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제로 (4)
“그러고 보니…….”
태일은 문득 자신이 저택에서 만난 하인들을 떠올렸다.
귀머거리와 벙어리.
저택에서 본 이들은 분명히 살아 있되, 마치 유령처럼 존재감이 희미했다.
그러나…….
“이 집안에는 메타휴먼이 없군.”
적어도 그중 붉은 눈동자를 가진 이는 없었다.
“당연한 일 아닌가? 그런 기생충들을 내 지붕 아래 들일 수는 없지.”
“기생충이라…….”
영혼을 가진 존재에게 쓰기에 적합한 표현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떻게 부정할 수 있을까.
메타휴먼의 역할이 무엇인지 알게 된 지금, 태일은 코르지의 분노를 탓할 수 없었다.
“내 얘기에 그리 놀라는 기색이 없군.”
“나름 그런 이야기에 익숙하거든.”
그럴 수밖에.
약자들의 소울을 지키기 위해, 부당하게 빼앗긴 소울을 되찾기 위해 싸워 왔으니까.
지금 코르지의 저항은 그 방식만 다를 뿐, 태일이 평생을 지속해 온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문득 어떤 조직의 이름이 떠오른다.
“혹시 당신이 코카서스를 조직했나?”
메타휴먼을 파괴하기 위해 모인 자들.
메타휴먼에 대한 혐오를 가감 없이 드러냈던 자들.
“그래, 맞네. 내가 조직했어.”
당연하게도 코르지는 그들의 리더였다.
“하지만 오해는 말게. 난 그 어리석은 자들처럼 메타휴먼을 하등한 존재라 여겨서 탄압하려는 게 아니야.”
코르지의 메타휴먼에 대한 감정은 백련이 드러낸 인종적 혐오와 달랐다.
자신의 것을 너무나 교활하게 도둑질해 가는 존재.
그런 메타휴먼에게 느끼는 감정은 일차적으로 분노였고…….
“난 메타휴먼을 두려워한다네. 아니, 정확히는 그런 것들을 만들어 낸 존재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지.”
그보다 큰 감정은 공포였다.
“그럼에도 난 맞섰네.”
코르지는 조용히 도살을 기다리는 돼지와는 달랐다.
저항에 대한 그의 이야기는 앞서보다 조금은 더 격앙되어 있었고, 조금은 더 우울하게 들렸다.
* * *
그래, 난 맞섰어.
과연 누가 나의 말을 믿어 줄까.
과연 누가 저 끔찍한 신에게 저항할 수 있을까.
저항한다 해도 과연 이길 수 있을까?
그래도 난 계획을 세웠네.
거대한 발전소를 부수기 위해, 이 우리 속에서 탈출하기 위해 반란을 계획했어.
놈에게 맞서기 위한 방책이 바로 센트럴 오더였다네.
자네가 센트럴 오더를 막으려 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어.
내 딸도 마찬가지였지.
하지만 오해는 말아 주게.
내가 센트럴 오더를 발동해 정말 파괴하려 한 건 드림 코퍼레이션과 캐피탈 클럽이었어.
무엇보다도 그 사내를, 신을… 없애려 했다네.
…그래, 없애야 할 이들은 그저 그뿐만이 아니지.
소울 에너지에 대해 알고 있는 과학자들까지 전부 지우려 했어.
허황된 소리 같은가?
난 이미 한차례 역사를 지워 버렸다네.
그러기 위해 얼마나 엄청난 노력이 들어갔는지 자네는 아는가?
역사학자와 철학자를 비롯해 수많은 이들의 사상을 개조시켰네.
두 번 못 할 것도 없지.
어차피 소울 에너지 따위 인간이 사용해서는 안 될 힘이네.
나의 생명이 누군가의 영생을 위해 사용되는 일 따위 납득할 수 있을 리 없잖은가.
‘기술에는 죄가 없다’라…….
그처럼 무책임한 말이 어디 있겠는가.
결국 그 기술을 사용한다면, 인류는 누군가에게 종속되어 버릴 게 빤한데 말이야.
소울 에너지에 대한 지식과 기술은 전부 그 자체로 ‘악(惡)’이네.
지난 두 달 동안 나는 그 ‘악’을 없애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다네.
보수당 의원들을 설득하고, 내가 가진 모든 자산을 쏟아부었어.
캐피탈 클럽은 경제와 재산권을 이유로 끝까지 센트럴 오더를 막으려 하더군.
그럴수록 순진한 보수당 의원들은 나의 뜻에 선뜻 동참해 주었네.
캐피탈 클럽의 젊은이들에게 권력을 빼앗길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겠지.
자식들이 청년당에서 캐피탈 클럽에 동조하며 반기에 들면서 그 두려움은 더 커졌어.
어리석은 자들이지.
보수당 의원 대부분은 센트럴 오더를 지역 레지스탕스의 토벌 수단 정도로 생각했네.
센트럴 오더가 한번 발동되면 정확히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지 그들은 알지 못했어.
그들은 내가 정확히 누구와 싸우고 있는지,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네.
물론 모두가 그처럼 어리석었던 건 아니야.
청년당의 대표 녀석처럼 머리가 좀 굴러가는 녀석들은 이 센트럴 오더의 위험성을 본능적으로 눈치채더군.
나를 막으려 했고, 실제로 취소를 위한 의결까지 이끌어 냈어.
그래, 자네가 의회에 선 바로 그날, 치러진 의결이지.
계획이 삐걱거리고 있을 때, 한 젊은이가 나를 찾아왔네.
한번 맞춰 보게.
누구인지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그는… 내가 없애려 한 사내의 아들이자 드림 코퍼레이션의 젊은 후계자, 아크 탈로스였네.
그는 당연하게도 이 세계의 진실을 이미 알고 있더군.
아니, 그 이상이었어.
그는 소울 에너지를 착취해 가는 ‘세계’에 대해서도 들려주었네.
소울 에너지가 더욱 만연한 세계, ‘혁명군’이 존재하는 세계…….
그래, 자네가 왔다던 ‘다른 세계’ 말이야.
그런 눈으로 볼 거 없어.
지금 이렇게 담담하게 말하고 있지만… 처음에는 나 역시 그가 미쳤다고 생각했거든.
어떻게 믿을 수 있겠나.
나와 닮은 누군가가 다른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야.
더구나 그 세계의 센트럴이 이쪽 세계를 ‘식민지’로 택했다니.
하지만 그 허황된 이야기에는 적어도 그럴듯한 논리가 있었네.
기억하나?
독재자가 패배를 앞둔 당시, 나타난 사내에 관한 이야기.
나의 아버지를 찾아와 독재자를 만난 뒤 전황을 완전히 뒤집고, 급기야 센트럴을 만드는 데 성공한 사내 말이야.
그가 아버지를 설득하기 위해 어떤 대단한 증거를 보였을까?
글쎄, 아마 그렇진 않았을 거야.
그는 자신이 전쟁을 뒤엎을 만한 힘을 가졌다는 사실을 논리적으로 차분하게 설명했을 게야.
아크 탈로스가 나에게 그런 것처럼 말이네.
아크는 날 도와 이 끔찍한 착취를 막고 싶다고 했네.
제 아비와 달리 자신은 대륙에 살아가는 주민 중 한 사람이자, 이 세계를 지키려 하는 젊은이라며 날 설득하더군.
그전까지 보수당 의원들에게 센트럴 오더 동의를 조건으로 엄청난 로비 자금을 쏟아부은 익명의 독지가가 있었는데, 알고 보니 그게 바로 아크 탈로스였어.
적어도 그의 행적만큼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네.
그렇다고 내가 그를 믿었을까?
…난 말이네.
처음 만난 순간부터 그를 의심했네. 단 한순간도 온전히 믿지 않았어.
그럼에도 그의 손을 잡았어. 사실 거절할 이유가 없었지.
그의 힘이 있다면 더욱 일은 수월해질 게 분명했으니까.
그리고 아크는 내가 생각지도 못한 일을 벌였네.
자네도 그 자리에 있었으니 잘 알고 있겠지.
그 자리에서 살아 나온 생존자이니, 그날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잘 알 게야.
그래, 아크는 의회를 무너뜨렸네.
의결 결과가 나오기 전에 판을 엎어 버렸어.
우습지.
어찌 우습지 않겠는가.
공교롭게도 독재자가 자신의 권력을 공고화할 때 즈음, 의사당에 화재가 났거든.
아크 탈로스, 그 정신 나간 인간이 테러리스트들을 동원해 의회를 날려 버린 거네.
그리고 그 결과, 마침내 센트럴 오더가 발동되었지.
센트럴 오더를 막을 수 있는 의원들도, 의회도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상태였으니까.
그게 한 달 전이라네.
그 직후, 동대륙의 저항 세력을 표적으로 군이 동원되었어.
사실 동대륙의 연합 따위야 명분에 불과했지.
50구역 마피아와 결탁하고 의원들을 암살한 드림 코퍼레이션.
결국 난 그 회사를 무너뜨릴 생각이었네.
신이라 불리던 사내를 처단하려 했어.
그런데 말이야.
난 처음부터 끝까지… 그저 꼭두각시에 불과했더군.
징집된 군 병력은 집정부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았어.
집정부에 속해 있던 군 장성들은 센트럴 오더의 발령과 함께 차례로 암살당했다네.
나의 정보망이 모조리 끊어졌고, 나와 거래하던 기업들은 물론, 경호 업체까지 차례로 부도가 났어.
그 모든 일을 저지른 자가 누구인지는 자명했지.
드림 코퍼레이션.
난 그저 놈들의 도구로 이용당한 거였네.
드림 코퍼레이션은 마치 자신들이 집정부라도 되는 것마냥 군의 정보를 독점했어. 심지어 군에 지시를 내렸고, 군은 그 명령에 따랐지.
드림 코퍼레이션은 이미 훨씬 전부터 군을 장악하고 있었던 게야.
법?
그따위 건 강력한 힘 앞에서 한낱 휴지 조각에 불과했네.
군은 집정부 대신들을 ‘보호’한다는 명목 아래 병력을 파견해 대신들을 감금해 버렸어.
드림 코퍼레이션의 경쟁사들은 전부 무너지거나 합병되었지.
센트럴 오더가 발동되었을 시 부여되는 무제한적 자원 동원권.
그 명령의 주체가 기업인 드림 코퍼레이션이 되어 버린 거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대체 내가 무엇을 착각한 걸까?
아니, 애당초 내가 이길 수 있는 상대였을까?
센트럴 오더가 발동된 순간, 아크로부터 편지가 도착했어.
그 편지에는 짤막한 한 문장이 쓰여 있더군
너무나도 익숙한 필체로 말이야.
오랜만에 만나서 즐거웠네, 코르지.
그 필체는… 독재자를 이용해 센트럴을 만든, 그리고 캐피탈 클럽을 이끌던 사내의 것이었네.
아크 탈로스는 말이야.
그는… 내가 그토록 없애고 싶어 하던 사내 본인이었다네.
그는 처음부터 센트럴 오더를 원했던 거야.
소울 에너지를 사용해 자신의 모습과 신분을 바꾼 채 내 앞에 나타난 게지.
‘제로’라는 이름으로 센트럴을 만든 사내이자, ‘이고르’라는 이름으로 캐피탈 클럽을 이끈 사내.
그리고… 이제 그는 ‘아크’라는 이름과 젊은 몸뚱어리로 살아가고 있지.
알겠나?
이 세계는, 이 대륙은 이미 모조리 그의 손에 들어갔다네.
내가 어떻게든 막으려 했던 사태가… 결국 벌어지고 만 게야.
* * *
코르지의 이야기가 끝난 뒤, 태일은 가만히 연회장 내부를 둘러보았다.
“여긴 어디지?”
주변에 코르지를 감시하는 군 병력 따위는 없다.
하인들까지 전부 나가 버려 텅 빈 연회장에는 오로지 코르지와 태일뿐이었다.
군 병력이 정말 코르지를 감시하고 있다면, 애당초 이런 자리가 가능할 리 없었다.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지?”
그리고 코르지, 그 역시… 진짜가 아니다.
홀로그램으로 형성된 그의 모습이 미세하게 떨렸다.
“교활한 토끼는 여러 개의 굴을 만드는 법이야. 이 집은 그 굴들 중 하나라네. 명의는… 그래, 어떤 장성의 것으로 되어 있지.”
곧이어 코르지가 먹고 있던 스테이크 조각과 식탁 위의 식기들이 연기처럼 사라진다.
“나 역시 아바타에 불과하지. 하지만 자네를 위해 차린 음식들은 전부 진짜야. 그러니까 풍족하게 먹고 즐겨도 좋네. 자네 집처럼 여겨도 좋아.”
“고맙다고 해야 하나?”
“천만에. 하지만 그리 오래 즐기진 못할 거네. 군에서 우리 가문 장부를 훑고 있거든.”
하인들의 월급도, 음식의 조달도 결국 브레드필드 가문의 계좌에서 지출된다.
즉, 태일이 머무르는 집 역시 결코 안전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럼 이제 기나긴 이야기의 끝을 내보도록 하지.”
코르지가 주먹으로 자신의 턱을 괴고 태일을 바라보았다.
“어떤가? ‘아크’라 불리고 있는 그 사내를 없애 주겠는가?”
“…….”
태일은 가만히 코르지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는 말했다.
처음부터 아크라는 남자를 믿지 않았노라고.
태일 역시 그러했다.
태일은 코르지 브레드필드를 믿지 못한다.
태일이 살던 세계에서 코르지 브레드필드는 소울 에너지를 빼앗는 당사자였으니까.
“좋아, 당신의 제안을 받아들이도록 하지.”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코르지에게 들려줄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고맙네.”
코르지가 힘없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것을 잃은 권력자는 평범한 노인처럼 보일 뿐이었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