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176화 (176/220)

176화 대혼돈의 대륙 (1)

“뭐야, 이건! 끝내주잖아?”

“제니, 정신 사나우니 잠자코 좀 있어.”

그러나 난생처음 구축함을 타고 흥분한 제니를 말릴 수는 없었다.

태일과 제니, 켄은 코르지에게 받은 항공 구축함에 탄 채 제로 구역을 벗어나고 있었다.

코르지의 구축함은 중형급이지만, 사실상 순양함에 버금가는 스펙을 자랑했다.

전장 166m, 전폭 21m, 중량 3,400톤.

오토 파일럿 시스템이 작동하는 가운데, 스텔스 모드, 정밀 폭격 기능까지 갖추고 있었다.

“이런 물건을 개인이 가질 수 있는 거였어?!”

“원래대로라면 안 되겠지.”

코르지 브레드필드, 센트럴의 가장 높은 자리를 지켜 온 인물.

아무리 그라도 이만한 구축함을 갖기 위해 꽤 많은 자금과 시간을 들였을 것이다.

그런 물건을 선뜻 태일에게 넘겼다.

“오빠, 지하에 내려가 봤어? PAV가 두 대에 전투기는 다섯 기나 있어!”

“알뜰히도 채워 놓으셨군.”

게다가 옵션까지 완벽하게 채워서.

비장의 무기를 넘기고 본인은 사지(死地)와 다름없는 제로 구역에 남는다.

켄은 그 의미를 이미 알고 있었다.

“최후를 각오했군.”

“그렇겠지.”

그럼에도 태일은 그의 결단에 경의를 표할 수 없었다.

코르지 브레드필드는 평생을 대륙민들 위에 군림하며 막대한 부와 권력을 누렸다.

자신은 그저 이용당했을 뿐이라고 했던가.

대륙의 식민화를 막기 위해 싸운다고 했던가.

그러나 태일은 이미 ‘코르지 브레드필드’라는 인간을 잘 알고 있었다.

만약 그에게 소울을 착취할 기술력이 있었다면, 다른 세계의 본인처럼 대륙민을 쥐어짰을 것이다.

거울처럼 닮은 평행 세계.

한쪽 세계가 다른 세계의 영혼들을 훔치려 하는, 기괴한 상황.

그 속에서 악인이 더 교활한 악인에게 패배했을 뿐이다.

단지 그뿐이었다.

비행을 시작한 지 한 시간가량이 지났다.

제로 구역을 벗어난 지 오래고, 구축함은 끝도 없는 바다 위를 날고 있었다.

“지금부터 어떻게 할 생각이지?”

“글쎄.”

태일과 켄의 눈앞에는 무더기로 쌓인 암호문과 흑백사진들이 있었다.

“으으, 보기만 해도 머리 아파.”

제니는 아예 머리를 감싸 쥐고 우는소리를 냈다.

“동감이야.”

그러나 눈앞의 정보들은 지극히 일부일 뿐이었다.

구축함 한 켠에서는 여전히 실시간으로 구식 통신 장비들이 작동하고 있다.

코르지의 첩자들은 대륙 곳곳에서 흑백사진과 모스부호, 암호문들을 쉴 새 없이 보내왔다.

중요한 정보도 있겠지만, 의미 없는 정보들도 꽤 섞여 있을 터였다.

“자금줄이 마르지 않는 이상, 첩자들은 계속 움직여 줄 거네. 아마 제법 오랫동안 유지될 테지. 차명 계좌 수천 개의 자금 흐름을 막는 게 그리 쉽진 않을 테니까 말이야.”

하지만 당장은 그 정보들을 해석하고 정리할 시간과 능력이 부족했다.

보물 상자를 얻었으나, 그 상자를 열 수 있는 열쇠를 가지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일단 알마티로 가야겠어.”

“알마티?”

“그래. 이 정보들을 이용하려면 머리를 좀 모아야지.”

아무래도 루키우스 시장과 알마티 장인들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 같았다.

* * *

알마티 외곽.

한때 인적 드문 숲이던 땅에는 임시로 만들어진 컨테이너 집들이 늘어서 있었다.

주변으로는 각종 시설을 건설 중이고, 한창 온갖 물자들이 오갔다.

그런 공사를 진행하는 이들은 붉은 눈동자를 지닌 메타휴먼들이었다.

“다들 표정이 꽤 밝아 보이는군요.”

“평생 지하 쓰레기장에 갇혀 살다가 이런 곳에 집을 갖게 되었으니 신바람이 날 수밖에.”

카심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지만, 얼굴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밝아 보였다.

“공사 속도도 굉장한 거 같습니다. 솔직히 놀랐어요.”

“그거야 자네의 도움이 컸지.”

카심은 오랫동안 쓰레기장에서 메타휴먼들과 함께 지내 왔기 때문인지 사람들과는 좀처럼 잘 어울리지 못했다.

알마티 주민들은 메타휴먼들과 어울리는 괴팍한 노인을 손가락질했으며, 그나마 시장인 루키우스만이 카심과 대화가 가능했다.

그러나 그런 카심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온화한 태도로 젊은 사내를 대하고 있었다.

“오, 저기 또 화물이 도착한 모양이군.”

“아마도 11구역에서 온 물자일 겁니다. 생각보다 빨리 도착했네요.”

카심과 편안히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이는 9구역 관리자이자 청년당 대표였던 안도 애슈턴이다.

그의 말대로 공사 현장 근처 임시 비행장에 도착한 수십 대의 수송함이 천천히 착륙하고 있었다.

수송함들에는 알마티에 도움이 될 만한 온갖 물자들이 실려 있을 터였다.

“솔직히 자네가 우릴 버리고 떠날 줄 알았어. 시장이 그렇게 무심한 답변을 내놓았으니, 그래도 할 말이 없었을 거야.”

“시장님의 결정은 합리적이었습니다.”

“합리적? 흥, 겁이 많은 게지.”

“어쨌든 이미 그 시점에 연합은 패배한 뒤였잖습니까.”

“…….”

알마티에서 협상이 오가고 있던 당시, 이미 49구역의 전투는 연합의 처참한 패배로 마무리된 상태였다.

“자네 친구들 소식은 없나?”

“네. 하지만 강한 친구들이니 분명 무사할 겁니다.”

협상을 결렬된 직후, 연합의 몰살 소식이 들려왔다.

패배 소식이 전해진 직후, 민호와 카츠미, 페이진은 곧장 49구역으로 떠났다.

“이미 전투는 결론이 났습니다. 지금 달려가도 할 수 있는 일은 없어요. 차라리 이곳에서 후일을 대비해야 합니다.”

무의미한 설득이었다.

그 어떤 말로도 셋을 말릴 수 없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노릇이었다.

친구와 동료들이, 부하들이 몰살당했다는 소식이 들려온 가운데, 어떻게 냉철함을 유지할 수 있을까.

그러나 세 사람이 PAV를 타고 49구역으로 떠났음에도 안도는 그대로 알마티에 남았다.

“전 제 할 일을 해야죠.”

알마티는 여전히 서대륙과 동대륙을 연결하는 관문이자 요충지였다.

알마티의 재건은 폭주하는 센트럴 집정부를 막기 위해 그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다.

“자네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다른 구역들의 지원을 받아 내는 건 불가능했을 게야.”

안도는 카심의 칭찬에도 그저 음울하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지금부터가 중요합니다. 다른 구역에서 알마티를 지원하는 건 그저 순수한 선의가 아니에요.”

무언가를 쌓아 올리기는 너무도 어렵지만, 무너지는 것은 허무할 정도로 간단하다.

무너진 의회, 폭주하는 군부.

자그마치 수십 년간 대륙의 중요 사항을 결정해 오던 정치체계가 단 한순간에 붕괴되었다.

모든 것이 엉망이 되기까지 채 두 달이 걸리지 않았다.

“이미 대륙 각 구역이 각자도생의 길을 찾기 시작했어요. 이미 센트럴에 대한 신뢰를 잃었죠.”

전 대륙의 결속과 중앙집권적 통치를 도모해 온 ‘센트럴 오더’.

그러나 센트럴 오더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연합과의 전투에서 몇 개 구역에서 파견된 병력이 총알받이로 내세워졌고, 많은 희생이 발생하였다.

드림 코퍼레이션과 경쟁 관계에 있던 대륙 기업들이 속속들이 무너져 내리면서 일부 구역의 경제가 혼란에 빠졌다.

그런 사건들이 연달아 발생하자, 각 구역들은 센트럴의 지시에 공공연히 반발하기 시작했다.

“다른 구역에서는 알마티가 센트럴에 맞서는 요새가 되어 주길 바랄 겁니다.”

안도의 말을 가듣고 있던 카심이 피식 웃어 보였다.

“이보게, 안도. 난 오랫동안 쓰레기장에 처박혀 붉은 눈깔 녀석들과 함께 부대끼며 지냈다네. 그래서 정치는 잘 몰라.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지.”

어느새 착륙을 마친 11구역 수송기에서 수없이 많은 물자들이 옮겨지기 시작했다.

“자네는 옳은 일을 하고 있어.”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안도는 그런 카심에게 힘없이 웃어 보였다.

카심은 안도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는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목소리를 높였다.

“자, 가지. 가서 저 많은 물자를 가져와 준 손님을 만나러 가야지.”

“네, 가시죠.”

임시 비행장에는 알마티 주민들이 최소 한 달은 먹고 마실 수 있는 식량과 더불어 건설 장비, 자재, 그리고 무기들이 실려 있었다.

“어이, 빨리빨리 옮겨!”

비행선에서 내린 금발의 미녀가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메타휴먼 인부들을 다그쳤다.

그 와중에 메타휴먼들이 그녀를 힐끗거리자, 눈을 부라리며 날카롭게 쏘아붙인다.

“뭘 봐? 일이나 해!”

“성격 여전하네, 멜리사.”

저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별안간 멜리사라 불린 여인의 눈매가 반달 모양으로 변했다.

“어머, 이게 누구야? 안도! 너 맞지?”

“오랜만이야, 멜리사. 설마 직접 올 줄은 몰랐는데.”

“누구의 부르심인데. 당연히 직접 와야지!”

멜리사는 간드러진 웃음을 지으며 손을 내밀었고, 안도 역시 선뜻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멜리사, 미리 말해 두는데, 여기 메타휴먼들에게는 함부로 하면 안 돼. 그들은 노예가 아니야.”

“어머, 그러고 보니 로보티안법을 입안한 게 너였지? 몰라봤어. 여기 인부들이 전부 로보티안이니? 생김새로는 꼭…….”

기계 팔이나 캐터필러 따위로 개조된 메타휴먼들의 모습은 시민권을 부여받은 로보티안의 모습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아니, 알마티에는 로보티안이 없어. 다만, 메타휴먼에 대한 차별이 존재하지 않을 뿐이야.”

“어머, 정말 알마티에 큰일이 나긴 났나 보네.”

시민권을 부여받지 않았더라도 메타휴먼을 물건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그건 멜리사에게 꽤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안도의 옆에서 뚱한 얼굴로 멜리사의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던 카심이 차갑게 쏘아붙였다.

“정상으로 돌아온 게지. 저 녀석들 또한 인간처럼 영혼을 지녔으니 당연히 존중받아야 하는 거라네.”

“어… 안도, 이분은?”

“인사해, 멜리사. 이분은 카심이야. 알마티에서… 음…….”

“그냥 괴팍한 늙은이일 뿐이네.”

뭐라 설명할지 곤란해하는 안도의 말을 카심이 대신 끝맺었다.

멜리사는 그런 카심을 보고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처음 뵐게요. 전 11구역의 의원이자 관리 대행을 맡고 있는 멜리사 마릴리에예요.”

그러나 카심은 멜리사의 손을 본체만체하며 한창 짐을 내리고 있는 인부들에게 다가갔다.

“어어, 거기 조심해! 녀석아, 잘못하면 안에 든 게 파손되잖아. 네 녀석 몸뚱어리 고칠 부품이 들어 있을지도 몰라!”

멜리사는 그런 카심을 보며 잠깐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안도를 보며 해맑게 웃어 보였다.

“어쨌든 네 연락을 받고 정말 놀랐어. 사람들은 의회가 무너진 그날 네가…….”

“죽었다는 소문이 돌았지. 보다시피 멀쩡히 살아남았어.”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네가 사라진 사이에 유키 녀석이 굉장히 설치고 다니던데. 갑자기 군부의 열렬한 지지자가 된 거 같더라니까.”

“한때 사귀던 사이 아니었던가?”

멜리사가 안도를 흘겨보며 팔짱을 꼈다.

“대체 언제 적 얘길 하는 거야? 내가 그런 소리나 듣자고 여기까지 온 줄 알아?”

“그래, 미안. 미안해. 오랜만에 동기를 만나니 반가워서 농담 좀 해 봤어.”

안도는 멜리사와 대화를 나누며 알마티 시내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금도 아찔해. 그날 아버지 병세가 갑자기 심해지지 않았다면, 나도 의회에 갔을 거야.”

“그래…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었어.”

“안타까운 일이지. 하지만 안도, 중요한 건 지금부터야. 의회를 날려 버린 개자식들을 그냥 둘 수는 없잖아?”

아카데미 시절에도 멜리사는 직설적이고 불같은 성격이었다.

유키와 헤어진 뒤, 그의 뺨에 남은 멜리사의 손바닥 자국이 한 달간 새겨져 있었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통신으로 하지 못한 말이 있지? 말해 봐. 무슨 생각인 건지.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

멜리사는 11구역의 대표이자 외교 사절로 이곳에 왔다.

시청으로 향하는 이 순간, 멜리사를 따라온 관료들이 뒤따르고 있었다.

“49구역 전투 이후로 어째서인지 집정부가 너무 조용해. 소식도 거의 전해지지 않고 있고. 그러다 보니… 잠깐.”

차분히 말을 이어 가던 안도가 별안간 말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알마티 상공에 나타난 이질적인 모양의 구축함.

언뜻 보아도 수송이 아닌 전투용이지만, 그 와중에 단 한 대뿐이었다.

“저 모함, 설마 너희 구역에서 알마티에게 선물로 준비한 건 아니지?”

“설마. 우리도 저런 구축함을 보유하고 있진 않아.”

멜리사 역시 경계 어린 표정으로 구축함을 올려다보았다.

구축함은 천천히 속도를 줄이며 고도를 낮추고 있었다.

자세히 구축함의 형태를 관찰하던 멜리사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건… 제로 구역에서 온 모함이야.”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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