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166화 (166/220)

166화 제로 (1)

“어때? 괜찮지?”

세연이 활짝 웃으며 태일을 바라보았다.

“음…….”

그러나 정작 태일은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머리를 긁적였다.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49구역 황무지. 그리고 지금 그 황무지에는 수십 그루의 묘목들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세연이 틔운 생명들이다.

그러나 그 모습을 본 태일은 도무지 웃을 수 없었다.

“뭐야, 표정이 왜 그래?”

곤란해하는 태일을 본 세연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태일은 잠시 망설이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괜찮겠어?”

세연은 이미 몇 번이나 나무를 심었다. 그러나 물이 부족한 황무지에서 나무들은 제대로 자라나지 못했고, 금세 말라 버렸다.

“이번에도 대부분이 말라 버리고 말 거야.”

그럴 때마다 세연은 더없이 슬픈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럼에도 세연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나무를 심었다.

“여긴 원래 수많은 생명들이 자라나던 땅이었어.”

세연이 황량하게 펼쳐진 대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먼 과거, 그 넓은 땅에는 인간의 마을과 더불어 끝도 없이 펼쳐진 초원이 있었다.

그러나 전쟁과 파괴로 인해 인간이 살기 힘든 땅이 되어 버렸고, 식물들도 자라나지 못했다.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언젠가 다시 그때처럼 생명들이 태어날 거야.”

“…그래.”

태일은 그런 세연의 말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세연의 얼굴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떠오른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신경 좀 써 봐! 지난번처럼 취해서 묘목에 오줌 싸면 그거, 잘라 버린다?”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언제 그런 짓을……!”

“물이라고 다 같은 물인 줄 알아? 그런 오염된 물은 오히려 묘목에 좋지 않아.”

“그만해! 알았으니까. 다신 그런 일 없을 거라니까?!”

그렇게 실랑이를 벌일 때 즈음, 포트리스 지붕 쪽에서 날카로운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야, 저걸 또 심었어?!”

알렉세이 딘이 부루퉁한 얼굴로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 거 심어 두면 포트리스를 은폐하는 의미가 대체 뭐야? 우리가 여기 숨어 있다고 표식이라도 남기는 거야?”

“아, 거, 되게 깐깐하게 구네!”

“심을 거면 멀리 가서 심으란 말이야! 아주 그냥 다 파내 버릴라!”

“어디 한번 해 봐! 그 자리에 널 파묻어 버릴 테니까.”

세연과 딘이 서로에게 삿대질을 해 대는 사이, 태일은 가만히 묘목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중 단 한 그루만이라도 무사히 자라나기를 바랐다. 어쩌면 이 척박한 땅에 넓은 그늘을 드리워질 날이 올지도 모른다.

“태일아.”

생각에 잠겨 있던 찰나, 세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

고개를 들어 옆을 바라본다.

그러나 조금 전까지 세연이 있던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세연아?”

의아해하며 주변을 둘러보니, 어느새 포트리스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세연아!!”

고함을 질러 보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회색 머리칼의 세이드가 태일 앞에 나타났다.

“난 말이야, ‘정의’를 위해서 전부를 걸었어.”

“세이드, 너!”

세이드가 소름 끼치는 미소를 지으며 태일에게 가까이 다가온다. 그 와중에 세이드의 발에 짓밟힌 묘목들이 꺾여 부러졌다.

“그래. 대륙민 절반의 목숨을 희생하더라도 센트럴을 무너뜨릴 생각이야.”

“세이드!!”

고함을 내지르며 손을 뻗었지만, 어째서인지 능력을 사용할 수 없었다.

놈을 막아야 한다. 그의 살육을, 파괴를 막아야만 한다.

세이드는 히죽 웃으며 부러진 묘목을 발로 짓이겼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배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배신자.”

제니가 조용히 중얼거리며 태일의 배에 칼을 꽂아 넣고 있었다.

넓게 펼쳐진 대지가… 검게 물들어 간다.

“안 돼!”

고함을 내지르며 눈을 번쩍 떴다.

침대 위, 하얀 천장이 보인다.

식은땀이 이마를 타고 흐르는 와중에 조금 전 장면들이 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물론 마지막 장면, 세이드와 제니의 모습은 단순한 꿈이 아니었다.

의회가 무너지던 마지막 순간, 제니의 단검이 태일의 몸을 파고들었다.

단검이 박힌 자리에서 여전히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끄…으윽…….”

천천히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보았다.

침대 모서리에 호화로운 사자 장식이 보인다. 열린 창문에서 내리쬔 태양 빛을 받아 사자 장식의 갈기가 은은하게 빛났다.

그러나 그보다 눈에 띄는 건 바로 눈앞 벽면에 빼곡히 꽂힌 서적들이었다.

‘여기는 대체……?’

의회가 무너지던 마지막 순간, 태일은 죽음을 각오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이처럼 호화로운 방에서 눈을 뜬 것이다.

바로 그때, 방 구석진 곳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악몽이라도 꾼 모양이군.”

고개를 돌려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바라보니, 웬 노인이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책을 덮은 그가 돋보기안경을 벗으며 태일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래, 몸은 좀 괜찮은가?”

“…당신은 누굽니까?”

“난 코르지 브레드필드라고 하네. 자네와 친하게 지낸 제인의 아비 되는 사람이지.”

“딸에게 히트맨을 보낸, 그 정신 나간 양반이 당신이었나?”

코르지는 태일의 거친 대꾸에도 그리 기분이 상하지 않은 듯 피식 웃을 뿐이었다.

“그런 일이 있었던가? 나이가 들면 그리 중요하지 않은 일은 금세 잊어버린다네.”

딸의 위험조차 가볍게 여길 정도의 사내.

태일은 그런 코르지가 혐오스럽게 보일 뿐이었다.

“그래서… 날 여기 눕혀 놓은 이유는 뭐지? 설마 그 이유까지 잊었나?”

“자네를 만나고 싶었다네.”

코르지가 가볍게 대답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탈로스 가를 번번이 괴롭힌 사내가 어떤 자인지 궁금했거든.”

“…….”

“이렇게 대화를 나누기까지 무려 한 달도 넘는 시간을 기다렸다네.”

“한 달…이라고?”

“그래. 자네가 그 침대에 누워 치료를 받은 지 그 정도 됐지.”

무려 한 달을 누워 있었다. 안도와 민호, 카츠미, 페이진은 무사할까? 센트럴 오더는 어떻게 되었을까? 동대륙의 봉쇄는 괜찮을까?

“꽤 궁금한 게 많은 것처럼 보이는군. 실은 나 역시 그렇다네.”

코르지가 몸을 일으켜 읽던 책을 책장에 집어넣었다.

“지금부터 서로 질문을 주고받는 건 어떤가? 규칙은 하나뿐이네. 결코 거짓을 말하지 않을 것.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에서는 대답하지 않아도 좋아.”

코르지는 마치 즐거운 게임이라도 앞둔 듯 눈을 빛내고 있었다.

태일이 고개를 끄덕이자, 코르지가 빙긋 웃으며 손가락을 펴 들었다.

“총 세 개의 대답을 듣는 걸로 하지. 세 개의 대답을 얻을 때까지 뭐든 질문해도 좋은 거네.”

“좋아.”

“그럼 나부터 질문하지. 자네는 어디에서 왔는가?”

태일이 겪은 일은, 이쪽 세계로 넘어오게 된 경위는 누가 들어도 선뜻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그러나 코르지가 믿든 믿지 않든 태일에게 굳이 감춰야 할 이야기는 아니었다.

“다른 세계에서.”

“다른 세계라……. 일단 동대륙도, 서대륙도 아니라는 거군.”

“…….”

어째서인지 코르지는 순순히 수긍했다. 심지어 태일의 말을 거짓이라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의회 테러는 당신의 지시인가?”

“아니. 내가 벌인 게 아니라네.”

코르지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곧이어 코르지의 질문이 이어졌다.

“내 딸과는 무슨 관계인가?”

의외의 질문이었다.

“그녀가 날 경호원으로 고용했어.”

“경호원이라면서 자네는 내 딸 곁이 아닌 여기에 와 있군.”

“…….”

코르지의 말투에는 그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태일의 차례였다.

“센트럴 오더는 취소됐나?”

“그럴 리가. 바로 어제 동대륙 연합군이 괴멸되었다는 보고가 들어왔네.”

담담한 코르지의 대답에 태일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결국 막지 못했다. 센트럴 오더로 인해 전투가 벌어졌고, 수많은 피가 흘렀다.

50구역 주민들은, 아이들은 무사할까?

코르지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태일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진행이 빨라서 좋군. 어쩌면 마지막 질문일 수 있겠어.”

“…….”

“닐스, 클라이드, 그리고 세이드. 이 셋과 자네는 무슨 관계지?”

코르지의 질문에 태일은 순간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 셋의 이름이 어째서 이 노인의 입에서 나온단 말인가.

태일의 표정 변화를 관찰하던 코르지가 부드럽게 말했다.

“곤란한가? 그렇다면 그냥 넘겨도 좋네.”

“한때 동료였지만, 세 사람이 날 배신했어.”

태일의 짧은 대답 뒤, 방 안에는 얼마간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잠시 뒤, 코르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잘 알겠네.”

코르지는 이제 태일의 마지막 질문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지막 질문을 앞두자 고민이 깊어졌다. 코르지는 배신자 셋의 이름을 알 정도로 정보력의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노인이었다.

태일이 무언가 묻는다면, 코르지는 순순히 그에 대한 답을 줄 것이다.

어쩌면 자신이 이쪽 세계로 넘어오게 된 이유를 대답해 줄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세연의 행방에 대해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질문 하나면, 세연을 찾을 수 있다.

고민하던 태일이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나에게 원하는 게 뭐지?”

코르지 브레드필드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 * *

코르지의 저택은 그야말로 거대한 성과 같았다.

방의 개수는 셀 수조차 없었고, 그보다 많은 수의 하인들이 저택을 관리했다.

정원사들이 교대로 드넓은 정원을 손질했고, 연회장에는 요리사들이 상시 대기하며 코르지의 지시에 따라 조리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복도에는 역사 시대 갑옷이나 미술품 따위의 보물들이 진열되어 있었고, 방마다 보석, 시계, 보검, 권총 등 코르지의 개인 소장품들이 가득 들이차 있었다.

그처럼 귀한 물건들이 가득했지만, 태일은 저택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었다.

코르지는 태일을 손님으로 대접하며 저택 내부를 구경할 수 있도록 배려했고, 보물로 가득한 방들의 출입 역시 막지 않았다.

요리사들은 태일을 위해 언제든 음식을 내주었으며, 의사가 자주 태일을 찾아 몸 상태를 살폈다. 저녁에는 시녀가 들어와 잠자리를 정리해 주었다.

그렇게 이틀 동안 태일은 저택을 돌아다니며 온갖 소장품들을 구경했고, 놀랄 정도로 후한 대접을 받았다.

그리고 저녁 시간 연회장, 코르지는 연회장의 긴 테이블 끝에 앉아 태일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난 이틀, 즐겁게 지냈나?”

“정말 대단하더군. 열심히 긁어모으셨겠어.”

태일이 반말로 무뚝뚝하게 대답했지만, 코르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눈앞에 놓인 스테이크를 썰었다.

“저택의 사용자는 당신뿐인가?”

성처럼 거대한 저택이었지만, 지난 이틀 동안 브레드필드 가문 사람들은 누구 하나 만날 수 없었다. 화려한 보물들로 가득했으나 묘하게 쓸쓸한 느낌이 든 까닭이었다.

“원래는 한 사람 더 있었지.”

“…제인이군.”

“보았다시피 이 안에는 모든 게 있다네. 원하기만 한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지. 그런데도 그 아이는 만족하지 못했어.”

그러나 태일은 제인이 떠난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친구도, 가족도 없는 폐가에 머물고 싶을 리 없었겠지.”

“폐가라……. 후후, 재미있군.”

코르지가 쿡쿡 웃으며 식기를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날카로운 눈으로 태일을 바라보았다.

“뭐, 자네의 건방짐 정도야 얼마든지 눈감아 줄 수 있네. 하지만 이제 시간이 되었어.”

조금 전까지 온화한 할아버지처럼 행세하던 코르지의 얼굴에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마음의 결정은 내렸나?”

코르지와 같은 인간은 결코 대가 없는 호의를 베풀지 않는다.

그는 태일의 생명을 구해 빚을 지웠으며, 자신의 부를 과시하며 능력을 입증했다.

그 모든 행동에는 유혹과 더불어 협박이 담겨 있었다.

“일단 들어야겠어.”

코르지의 눈썹이 치켜올라 갔다.

“당신이 죽이려 하는 사내가 누구지?”

코르지가 태일을 살려 데려온 이유.

그건 한 사내를 살해하기 위함이었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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