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171화 (171/220)

171화 운명 (2)

우렁찬 박수 소리와 함께 아크 탈로스가 무대 위에 올랐다.

바로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제로 구역 연회장에서는 아크의 오만함에 대한 성토가 쏟아져 나왔다.

유력가들은 청년 사업가를 선동하는 그의 행동에 불쾌감을 표했다.

대륙 곳곳을 떠도는 그의 기벽에 대한 험담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이제 그 누구도 감히 아크를 무시하지 못한다.

아니, 모두가 아크를 두려움 섞인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젊고 자신감 넘쳐 보이는 호감형의 얼굴, 확신에 찬 목소리.

그 옛날 독재자를 찾아온 사내, 제로와 완전히 똑같았다.

‘그런데도 난 눈치채지 못했군.’

코르지는 씁쓸하게 웃으며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게임이 끝나고 난 뒤, 복기를 해 볼수록 아쉬움은 커진다.

그래 본들 승부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

“여기 계신 분들께서는 센트럴의 번영을 위해 애써 오신 분들이지요.”

밝은 목소리가 연회장 전체로 울려 퍼졌다.

“제로 구역은 아주 오랫동안 대륙의 평화를 책임지는 심장이었지요. 여러분 덕분에 50개 구역의 평화가 지켜졌고, 대륙민들은 풍요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아크의 연설에 호응하듯 우렁찬 박수가 쏟아졌다.

“마침내 센트럴 오더가 발동하였습니다. 여러분의 협조로 센트럴은 변화할 준비를 모두 마쳤습니다.”

과연 무엇을 위한 변화인가.

아크는 그에 대해 설명하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아크의 눈이 코르지와 맞부딪쳤다.

아크는 코르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어 갔다.

“약속드리죠. 센트럴의 존속에 방해가 되는 존재들은 이번 기회에 모두 청산하겠습니다.”

아크가 잔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새롭게 출발할 것입니다.”

그 뒤에 생략된 말.

‘그 자리에 당신은 없습니다.’

얼핏 그런 목소리가 들린 듯했다.

“자, 다 함께 건배합시다.”

멍하니 아크의 말을 듣고 있던 유력가들이 황급히 잔을 들어 올렸다.

옆에 서 있던 장교가 조심스레 잔을 건넸지만, 코르지는 받지 않았다.

“영원한 센트럴의 번영을 위하여!”

“번영을 위하여!”

건배사와 함께 모두의 잔이 비워진다.

“부디 행복한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아크의 마지막 한마디에 호응하며 열렬한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아크는 천천히 연회장 바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곧이어 건배사에 따라 잔을 들어 올린 유키 역시 코르지를 향해 돌아섰다.

“저도 이만 나가 봐야겠습니다.”

“아마도 우리 둘의 만남은 오늘이 마지막이겠지. 안 그런가?”

유키가 잠시 침묵하며 코르지를 바라보았다.

무언의 긍정.

“오랜만에 뵙게 되어 즐거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인사.

“자네를 내 사위로 맞아들이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네.”

“전 제인 양을 그리 싫어하지 않았습니다.”

유키는 그 말을 끝으로 깊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러고는 천천히 연회장 밖으로 빠져나갔다.

의회가 무너진 그날 그랬듯.

쿵!

아크와 군 장성들, 그리고 유키마저 빠져나가자 연회장 문들이 굳게 닫힌다.

연회장에 있던 이들의 시선이 닫혀 버린 문들에 고정된 사이,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다시 시작되었다.

지금까지의 잔잔한 음악과 다른 분위기의 곡이 연주되기 시작했다.

베토벤 교향곡 5번, ‘운명’.

연회장과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의 곡에 모두가 당황한 찰나, 각오를 마친 코르지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역사를 지웠으되, 예술은 지우지 못했다.

기억은 지웠으되, 감정은 지울 수 없었다.

‘운명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So pocht das Schicksal an die Pforte]’.

그 장엄한 소리가 연회장을 울린다.

그리고…….

서주 없이 바로 등장하여 곡의 시작을 알리는 거대한 떨림.

어디선가 총소리가 들려왔다.

“꺄아아아악!!”

목이 찢어질 듯한 비명 소리가 울린다.

그러나 음악은 멈추지 않았다.

아니, 오케스트라의 음악은 도리어 비장미를 더해 갔다.

“도망쳐!”

“문, 문이 잠겼다!!”

“문 열어! 이 문 열란 말이야!”

문을 두드리며 살려 달라 아우성치는 사람들.

그 와중에 쓰러져 가는 사람들.

연회장 곳곳에서 피가 흐른다.

암살자들은 곳곳에 숨어 있었다.

턱시도를 입고 있는가 하면, 군복을 입고 있기도 했다.

대륙민들의 위에 군림하며 권력을 누려 오던 센트럴 정치가들이 속절없이 죽어 나갔다.

엄청난 부를 쌓아 올린 캐피탈 클럽의 자본가들 역시 영문도 모른 채 목숨을 잃었다.

심지어 유력가들을 통제하던 젊은 장교 몇몇도 그 난리 속에서 희생되었다.

“아크, 이 개자식아!!”

“감히 우릴 배신하다니! 네가 감히!”

몇몇 바보들은 자신들이 배신당했다는 사실에 분노했고.

“제발, 살려 주세요. 뭐든 다 하겠습니다. 제발!”

누군가는 목숨을 구걸했으며.

“으, 으아아아아!”

또 누군가는 허겁지겁 탁자 밑으로 기어들어 숨으려다가 붙잡혀 질질 끌려 나왔다.

연주곡이 절정에 이르는 가운데…….

“우와아악!!”

탕! 타탕! 탕!!

총소리와 비명 소리가 어지러이 교차하고, 사방에 피가 번진다.

코르지는 자신의 이마에 총알이 박힐 것을 각오한 가운데, 지그시 눈을 감았다.

“대표님…….”

장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비명 소리가 점차 잦아들고 있었다.

가만히 눈을 뜬다.

연주를 마친 악공들이 창백한 얼굴로 악기들을 천천히 정리하고 있다.

숙청은 어느새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다.

그러나 코르지는 아직 살아 있었다.

여전히 옆을 지키고 있는 장교를 돌아보았다.

지금껏 자신을 철저하게 감시하고 통제하던 젊은 장교의 손에는 권총이 들려 있었다.

“자네의 임무는 무엇인가?”

그는 항상 코르지를 보호하는 게 자신의 임무라 말했다.

“여전히 나를 보호하는 게 자네 임무인가?”

“…….”

그러나 이번에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젊은 장교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코르지는 그런 장교를 바라보며 담담히 말했다.

“자네는 자네가 해야 할 일을 하게.”

“모시고 갈 곳이 있습니다.”

뭐라 말할 새도 없이, 장교는 코르지의 몸을 붙잡아 일으켰다.

그와 함께 뒤쪽의 문이 열렸다.

* * *

‘빌어먹게도 크게 지어 놨군.’

세이드는 대륙 곳곳을 돌며 제법 크고 화려한 건축물들을 여럿 보았다.

그러나 그 무엇도 눈앞 타원형의 돔형 건축물에 비할 수는 없었다.

백색으로 지어진 건물은 마치 거대한 고래가 누워 있는 것처럼 보였다.

50개 구역의 지배자들은 바로 이 건축물 안에서 웃고, 떠들고, 즐겼을 것이다.

눈길을 끄는 건 그저 건물뿐만이 아니었다.

건물 주변에 넓게 드리워진 정원과 거대한 분수, 화려한 조명들 역시 입이 떡 벌어질 수준이었다.

그러나 이제 세이드의 손에 의해 이 모든 것은 잿더미로 변해 버릴 것이다.

의회를 부순 데 이어 제로 구역의 성채까지 무너뜨린다.

‘태일, 너도, 그 대단하던 너조차도 해내지 못한 일을… 나는 끝마친다.’

고개를 들어 올린다.

주위로 어둠이 내린 가운데, 마음이 차분해진다.

세이드는 정원을 지나쳐 건축물 입구 바로 앞에 닿았다.

“대장.”

은회색 머리칼의 제니가 그런 세이드 앞으로 다가온다.

제니의 얼굴에는 한 점의 온기조차 없었다.

“다 끝났나?”

“…네.”

당차게 날뛰던 소매치기 소녀도, 건방지게 장난을 걸어오던 말괄량이도 더는 없다.

눈앞의 소녀는… 제니의 모습을 한 인형에 불과하다.

그저 자신의 명령에 따를 뿐인 인형.

자신의 지시에 따라 기꺼이 태일에게 칼을 찔러 넣은… 병기.

제니로부터 시선을 돌린 세이드가 조용히 물었다.

“킹(King)은?”

“켄이 데려오고 있습니다.”

때마침 연회장 안쪽 문이 열린다.

끼이이이이익…….

열린 문틈에서 짙은 피 냄새가 흘러나왔다.

화려한 문양의 커튼, 식탁보, 바닥의 카펫들은 하나같은 붉은 얼룩으로 지저분해진 상태였다.

그 와중에 한 사내가 노인을 부축해 나왔다.

센트럴의 군복을 입은 켄이 그토록 잡고 싶어 한 센트럴의 왕, ‘코르지 브레드필드’를 데려오고 있었다.

앞으로 다가온 켄이 고개를 숙여 보이자, 세이드는 여전히 코르지를 부축하고 있는 그를 바라보며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포로를 데려오는 태도로는 보이지 않는군.”

“…병약한 노인입니다.”

“우리의 적이기도 하지.”

켄은 대답 없이 코르지로부터 팔을 놓고 살짝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홀로 세이드 앞에 선 코르지를 여전히 걱정하는 듯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한심한 녀석.”

제인처럼 켄 역시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자신이 무엇을 잃었으며, 누구에게 잃었는지 알지 못한다.

가만히 켄과 세이드를 번갈아 살피던 코르지가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세이드를 바라보았다.

“자네가 나를 죽이려는가?”

코르지 브레드필드, 센트럴을 이끄는 집정부의 수반이자 보수당을 이끄는 대표.

그러나 그의 본질은 기생충에 불과했다.

대륙민들의 소울을 훔쳐 그것으로 제 배를 불리던 기생충.

“자네… ‘세이드’로군.”

“나를 알고 있나?”

“알고말고. 대륙에서 가장 유명한 연쇄살인마 아닌가.”

“헛소리.”

허리춤의 바리사다를 빼 들어 곧장 코르지의 목을 겨누었다.

“그래, 자네는 연쇄살인마 세이드가 아닐지도 모르겠군.”

“뭐라고?”

“그 연쇄살인마는 5년 전, 사형당했다네. 내가 참관인으로 그 자리에 있었지.”

지금 와서 목숨이라도 부지하기 위해 말장난이라도 하는 걸까?

하지만 정작 코르지의 표정은 담담했다.

삶에 대한 미련도, 두려움도 느껴지지 않는다.

“자네가 말하는 ‘코르지 브레드필드’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네.”

“그렇겠지.”

“그래, 자네 역시 다른 세계에서 온 게로군.”

“…….”

“신태일, 그 친구 말이네.”

태일의 이름이 언급되자, 세이드의 손이 순간적으로 움찔거렸다.

“한때 그와 동료였다지?”

“그 배신자 놈이 그런 것까지 말하던가?”

“정말 자네가 배신당한 게 맞나?”

코르지의 반문에 세이드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늙은이의 헛소리일 뿐이다. 그냥 목을 날려 버리면 그뿐이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그토록 죽이고 싶어 한 사내를 눈앞에 두고도 선뜻 끝낼 수 없었다.

바로 그때, 켄이 앞으로 나섰다.

“대장.”

켄의 얼굴에는 망설임이 떠올라 있었다.

“이 노인을 꼭 죽여야겠습니까?”

세이드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지만, 켄은 마음을 굳힌 듯 말을 계속했다.

“모든 것을 잃고, 그저 목숨만 남은 노인일 뿐입니다. 제가 그를 지켜보는 동안 그 누구도 이 노인을 찾는 이가 없더군요. 그 흔한 안부 연락조차 없었습니다.”

지난 몇 주 동안 켄은 코르지의 모든 통신을 감시했고, 그 결과를 그대로 보고했다.

그러나 코르지에게 오는 연락이라고는 전부 시답잖은 광고뿐이었다. 심지어 하나뿐인 딸조차 코르지에게 그 어떤 연락도 전해 오지 않았다.

권력을 잃은 노인에게는 친구도, 가족도 남아 있지 않았다.

켄이 보기에 코르지 브레드필드는 외롭고 쓸쓸한 고집불통 노인일 뿐이었다.

“죽여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노인이니, 그냥…….”

그렇게 켄이 코르지를 변호하던 찰나.

“하! 지금 자네가… 감히 네놈 따위가 나를 동정하는 건가?”

코르지가 날 선 말투로 켄의 말을 끊었다.

“어처구니가 없군. 이 늙은이가 그렇게도 불쌍해 보이던가?”

줄곧 의연해 보이던 코르지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잔잔하던 눈동자에 불길이 일고, 구부정하던 허리가 꼿꼿이 펴졌다.

코르지에게는, 평생을 권력자로 살아온 노인에게는 죽음보다 더 견디기 힘든 것이 바로 무시와 동정심이었다.

“제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인조인간들 따위가 감히 이 코르지 브레드필드를 동정하는가?”

마치 발악이라도 하듯 고성을 내지르는 코르지의 모습은 마치 상처 입은 짐승처럼 보였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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