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격동하는 대륙 (2)
“…‘마녀’라는 여자를 없애라는 겁니까?”
“아니. 난 자네에게 아무런 지시도 내리지 않아.”
노인이 고개를 내저으며 엷게 미소 지었다.
“이 일은 자네의 의지와 무관하다네. 센트럴이 피조물들에게 부여한 운명이지.”
하는 말을 들으니, 노인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노인에게는 사람을 잡아끄는 힘이 있었다.
아마 그건 노인의 왼쪽 눈 때문일 것이다.
하얗게 변해 버린 눈동자.
분명 시력을 잃은 상태일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노사제의 그 눈이 자신을 꿰뚫어 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잠시간의 침묵 뒤, 노인이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자네, 종교를 믿나?”
“저에게 신의 뜻을 거스르고 만들어진 존재라고 하셨던 거 같은데요.”
프랑켄의 말투에는 날이 서 있었다.
그러나 노인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분명 탄생은 그렇지. 하지만 피조물이 조물주의 통제에서 벗어나는 건 꽤 흔한 일이라네. 바깥에서는 그런 존재를… 그래, ‘로보티안’이라고 부르더군.”
“…….”
“자네 또한 센트럴의 의지에 따라 만들어졌지만, 해방된 존재 아닌가? 그러니 얼마든지 신앙을 가질 수 있겠지.”
“저는…….”
곰팡이 슨 빵 조각만을 남긴 채 독사에게 물려 천천히 죽어 간 순례자를 떠올린다.
그는 숨이 끊어지기 직전까지 부적처럼 보이는 물건을 꼭 움켜쥐고 있었다.
끝까지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는 마지막 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신이 자신을 구원하리라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신은 순례자를 구하지 않았다.
결국 프랑켄은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말을 맺었다.
“신을 믿지 않습니다.”
종교적 믿음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존재의 증거조차 찾을 수 없는 무언가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
대체 그게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가.
비합리적이고 무의미하다.
그리고 지금의 대화 또한 그렇다.
프랑켄은 옆에 세워 둔 녹스의 소총을 힐끗 바라본 뒤, 노인에게 물었다.
“보니를 안다고 하셨죠?”
지금 프랑켄에게 중요한 것은 신이니 센트럴이니 하는 것 따위가 아니었다.
“그래, 알지.”
“본 적 있으십니까?”
“없네. 그저 이야기만 들었거든. 그녀 역시 자네와 같은 베타였지, 아마?”
“어디로 가면 그들을 볼 수 있겠습니까?”
“운명에 맡기면 곧 보게 될 거네.”
“…….”
마지막까지 노인의 대답은 뜬구름 잡는 이야기일 뿐이었고, 그저 공허했다.
다행히 어느새 찻잔은 비어 있다.
더는 노사제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잘 마셨습니다.”
사실 마을에서 마녀와 남매에 대한 정보를 얻은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이 정글에서 녹스는 꽤 유명해진 듯하니, 조금만 수소문한다면 곧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마을에서 약간의 식량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나름의 비용은 치르겠습니다.”
“정글의 모든 것에는 주인이 없네.”
“…동의하신 걸로 알겠습니다.”
그렇게 집 밖으로 나가려는 찰나, 노인이 입을 열었다.
“혹시 말이네, 신이 자네에게 단 한 가지 소원을 들어준다고 한다면, 자네는 무엇을 말하겠나?”
이번에도 뜬금없는 질문이다.
“인간이 되고 싶지 않나? 아니면… 모두를 다스리는 지배자의 위치에 앉는 건 어떤가? 혹은 누구든 없앨 수 있는 강한 힘을 얻을 수도 있겠지.”
프랑켄은 가만히 노인을 바라보았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이런 질문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생각해 본 적 또한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껏 누구도 프랑켄의 꿈이나 소망 따위에 관심을 가진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꿈을 갖고 욕망을 가진 녹스를 동경했는지도 모른다.
프랑켄은 가만히 한숨을 내쉰 뒤, 짧게 대답했다.
“전 그저 제 친구를 되찾고 싶을 뿐입니다.”
“…그렇군.”
노인은 만족스러운 답을 얻었다는 듯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바로 그때, 바깥쪽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배, 뱀이다!!”
“도망쳐!!”
“으아아아악!!”
총소리와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소총을 고쳐 쥐고는 문고리를 잡는다.
그때, 노인이 잔잔한 말투로 말했다.
“다시 볼 수 있다면 좋겠군.”
묘하게 태평한 노인을 보며 프랑켄은 당장에라도 도망치라고 말하려 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집 안에 묘한 연기가 피어오르며 노인의 모습이 연기 속에 감춰졌다.
“어르신!”
아무런 소리나 향도 없이 온 집 안이 연기로 덮인다.
‘연막인가? 아니면 최루탄?’
철컥!
급히 총을 장전했다.
그러나 연기는 프랑켄에게 그 어떤 영향도 주지 않았다.
애당초 단단히 잠긴 창문에서는 그 어떤 폭발물도 유입되지 않았다.
“어르신, 괜찮으십니까?”
잠시 뒤, 천천히 연기가 걷혔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본 프랑켄은 그만 제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집 안 가득 걸려 있던 종교의 표식들은 물론, 선반 가득하던 책까지도 전부 사라졌다.
벽 곳곳에 거미줄이 처져 있고, 선반은 반쯤 부서진 상태로 방치되어 있다. 애당초 사람이 사는 곳처럼 느껴지지 않았고, 방치된 흉가처럼 보일 뿐이었다.
그 와중에 눅눅한 냄새와 탁한 공기는 그대로였다. 아니, 애당초 이 공간은 처음부터 이런 상태였을 것이다.
무언가에 홀린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낡은 나무 탁자 위에는 비워진 찻잔 두 개가 부자연스럽게 깔끔한 상태로 올려져 있었다.
프랑켄은 방금까지 자신이 무엇을 하려 했는지조차 잊은 채 가만히 총을 떨구었다.
바깥에서 들려오던 총소리와 비명 소리는 점차 멎어 가고 있었다.
* * *
“어째서일까…….”
“언니, 무슨 고민이라도 있어요?”
“별거 아니야.”
“별거 있어 보이는데?”
검은 머리칼의 미녀, 메데이아가 자신을 올려다보는 소녀를 보며 피식 웃었다.
“내 힘이 예전 같지 않은 거 같구나.”
손을 들어 올리자 손바닥 안에서 검은 소용돌이가 작게 피어오른다.
소용돌이는 당장에라도 자신을 내보내 달라고 울부짖기라도 하듯 마구 날뛰고 있었다.
메데이아는 그런 저항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가만히 중얼거렸다.
“무엇이 문제일까?”
수많은 군단과 도시를 파괴했던 뱀, 요르문간드.
지금껏 몇 번이나 변태를 거쳤지만, 단 한 번도 주인인 자신의 의지에 반한 적이 없었다.
변태 과정에서 제물로 바쳐진 인간의 자아는 사라졌고, 껍질을 벗은 요르문간드는 그 즉시 맹목적인 충성심을 보였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요르문간드에게 장 베르코프의 의지가 남아 있는 듯 보였고, 지금까지도 자신에 대한 저항을 계속하고 있었다.
마지못해 봉인해 두긴 했지만, 언제까지나 요르문간드의 힘을 봉인해 둘 수는 없다.
결국 다시 대륙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요르문간드의 힘이 반드시 필요했다.
잠시 고민하던 메데이아가 음울하게 중얼거렸다.
“나도 늙은 모양이야.”
“에이, 말도 안 돼. 언니가?”
소녀의 말처럼 메데이아의 얼굴은 언뜻 보아도 30대 정도로 보일 뿐이었다.
긴 속눈썹과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 잡티 하나 없는 피부와 아름답게 굴곡진 몸매.
늙기는커녕 너무나 매혹적인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 어떤 남성이라도 그녀를 한 번 본다면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메데이아는 씁쓸하게 웃을 뿐이었다.
“너, 내 나이가 몇인지는 아니?”
소녀가 고민하는 척 고개를 갸우뚱한다.
“음… 스물?”
“아부는.”
“스물…하나?”
“됐어, 얘. 그만해.”
그러나 메데이아는 싫지 않은 듯 웃어 보이며 발걸음을 내디뎠다.
스스스…….
메데이아의 앞, 거대한 검은 뱀들이 수풀들을 헤집고 다니며 길을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새 둘은 목적지에 도달했다.
“어쨌든 내가 예전만 못 한 건 확실해. 그렇지 않다면…….”
부서진 집과 사방을 뒹구는 탄피, 그리고 수십 구의 시신들.
그 와중에 여전히 총을 움켜쥐고 있는 생존자 몇이 독기에 찬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고작 숨어 있는 꼬마들을 찾아내는 데 이렇게 시간이 걸릴 리 없잖니.”
생존자들은 수백 마리의 뱀들에 포위를 당한 상태였지만, 여전히 용기가 남은 듯했다.
“이 괴물 같은 년!”
“반드시 천벌이 내릴 거다! 마녀, 네년에게 저주가 내릴 거야!”
“이런… 아쉽네.”
메데이아는 혀를 차며 부드럽게 말했다.
“난 용기 있는 아이들을 싫어하지 않는단다.”
바로 그 때문에 마지막까지 총을 들고 저항하는 이들은 살려 두었다.
도망치는 이들을 가장 먼저 살해했고, 살려 달라며 울부짖는 이들은 가장 잔혹한 방식으로 죽였다.
그것은 바토리 일족의 가르침이기도 했다.
‘용기 있는 자에게는 그에 걸맞은 대우를 해라.’
종교적 신념 때문일 수도 있고, 자부심 때문일 수 있으며, 어쩌면 그저 만용일 수도 있다.
그러나 가망이 없음을 알고도 달려드는 이들에게는 이유와 무관하게 나름의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다.
메데이아가 살짝 손짓하자, 생존자들을 포위하고 있던 뱀들이 검은 연기로 변해 사라져 버렸다.
“고작 그림자 따위로 상대한다는 것은 너희에 대한 모욕이겠지.”
“건방진 년!”
근육질의 사내가 목소리를 높이며 메데이아에게 총을 겨누었다.
곧이어 그의 총구가 불을 내뿜는다.
“죽어!!”
그러나 눈 깜짝할 사이에 정글의 넝쿨과 돌멩이들이 뒤엉켜 메데이아 앞으로 거대한 방패가 만들어졌다.
총탄은 두꺼운 방패에 가로막혀 더는 나아가지 못했다.
메데이아는 고개를 돌려 자신을 따라온 소녀, 보니를 바라보았다.
“네가 하겠니?”
“응.”
보니는 천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
‘보면 볼수록 신기한 아이야.’
오랜 세월을 살아오며 수많은 이들을 만났지만, 보니는 그중에서도 가장 이질적인 아이였다.
보니가 손을 들어 올리자 사방에서 흙모래가 솟아오른다.
“저, 저런 괴물 같은……!!”
“쏴! 쏘란 말이야!”
틱! 틱!
“초, 총이……!!”
어느새 사방에서 날아든 돌과 흙이 총의 소염기와 약실을 전부 메워 버린 상태였고, 방아쇠조차 당길 수 없었다.
아니, 돌과 흙은 마치 총과 본래부터 하나였던 듯 뒤섞여 총을 다른 무언가로 바꾸어 버렸다.
“빌어먹을!”
참다못한 근육질의 남자가 총을 던져 버린 뒤, 단검을 꺼내 들고는 앞으로 내달렸다.
보니는 무방비한 자세로 그런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와중에 빗방울이 보니의 볼에 떨어졌다.
똑.
“비가 내리려나 보네.”
똑, 똑, 똑.
그리고 마침내 남자의 칼끝이 보니의 머리를 노리는 순간, 남자의 주변에 떨어져 내리던 물방울들이 일제히 칼끝으로 몰려들었다.
일순간 공기 중의 물들이 모조리 한 지점으로 모여들었고, 그와 함께 남자의 입 안이 바짝 말랐다.
그사이, 칼날이 물과 뒤섞여 무뎌졌고, 급기야 칼날이 찢어지듯 수십 갈래로 나뉘었다.
“아, 아아…….”
칼을 휘두르던 남자의 두 눈이 터질 듯 부풀어 오른다.
그건 눈앞의 일에 놀랐기 때문이 아니었다.
“아악!!”
퍽!
마침내 남자의 눈이 터지며 마지막 한 방울의 물까지 칼날에 뒤섞였다.
아니, 남자가 쥔 것은 더 이상 칼이 아니었다. 손잡이 끝에 만들어진 것은 마치 개화한 꽃과 같은 형상의 무언가였다.
“으, 으아아아!!”
남자는 무릎을 꿇은 채 멀어 버린 두 눈을 감싸고 고함을 내질렀다.
그 모든 일이 벌어지는 동안 보니는 단 한 발자국도,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지 않았다.
그 꼴을 본 생존자들은 싸울 의지를 완전히 잃은 채 주춤거렸다.
눈을 잃은 남자의 비명은 그들의 전의를 완전히 꺾은 듯했다.
곧이어 빗줄기가 더욱 거세졌다.
보니는 칼과 물로 만들어진 꽃 모양의 조형물을 들어 올리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번에는 뭘 만들어 볼까?”
“도, 도망쳐…….”
“도망쳐!”
생존자들이 저마다 괴성을 내지르며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진다.
“이런…….”
메데이아가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살 기회를 날려 버렸구나.”
곧이어 메데이아의 그림자에서 수백, 수천 마리의 뱀들이 쏟아져 나와 도망자들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도망자에게는 그 어떤 기회도, 자격도 주어지지 않는다.
그저 가장 하찮고 가장 무용한 그림자에 의해 죽어 갈 뿐이다.
뱀은 도망자들을 완전히 물어 죽이기 전까지 사라지지 않을 터였다.
오늘 이 자리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이는 마지막까지 싸우다가 시력을 잃은 전사, 한 사람뿐이다.
“강해졌구나, 보니.”
“아직 언니만큼은 아닌걸요.”
보니가 믿을 수 없게 천진한 미소를 지으며 기괴한 금속 꽃을 건넨다.
그러나 메데이아는 꽃을 받지 않았다.
다만, 굳은 얼굴로 보니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와 달리 완벽하게 자신의 소울을 컨트롤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더욱 정교해졌다.
그런 보니를 보며 자신이 느끼는 이 감정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고맙구나.”
메데이아는 그제야 조용히 대답하며 손을 뻗어 보니가 건넨 물건을 받아 들었다.
무언가 뜨거운 것이 가슴에서부터 치밀어 오르고 있었지만,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바로 그때였다.
“…녹스?”
마을 안쪽에서 웬 남자가 소총을 쥔 채 걸어 나왔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