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167화 (167/220)

167화 제로 (2)

“성미가 급하군.”

짐짓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던 코르지의 얼굴이 돌연 부드럽게 풀렸다.

슬쩍 미소를 짓더니, 손을 내밀어 연회장 옆쪽의 자리를 가리킨다.

“앉게, 이야기가 길어질 듯하니까.”

저택의 하인들이 온갖 음식들을 내오기 시작했다.

돼지구이와 푸아그라, 연어 샐러드, 꿀에 절인 밤과 과일들까지.

그 외에도 이름 모를 음식들이 끝도 없이 들어왔다.

그렇게 잠깐 사이에 거대한 연회장 테이블이 음식들로 가득 메워졌다.

태일은 산해진미로 가득한 식탁 위를 보며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이건 분에 넘치는 것 같은데. 체하겠어.”

대륙 주민들은 대개 맛없는 통조림과 말라빠진 빵, 멀건 야채 죽 따위로 배를 채운다.

지금 눈앞에 펼쳐진 음식은 대륙 주민들이 평생토록 보기 힘든 요리였다.

그러니 태일은 선뜻 자리에 앉을 수 없었다.

코르지는 그런 태일의 거부감을 눈치챈 듯 고개를 저으며 조용히 말했다.

“오해는 말게. 나 역시 이런 음식들을 매일같이 먹는 건 아니라네. 그만큼 자네를 특별한 손님으로 여긴다고 생각해 줬으면 좋겠군.”

어쨌든 코르지는 이만한 음식들을 원하기만 한다면 언제든 마련할 수 있다.

무엇이든 가질 수 있고,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는 남자.

대륙에서 그만한 선택권을 가졌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권력을 가졌음을 상징한다.

물끄러미 음식들을 바라보던 태일이 가만히 코르지를 바라보았다.

“질문에 대한 답을 듣기 위해 이만큼 번거로운 준비가 필요한가?”

코르지는 누군가의 암살을 요청했고, 태일은 그 대상이 누구인지 물었다. 그저 그뿐이었다.

그러나 코르지는 계속 말을 돌리며 영문 모를 소리를 늘어놓고 있었다.

“사람의 뇌란 참으로 교활한 법이지. 조미료와 고깃덩어리 몇 점이면 현실의 막막함 따위 쾌락으로 잊게 만들어 주거든.”

코르지가 느긋하게 고기 한 점을 썬 뒤, 입에 넣는다.

“지금부터 자네에게 들려줄 이야기는 조금의 거짓도 없는 사실이네. 나와 친구들이 손수 지워 버린 역사이자 그림자이지.”

그렇게 코르지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 * *

80년 전, 전 대륙은 끔찍한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네.

1939년, 본격적으로 시작된 전쟁은 1942년이 되자 절정에 이르렀지.

계기란… 단순하다네.

늘 그렇듯 탐욕이지.

제국의 독재자가 대륙을 전체를 집어삼키고자 전쟁을 일으킨 게야.

그저 한 사람만의 탐욕이라고 말하지는 않겠네.

그의 욕망은 오로지 그 한 사람만의 것이 아니었을 테니까.

수많은 추종자가 있었고, 그의 뜻에 따른 장군들이 있었으며, 그에게 협력한 정치가들이 있었다네.

개중에는 제국의 정치가였던 아버지와… 나 또한 있었지.

그래, 맞네. 나도 그중 하나였어.

부끄럽지만 당시의 나는 독재자의 신념과 정의를 진심으로 믿었네.

그의 연설과 선전 능력은 그야말로 경이로운 수준이었고,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그의 힘은 정말이지 대단했어.

핑계처럼 들리겠지만, 그는 참으로 금욕적이고 도덕적인 지도자였다네.

금주, 금연, 금욕, 그리고 채식까지.

흠잡을 데 없는 사내였지.

앞선 전쟁에서 헌신적 전투 수행으로 훈장을 받은 애국자이자 음악과 건축, 미술을 사랑한 수집가.

제국의 미래에 대한 그의 열망은 참으로 숭고한 것처럼 보였지.

그래, 그 당시의 독재자는 어린 내 눈에도 꽤 매력적인 인물이었다네.

하지만… 잘못된 믿음의 대가는 끔찍한 법이야.

당시 전쟁으로 인한 사망자는 대략 6,000만에서 7,000만에 이른다네.

믿어지나?

6천이나 7천이 아니야.

거대한 구역의 전체 인구 정도가 전쟁 속에 죽어 간 거란 말이네.

심지어 그 희생자 중 상당수는 군인조차 아니었지.

지금껏 그 역사를 기억하는 이는 몇 되지 않지만, 내 손으로 그 역사를 지워 버렸지만… 나와 내 친구들은 여전히 그 참혹한 시기를 기억하고 있다네.

어쨌든 독재자가 이끄는 군단은 실로 강력했어. 정말 대단했지.

뛰어난 장군들의 활약에 더해 막강한 군사력, 잘 훈련된 병사까지… 마치 전투의 교과서처럼 보일 정도였거든.

순식간에 인근 국가들을 무너뜨렸고, 당장에라도 대륙 전체를 집어삼킬 것처럼 보였지.

사실 그 모든 게 오로지 독재자의 힘이라 치부할 수는 없겠지.

독재자의 승리는 인근 국가 지도자들의 나태와 오만에도 그 책임이 있었을 테니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주변 국가의 지도자들은 너무나도 쉽고 허무하게 독재자 앞에 무릎을 꿇었어.

무능한 지휘관들은 처참한 패배를 맛보았고, 중세 수준에 머물러있던 오합지졸들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지.

승리란 게 너무나도 쉬워서 믿기 힘들 정도였다네.

그렇게 전쟁은 금세 끝나 버릴 것만 같았어.

제국의 낙관주의자들은 인류 역사의 기나긴 분열을 끝내고, 마침내 통합이 이루어질 것이라 외쳤다네.

진보에 대한 믿음과 승리에 대한 확신, 독재자가 약속한 제국의 미래에 대한 열망.

그런 것들로 가득한 시대였어.

아버지와 나는 제국의 영광이 영원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참으로… 순진한 믿음이었지.

전쟁은 쉽게 끝나지 않았네.

참전국이 늘어났고, 적 또한 점차 많아졌지.

그렇게 전쟁이 길어지면서 독재자의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했어.

오만함과 조급함.

그처럼 완벽해 보이던 독재자 또한 결국 그 덫에 빠져 버린 게야.

독재자는 이방인과 피지배민들을 잔혹하게 탄압했고, 학살을 자행했다네.

바로 어제까지 친구였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혈통 문제로 인해 죄악의 상징으로 매도되었네. 열등하다 규정된 이들은 국가에 의해 살해당했지.

어쩌면 독재자는 그게 질서라 여겼는지도 모르겠네만.

그건 오만이었어.

스스로의 우월함에 대한 과신으로 인해 그처럼 무모한 살육을 벌인 게야.

사방에 피 냄새가 진동했고, 화약의 뿌연 연기가 대륙을 뒤덮었지.

그건 그야말로 야만.

그 외에 다른 말로 표현하기 힘들군.

게다가 독재자는 넘치는 탐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전선을 더 넓혔네.

우군이던 동대륙 국가를 습격했고, 무모한 작전을 지시했어.

조급해진 독재자는 폭주하기 시작했고, 사방이 적으로 뒤덮일 때까지 전선을 확대했네.

상대해야 할 적은 늘어났고, 더욱 강력해졌지.

어느덧 나는 그의 신념과 자질에 의문을 품게 되었네.

당연하게도 전쟁 중반에 이르자 전세가 기울었어.

동대륙으로의 무리한 진출은 실패로 끝났다네.

아니, 실패라는 표현은 너무 부드러운 거겠지. 당시 동부 전선에 발생한 사상자만 수천만에 이르렀으니까.

동대륙에서의 실패 이후, 전선 곳곳에서 패전 소식이 들려왔네.

그러나 독재자는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고, 그럴수록 무리한 작전 지시를 이어 갔어.

물러서지 말라, 맞서 싸우라, 항복하지 말라, 패배하지 말라.

어리석기 짝이 없는 판단의 연속이었지.

독재자가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처럼 보였어.

바로 그즈음이었다네.

한 사내가 독재자의 충직한 가신을… 그래, 나의 아버지를 찾아온 건 밀이야.

참으로 신비한 사내였네.

유쾌하고 가벼운 것처럼 보이지만, 한편으로 무서울 정도의 집념과 열의가 느껴졌거든.

자신만만한 태도와 확신에 찬 말투는 허황된 말을 하더라도 믿고 싶게 만들었지.

그는 아버지에게 독재자와 만나게 해 달라고 부탁했어.

사실… 말도 안 되는 요청이었지.

독재자를 독대한다는 것은 아무리 아버지라 해도 쉽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그자는 아버지에게 웬 설계도 하나를 건넸고, 그것을 본 독재자는 사내와의 독대를 허락했어.

둘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갔을까.

그건 알 수 없네.

하지만 아마 그는 자신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고 했겠지.

자신이 가진 재능과 역량을 어떤 방식으로든 보여 줬을 거네.

제법 긴 시간의 면담 끝에 독재자는 마치 홀리기라도 한 듯 제국의 막대한 재원을 정체 모를 사내에게 지원했네.

많은 관료들이 미친 짓이라며 독재자의 결정을 막으려 했지.

그도 그럴 것이, 전선 곳곳에서 패전 소식이 들려왔고, 전쟁의 유지 비용조차 감당하기 힘든 상태였거든.

그런 와중에 정체조차 불투명한 기술 연구 지원을 허가한 거야.

그러나 독재자의 뜻은 굳건했고, 그 누구도 그를 막을 수는 없었네.

사내에게 천문학적인 돈과 자원이 투입되었어.

오로지 하나의 프로젝트를 위해 수백 개의 공장이 가동되었지.

제국의 과학자들이 사내와 함께 프로젝트에 매달렸어.

만약 그 프로젝트가 실패로 돌아간다면, 제국 역시 끝장날 게 자명했지.

아니, 프로젝트의 완성이 늦어도 결국 제국은 끝장났을 거야.

전선의 패배가 계속되었고, 그때쯤 제국의 본토마저 폭격 대상이 되었으니까.

하지만 결과적으로 독재자의 마지막 결단은 틀리지 않았어.

사내는 성공적으로 약속한 무기들을 만들어 냈거든.

단 2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에 말이야.

사내가 만든 무기들이 전장에 투입되었네.

사실 고작 2개월 만에 만들어진 무기를 전장에 투입한다 해서 무너지기 직전의 제국이 되살아날 거라 믿는 이는 몇 없었네.

그저 패배를 조금 늦출 수 있으면 다행일 거라 여겼지.

하지만 무기들이 전장에 투입된 뒤, 채 한 달이 지나지 않아 연합군의 괴멸 소식이 들려왔어.

우연이 아니었네.

믿을 수 없는 승전보가 계속해서 전해졌어.

독재자에 맞서던 국가들이 빠른 속도로 무너져 내렸네.

사내의 무기는 적군을 철저하게 박살 냈어.

하지만 독재자는 물론, 그 독재자에게 사내를 소개한 아버지조차 망각하고 있는 사실이 한 가지 있었다네.

사내가 만든 그 모든 것은 독재자의 소유가 아니었어. 제국의 것조차 아니었지.

어느새 사내는 독재자가 어찌할 수 없을 정도의 권력과 추종자를 지닌 괴물이 되어 있던 게야.

사내는 ‘센트럴’이라 불리는 조직을 만들어 냈네.

그리고 난… 그때쯤 더는 독재자를 따르지 않았지.

최소 몇 세기는 앞선, 발전의 수십 단계를 건너뛴 결과물들이 계속해서 쏟아져 나왔어.

사내의 프로젝트는 계속되었고, 새로운 에너지를 기반으로 이른바 혁명적인 변화를 이끌었네.

그래, 눈치를 보니 그 에너지가 뭔지 아는 것 같군. 그렇지?

맞네.

‘소울 에너지’였어.

그는 그저 전쟁을 끝낼 무기를 만든 게 아니라 아예 새로운 시대를 열었지.

이른바 ‘신인류’를 창조해 낸 거야.

그 결과물이 바로 ‘바토리 일족’이었지.

그의 세 번째 프로젝트가 끝났을 때 즈음, 과학자와 정치가들은 물론, 제국의 유력자 대부분이 더 이상 독재자의 지시를 듣지 않았네.

당연한 노릇이었지.

시대를 바꿀 수 있음을 직접 보여 준 청년과 무모한 지시를 거듭하는 독재자.

둘 중 어디를 따라야 할지는 자명했으니까.

뒤늦게 그런 상황을 눈치챈 독재자는 자신을 따르는 군부와 일부 추종자들을 규합해 사내를 살해하려 했네.

그 결과, 독재자는 허무하게 모든 것을 잃고 살해당했네.

군부 내 배신자에게 살해당했을 수도 있고, 적국에서 보낸 암살자에 의해 목숨을 잃었는지도 모르지. 어쩌면 그의 무모한 명령 때문에 사망한 군인의 유가족에게 살해당했을 수도 있네.

하지만 적어도 나의 아버지가 어떻게 목숨을 잃었는지만큼은 잘 알고 있다네.

왜냐하면… 아버지를 살해한 이는 바로 나였으니까.

그래, 내가 직접 아버지를 살해했어.

날 그런 눈으로 보지 말게.

나 역시 결코 원하던 일이 아니었어.

이성을 상실한 채 권력욕만 남은 독재자.

그런 남자를 추종하는 아버지에게 더는 합리성이 남아 있지 않았어.

센트럴을 지지해야 한다는 나를 ‘반란군’이라 불렀고, 직접 살해하려 했지. 나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

신념이란 그런 것이라네.

같은 피가 흐르는 부자 관계라 하더라도 서로를 향해 칼을 겨누게 만드는 법이지.

어찌 되었든 독재자와 그를 따르던 무리들은 모조리 숙청되었다네.

제국은 사라졌고, ‘센트럴’이 전 대륙을 통일하기 위해 전쟁을 이어 갔어.

살아남은 독재자의 추종자들과 전 대륙의 저항군들이 센트럴에 맞섰지.

물론 본토가 공격당하는 위기도 있었지만, 바토리 일족과 사내가 만든 전투순양함의 저력을 막을 수 있는 세력 따위 존재하지 않았어.

더구나 ‘센트럴 오더’가 발동되면서 센트럴에 속한 모든 자원들이 오로지 완벽한 승리를 위해 동원되었지.

그렇게 센트럴은 기나긴 전쟁을 끝냈고, 야만스럽던 역사 시대를 끝냈다네.

바다 건너에서 격렬하게 저항하던 연방을 초토화시켰고, 동대륙 가장 끝에서 자주권을 외치며 저항하던 마지막 독립군까지 쓸어버렸지.

비로소 전 세계가 센트럴이라는 이름으로 통일된 게야.

사내는 모든 전쟁을 마친 뒤, 바다 건너 연방의 거대한 땅에 센트럴 집정부와 통치자의 땅을 만들었지.

그게 바로 자네가 발을 딛고 있는 이 땅, ‘제로’ 구역이라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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