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끝의 시작 (2)
“잘 지냈어, 제인?”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네가 어떻게 여길!”
“레미제라블에 가 보니 네가 없기에.”
그래, 세연은 사라지기 직전 제인에게 분명히 약속했다. 다시 돌아오면 반드시 제인을 찾겠다고.
그리고 세연은 약속을 지켰다.
“이렇게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야. 갑자기 사라져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네가 나를 걱정해? 너도 참, 너야말로 그동안 또 무모한 일을 저지른 건 아니지?”
“하, 하하…….”
제인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볼을 긁적였다.
무모한 일… 하긴 했다. 그것도 여러 번.
인형 극단을 조사하다가 납치당해 인신매매를 당할 뻔했고, 마피아들 간의 싸움을 말리려다가 히트맨에게 당할 뻔했다.
알마티에서는 폭동에 휘말릴 뻔하기도 했지.
“음, 별일 없었어.”
“그래, 네가 무사하면 된 거지.”
세연이 빙긋 웃어 보이자, 그녀의 발밑으로 화사한 꽃들이 피어난다.
한편, 제인이 세연을 반갑게 맞이하는 동안에도 레이는 여전히 권총을 손에 쥐고 있었다.
“당신이… 세연이라고?”
‘한세연’이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레이 역시 들은 적이 있었다.
아니, 한때는 뒷세계에서 가장 뜨거운 이름이었다.
50구역에서 거대 마피아 조직 페노제를 하루아침에 무너뜨린 여자.
그녀가 50구역에 머무르는 동안 마피아들이 전부 그녀의 눈치를 살핀다는 소문까지 돌 정도였다.
하지만 그녀는 오래지 않아 사라져 버렸고, 그녀에 관한 이야기들 또한 거리의 풍문처럼 시들해졌다.
이제 그녀에 대한 이야기는 일종의 괴담처럼 회자될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 나타난 한세연은 어떤가.
‘그 얘기들이 전부 사실이었다는 거군.’
오염된 땅에서 식물을 피워 올리고 온 사방을 덩굴로 메워 버렸다.
그처럼 엄청난 힘을 발휘하는 와중에 지친 기색은 조금도 없다.
‘아니, 오히려 소문보다 더 괴물이야.’
세연의 힘은 고작 마피아 따위가 아니라 전 대륙을 뒤흔들고도 남을 정도였다.
“주변에 경호원들이 대기하고 있었을 텐데.”
“아, 그래. 있었지. 난 혹여나 제인을 노리는 녀석들이 아닌가 했는데.”
세연이 레이 쪽을 바라보며 가볍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 친구니, 제인?”
“아, 응. 학창 시절 친구인데… 지금은 날 도와주고 있어.”
“아하.”
세연이 빙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반가워요. 난 제인의 친구, 한세연이라고 해요.”
“…….”
그러나 레이는 선뜻 그녀의 손을 맞잡을 수 없었다.
카렌의 얼굴에 붉은 눈동자, 여유만만하지만 그 와중에도 온 사방을 메워 가는 그녀의 능력.
언덕 곳곳에 배치해 둔 경호원들 사이를 아무렇지 않게 통과해 오기까지 했다.
과연 이 정도의 능력을 보일 수 있는 존재가 대륙에 몇이나 될까?
긴장감으로 인해 레이의 등 뒤는 이미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그렇게 경계할 필요 없어요.”
세연이 손을 가볍게 튕기자 보랏빛의 커다란 봉우리가 순식간에 피어올랐다.
어느새 활짝 개화한 꽃이 뿌옇게 꽃가루를 뿜어낸다.
“당신의 경호원들은 잠시 재워 놓았을 뿐이에요. 잠이 들 뿐, 딱히 몸에 해로울 건 없죠.”
세연의 설명에도 레이는 경계를 늦출 수 없었다.
“카렌은… 어떻게 된 거지?”
“레이, 많이 닮긴 했지만, 얜 카렌이 아니라 세연이야.”
제인이 고개를 저으며 세연을 변호했지만, 레이의 눈길은 세연의 옷소매를 향해 있었다.
세연의 소매에 끼워진 단추의 문양, 그것은 탈로스 가문을 의미하는 문장이다.
세연 역시 레이의 의구심을 눈치채고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인, 이 몸은 카렌에게 잠시 빌린 게 맞아.”
“뭐?!”
뜻밖의 말에 놀란 제인이 입을 딱 벌렸다.
“그렇게 놀랄 거 없어. 곧 돌려줄 거니까. 난 그저 잠깐 이쪽 세계에 넘어온 것뿐이야.”
“…….”
‘이쪽 세계’.
제인의 눈이 반짝거린다.
메타휴먼에 대한 조사 중 아버지의 서재에 있던 보고서에 비슷한 표현이 있었다.
만약 세연이 잠시 이쪽 세계로 넘어온 것뿐이라면, 어딘가에 또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리고…….
“태일 씨도 네가 있던 세계에서 넘어온 거야?”
“태일이를 만났니?”
“그래. 널… 찾고 있었어.”
몇 번이나 태일의 도움을 받았고, 자신의 경호원으로 일해 주기까지 했다.
그러나 태일은 줄곧 애타게 세연을 찾고 있었다.
“…그랬구나.”
문득 세연의 얼굴에 쓸쓸함이 떠올랐다.
태일에 대해 더 물으려던 제인은 그런 세연의 표정을 보고 말을 삼켰다.
“태일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니?”
“마지막으로 본 건 알마티였어. 그 뒤에 의회 쪽으로 간다고는 했는데.”
“알마티……. 그렇구나.”
세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고개를 돌려 검을 탑을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얼마간의 침묵 뒤, 세연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제인, 이 탑을 찾아온 이유가 뭐지?”
“그건…….”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누구도 찾지 않는, 50구역 구석의 버려진 탑.
그러나 제인에게 이 탑의 의미는 남달랐다.
세연과 태일. 두 사람이 50구역에 나타나던 날, 처음으로 발견된 장소는 바로 이곳, 붉은 언덕이었다.
세연은 제인과, 태일은 앨리스와 처음 이곳에서 만났다. 종적도, 신분도 불확실한 이들의 등장.
게다가 두 사람 모두 대륙의 상식과 동떨어진 인물들이었다.
“우린… 메타휴먼에 대해 조사하고 있었어.”
“메타휴먼…….”
“당신처럼 붉은 눈동자를 가진 이들이지. 드림 코퍼레이션에서 만들어진.”
“레이!”
지나치게 노골적이고 무례한 표현에 놀란 제인이 외쳤지만, 레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세연을 노려보았다.
‘탈로스 가문, 이 미친 자들이 후계자인 카렌까지 실험 도구로 사용한 건가?’
카렌의 내부에 새로운 인격이 생겨났다는 것 이외에 지금의 상황을 이해할 다른 방법은 없었다.
그러나 제인은 레이의 말에 그리 화가 난 기색이 없었다.
그저 담담히 설명할 뿐이다.
“유감이지만, 난 드림 코퍼레이션에서 만들어진 인격체가 아니야. 아니, 애당초 메타휴먼이라는 존재들은 여기서 만들어진 게 아냐.”
세연이 천천히 검은 탑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그건……!”
째깍, 째깍, 째깍…….
낡은 회중시계.
태일이 갖고 있던 것과 같은 물건이었다.
회중시계 안의 초침이 비정상적인 속도로 돌고 있었다.
“우리는 다른 세계에서 넘어왔어. 평행 세계에서 온… ‘도플갱어(Doppelganger)’야.”
같은 공간, 같은 시간에서 살아가는 또 다른 자신.
“이쪽 세계의 모든 것을 훔치기 위해 보내진 존재들이지.”
세연의 설명이 끝나자, 검은 탑에서 묘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째깍째깍…….
회중시계의 초침 소리와 공명하며 검은 탑이 희미한 빛을 뿜어낸다.
“이건 대체?!”
그리고 잠시 뒤, 탑의 전면에 동그란 원이 생겨났다.
마치 어딘가로 통하는 문처럼 원 안쪽으로 무언가가 언뜻 비친다.
황량한 대지의 모습이 보이더니, 잠시 뒤에는 불타고 있는 저택의 모습이 비쳤다.
“저기는?!”
곧이어 장면이 바뀌며 거대한 도시의 모습이 나타났다.
스스스스…….
그 와중에 땅에서 피어오른 나무줄기들이 원으로 향하는 발판을 만든다.
세연은 그 줄기에 발을 올리며 뒤돌아 제인과 레이를 바라보았다.
“이제부터 난 모든 걸 원래대로 되돌릴 거야.”
레이는 그 터무니없는 광경을 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대체 뭘 어쩔 생각이지?”
“연결된 세계를 다시 분리할 거야.”
세연은 그 말을 끝으로 탑에 만들어진 문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눈부신 빛과 함께 원형 문에 닿은 세연의 모습이 사라진다.
그 모습을 본 제인이 마치 홀린 듯 세연의 뒤를 따라 문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레이는 다급히 그런 제인의 팔을 붙잡았다.
“자, 잠깐 기다려!”
문 너머에 비치는 건물들.
어느새 문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레이에게도 꽤 익숙한 곳이었다.
그곳은 한창 재건 중인 알마티였다.
“저 여자를 따라가는 건 너무 위험해! 대체 어떻게 저 여자를 믿고……!”
“레이, 난 모든 비밀을 알기 위해 여기까지 왔어. 그런데 여기서 멈추라고?”
“저, 적어도… 적어도 경호원들이 도착하기 전까지만 기다리자. 너 혼자서는 절대 안 돼!”
레이가 다급히 말렸지만, 제인은 가만히 고개를 내저었다.
세연이 만들어 낸 문은 천천히 흐릿해지고 있었다.
“난 내 눈으로 직접 봐야만 해. 그리고 알아야 해. 아버지가 왜 그렇게 끔찍한 일을 저질렀는지.”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고, 불타 사라졌다.
테러와 혼란, 그리고 전쟁.
제인 역시 최근 벌어진 끔찍한 소식들을 모두 전해 들었다.
그 모든 일의 책임은 코르지 브레드필드, 즉 자신의 아버지에게 있었다.
과연 아버지의 죄악으로부터 딸인 자신은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제인에게는 그에 대해 알아야 할 의무가 있었다.
“제인, 난 네 아버지에게 널 부탁받았어!”
제인은 세연이 만들어 낸 문 앞에 선 채 NineD 노트를 꺼내 들었다.
아버지의 선물이지만, 감시의 목적임을 알았기에 여정 중 단 한 번도 켜지 않았다.
그런 통신 장치의 전원을 켠 뒤, 천천히 아버지의 ID를 입력했다.
뚜루루루루… 뚜루루루루…….
“…….”
받지 않는다.
마피아와 엮였다는 이유로 딸에게 히트맨을 보낸 아버지.
전투가 일어나기 직전, 딸을 납치하도록 지시한 아버지.
오래도록 감금해 둔 아버지.
조금의 온기조차 없던 아버지였다.
“아까 잠시 나타난 그 저택, 꽤 낯이 익었어.”
불타고 있던 그 저택은 제로 구역의 건축물이었다. 늘 안전하다고 여겨지던 제로 구역의 저택이 불타고 있다면, 그건 무엇을 의미할까?
“아버지에게도 무슨 일인가 벌어진 거지?”
“…….”
레이는 입술을 깨문 채 그런 제인을 바라보았다.
전 대륙을 파괴와 광기 속으로 밀어 넣은 코르지 브레드필드.
그러나 그의 행위는 자신이 머무르는 제로 구역까지, 그 자신까지 위태롭게 만들었다.
“레이, 넌 따라오지 않아도 돼. 50구역까지 안전하게 도착했으니, 네 임무는 성공적으로 완수한 거야.”
“제인!”
“그동안 고마웠어.”
제인은 서글프게 웃어 보인 뒤, 천천히 세연이 만들어 둔 문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렇게 제인의 모습 역시 문 속으로 금세 사라져 버렸다.
그 모습을 본 레이는 이마를 부여잡은 채 고개를 숙였다.
“이런 젠장……!!”
경호원들은 누구 하나 나타나지 않는다.
세연과 제인이 들어간 문은 점차 그 빛이 사그라지고 있다.
주변에 피어 있던 식물들은 피어오를 때처럼 빠른 속도로 시들어 간다.
레이는 늘 철저한 계획하에 움직였다.
냉철하고 이성적으로 판단했으며, 오차 없이 임무를 수행했다.
변수 없는 임무의 완수.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없었다.
그러나 세연의 등장과 그녀가 보인 능력은 모든 계산의 범위를, 아니, 상상의 범위를 넘어섰다.
그리고 이젠 레이의 선택만이 남았다.
아니, 선택이라 할 수조차 없다.
눈앞의 문에 걸어 들어가는 것은 충동적이고, 무모하며, 위험하다.
따라갈 이유 따위 없다.
아니, 애초에 이번 임무에서 손을 떼고 쏟아지는 의뢰들을 해결하면 떼돈을 벌 수 있다.
그렇게만 한다면 센트럴 오더가 끝난 뒤, 레이는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뒷세계의 거물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레이는 이를 악문 채 문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될 대로 되라지!”
문이 완전히 사라지기 직전, 레이의 몸뚱어리가 문을 통과했고, 그와 동시에 검은 탑에 만들어진 문은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렸다.
이어 주변을 메웠던 식물들은 붉은 흙에 파묻혔고, 검은 탑은 이전과 같은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