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대혼돈의 대륙 (2)
조금 전까지 11구역에서 온 화물들을 옮기던 현장에서는 한바탕 소란이 일고 있었다.
한창 수송함의 짐을 하선하던 메타휴먼들은 갑자기 상공에 구축함이 나타나자 저마다 놀라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키리리릭! 끼릭! 끼리리리!
드릴과 집게손을 부산히 놀리며 전투를 준비하는가 하면, 캐터필러를 부산스럽게 굴리며 비상을 울려 대는 녀석도 있었다.
“전투 구축함… 중대형급…….”
육성을 낼 수 있는 녀석들은 한창 착륙을 준비하는 구축함의 스팩을 읊어 댔다.
“아, 이 녀석들아, 정신 사나워! 조용히 좀 해 봐!”
그 와중에 침착함을 유지한 카심은 목소리를 높이며 메타휴먼들을 진정시켰다.
그러나 정작 카심 역시 긴장감을 숨기지 못했다.
함포를 갖추고 있지만 공격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호위함도 없이 홀로 나타난 구축함은 어느 모로 보아도 비정상적이었다.
위이이이이이…….
구축함이 천천히 날개를 변형시키며 고도를 낮춘다.
“저, 저 미친……!”
비행장의 공간이 부족한 까닭에 채 정리되지 않은 현장 한가운데 비상착륙을 시도하고 있었다.
‘설마 11구역에서 보내온 지원 물품은 아니겠지?’
살짝 희망적인 희망을 품고 있던 찰나.
“카심 씨!”
안도와 멜리사를 비롯한 11구역 관료들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뭐죠, 저건?”
하긴 아무리 배가 부른 구역이라도 구축함을 선뜻 내줄 기부 천사가 있을 리 없었다.
“…난들 알겠어? 루키우스에게 뭔가 들은 거 없나?”
“아무 얘기 못 들었습니다. 더구나 구축함이라니.”
콰지지직!!
그 와중에 구축함이 근처에 남아 있던 나무 몇 그루를 뿌리째 날려 버리며 거칠게 착륙했다.
온 사방에 모래바람이 몰아치며 한바탕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그렇게 요란한 착륙이 끝난 뒤, 멜리사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탄식을 내뱉었다.
“뭐야, 저건? 저 구축함이 얼마짜린데 저따위로……!”
“일단 가 보죠. 적인지, 손님인지 모르겠지만.”
“어느 쪽이든 일단 제정신이 아닌 건 확실하네.”
구축함에 모든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천천히 입구가 열리기 시작했다.
치이이이…….
그와 함께 안쪽에서 다투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수동 비행을 해 본 적 있다고 하지 않았나?”
“아, 소형 PAV였다니까! 이렇게 육중한 걸 다뤄 보는 건 나도 처음이라고.”
“사람이라도 깔아뭉갠 건 아닌지 모르겠군.”
“밑에 아무도 없는 거 확인했어! 날 뭘로 보고.”
“뭔가 부서지는 소리는 나던데.”
“기억이 통째로 날아간 녀석한테 맡긴 내 잘못이지.”
“아, 그거, 진짜 남자 둘이서 되게 쫑알거리네! 속이 그렇게 좁아?!”
“쫑…알?”
“말을 말지.”
그렇게 한창 다투던 세 사람의 시선이 문득 바깥쪽에 가득 몰려온 사람들을 향했다.
“이거… 우리가 주의를 너무 끈 거 같은데?”
“역시 착륙이 문제였겠지.”
“켄, 닥쳐.”
“조용히 좀 하지.”
자욱한 흙먼지로 인해 면면을 확인할 수 없었다.
모두는 어색한 침묵 속에서 흙먼지가 완전히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시, 신태일 씨?!”
안도는 구축함 입구 쪽에 서 있는 태일의 모습을 보고는 목소리를 높이며 곧장 앞으로 내달렸다.
“어어? 안도! 왜 그래? 대체 누구이기에.”
멜리사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런 안도를 바라본다. 그러나 안도뿐 아니라 카심과 몇몇 메타휴먼들도 만면에 웃음을 띤 채 입구에 선 사내에게 달려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멜리사는 곧 냉정하게 계산하기 시작했다.
“흐음, 일단 이쪽 편이라 이거지? 구축함 한 대를 손에 넣은 건 꽤 큰데.”
뒤쪽에 서 있던 관료가 조용히 묻는다.
“하지만 아가씨, 제로 구역에서 대체 왜 구축함을 보내온 걸까요?”
“차림새로 봐서는 제로 구역 사람들은 아니야. 게다가 훈련받은 비행사도 아닐 테고.”
“하지만…….”
“그래, 구축함은 분명 제로 구역 물건이지. 아마 제로 구역에 무슨 일이 터지긴 한 모양이야.”
잠시 생각하는 듯하던 멜리사가 곧 밝은 미소를 지으며 구축함 쪽으로 다가갔다.
“이봐, 안도! 날 이렇게 버려 두기야? 나도 소개 좀 시켜 달라고!”
* * *
약 한 시간 뒤, 알마티 시청.
“믿기 힘든 이야기군. 정말 믿기 힘든 이야기야.”
지금껏 태일은 의회 테러 사건 이후, 제로 구역에서 겪은 일들을 모두 들려주었다.
센트럴과 평행세계, 메타휴먼에 대한 진실까지.
태일은 자신이 보고 들은 모든 것을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자네 말에 따르면, 메타휴먼이 이쪽 세계에서 뭔가… 에너지 같은 것을 추출해 보내는 역할을 한다는 건가?”
루키우스의 얼굴은 마치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정확히는 소울 에너지입니다.”
“자네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그런 얘기를 했다면… 분명 미쳤다고 했을 거네.”
태일은 자신의 이야기가 가진 파급효과를 잘 알고 있기에 루키우스와의 독대를 요청했다.
안도는 물론, 카심조차도 방 안에 들이지 않았다.
로보티안법을 입안한 안도와 메타휴먼을 위해 평생을 살아온 카심.
사실 그 두 사람이야말로 결코 들어서는 안 될 이야기였다.
“메타휴먼들은 이미 알마티에서 함께 살아가는 주민들이네. 아니, 그들의 힘으로 알마티가 재건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야. 그런데 지금 와서…….”
“전 지금 메타휴먼들을 차별하고 몰아내야 한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메타휴먼의 존재 목적은 소울의 착취에 있다.
그러나 그건 메타휴먼의 의지와 무관한 방식일 가능성이 높았다.
적어도 메타휴먼들에게는 악의가 없다.
“지금 이야기는 일단 비밀로 해 두십시오. 어떤 방식으로 소울이 수집되고 다른 세계로 보내지는지부터 알아내야 합니다.”
“다른 세계… 허허, 다른 세계라…….”
루키우스는 의자에 등을 기댄 채 연신 한숨을 뱉어 냈다.
사실 메타휴먼의 비밀보다 더 충격적인 이야기는 ‘닮은 세계’의 존재였다.
태일이 넘어온 세계.
또 다른 자신이 존재하는 세계.
고작 한 시간 만에 지금껏 알고 믿어 오던 세계관 전체가 흔들려 버렸다.
루키우스는 얼마간 침묵하며 태일을 바라보았다.
지금이라도 태일이 ‘전부 농담이었습니다’라고 말하며 웃음을 터뜨려 주길 바랐다.
오랜만에 만난 김에 골려 주기 위해 이야기를 꾸며 낸 거라 말해 주길 바랐다.
그러나 태일의 표정은 시종일관 진지했고,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루키우스를 응시하고 있었다.
“코르지 브레드필드가 자네에게 거짓말을 했는지도 모르잖나.”
이젠 아예 사정하다시피 말했다.
그러나 태일은 끝까지 담담했다.
“당장 저 자신이 다른 세계에서 넘어온 증인입니다.”
결국 코르지는 한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왜 나에게 모든 걸 얘기한 건가?”
따지고 보면 알게 된 지 채 몇 달 되지 않은 사이였다.
“굳이 그런 얘기를 들려주는 이유가 뭐냐는 말이야.”
이제는 차라리 태일이 원망스럽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이런 거짓말 같은 이야기 따위 차라리 듣지 않는 편이 나았다.
“시장님은 알고 계셔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알마티는 대륙에서 가장 다양한 종류의 장인들과 기술자가 모여 사는 곳이다. 그리고 대륙에서 유일하게 메타휴먼에 대한 재산권 규정이 폐지된 구역이다.
루키우스는 그런 알마티의 통치자였다.
“믿을 만한 장인들을 모아 주십시오. 앞으로 할 일이 많아질 겁니다.”
메타휴먼과 소울에 관한 연구, 대륙 곳곳에서 전해져 오고 있는 온갖 암호에 대한 해독, 그리고…….
“일단 구축함부터 수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제니가 망가뜨린 구축함의 수리.
루키우스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가 복잡한 와중에도 당장 눈앞의 일처리를 미룰 수는 없었다.
“안 그래도 이미 발터, 막야 부부가 벌써 갔네.”
하늘에서 떨어진 보물을 보고도 가만히 앉아 있을 두 사람이 아니었다.
한창 태일과 루키우스가 대화를 나누고 있던 그 시점, 안도와 멜리사 일행은 시청 근처 카페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카심은 해야 할 일이 많다며 훌쩍 떠나 버린 지 오래고, 태일을 만나겠다며 달려온 자경단원들 역시 김이 샌 듯 떠나 버렸다.
빈 잔을 노려보고 있던 멜리사가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탁상을 내려쳤다.
“아니, 이게 말이 돼? 벌써 한 시간이 지났다고!”
“미안해, 멜리사. 조금만 더 기다리면 곧 연락이 올 거야.”
“안도, 뭔가 착각하는 거 같은데, 난 11구역을 대표해서 이곳에 온 거야.”
“알아. 그 얘긴 아까도 했어.”
“안도!!”
“멜리사, 너야말로 알잖아? 태일 씨가 가져온 구축함이 어느 정도 물건인지.”
“너……!”
백여 기 넘는 소형 수송선에 채워 가져온 물자들.
열차 수송이 더 효율적인 방법임에도 11구역의 부와 기술력을 과시하기 위해 일부러 항공 수송이라는 방법까지 택했다.
다소 지나칠 정도의 조치이지만, 어디까지나 협상의 우위를 차지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그러나 물자 지원 당일, 웬 사내가 구축함을 떡하니 이끌고 나타났다.
“구축함을 가져왔으니, 종일이라도 접견해야지. 안 그래?”
하긴 만약 태일이 저 구축함을 끌고 11구역으로 왔다면, 멜리사는 며칠이라도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었을 것이다.
구축함이 어떤 물건인가.
중대형급 구축함 한 척은 일개 구역 1년 예산을 가뿐히 넘는 물건이다. 아니, 항공 기술에 대한 센트럴 규제가 워낙 강했기에 돈이 있어도 만들 수 없는 물건이 바로 전투용 구축함이었다.
심지어 구축함 안쪽에는 PAV와 전투기 등 장비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그런 구축함 앞에서 11구역의 지원 물품은 그야말로 푼돈에 불과했다.
“오해하지 마. 나도 냉정한 현실을 말하는 것뿐이니까.”
“…….”
멜리사는 얼굴만 붉힐 뿐,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대체 이게 무슨 망신이야!’
11구역 관료들은 슬금슬금 멜리사의 눈치를 보며 조용히 차만 마실 뿐이었다.
한편, 안도는 줄곧 굳은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대체 태일은 어떻게 제로 구역의 구축함을 갖고 나타난 걸까?
아니, 애당초 어떻게 제로 구역에 들어간 걸까?
게다가 태일이 데려온 두 사람은 얼굴이 낯익었다. 설마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지만, 둘을 의회 테러 현장에서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무엇보다 마음에 걸리는 것은 태일의 시장 독대 요청이었다.
굳이 자신까지 배제한 채 나눠야 할 대화가 뭐란 말인가.
태일은 시청까지 오는 내내 아무것도 대답해 주지 않았다.
어째서인지 계속해서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바로 그때쯤 안도의 전화기가 울렸다.
루키우스로부터 온 전화였다.
* * *
“호오, 이거이거… 마감이 끝내주는군.”
“그래도 지난번 비공정에 비하면 정교함은 좀 부족하네요.”
“그거야 알렉세이 님의 작품 아닌가. 이 정도만 되어도 훌륭하지. 암.”
구축함 안에 남아 있던 켄과 제인은 웬 노부부를 보며 불편함을 감추지 못했다.
발터와 막야는 다짜고짜 구축함에 들이닥쳐 이곳저곳을 뜯어보고 있었다.
태일과 아는 사이라며 밀고 들어오는 통에 말릴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아니, 대체 누가 이렇게 무식하게 착륙한 건가? 쯧쯔, 다행히 구동부는 무사하지만, 하마터면 날개를 아예 못 쓰게 될 뻔했어.”
“아니, 그거, 좀 긁힌 거뿐인데.”
“허, 이 아가씨 말하는 거 좀 보게. 좀 긁혀? 저 날개가 얼마나 민감한 물건인지 모르니 그런 무식한 소리를 할 수 있는 거야!”
한바탕 욕을 얻어먹은 제니는 얼굴을 붉힌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고칠 수는 있겠습니까?”
“당연히 고칠 수 있지. 고칠 수 있고말고. 아니, 고쳐야지.”
켄의 물음에 발터는 열의를 불태우며 온갖 장비를 꺼내 들었다.
한편, 막야는 철과 재료, 공간을 보는 눈은 뛰어나되 기계공학에는 그리 밝지 못했기에 구축함 내부 구조를 꼼꼼히 살폈다.
그러다가 구식 통신기기들이 막야의 눈에 들어왔다.
“아, 그건 함부로 손대시면 안 됩니다.”
깜짝 놀란 켄이 급히 달려와 막으려 했지만, 이미 막야는 이제 막 전송된 사진들을 살피고 있었다.
“이건…….”
막야가 눈을 찌푸린 채 흑백 사진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낯익은 건물 흔적과 배경.
흑백사진이지만 틀림없었다.
“49구역 포인트 중 하나군요.”
“엇, 아는 장소입니까?”
막야가 무언가 알아보는 듯하자, 흥미가 동한 켄 역시 옆에 서서 사진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건… 뭔가 이상한 게 있네요.”
사진에는 기괴한 형상이 찍혀 있었다.
마치 거대한 나무처럼 보이는 무언가였다.
“이런 나무는 49구역에서 자랄 수 없을 텐데. 그리고 그 위에 이건…….”
나무 위에 함께 찍힌 형체, 그건 분명 비행체였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