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183화 (183/220)

183화 끝의 시작 (1)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없는 붉은 언덕.

50구역의 붉은 언덕 정상에는 이름 모를 검은 탑이 존재한다.

언제부터 그 자리에 있었는지, 무슨 목적으로 만들어졌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레지스탕스들이 몰래 간직해 온 역사 시대 기록에조차 탑에 대한 정보가 없기에 세계대전이 끝난 뒤 세워진 탑이라 추정할 뿐이었다.

“결국 여기까지 왔네.”

마침내 탑 앞에 이른 제인은 긴 머리를 쓸어 넘기며 검은 탑을 올려다보았다.

제인을 따라 올라온 레이가 한숨을 내쉬며 탑 앞에 멈춰 섰다.

“그러게. 정말 여기까지 오고야 말았어.”

제인과 달리 레이의 목소리에서는 허탈함이 묻어났다.

“정말 여기서 뭔가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찾아야지.”

“오랫동안 발길이 끊어졌던 모양인데…….”

꽤 오래전 환락가에서 탑을 관광지로 홍보한 적도 있지만, 사기나 다름없는 마케팅이었다.

이젠 그 누구도 탑을 찾지 않는다.

그런 탑에 대체 뭐가 있단 말인가.

‘헛수고도 이런 헛수고가 없네.’

레이는 못다 한 말을 속으로 삼켰다.

그러나 정작 제인은 눈을 빛내며 탑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틀림없어. 분명 여기 어딘가에 무언가 오간 흔적이 있을 거야.”

“제인, 애당초 여길 찾는 사람들이 있긴 해? 주민들조차 이 언덕을 오르는 일이 없는 것 같던데.”

“그러니까 더더욱 이만한 장소가 없지.”

“…….”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다.

‘이런 시기에 버려진 탑의 수색이라니…….’

고작 수일 사이에 레이에게 온갖 소식들이 전해졌다.

센트럴 오더가 발동되었고, 의회가 무너졌으며, 군에 의해 반군이 괴멸되었다.

상상조차 하기 힘든 혼돈과 파괴의 연속이었다.

그와 함께 달갑지 않은 성수기가 시작되었다.

사무장의 노골적인 압박도 덩달아 이어졌다.

“레이, 온갖 의뢰가 밀려들고 있어.”

“정말 그 여자애를 따라다니는 게 그렇게 중요해? 거기 투입된 인력만 일부 빼도 큰돈을 벌 수 있다고!”

“대륙의 손꼽히는 부자들이 죄다 너를 찾고 있어. 알아? 코르지의 딸이라 해도 이건 너무 지나쳐!”

“그냥 의뢰를 포기하고 위약금 물자. 소문으로는 제로 구역에 뭔가 일이 터지면서 코르지에게도 뭔가 문제가 터진 것 같단 말이야.”

레이에게 전해진 소식들이란 결국 ‘의뢰’였다.

혼란기에 뒷세계를 찾는 발걸음은 늘어난다.

어딘가를 지켜 달라, 누군가를 없애 달라, 무언가를 가져다 달라 등등.

그러나 의회 테러 사건 직전, 9구역 근방 하이퍼루프 근처에서 히트맨들이 몰살당했다.

쓸 만한 히트맨들이 하루아침에 전멸하면서 뒷세계를 주름잡던 중개업체들이 줄줄이 무너졌다.

즉, 은밀한 의뢰를 수행해 주던 뒷세계는 사실상 궤멸 상태였다.

아니, 정확히는 제인의 경호로 인해 그 어떤 의뢰도 받지 않은 레이의 팀만이 살아남았다.

센트럴 오더의 발령 이후, 레이의 사무실로 하루에 수백 통의 전화가 쏟아졌다.

의뢰인들은 천문학적인 비용을 제시하며 온갖 의뢰를 맡기려 했고, 참다못한 사무장은 레이를 닦달했다.

하지만 레이는 기어코 모든 의뢰들을 거절했다.

‘…내가 미쳤지.’

결과적으로 그 엄청난 돈과 기회를 전부 발로 차 버리고 제인을 따라다니고 있다.

그러나 정작 제인은 이처럼 값비싼 서비스를 누리면서 엉뚱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메타휴먼이 어디에서, 왜 왔는지 알아?’

레이가 보기에 그저 무의미하고 불필요한 질문일 뿐이었다.

그러나 제인은 그 질문의 답을 찾겠다며 대륙의 끝까지 왔다.

“제인, 이제 헛수고는 그만해.”

그동안 레이는 그저 제인을 보호하는 것만이 자신의 역할이기에 제인을 말리지 않았다.

하지만 대륙 끝까지 닿는 동안 알아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메타휴먼이 이런 곳의 탑과 관련되어 있을 리 없잖아.”

제인이 레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레이, 너 아버지가 무엇 때문에 센트럴 오더를 고집했는지 알아?”

‘권력을 위해서였겠지.’

머릿속에 곧장 답이 떠올랐지만,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하지만 제인은 레이의 답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 욕심 때문이었는지도 모르지. 하지만 난 다른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해.”

“다른 이유?”

“아버지는 메타휴먼을 없애고 싶어 했어.”

“…그렇겠지.”

메타휴먼을 학살하고 다니는 비밀 조직 ‘코카서스’.

그 조직의 수장이 코르지 브레드필드라는 사실은 뒷세계에서 그리 대단한 비밀도 아니었다.

“정확히는 메타휴먼을 유통한 사람들을 경계하고 있었어.”

“드림 코퍼레이션을 말하는 건가?”

“아니. 그 뒤에 있는 누군가.”

레이는 제인의 말에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음모론이 있긴 했지.”

드림 코퍼레이션에서는 매년 터무니없이 많은 숫자의 메타휴먼들을 생산해 낸다.

하지만 그 제조 과정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인간과 꼭 닮은 메타휴먼, 심지어 시민권까지 획득했을 정도로 정교한 존재.

그러다 보니 메타휴먼에 대해 온갖 소문이 만들어졌다.

드림 코퍼레이션의 CEO 가문 모두가 외계인이라는 소문, 무덤에서 시체들을 꺼내 메타휴먼으로 만든다는 소문, 메타휴먼의 기술이 미래에서 왔다는 소문 등.

드림 코퍼레이션 뒤에 비밀 조직이 존재한다는 소문은 그중에서도 특히 진부한 음모론이었다.

“음모론이 아니야.”

제인이 진지한 얼굴로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는 메타휴먼을 혐오한 게 아니라 두려워했어. 뭔가 메타휴먼에 대한 비밀을 알고 있던 거야.”

“제인, 난 지금껏 메타휴먼들로 경호팀을 꾸려 왔어. 하지만 그 녀석들이 뭔가 대단한 비밀을 숨긴 건 아니야. 어떤 녀석은 순진하고, 어떤 녀석은 교활하기도 해. 또 어떤 녀석은 멍청하기도 하지. 메타휴먼은 그런 녀석들이야. 그뿐이라고.”

레이는 그 누구보다도 메타휴먼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메타휴먼이 받는 부당한 시선들에 대해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다.

메타휴먼에 대한 음모론은 비이성적이고 비상식적인 파괴로 귀결된다.

“메타휴먼은 지금껏 단 한 번도 인간을 적대한 적이 없었어. 그건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거야.”

“나도 알아. 내 친구 중에도 메타휴먼이 있으니까.”

요한의 파트너였던 프랑켄, 그 역시 메타휴먼이었다.

“그럼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메타휴먼의 탄생, 로보티안 법의 제정, 그리고 센트럴 오더까지.”

5년 사이에 벌어진 사건들.

“이 사건들은 하나로 이어져 있어. 대륙의 혼란을 촉발한 사건들 뒤에는 메타휴먼이 있었어.”

레이는 가만히 입술을 깨문 채 제인을 바라보았다.

“그게 전부 메타휴먼의 잘못이란 말이야?”

“아니. 누군가 메타휴먼이라는 존재를 이용해 뭔가 계획하고 있다는 뜻이야.”

제인은 그 말을 끝으로 천천히 탑 앞으로 다가갔다.

처음으로 제인의 목적을 모두 전해 들은 레이는 입술을 깨문 채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이건 정신 나간 짓이야.’

또한 무의미한 짓이었다.

제인의 의욕과 달리 꽤 오랜 시간 동안 탑에서는 무엇 하나 발견되지 않았다.

“레이, 따라온 애들도 전부 와서 도우라고 해. 누가 여기까지 쫓아올 리도 없잖아?”

“별로 좋아할 거 같지 않은데.”

레이의 경호원들은 전부 메타휴먼으로 이루어져 있다.

메타휴먼에 대한 조사에 메타휴먼을 투입한다는 것은 께름칙한 일 아닌가.

더구나 자신들이 인류에 해로운 이유를 찾아보라고 지시하는 꼴이었다.

하지만 곧이어 아무래도 상관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아무것도 없을 테니까.’

사실 제인의 안전을 고려한다면, 이렇게 시간을 허비하는 것도 나쁠 게 없었다.

마피아들을 중재하겠다며 칼부림 한가운데 끼어든 여자다.

알마티 폭동 직전에도 굳이 발 벗고 나서지 않았던가.

그런 무모함은 늘 그녀 자신을 위험에 빠뜨렸다.

그 위태로운 상황들을 생각해 보면, 차라리 지금처럼 쓸데없는 일을 하며 50구역에 머무르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할 수 있다면, 이 정도 장단에는 얼마든지 맞춰 줘야지.’

마음을 굳힌 레이는 주머니에 넣어 둔 소형 통신기를 꺼냈다.

“다들 집결해.”

치지지지…….

스피커에서 대답 대신 잡음이 들려온다.

‘통신 문제인가?’

하지만 몇 분이 지나도록 경호원 중 누구 하나 응답하지 않고,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잡음만이 계속될 뿐이었다.

“뭐야? 이 녀석들 전부…….”

눈살을 찌푸린 채 주변을 둘러보던 레이가 문득 입을 다물었다.

츠츠츠츠…….

주변에서 묘한 소리가 들려온다.

뱀과 같은 무언가가 부드럽게 미끄러지듯 지나쳐 가는 소리.

츠츠츠츠츠츠…….

한 방향이 아니다.

좌측과 우측, 전후방에서 고루 동시다발적으로 들려오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에 포위된 듯한 느낌에 레이는 조심스럽게 권총을 꺼내 들었다.

‘…생명체는 아니야.’

영악한 주변 상인들은 붉은 언덕을 운치 있는 풍경으로 홍보했지만, 사실 붉은빛은 중금속과 폐수 따위로 인해 오염된 결과였다.

야생 동물은 물론, 풀 한 포기조차 살 수 없는 환경이다.

츠츠츠츠…….

주변에서의 묘한 소리와 기척은 점차 가까워졌고, 주변을 뒤덮었다.

생명체가 아닌 무언가가 주변을 뒤덮어 오고 있다면, 답은 하나뿐이었다.

‘이레귤러군.’

마피아와 레지스탕스를 비롯해 힘깨나 쓴다는 자들이 모두 떠나버린 지금, 50구역에 이레귤러가 나타난 것이다.

주변에 배치해 둔 경호원 중 누구 하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전부 당한 건가? 아니면…….’

철컥!

탄알을 확인한다.

다섯 발.

강력한 히트맨을 상대로 권총은 장난감과 다르지 않지만, 만일의 경우 약간의 시간은 벌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제인, 멈추고 이쪽으로 와.”

“기다려 봐. 여기 뭔가 이상한 문자가 쓰여 있는 것도 같… 아, 그냥 긁힌 건가?”

“제인!”

레이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제인이 다소 얼떨떨한 얼굴로 다가왔다.

“뭐야, 갑자기 왜 그러는데?”

“…목소리 낮춰.”

레이는 제인의 손을 잡아끌며 탑 뒤쪽으로 몸을 숨겼다.

사박, 사박, 사박.

선명하게 들려오는 발소리에 제인 역시 눈을 동그랗게 뜬다.

곧이어 비탈길 쪽에서 누군가의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근방에는 제법 많은 수의 경호원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만약 그들을 모조리 제압할 정도의 실력자라면, 자신의 힘으로는 결코 이길 수 없다.

“여차하면 내가 시선을 끌 테니, 그 틈에 도망쳐.”

“레이,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도망이라니, 내가 왜?!”

제인은 여전히 지금의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 듯 되물었다.

“이레귤러야. 널 노린 히트맨일 가능성이 높아.”

얼마 전부터 코르지와의 연락이 끊어졌다.

코르지의 지원금은 빠짐없이 입금되었지만, 자금의 흐름이 곧 그의 안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만약 코르지의 신변에 문제가 생겼다면, 후계자인 제인이 위험해진다.

“일단 최대한 놈의 시선을 끌어 볼 테니까…….”

“레이, 잠깐. 저건…….”

제인이 레이의 팔을 붙잡는다.

붉은 흙먼지 속에서 이쪽으로 걸어오는 여인의 모습이 보인다.

그런 여인의 발밑에서 꿈틀거리며 기어오르는… 아니, 피어오르는 무언가.

‘식물……?’

그녀의 발밑으로 초록빛의 새싹들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결코 싹을 틔울 수 없는 붉은 땅에서 식물을 피워 낸 것이다.

그와 함께 온 사방에 덩굴들이 빠른 속도로 번져 가고 있었다. 붉은 흙을 쓸고 지나며 뻗어 나가는 덩굴들은 금세 언덕 곳곳을 푸르게 물들였다.

그 와중에 레이는 이쪽으로 다가오는 여인의 얼굴을 알아보고 숨을 들이켰다.

“카렌……?!”

드림 코퍼레이션의 이사이자 탈로스 가문의 후계자, 그리고 49구역에서 연합을 지휘하다가 실종된 여인.

그녀가 어째서 이곳에 있단 말인가.

“아니야, 카렌이 아니라고.”

“제인, 무슨 소리야? 저 얼굴은 분명…….”

고개를 돌려 제인을 바라본 레이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제인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돌아왔어!”

제인은 흥분한 듯 곧장 탑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한세연, 너지! 너 맞지?!”

곧이어 카렌의 얼굴을 한 여인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른다.

“오래간만이야, 제인.”

그녀의 눈동자는 붉게 빛나고 있었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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