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개는 주인을 물지 않는다 (2)
“세탁이 필요한 옷가지는 제게 주시면 깔끔히 세탁 후 돌려드리겠습니다.”
“식사 준비되었습니다. 메뉴는 파르미자나와 제노베제 파스타, 후식으로 레몬 샤베트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닥터가 대기 중입니다. 치료가 필요하시면 치료실로 안내하겠습니다.”
저택 하인들은 코르지뿐만 아니라 태일과 제니, 켄에게도 더없이 깍듯했다.
“아, 괘… 괜찮아요! 내 양말은 내가 알아서 할게요. 어, 거기 내 신발 그냥 내버려 둬요.”
제니는 극진한 대우가 더없이 어색한지 쩔쩔매며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그나마 켄은 코르지의 감시를 담당한 적이 있기에 그런 분위기에 제법 익숙했다.
“왜 그렇게 쩔쩔매?”
“이런 제길, 다들 왜 이렇게 나한테 관심이 많은 거야? 난 이런 거 부담스럽다고.”
“이 사람들은 그저 자신의 일을 하는 거야.”
“전부 직접 하면 될 일들이잖아. 하여튼 부자들의 생활 방식이란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 퉤!”
제니가 불만을 토해 내며 습관적으로 침을 탁 뱉자, 시녀가 마룻바닥의 침을 닦아내기 위해 곧장 다가온다.
그 모습을 본 제니가 화들짝 놀라며 허리를 숙였다.
“우왓! 미, 미안해요. 내가 할게요, 내가! 습관이라서 그만.”
그러나 시녀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괜찮습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아가씨.”
“아, 아니… 난…….”
아가씨라는 표현을 처음 들은 제니는 얼굴을 붉히며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켄은 한동안 그 모습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보았다.
망아지처럼 날뛰던 제니가 그렇게 허둥거리는 모습은 꽤 재미있는 장면이었다.
울고, 웃고, 화내고, 당황하고.
그처럼 다양한 표정을 지을 줄 안다는 것만으로 신기하게 느껴졌다.
‘나도 기억을 찾는다면 저렇게 생기 있는 삶을 되찾을 수 있을까?’
나이가 지긋한 하인 하나가 그런 켄에게 다가왔다.
“필요한 게 있으십니까?”
켄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허리에서 권총을 꺼내 들어 하인에게 보였다.
“이 총 모델에 맞는 탄을 좀 얻을 수 있을까요?”
“야, 그걸 이런 곳에서 찾아?”
제니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켄을 돌아보고 힐난했다.
그러나 물끄러미 권총을 바라보던 하인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357매그넘’이군요. 다행히도 비축분이 꽤 있습니다.”
“…뭐?”
제니는 멍한 얼굴로 하인과 켄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게 왜… 여기에 있어?”
한편, 태일은 코르지와 함께 나란히 복도를 걷고 있었다.
“치료는 받지 않아도 되겠나?”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애당초 의사가 치료할 수 있는 상처들이 아니야.”
“그렇군. 그럼 따라 들어오게.”
코르지가 복도 끝 방의 문을 열어젖혔다.
“뭐야, 이건…….”
방 안에는 수십 개의 화면과 수신기, 그 밖에 정체 모를 장치들이 잔뜩 쌓여 있다.
어둠 속에서 말끔하게 차려입은 사내가 서서 다소곳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얼마 전, 태일이 머무를 당시에 단 한 번도 모습을 보인 적 없는 사내였다.
“이 친구와는 처음 만나는 거겠지? 이 저택의 집사라네.”
얼떨결에 집사와 악수를 나눈 태일은 찬찬히 방 안의 잡동사니들을 훑기 시작했다.
코르지는 턱을 매만지며 조용히 말했다.
“오래전 사용되던 유물들이지.”
‘유물’이라는 표현은 과장이 아니었다.
도청 장치, 통신 장비, 심지어 구식 전신기까지.
방 안 장비 대부분은 50구역 레지스탕스에서조차 쓰지 않을 것들이었다.
사용은커녕 당장 박물관에 들어가야 할 물건들이다.
“마지막 세계대전 당시, 인류는 참으로 기발한 물건들을 만들어 냈어.”
“이것들이 작동하긴 하는 건가?”
“당연히 작동하지. 이 구식 장비들을 무시하면 안 되네. 아마 보안 측면에서는 가장 완벽에 가까운 물건들일 거야.”
홀로그램과 아바타가 보편화된 제로 구역.
그 안에서도 코르지는 모스부호를 주고받았고, 화질 낮은 흑백사진을 수집했다.
“센트럴 오더가 발동된 그 순간부터 사령부는 모든 종류의 통신과 콘텐츠들을 검열하고 감시한다네. 하지만 최신 기술로 무장한 사령부에서도 추적하지 못하는 게 있지.”
코르지는 벽돌을 연상하게 만드는 수화기를 들어 올리며 피식 웃었다.
“너무도 작고 하찮고 하잘것없어 보이는 데이터 조각들, 말 한마디조차 담을 수 없을 정도로 미세한 부스러기들일세.”
감시자는 엄청난 용량의 데이터 흐름 속에서 쉴 새 없이 정보들을 감시한다.
그러나 낡은 기술로 생산해 낸 조그마한 정보들은 감시의 그물망을 쉽게 빠져나왔다.
고도의 기술력 때문이 아니라, 살펴볼 가치조차 없기 때문이었다.
센트럴 오더를 발동시킨 당사자이지만, 정작 그 법의 사각지대를 이용하는 이 역시 코르지 본인이었다.
태일은 눈살을 찌푸리며 코르지를 바라보았다.
“고작 이런 기계들로 전달할 수 있는 정보라면 한계가 확실할 텐데?”
“수십, 수백, 수천 개가 모인다면 한계 따위 없다네. 그 일을 여기 이 친구가 해 주고 있지.”
때마침 집사가 수십 장 분량의 종이 보고서를 코르지에게 건넸다.
“전 대륙에서 모은 현황 보고서입니다.”
코르지는 보고서를 열어 보지도 않은 채 그대로 태일에게 건넸다.
“직접 보게.”
태일은 보고서를 받아 들며 코르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나에게 이 모든 걸 보여 주는 이유가 뭐지?”
“이제부터는 자네에게 필요할 테니까.”
“나더러 당신 밑에서 일하라는 건가?”
“그럴 리가. 자네는 내 딸에게 이미 고용되어 있지 않은가. 이중 계약은 안 될 일이지.”
피식 웃으며 농담조로 말하던 코르지가 짐짓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난 자네가 원하는 게 나와 그리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네. 그래서 마지막으로 자네를 도우려는 것뿐이네.”
“…….”
태일은 그런 코르지에게 별다른 대꾸지 하지 않은 채 천천히 보고서를 펼쳤다.
* * *
“확실하겠지?”
“가장 유력한 장소입니다.”
세이드는 가만히 한숨을 내쉰 뒤, 눈앞의 저택을 바라보았다.
제로 구역에서도 가장 구석진 위치에 처박혀 있어 은신처로 쓰기에 더없이 좋아 보였다.
“내부는?”
“설계도를 확인해 본 결과, 평범한 저택입니다. 서른 명의 고용인이 저택에 상주하고 있지만, 집주인은 한 달 전 군부에 의해 숙청되었습니다.”
“주인 없는 집에 고용인들만 머물고 있다는 건가?”
“월급은 꾸준히 지급된 내역이 있습니다. 차명계좌이기에 흐름을 파악하긴 어렵지만…….”
“코르지, 그 늙은이가 진짜 주인이라는 거군.”
“추측하기로는 그렇습니다.”
세이드는 쓴웃음을 삼키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지금 세이드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인물은 코르지 브레드필드도, 태일도 아니었다.
저택의 설계도에서부터 고용 현황, 소유권과 자금 흐름까지 전부 파악하고 있는 사내, 아크 탈로스.
그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숨통이 조여 오는 것 같았다.
결국 마지막 순간, 반드시 없애 버려야 할 사내다.
이용당하는 게 아니라 이용하는 것일 뿐이다.
세이드는 애써 마음을 가라앉힌 뒤, 대기 중인 대원들을 향해 지시했다.
“진입해. 코르지를 생포하고 일꾼들은 전부 쫓아내라.”
지시가 떨어짐과 동시에 대원들이 제각기 벽을 타기 시작했다.
그들은 발소리조차 내지 않은 채 빠른 속도로 2층, 3층의 복도 창문들을 통해 저택 안으로 잠입해 들어갔다.
그렇게 대원 전부가 진입한 직후, 세이드는 홀로 정문 앞으로 다가갔다.
가만히 문손잡이에 손을 올린다.
키리리릭…….
검은 안개가 문고리를 파고들어 몇 개의 잠금장치와 보안 장비를 부식시킨다.
사실 방범 장치가 작동해 사이렌이 울린다 해도 저택을 위해 달려올 사람은 없다.
제로 구역 치안대는 이미 수시간 전, 세이드의 부대원들에 의해 사실상 전멸한 상태였으니까.
그러나 세이드는 조용한 일처리를 선호했다.
굳이 소란을 일으켜 모든 것을 부수고 들어갈 필요는 없는 노릇 아닌가.
끼이익…….
그렇게 열린 정문을 유유히 통과해 갈 즈음.
콰쾅!!
갑자기 저택 어딘가에서 폭발음과 함께 거대한 진동이 느껴졌다.
세이드의 지시에 따라 2층에 진입한 베인 형제는 좌우를 두리번거리며 복도를 누볐다.
그러다 곧 각자 칼을 꺼내 들고 서로를 바라보며 비릿하게 웃어 보였다.
동생이 쓰고 있던 복면을 살짝 내린 채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형, 이번에도 내기할까?”
의사당에서도, 연회장에서도 했던 내기.
누가 얼마나 더 많은 수를 죽이는가.
“또?”
“1대1이잖아. 이번에는 승부를 내야지.”
의사당에서는 형 쪽이, 연회장에서는 동생 쪽이 이겼다.
이 저택에서 승부를 가려 볼 참이었다.
코르지를 생포하고 일꾼들은 쫓아내라는 세이드의 지시가 있었지만, 이미 형제에게 지시의 내용 따위는 중요치 않았다.
인간의 팔딱거림이 자신으로 인해 멈출 때의 쾌감,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뿜어진 핏물이 얼굴을 뒤덮을 때의 즐거움.
기억을 잃은 채 줄곧 멍하던 감각이, 부유하던 정체성이 살인의 순간, 깨어나는 느낌이 들었다.
오로지 그 감각을 다시 느끼기 위해 둘은 살인을 계속했다.
살인에 중독되었고, 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구실로 둘은 게임을 벌였다.
“재미있겠네.”
“그렇지?”
바로 그때, 복도 저편에서 웬 여인의 그림자가 보였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헤벌쭉 웃으며 그림자를 쫓아 허겁지겁 달려간다.
그리고 마침내 형제들을 목격한 여인은 뒷걸음질 치며 한쪽 손으로 입을 감싸 쥐었다.
겁에 질린 먹잇감은 광기를 더욱 자극할 뿐이다.
“내 거다!”
“내가 먼저 봤어!”
혀를 내밀고 마구 내달리던 형제들을 곧 여인의 표정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정작 여인은 조금도 겁에 질린 얼굴이 아니었다.
그녀는 결연한 얼굴로 형제를 향해 무언가를 내보였다.
여인의 손에 들린 건 작은 핀이었다.
데구르르르…….
수류탄 끝에 달려 있는 안전핀.
형제의 눈이 터질 듯 부풀어 오른 그 순간, 여인의 발밑을 구르던 수류탄이 폭파하며 파편을 사방으로 비산했다.
그와 함께 저택 곳곳에서 요란한 총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저택 전체에 요란한 폭발음과 총소리가 시작된 가운데, 코르지 브레드필드는 홀로 지하 연회장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어르신.”
집사가 코르지의 빈 잔에 차를 따라 주었다.
“시작된 모양입니다.”
“그렇군.”
하나 코르지의 얼굴에는 한 점의 두려움이나 미련도 없었다.
“자네는 왜 따라가지 않았나? 자네의 능력이면 그 친구들에게도 꽤 도움이 되었을 텐데.”
집사의 표정 역시 잔잔했다.
“저도 이 저택 사람입니다. 주인님께서 억울하게 돌아가신 그날, 저 역시 죽음을 각오했습니다.”
“자네의 주인은… 그래, 훌륭한 군인이었지.”
집정부에서 군을 이끌던 사내.
그는 코르지의 정치적 동료이자 친구였다.
아크 탈로스가 장악한 군부에 의해 잔혹하게 숙청된 그는 강력한 사병을 남겼다.
“죽을 자리를 마련해 주신 대표님께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저택의 하인들은 한 명, 한 명이 훈련된 군인이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병기였다.
끼이익.
연회장의 문이 열린다.
세이드가 천천히 연회장 내부로 들어왔다.
그 모습을 본 집사가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인다. 그러고는 뒤쪽에 세워 둔 총을 집어 들고 세이드를 겨누었다.
의미가 없는 저항이라는 사실은 세이드도, 집사도 알고 있다.
그러나 집사는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탕!!
집사의 죽음까지는 채 3분도 걸리지 않았다.
어느새 피로 흥건해진 테이블 위로 다가온 세이드가 무표정한 얼굴로 코르지를 바라보았다.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자네는 개야.”
“…….”
“아주 충성스러운 개지.”
세이드는 가만히 손을 들어 올려 코르지의 목을 붙잡았다.
그러나 코르지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개는 주인을 물지 않는다네. 그러니 허튼짓하지 말게.”
“…할 말은 그것뿐인가?”
코르지가 힘없이 미소 지었다.
그러나 세이드는 곧장 코르지의 목숨을 끊지 않았다.
“태일이 녀석은 무사히 빠져나갔나?”
“그래, 이미 오래전에 이 저택을 벗어났네.”
“다행이군. 녀석이 살아서 좀 더 날뛰어 줘야 할 거 같거든.”
그 말을 끝으로 세이드의 손에서 뿜어 나온 검은 구름이 코르지의 목을 잡아뜯어 버렸다.
코르지의 몸뚱어리가 힘없이 옆으로 기울어진다.
“어리석은 늙은이 같으니.”
코르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세이드를 자극하며 충동질했다.
하지만 쓸데없는 시도였다.
애당초 세이드는 아크의 개가 아니었으니까.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지만, 바로 그즈음 코르지의 주머니에 있던 전화기가 울렸다.
수신자 이름에는 ‘딸내미’라고 쓰여 있었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