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168화 (168/220)

168화 제로 (3)

어느새 연회장 테이블에 올려진 음식들 대부분이 꽤 식어 버렸다.

이야기가 이어지는 사이 태일은 음식에 손조차 대지 않았고, 코르지 역시 물만 몇 차례 들이켤 뿐이었다.

“…그렇게 역사에 관심이 많은 줄은 몰랐는데.”

“나와 내 친구들은 역사의 끝을 선포한 뒤, 역사를 지우려 애썼네. 하지만 누구보다 잘 알기에 그리한 게야.”

태일은 레지스탕스에서 생활할 당시, 80여 년 전 대륙에서 벌어진 전쟁에 대해 몇 차례 들은 적이 있었다.

이른바 ‘세계대전’이라 불린 인류 최악, 최후의 대전쟁.

하지만 레지스탕스의 기억 속에 독재자나 센트럴을 만든 사내에 관한 이야기는 없었다.

레지스탕스에 전해지는 역사 속에서 제국과 센트럴은 불합리한 침략자일 뿐이었고, 대륙을 전부 불태운 악마에 불과했다.

악마에게는 이성도, 정당성도 없다.

반면, 코르지가 들려주는 이야기에는 생생한 인간의 욕망과 합리성, 그리고 광기가 스며 있었다.

“감추려 한 게 대체 뭐지? 제국에서 센트럴이 잉태되었다는 사실인가? 아니면 그 이야기 속 ‘사내’의 존재?”

“센트럴은 인류가 만들 수 있는 정치 구조 중 가장 완전무결한 것이어야만 했네. 그런 센트럴이 독재자의 지원으로부터 잉태되었다는 건 그리 달가운 이야기가 아니지.”

“…….”

“하지만 센트럴을 만든 사내의 존재를 숨긴 건 오로지 그 자신의 의지였다네. 대륙을 모조리 손아귀에 넣은 뒤 군림하려 힌 독재자와 달리 그는 센트럴을 완성한 뒤 조용히 사라져 버렸거든.”

“사라졌다고?”

“그래, 어느 날 갑자기 말이야.”

터무니없는 오버테크놀로지를 어느 날 갑자기 대륙에 풀어놓은 사내.

제국을 무너뜨리고 전 대륙을 손에 넣은 사내.

제로 구역에 집정부를 만들어 통치를 위한 제도를 구축한 사내.

그러나 그 모든 일을 마무리 지은 영웅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우리 중 일부는 그를 신이라 여겼네. 대륙에 평화를 선물하기 위해 내려온 사도라 여기는 이도 있었지.”

“…….”

“하지만 난 그가 그저 평범한 인간임을 알고 있었다네. 가까이서 본 그는 호기심과 욕망으로 똘똘 뭉친… 그런 사람이었거든.”

코르지는 씁쓸하게 웃더니, 포도 알 하나를 입에 물었다.

잠깐 숨을 고른 코르지가 다시금 이야기를 계속했다.

어느 순간부터 코르지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 * *

인간의 신격화.

참으로 우스운 일이지만, 어리석은 자들을 통제하는 데는 꽤 유용하다네.

내가 원하는 세계를 만드는 데 있어 특히 그랬지.

그의 상징을 빌린다면, 그 어떤 일이든 이룰 수 있을 테니까 말이야.

난 사라진 사내를 숭배하는 이들과 함께 집정부를 이끌며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네.

금욕적이고 도덕적인 정치 체계.

그 옛날 위대한 철학자가 말한 ‘철인정치’.

그게 가능해진 게야.

알고 있는가?

대중은 어리석으며, 위대한 철인의 통치를 받을 때만이 진정으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체제를 만들 수 있다네.

인류 역사상 무수히 벌어진 전쟁과 그 안에서 일어난 잔혹한 살육.

그거야말로 인간이 가진 한계의 증거인 게지.

그래, 부정하진 않겠네.

인류 역사상 마지막으로 벌어진 세계대전에 나 역시 책임이 있어.

나 또한 광기에 휘둘린 적이 있는 인간이란 말이네.

그러나 난 오히려 그런 경험을 겪었기 때문에 철인정치를 추구했네.

전쟁을 초래한 인간의 탐욕과 광기를 제어하기 위해 집정부는 강력한 힘을 가져야만 했지.

나와 친구들은 대륙을 50개의 구역으로 나누었고, 제국의 수도였던 1구역에 의회를 만들어 체계적인 구조를 만들었어.

사람들이 ‘금욕의 시대’라 부르는 그 시기, 나는 그 누구보다 확신에 차 있었다네.

항구적인 평화와 공리(公理)가 지켜지는 세계가 눈앞에 있다고 생각했거든.

대륙은 꽤 빠른 속도로 재건되었다네.

공장들이 다시 가동되기 시작했고, 도시가 건설되었지.

그건 분명 집정부에서 추구하던 근면과 금욕, 그 결과였어.

그래, 나는 최선을 다했고, 그 결실을 보았네.

하지만 빠른 성장과 풍요는 다시금 과거의 탐욕을 상기시켰지.

참으로 어리석지 않은가.

고작 수십 년 전에 탐욕의 대가를 치른 인간들이 과거를 잊은 채 다시금 분에 넘치는 욕심을 부리기 시작한 거야.

그들은 ‘캐피탈 클럽’이라는 조직을 만들어 자신들의 이권을 주장하기 시작했고, 집정부의 권위에 도전했네.

황금의 가치를 우선시하며 착취를 일삼았지.

탐욕을 미덕이라, 무모함을 용기라 여기는 놈들.

어느 순간, 우리는 놈들의 폭주를 막을 수 없는 지경에 왔음을 깨달았네.

그들은 대륙민들의 목숨을 담보로 우리를 협박했고, 자신들이 가진 금권으로 집정부의 결정을 무력화시켰어.

의회에 돈을 쏟아부어 우리의 정치적 영향력마저 약화시키더군.

급기야 놈들이 제로 구역에 찾아오겠다며 협상을 제안하는 지경이 이르렀네.

그리고 마침내 놈들의 리더를 만났지.

놈들의 리더…….

그게 누군지 알겠는가?

그래, 센트럴을 만든 사내. 바로 그였네.

이름이 바뀌고 외양이 조금 변했지만,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지.

나뿐만이 아니었네.

그를 추종하던 나의 친구들 역시 모두 그를 알아보았어.

그는 우릴 보자마자 예전처럼 유쾌하게 웃으며 안부를 묻더군.

자신을 멋대로 신격화하여 법과 제도를 만들어 낸 우리를 보며… 그는 그저 웃었어.

센트럴을 만든 그는 자신의 손으로 센트럴의 정체성을 바꾸어 버렸다네.

누가 그를 말릴 수 있겠는가.

지금껏 우상으로 모셔 온 그가 눈앞에 나타난 이상, 모든 것은 그가 원하는 그대로 될 수밖에 없었지.

집정부는 실질적인 권한을 내려놓았네.

의회 다수석을 차지한 보수당과 집정부 수반의 자리를 지켜 냈지만, 그뿐이었네.

이전처럼 절대적인 힘을 유지할 수는 없었어.

우리가 가진 군사력도, 제로 구역에서 쌓아 온 기반도 그 사내 앞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거든.

철인정치의 이상 역시 그렇게 끝장났지.

하지만 사내는 우리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았다네.

사실 그의 요구는 그저 자신을 방해하지 말라는 경고… 그뿐이었어.

그가 정확히 무엇을 원하는지 아는 이는 아무도 없지만, 그의 존재와 의미는 절대적이었네.

내 친구들은 신의 강림을 반겼고, 그를 기꺼이 따랐으며, 그의 시종이 되기를 원했지.

그 근저에 존재하는 감정은 사실 공포였을 게야.

압도적인 기술력으로 전 대륙을 무너뜨린 사내.

수십 년 뒤, 새로운 조직을 만들어 다시금 모습을 드러낸 사내.

그를 적으로 돌린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겠지.

하지만 나는 내 친구들과 달랐네.

앞서 말했지만, 나는 그가 한낱 인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거든.

사실 처음은 호기심이었어.

그는 어째서 센트럴을 만들었는가.

그는 어째서 자신이 직접 세계를 통치하지 않았는가.

그는 어째서 캐피탈 클럽을 만들어 다시 모습을 드러냈는가.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난 그에 대해 알고 싶었네.

그래서 그의 행적을 조사했지.

그는 무너지기 일보 직전의 회사를 인수해 영문 모를 사업들을 벌였더군.

정체 모를 비약을 제조해 유통하는가 하면, 터무니없는 인조인간을 만들어 냈어.

그 와중에 회사를 터무니없는 규모로 키워 냈지.

자네도 어디인지 알겠지. 자네와는 유난히 많이 얽힌 곳이니까 말이야.

그래, 바로 ‘드림 코퍼레이션’이라네.

대륙에서 유일하게 소울 에너지를 다루는 회사 말일세.

그는 여전히 몇 세대는 앞서간 기술력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떨치고 있었네. 수많은 천재 과학자들도 그 앞에서는 석기시대 유인원일 뿐이었지.

자네, 소울 에너지에 대해 알고 있는가?

아니, 얼마나 자세히 알고 있는가?

제1의 에너지 불, 그리고 제2의 에너지 석유… 그리고 제3의 에너지 소울.

학자들은 그렇게 설명하지만, 정작 제대로 그 에너지를 설명하지 못해.

혹자는 소울 에너지를 일종의 초능력이라 여기더군. 그래, 자네가 쓰는 그 번개와 같은 힘 말이야.

또 누군가는 석유처럼 공장을 돌리고 기계를 가동하는 원료처럼 여기지.

그렇지만 그런 설명들은 소울 에너지의 본질을 온전히 설명하지 못해.

소울 에너지는 ‘생명의 본질’이라네.

흔히 영혼이라 불리는 바로 그것 말이야.

만약 그 에너지를 온전히 활용할 수 있다면, 영생을 누릴 수 있을지도 모르지. 영원한 젊음 역시 가능할 거네.

마치 공상과학과도 같은 기술도 실현될 거네.

이를테면… 인간의 뇌를 새로운 육체 더미에 옮길 수 있겠지.

알겠는가?

소울 에너지란 모든 생명체가 가진 에너지, 그 자체란 말이야.

에너지를 얻어 사용하기 위해서는 당연하게도 원료를 얻어야 하지.

그리고 소울 에너지의 원료는… 모든 생명체라네. 특히 고도화된 지능과 발달된 이성을 지닌 인간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원료가 되지.

인간이… 마치 고기를 제공하는 가축처럼 에너지를 제공하는 원료가 될 수 있단 뜻이야.

소름 끼치는 말 아닌가?

난 말이네.

센트럴을 만든 사내가 인류를 위해 자신의 지식을 사용한다고 믿었다네.

아버지를 배신할 정도로 믿었기에 그를 의심한다는 것은 감당하기 힘든 일이었지.

그의 모든 행동은 결국 인류를 위한 것이라 여겨야 했네.

그는 수많은 신도를 거느린 신이니까.

그는 지금과 같은 세계를 만든 당사자이니까.

내가 오랜 시간 동안 그를 믿어 왔으니까.

반드시 그래야만 했어.

그런데…….

만약 그가 사실 인류의 현재나 미래 따위 조금의 관심도 없는 인물이었다면?

우리를 한낱 양계장의 닭이나 도살을 앞둔 소, 돼지 따위로 여기고 있다면?

꽤 놀란 얼굴이군.

아직 모르겠나?

난 또다시 잘못된 믿음을 가졌던 거라네.

단기에 소울 에너지를 폭발적으로 증폭시켜 뽑아내는 비약, 소울벌룬.

소울 에너지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이자 인형, 메타휴먼.

이것들은 결국 자원을 채취하기 위한 도구들이라네.

인간으로부터… 소울을 빼앗아 모으기 위한 도구들 말이야.

사내는 처음부터 이 세계를 거대한 발전소로 만들려 한 거네.

무수히 흩어져 있던 국가들을 모조리 무너뜨린 뒤, 센트럴이라는 단일한 체제를 만든 것도.

캐피탈 클럽에서 대륙 기업을 만들어 전 대륙의 공급망을 구축한 것도.

결국은 단 한 가지 목적 때문이었어.

‘소울 에너지’의 채취… 아니, 착취 말이네.

‘센트럴’은 그 거대한 발전소의 다른 이름이었던 게지.

그 사내는 처음부터 이 세계의 인류를… 우리 모두를 사육장의 가축으로 보고 있었네.

사람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메타휴먼’이라 불리는 인형들에게 소울 에너지를 빼앗기고 있지.

대부분의 대륙민들은 이미 능력을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수명을 잃었고, 심지어 생식 능력마저 잃었어.

영문도 모른 채 말이야.

인간의 소울을 충분히 채취한 메타휴먼은 그 소울들을 어디론가 전송한 뒤, 찌꺼기처럼 남은 소량의 에너지 덕분에 인격을 얻게 되지.

그래, 로보티안이 바로 그런 존재들이네.

착취의 흔적이자, 다 쓰고 버려진 도구들 말이야.

그리고 자신의 소울 에너지를 온전히 지켜내 활용하는 이들은 ‘이레귤러’라 불리며 손가락질받고 있지.

우습지 않은가?

우리에 갇혀 도축을 기다리는 돼지들이 우리 밖 자유로운 동물들을 보고 비웃는 꼴이니 말이야.

거대한 사육장이자 발전소.

이게 바로… 우리 세계의 진실이라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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