섰다.
설계자들은 자신들이 직접 금지한 일들을 제로 구역에서 서슴없이 자행했다.
법 위에 군림하며 귀족이 되어 모든 것을 누렸다.
역사 시대의 종언을 말하던 이들이 중세시대로 돌아간 듯 행동한 것이다.
“정말 웃기는군. 그렇지?”
훌쩍이는 사내를 보며 묻는다.
평생을 증오하고 두려워하던 센트럴이 고작 이 정도에 불과했다.
살찐 돼지 꼴로, 겁에 질린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멍청이.
추하기 이를 데 없는 그 모습이 바로 감춰져 있던 제로 구역의 실체였다.
“하, 하하하… 하하하하하하하!!”
광기 어린 웃음을 토해 낸다.
세이드의 웃음에 겁을 집어먹은 사내가 움찔하며 고개를 거북이마냥 집어넣었다.
뒤에 엎드리고 있던 노예들이 겁에 질린 눈으로 세이드를 올려다본다.
세이드는 웃음을 뚝 그친 뒤, 가만히 바리사다를 들어 올렸다.
“히, 히이익!! 사, 살려 줘!!”
돼지처럼 울부짖는 놈의 머리 위로 바리사다가 떨어져 내렸다.
퍽!
끔찍한 소리와 함께 온 사방에 피가 튀었고, 으깨진 수박 꼴이 된 그의 머리통을 본 노예들이 저마다 비명을 질러 댔다.
“꺄아아아악!!”
“으흐흐흑!!”
그 와중에 노예 중 하나가 세이드의 발밑으로 기어와 바지를 붙잡았다.
“사, 살려 주세요. 저흰 마지못해 저자의 밑에서 일했을 뿐입니다. 저희가 원한 게 아니었어요. 뭐든 하겠습니다. 뭐든!”
노예들은 사내가 먹고 마실 술과 음식을 바쳤을 것이고, 모든 것을 빼앗기며 살았을 것이다.
사내와 몸을 섞은 여자가 있을 것이고, 그중 일부는 사생아를 낳았을 것이다.
그 모든 일이 벌어지는 동안 저항한 이는 없었다.
주인이 죽은 지금 이 순간에조차 그 시신에 침을 뱉거나 기뻐하는 이가 단 하나도 없다.
그저 순순히 복종하며 고개 숙인 채 살았을 뿐.
세이드에게 그런 겁쟁이 따위 아무런 가치도 없었다.
살려 둬 봐야 후환만 될 뿐.
“전부 없애.”
세이드의 지시가 떨어지자 대기하고 있던 대원들이 일제히 병기를 휘둘러 노예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끔찍한 비명이 들려온다.
저택 주변으로 불길이 번져 가는 가운데, 비릿한 피 냄새가 매캐한 연기와 뒤섞였다.
‘이제 스무 명째인가.’
지난 한 달 동안 세이드가 사냥한 제로 구역 주민의 숫자였다.
제로 구역의 드넓은 땅덩어리를 무식하게 나눠 가진 이들은 대륙 곳곳에 숨어들었다.
수만 개의 별장과 곳곳에 숨겨진 벙커들.
그처럼 넓은 제로 구역에서 한 명, 한 명 찾아 없애는 것은 굉장히 수고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정작 이러한 일의 의미와 목적은 희미해졌다.
결국 자신은 무엇을 위해 이 넓은 대륙에서 사냥을 계속하고 있는가.
여기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토록 원하던 순간이다. 센트럴의 심장부를 부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세이드는 조금의 기쁨조차 느낄 수 없었다.
‘제니, 넌 이번에도 날 선택하지 않았지.’
공허한 눈으로 바리사다를 내려다본다.
제니가 떠나면서 세이드는 이 모든 일의 의미를 잃어버렸다.
이번에는 다를 거라 생각했다.
자신을 의지하는 제니를 보면서, 자신의 지시에 따라 태일에게 칼을 찔러 넣는 제니를 보면서 세이드는 안도했다.
“오빠를 배신해서는 안 돼, 아저씨. 아저씨는 지금 놈들 생각대로 놀아나는 거라고요!”
과거, 제니는 자신이 아닌 태일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택했다.
결과적으로 제니의 말이 옳았다. 당시 자신은 센트럴에게 철저하게 이용당했다.
태일의 죽음과 함께 혁명군은 괴멸했고, 모든 것이 끝장났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제니의 한마디를 기억해 냈다.
“내가 누구 편이냐고? 나야 당연히 센트럴 놈들을 엿 먹일 수 있는 사람 편이죠!”
제니가 태일을 따른 이유는 센트럴과 진정으로 싸우고 있던 쪽이 태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니는 세이드의 편이 되어 주지 않았다.
하지만 이쪽 세계에서 다시 깨어날 당시, 제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저씨에게는 아직 할 일이 남았잖아요!”
세이드는 그렇게 한 번 더 기회를 얻었다.
아직 할 일.
그건 당연하게도 센트럴을 부수는 일이었다.
그래서 다시금 눈을 뜬 세이드는 오로지 센트럴을 부수기 위해 움직였다.
기억을 잃은 제니를 데리고 다니며 그녀에게 똑똑히 보여 주었다.
센트럴의 모든 것을 차례로 부수어 나가는 자신의 모습을.
이번만큼은 자신이 옳다고 확신했다.
세이드 자신이야말로 진정한 센트럴의 파괴자였다.
그러나 기억을 되찾은 제니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태일을 따라 떠나갔다.
“어째서지?”
멍하니 중얼거린다.
“이번에는 나잖아?”
센트럴의 심장부를, 제로 구역을 불태우고 있는 자신이 아니라…….
“왜 그 녀석이지?”
센트럴의 고위층을 비호하는, 그놈들과 함께하는 태일을 택했다.
“이번에도 내가 틀렸다는 거냐?”
당연하게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 대신 떠오른 목소리들이 있었다.
“넌 그저 이용당하고 있을 뿐이야.”
태일의 목소리.
“개는 주인을 물지 않는다네. 그러니 허튼짓하지 말게.”
그리고 코르지의 비아냥거림.
전부 헛소리다.
세이드는 지금껏 오로지 센트럴을 부수기 위해, 그 한 가지 목적으로 움직였다.
모두가 부정하더라도, 모두가 매도하더라도 한 사람만큼은 알아줘야 했다.
하지만 그 한 사람, 제니가 세이드를 떠났다.
“난 틀리지 않았어.”
세이드는 입술을 깨물며 바리사다에 흥건하게 묻은 피를 닦아 냈다.
스무 번째 사냥감이 남겨 둔 것들을 불태우는 작업만으로도 한나절이 훌쩍 지나갔다.
일을 마무리 지은 대원 하나가 세이드를 향해 다가왔다.
“대장, 창고 쪽에서 소형 PAV 두 대를 발견했습니다.”
“지금껏 총 몇 대지?”
제로 구역의 돼지들을 사냥하는 와중에 그들의 저택과 경작지 등 모든 것을 불태웠지만, 단 한 가지, 항공기만큼은 차곡차곡 모아 두었다.
“소형 열다섯 대, 중대형 일곱 대입니다.”
“…그 정도면 부족하진 않겠군.”
세이드는 주머니에 통신 장비를 꺼내 들었다.
대륙의 지도가 홀로그램으로 펼쳐진 가운데, 어느 한 지점에 붉은 점들이 반짝거린다.
제니와 켄의 무기에 미리 박아 둔 위치 추적 장치의 신호였다.
‘알마티.’
제니와 켄은 알마티에 있다.
제로 구역을 더 불태우고, 더 많은 이들을 없애 봐야 더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살진 돼지들 따위 언제든 없애 버릴 수 있으니까.
“흩어져 있는 녀석들 전부 집결하라고 해.”
“지금 당장 말입니까?”
“그래, 지금 당장.”
세이드의 지시를 들은 대원이 놀란 듯 되물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이드를 피해 숨어든 돼지들을 찾기 위해 대원 대부분이 제로 구역 곳곳을 뒤지고 있었다.
“대륙으로 돌아간다.”
“지금 돌아간다면 반발이 심할 겁니다.”
지난 한 달 사이, 세이드에 대한 소문이 퍼지면서 인간 이하의 취급을 당하던 노예들이 몰려들었다.
세이드 역시 그처럼 저항하고 분노하는 노예들을 혁명군의 일원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지금 와서 제로 구역을 떠나 버린다면, 복수를 위해 혁명군에 합류한 노예들은 반발할 게 빤했다.
“제로 구역의 파괴라면 언제든 할 수 있어. 아직 남아 있는 돼지들도 전부 없애 버릴 거고.”
그러나 대원은 선뜻 물러서지 않았다.
“대장, 재고해 주십시오. 이 기세대로라면 제로 구역 전체를 손에 넣을 수 있습니다. 제로 구역을 새로운 기지로 삼을 수도 있을 겁니다.”
“그다음은?”
“예?”
“우리의 목표가 또 다른 센트럴을 만드는 건가?”
세이드의 날 선 목소리에 대원이 자세를 바로 했다.
“아닙니다.”
“똑똑히 기억해. 우리는 새로운 센트럴이 되려는 게 아니야. 센트럴을 철저히 파괴하려는 거야. 알았나?”
“…명심하겠습니다.”
세이드는 한숨을 내쉰 뒤, 바짝 얼어붙은 대원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대륙으로 돌아가 센트럴의 마지막 숨통을 끊는다. 지금은 그게 우선이야. 동의하지 않는 녀석들은 여기 남으라고 해. 강제하진 않겠어.”
“그렇게 전달하겠습니다.”
대원은 고개를 끄덕여 보인 뒤, 곧장 명령을 전달하러 갔다.
켄과 제니뿐만이 아니었다.
붉은 눈동자의 대원들 모두 처음과 달리 스스로 사고하고, 서슴없이 감정을 표현하며, 나름의 의견을 내놓는다.
그동안 철저하게 복종하던 대원들이 점차 세이드의 통제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그건 마치 켄이나 제니처럼 세이드를 떠나 버릴 수도 있음을 의미했다.
그러니 보여 줘야만 했다.
‘누가 진정으로 센트럴을 엿 먹일 자인가.’
이번만큼은 제니를 비롯해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 사실을 입증할 것이다.
오로지 세이드 자신만이 진정으로 센트럴을 끝장낼 수 있는 복수자였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